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게임판(5)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계통의 생물체, 군단은 그 모든 것을 분해하고 소화하며 흡수하였다]
[고블린의 두뇌는 지금껏 얻은 그 어떤 뇌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이었다. 이것을 힌트 삼아 군단은 자신의 뇌를 더욱 키워나갔다]
[처음 개미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처럼, 이것은 우리의 진화에 큰 분기점이 될 것이다]
"싫어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네."
나는 쓰게 웃었다.
솔직히 고블린하면 일반인들도 무시하는 멍청하고 작달막한 하급 마물놈들 이미지가 여전히 박혀 있지만, 지금 저 고블린들은 다르니까.
내 뇌리에는 경찰의 권총을 탈취해 여유롭게 사용하던 녀석의 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새로운 모습을 취할 수도 있겠군]
"아직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은데."
줄기의 일부분인 20층계는 너무 컸다. 아직 탐색도 다 끝난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 줄기와 연결된 다른 가지들까지.
우리가 먹어치울 수 있는건 굉장히 많다.
먹어 치우는 속도가 느려서 문제인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확실히 이곳은 굉장히 큰 하나의 세상이다. 그리고 이곳에도 주인이 있겠지. 화면을 봐라. 우리의 정찰병이, 이곳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생물체를 발견했다]
"...크다."
엄청나게 거대했다.
공룡 사이즈? 적어도 대형 트럭에 맞먹는 것 같았다.
전체적인 형태는 적어도 뭔지는 알겠다 싶었던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체 저게 무슨 생물인지, 파충류인지 양서류인지 뭔지 알아먹을 수 없게 생겼지만.
이곳 생물들 치고는 특이하게 이족보행을 하는데, 다리는 굉장히 짧고 굵었다.
구부정한 자세로 길고 두꺼운 양 팔로 땅을 받치며 사실상 고릴라와 비슷한 자세로 걷고 있었다.
그 억센 팔 끝에 달린 날카로운 발톱들이 번득였다.
[군단 역시 처음 보는 형태의 적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마침 놈이 사냥을 결심한듯 보인다]
놈은 쿵쿵거리며 걷더니, 근처에 있던 대형 쌍두거북이를 향해 다가갔다.
거북이는 당연히 허겁지겁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놈이 주먹을 들어올린뒤 내려쳐 거북이를 으깨버렸다. 터져버린 거북이의 시체에, 놈은 목을 길게 늘려 입을 쩍 벌리는군]
저게 대체...
나는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길게 늘어난 녀석의 목 끝에는 얼굴이 달려있지 않았다.
갈라진 살이 쩍 벌어지더니, 마치 칠성장어처럼 날카로운 이빨들이 돋아난 입이 드러났을 뿐.
그 입으로 으깨버린 거북을 통째로 삼키고 있었다.
"미친세상이군."
[군단은 사냥을 준비했다. 이정도로 대형인 적을 사냥하는건 처음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미 덩치 큰 적을 어떻게 사냥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질색했지만 군단은 자신감이 넘쳤다.
곧바로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던 둥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너무 큰데?"
[우리도 새로운 무기를 얻었다. 군단은 이번에 얻은 고블린의 유전자를 적극적으로 써먹을 생각이다]
기분이 살짝 얼떨떨했다.
군단은 효율이 좋지 않을 것 같으면 절대 기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블린을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는데.
대체 어디서 무슨 가능성을 본거지?
[우리의 강점을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 고블린은 지금 군단이 가진 모든 샘플 중 가장 만능형에 가깝다. 우리는 이제 도구에 대해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렇긴 하지."
[어떤 형태가 되든간에, 개조하고 진화시킬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20개 층계, 그리고 그 사소한 잔가지들까지 세포 하나 빼놓지 않고 전부 먹어치운 둥지에서 알들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고블린을 베이스로 한 새로운 병사들이 그 알에서 성장하여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뇌쪽은 어때. 나와의 소통은?"
[너도 고블린들에 대해 알듯이, 이제 언어란 것의 체계를 배울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졌다]
"좋았어."
나는 반색했다.
나와 같은 차지연을 보니, 아니 당장 오윤아만 봐도 비슷하거나 대등한 지능을 지닌 플레이어와 서로 소통하며 강해진다.
소통의 힘이 그만큼 크다는걸 직접 겪었으니 내가 이렇게 들뜰 수밖에.
"대화할 수 있는거지?"
[...]
"...대화할 수 있는거 맞지?"
다만 쭉쭉 뻗어나가는 군단의 성장세와는 별개로 그들과 소통하려는 내 앞으로의 길은 그리 순탄치가 않았다.
[언어는, 학습이다]
"이런..."
[가르쳐줄 이가 없는데 어떻게 배운단 말이냐]
내 희망이 와사삭 부서졌다.
언어? 저 동굴 안에 그나마 서로 소통하던건 찍찍거리던 쥐들이 전부였다.
[게다가 고블린의 언어 체계는 인간과도 명확히 다르다. 아직 군단은 고등한 언어를 배울 정도로 성장하진 못했다. 조언하건데, 너는 군단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을 기다리느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게 좋을 것이다]
"좋은 방법을 찾으라고? 수화라도 배우란거냐? 됐다. 그건 넘어가고, 그럼 나는 언제쯤 군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건데?"
[아직 그 누구도 챕터 3에 도달하지 못했다. 분명 플레이어와 유닛은 하나의 스트링으로 이어져 있으나, 지금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이들은 게임의 옵션이 아닌 본인들의 능력으로 세상의 벽을 뛰어 넘는 이들이다]
"또 내탓이야? 진짜 고구만데 이거."
나는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니, 어쩌면 내가 너무 급한 것일지도 모른다.
고작 1달이다.
다른 이들은 처음부터 서로 소통하고 교류해서 그렇지, 우리는 일개 세포덩어리에서 여기까지 성장했다.
군단은 지금까지 단 1초도 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더 재촉할 순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과 연을 맺게 된 이상 내가 감수해야 할 사항이었다.
인내하고, 기다리면.
분명 그 끝에는 우리가 유리한 점들이 생길 것이라고.
그 시간을 벌어주는게 내 일이라고 마음을 먹었다.
"오빠, 자는거 아니지?"
그때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휴대폰을 접었다.
아직 시간은 필요했으니까.
"무슨 일인데?"
"혹시 그..."
"맞아. 우리 애들 보고 있었지."
나는 말 끝을 흐렸다.
녀석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지만, 우리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내 유닛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물론 동생은 계속 눈치를 보며 궁금하단 티를 내고 있었지만.
"오빠 유닛들은 뭐 안 줘?"
"크흡.."
그렇기에 뼈를 때리는 공격이 간간히 들어오기도 했다.
"우, 우리 애들은 대기만성이야. 근데 왜 온거야?"
"윤아한테 문자가 왔어."
"!"
확실히 큰 이야기긴 했다.
차지연과 이야기 한다더니 결론이 난건가?
"걔가 뭐라는데."
"어차피 당분간은 우리 학교도 못가고. 일단은 내일 만나재. 근데 오빠도 와야 할 것 같다는데."
"혹시 그 자리에 차지연도 있어?"
"...응. 차지연씨는 오빠도 나랑 같은...그걸로 생각하니까. 아무래도 중요한 이야길 할 것 같은데."
강도연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궜다.
아무래도 자기 때문에 내가 휘말렸다 생각한건지.
"딱히 상관은 없어. 그러니 자책하지 마. 그리고 이건 우리가 처음부터 계획한거잖아."
나는 별거 아니라며 녀석을 달랬다.
스스로도 딱히 나쁠게 없다 생각했다.
당장 이녀석 혼자 휘말리게 하는 것 보다는 낫고.
무엇보다 차지연도 오윤아도 내 정체를 모른다.
서로 접촉한 이상 그들은 분명 그 이상의 행보를 보일텐데, 내게는 꽁으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기회였다.
"연기는 잘 해야겠네."
괜히 피식 웃었다.
*
"뒤숭숭한데 꼭 가야겠니? 그냥 집에..."
"별거 아니니까 괜찮아요."
이른 아침.
어머니를 안심시킨 나는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왔다.
동네, 아니 나라 전체가 뒤숭숭하고 어수선한건 사실이었다.
수십명의 사람이 죽거나 끌려갔다.
그중 반절이 어린 학생들이었다.
"가자."
우리는 길을 가로질러 약속장소로 향했다.
아직 수습도 채 끝나지 않은 곳엔 유가족들과 경찰, 언론사등으로 어지러웠다.
약속 장소로 잡힌 곳은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
우리 둘은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 있네."
그리고 그때, 강도연이 먼저 그들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작달막한 여자애와 함께 서 있는 중년의 남녀.
설마 오윤아의 부모님인가?
"왔어? 이쪽은...푸헼!"
"?!"
다가오는 우릴 보고 반갑게 인사하던 오윤아의 뒤통수를, 중년 여인이 후려쳤다.
그리고는 우릴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이 애 부모되는 사람들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끔찍한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 도연아."
"아, 아뇨 저희는..."
예상외의 상황에 우리 둘다 당황했다.
그렇게 우리는 뒤통수를 부여잡고 쭈그려 앉아 끙끙거리는 오윤아를 내버려두고 오윤아의 부모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정말 괜찮아요. 결국은 덕분에 그 위기 상황속에서 살아남기도 했고."
"...속이 참 깊구나. 우린 스스로 선택했는데도 참 아팠는데."
"그리고 어쨌든, 이제 한팀이니까요."
오윤아의 어머니는 동생의 손목에 찍힌 낙인을 어루만지며 훌쩍였다.
그녀의 손목에도 낙인이 보였다.
오윤아는 자신의 부모에게도 힘을 부여한 것이다.
아마 방패막이로 써먹을 생각은 전혀 아니였겠지만.
"일단 다들 진정하죠. 저기 그 사람이 오고 있습니다."
괜히 손등을 가린 소매를 만지작 거린 나는 슬쩍 끼어들어 현장을 정리했다.
이쪽으로 다가 온 큼직한 승합차 한대가 멈춰섰다.
"다들 타시죠."
이 차를 직접 몰고 온 사람은 차지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