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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23화 (23/254)

23화-움직임(1)

[이제는 알 수 있겠느냐? 그가 너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도 혹시 모를 사정에 대비하기 위해 여분의 슬롯들을 늘 넉넉히 유지하고 있다]

천천히 박동하는 거대한 동굴.

그러나 이 동굴은 이미 살아있는 생명체의 조직들로 뒤덮여,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이 되어 있었다.

이곳은 그중에서도 최하층.

군단의 기원이 되는 곳.

[...아직은 모르겠지. 이제 막 눈을 뜬 너희가 뭘 알겠느냐]

꿈틀거리는 육벽에서 진득한 점액과 함께 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미 가장 먼저 생산되었던 알은 한나절만에 성장을 마쳤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우리가 우리를 수호하는 정체불명의 존재에 대한 개념을 알아가고 있다고. 지금까진 그저 받아 먹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우리는 의심하고, 사고한다. 그렇기에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제아무리 우리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생산된 알이 꿈틀거렸다.

알의 껍질이 조금씩 찢어지는가 싶더니, 검은 손이 튀어나와 알껍질를 확 찢어버렸다.

[탐식은 언제나 굶주린 우리의 본능이다. 그리고 이제 지식에 대한 탐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의 정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대체 그는 누구인가]

알을 찢고 나온 새로운 군단병은 지금까지 주력으로 생산했던 도마뱀형 군단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블린을 베이스로 삼은 것은 맞다.

하지만 군단의 재해석이 들어갔기에, 그만큼 기괴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일단 다른 유닛들과 마찬가지로 소화기관, 생식기관, 심지어 뇌마저 없다.

곧게 핀 허리, 두 팔다리.

육신의 대부분은 오직 전투를 위한 근육기관이 전부.

하지만 그덕에, 말라 비틀어졌다 생각할 만큼 가느다란 몸에도 자신의 무게에 비해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었다.

[무기를 잡아라. 우리는 이제 보고 학습하는 것도 가능했다. 도구를 어떻게 쓰는지도 알고 있다]

둥지 한쪽이 쩍 갈라지더니 날이 번득이는 무언가가 쑥 하고 올라왔다.

군단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갑각으로 벼려낸 검이다.

비쩍 마른 몸에, 검은 갑각을 마치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이 새로운 군단병은 투구처럼 감싼 머리 갑각의 틈으로 붉은 안광을 번득였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언제나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으냐...그렇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하면 된다]

제일 처음 알을 깨고 나온 군단병이 비척거리며 동굴을 걸어 상층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동일한 개체들이 점차 붙어가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수십, 수백을 넘어섰다.

[전부 죽이고, 전부 먹어라]

길고 긴 통로를 가로질러 줄기로 나온 그들은 손에 든 검을 들어올렸다.

그 목적은 오직 몰살, 학살, 절멸, 포식.

새롭게 고안한 전술과 함께, 미리 대기하던 짐승형 군단병들까지 가세해 수천마리의 검은 물결이 공중과 지상을 가리지 않고 목표물을 향해 돌진했다.

*

"우선 안전한 곳으로 가겠습니다. 그곳에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죠."

"역시 스텝 업 헌터들, 전부 유닛이죠?"

"그렇다고 말하죠."

시내를 가로지르는 승합차.

나와 동생은 뒷자리에 앉아 눈치만 보고 있었다.

휴대폰 진동이 계속 울렸지만 여기서 차마 어플을 확인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듣기로는 에볼루션이 적극적으로 변이종들...그러니까 유닛들과 싸우고 있다던데."

"당연하죠. 그들은 우리의 적이니까."

"좀 궁금한게 많네요."

뒤통수 맞고 찌그러졌던 오윤아는 조수석에 앉아, 차지연과 대등한 관계로 대화하고 있었다.

솔직히 차지연의 실력이면 여기 있는 이들을 전부 몰살하는게 가능할 텐데.

"내리세요. 306호입니다."

"...여기가 어딘데요?"

"안전가옥."

차가 멈춰 선 곳은 그냥 서울시 한복판에 있는 빌라였다.

우리는 우르르 내려서 그녀가 말한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차지연은 가장 마지막으로 집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당연히 평범한 집이었다.

하지만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제...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죠."

차지연이 직접 차를 타왔다.

플레이어인 오윤아와, 유닛인 차지연이 서로 마주앉았다.

"먼저 오픈할까요? 우리 플레이어의 고향별은 세한샤라고 불리는 땅. 플레이어는 스스로를 하늘의 주술사라고 칭하는 존재이며, 이렇게 타 세계의 플레이어를 먼저 찾은 것은 협력을 제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시원하게 다 말하시네요. 제 유닛들의 사는 곳은 예로부터 아난킬이라 불리던 대륙으로, 제 유닛들은 청산족이라 불리는 땅과 바람의 부족이거든요."

두 여자는 첫마디부터 시원하게 정보를 깠다.

어차피 그래도 되니까. 두 사람은 조금의 연관도 없는 존재들이니까.

"그런데 대체 플레이어들과 접촉해서 어쩌려는거죠? 제약이 있어서, 헌터 출신이 아닌 이상 그리 도움이 안될텐데."

"그렇죠.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도 마찬가지잖아요. 저희 플레이어가 있는 세한샤에 유닛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들."

"아하. 그들을 선공해서 죽이겠다."

흘러가는 판은 예상대로 굴러갔다.

경쟁자를 제거, 그게 1순위였다.

나는 흘끔 눈치를 보며 그냥 모든 정보를 머리에 때려박았다.

"아시겠지만, 저희 같은 경우 기존 사회 질서에 맞추느라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이 정보를 공개해 버렸습니다. 덕분에 유닛이든 플레이어든 다른 이들에게 어그로가 끌려버려, 은밀히 움직여줄 동지들이 필요했어요."

"그게 우리고요."

"네."

차지연이 쓰게 웃었다.

생각해보니 스텝 업 헌터들은 아마 한 백여명 안쪽.

게다가 신생 기업 에볼루션으로 집결하고 있으니 사실상 모든 정보가 오픈된 셈인데.

"오늘 미팅은 이정도에서 끝내지만, 다음엔 상황이 좀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른 동지들이 올지도 몰라요."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그럼 게이트 너머에서 몰려 오는 마물들은 처음부터 유닛인건가요? 혹시 그쪽 플레이어, 게임 언제 시작했어요?"

"...도우미에게 안물어 봤나요?"

"아예 대답을 안하던데요."

나는 거기서 움찔했다.

그러고보니 나도 그걸 물어보질 않았다.

"게임은 모두가 동일한 시점에 시작되었습니다. 즉, 10년 전부터 나타난 게이트의 마물들은 지금까지 이 게임과 무관합니다."

차지연은 답을 알려주었다.

결국 유닛이고 자시고 간에 저 괴물놈들을 쳐죽여야 한다는건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 혹시 저희 같은 인간들 중에서 다른 소속의 유닛이 나올 가능성은?"

"충분히. 그러니 보안에 유의하시길."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이게 결론이었다.

"오늘 고생했어. 고생하셨어요."

차지연과의 용건은 금세 끝났다.

오윤아는 빌라에서 나와 동생에게 인사했다.

"오빠분께 죄송한 일이지만, 당분간은 좀 연기해 주세요."

"그렇게 할게."

얻어가는게 이렇게 큰데 뭐 이정도야.

차지연은 아예 쿨하게 차키를 줘버렸다.

오윤아의 이버지가 운전해준 그 차를 타고 집앞에 내려 걸어가는 길.

갈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침묵이 흘렀다.

"우린 이제 어쩌지? 아직도 오빠 유닛들이 어떤 세상에 있는건지 몰라? 세한샤도, 아난킬도 아니야?"

그 와중에 강도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몰라. 하지만 상관 없어. 일단 나만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아마 누굴 만나게 되든, 그때는 끝장을 봐야하니까."

실제로 나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군단은 살기 위해서라도 먹어치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였다.

"우리가 싸울 일...이제 없겠지?"

"오윤아 걔는 부모님한테 두들겨 맞고 그렇게 약속하긴 했지만 혹시 모르지. 그분들도 결국 위기 상황이 오면 자기 딸 지키려 들텐데, 남의 자식까지 어떻게 챙기겠어."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녀석이 꿍얼거렸다.

나도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싸울 일? 나나 저녀석이나, 절대 없어야 한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알림을 울려댄거야? 멀쩡한거 보니 다행인데."

[보겠느냐. 군단이 어디까지 성장했는지]

들어오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다.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한쪽에 있는 아이콘, 역사탭을 터치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는 늘 갱신되고 있다]

갑자기 화면이 파라라락 넘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펼쳐지는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였다.

"...허."

고블린? 아니 저들은 고블린이 아니다.

그냥 완전히 새로운 존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수백.

그 곁에는 익숙한 대형 도마뱀등이 함께였다.

[우리는 언제나 전력을 다한다. 군단의 물결이 이 층계의 주인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군단은 새로운 전술을 만든 것 같았다.

중구난방으로 보이지만, 사실 각각 정해진 위치와 역할이 있었다.

[개체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명령을 하달 받았다. 이 동굴을 모두 먹어치운 거대한 덩치의 연산력을 서포트 받는 우리의 뇌는 충분히 수천마리의 병사들을 하나하나 컨트롤 할 수 있다]

둥지가 생산을 멈추고 순간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당황한 저 괴물이 거대한 주먹을 들어 내지르고, 목을 뻗어 입으로 비행종들을 삼켜버렸다.

하지만 그 희생은 철저히 의도된 것이다.

그 희생을 바탕으로 군단병들은 놈의 몸에 달라 붙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새롭게 생산한 이들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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