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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21화 (21/254)

21화-게임판(4)

"으..아..."

"얼른 뛰어."

강도연은 얼어버린 친구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손에는 여전히 소화기를 들고 있었다.

"뒤져!"

처음이 어렵지 두번은 쉽다.

이미 흥분 상태던 그녀는 계단 아래쪽에서 나타난 또 다른 고블린을 향해 소화기를 투척했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간 소화기는 그대로 고블린의 얼굴을 으깨버렸고, 그녀는 쓰러진 놈을 미친듯이 짓밟았다.

"씨..."

그녀는 옷에 튄 핏물을 닦아내었다.

그러나 여운에 잠길 틈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소화기를 챙기더니 오윤아의 손을 끌고 서둘러 달렸다.

여기도, 저기도 고블린들이다.

그녀들은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를 들으면 도망치는건 분명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아..."

"어떡해! 어떡해!"

빽 소리를 지른 오윤아가 기겁을 하며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녀들은 포위당했다.

어느새 몰려 온 고블린 십수마리가 이를 들어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근처에 도와줄 사람은 없다.

'...하.'

강도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화기를 들었다.

놈들 중 몇놈이, 미리 챙긴 거친 밧줄을 대놓고 들이대고 있었다.

"야!"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크락션과 함께 승용차 한대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미친듯이 달려왔다.

"이런 미친."

브레이크를 밟은 나는 끔찍한 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운전석에서 화살 맞아 죽은 사람을 내버리며 고인 능욕에, 남의 차를 훔친데다, 그 차로 과속에 로드킬?

물론 지금 중요한건 그런게 아니었다.

"빨리 타!"

고블린 몇 마리를 그대로 치여죽인 나는 멍하니 있는 녀석들에게 소리쳤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강도연이 비틀거리던 고블린의 머리를 소화기로 쳐버리곤 작달막한 친구를 자기 옆구리에 끼다시피 하며 차로 내달렸다.

쟤가 오윤아다. 그냥 버리고 오지.

"어, 어떻게 온거야? 이차는 뭔데?!"

"지금 그게 중요해?"

다시 엑셀을 밟았다.

일단은 여길 벗어나는게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내 안일한 생각은 틀려먹었다.

후진하려는 순간, 무언가 날아들었다.

"말도 안 돼."

"지금 이거..."

어처구니가 없어서 탄식이 나왔다.

지금 날아와서 타이어를 터트린거, 설마 총알인가?

"꺄아악!"

총탄이 이어서 날아들었다.

저 앞에 선 고블린, 다른 놈들을 대동하고 수염을 휘날리고 있는 저놈.

지금 우리에게 경찰에게서 탈취한 권총을 겨누고 있는 저놈이 바로 이 고블린들의 지휘관이자 누군가의 유닛이다.

"오빠..."

"너, 여기 있어."

놈이 권총을 버리고 손에 든 큼직한 지팡이를 겨누었다.

순식간에 타오른 불길이 뭉쳐 화염탄이 되었다.

놈은 저걸 우리에게 쏠 생각이다.

나는 장갑 낀 손을 내려다 보았다.

지금 척살권을 써서 저놈을 죽인다 한들, 다른 놈들은 어쩌지.

문의하기로 '유닛과 플레이어'는 어플의 기본기능으로 처리하는게 불가능하다. 그게 '룰'이다.

그러니 사진을 찍는건 불가능하다.

"저건."

그러나 희망은 언제나 있었다.

눈앞을 번쩍이는 낙뢰와 함께 누군가 놈들의 뒤에 나타났다.

"차지연!"

"그 스텝 업 헌터?"

오윤아와 강도연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옅은 하늘색 머리를 휘날리며 번개를 두른 검은 정장의 여자.

우레와 같은 굉음이 작렬하는 섬광과 함께 연달아 뿜어져 나왔다.

나는 입을 다문채, 그녀가 고블린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음을 들으니 이미 저 뒤쪽에서도 헌터나 경찰들이 수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강하다..."

애들이 멍하니 감탄했다.

맞다. 강하다.

지금 연달아 내리치며 퍼져나가는 전격에 무려 수십마리의 고블린들이 일격살당했다.

분명 고블린들도 상식 밖으로 강해졌지만, 그녀의 힘이 압도적이었다.

대장으로 보이던 놈이 불덩이를 번개를 두른 그녀에게 던졌다.

정작 차지연은 그 거대한 불덩이를 푸른 번개가 번쩍이는 손으로 갈라버리고, 손을 뻗어 날린 강력한 전격으로 놈을 통구이로 만들어 버렸다.

통구이 시체들 사이로 그녀가 우릴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저기..."

"다친 사람은 없나요."

그녀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직감했다.

그녀의 눈, 그 안에 깃든 무언가.

설마 유닛으로 추정되는 그녀가 내 정체를 알아 본건가.

"뒤, 뒤쪽에 아직 사람들이 있어요!"

"...뒤에요?"

그때 오윤아가 학교 건물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런데, 그녀는 그냥 멍하니 그녀를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강도연과 눈이 마주쳤다.

애초에 이 자리에 있는 플레이어는 둘인데.

"걱정 말아요. 지금 무장 경찰과 헌터들이 긴급 투입했으니, 그래도 잘 도망쳤네요. 대피소에 그대로 있었다면 분명 뚫렸을거에요."

"...혹시 제게 볼일 있으세요?"

분위기가 심상찮다.

오윤아와 차지연, 각각 비밀을 가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카사만디스."

"...?"

"한번 말해봐요. 카사만디스."

먼저 입을 연쪽은 오윤아였다.

나는 녀석이 나름의 확인 절차를 진행한단걸 알아차렸다.

"카사만디스."

"멀쩡하네? 만약 이쪽 세상의 사람에게 힘을 받았으면, 저주를 받을 주문이랬는데."

차지연도 무언갈 눈치 챘는지 순순히 말해주었다.

동시에 그녀가 무언가를 꺼냈다.

강하게 빛나고 있는 작은 조약돌 같은 돌이었다.

"유닛."

"플레이어."

오윤아와 차지연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예상대로, 차지연은 누군가의 유닛이었다.

그것도 오윤아와는 다른 세상의.

카사만디스...나는 그 주문을 기억해 두었다.

"그래서요. 그쪽의 플레이어는 어떤 입장이신지?"

"소속이 다른 플레이어를 찾아, 동맹을 맺는게 목적이라 했죠."

"아항. 역시나."

대체 어디서 자신감을 얻은건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울먹거리던 애가 어깨를 당당히 피고 고개를 쳐들었다.

하긴 좀 맹해보이긴 해도, 속내는 자기 친구에게 낙인을 찍어버릴 정도로 영악한 애니까 뭔가 수는 있을 것이다.

"사실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도움은 충분히 줄 수 있죠."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네요."

차지연이 피식 웃으며 사실상 동맹의 성사를 공인했다.

우리 남매는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그게 차라리 나은거기도 한데.

"우선 안전한 곳으로...잠시만."

그때, 우리를 인도하려던 차지연이 갑자기 멈춰섰다.

그러더니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무, 무슨 일이죠? 혹시 당신 플레이어가..."

자신만만하던 오윤아가 순식간에 찌그러지더니 강도연 뒤로 숨었다.

눈을 질끈 감은 차지연이 부들거렸다.

그러더니 비틀거렸다.

마치, 고통을 참는 것 처럼.

"그럴 수 없어. 이들은 무고한 사람들인데..!"

"설마."

비틀거리던 그녀가 다시 번개를 일으켰다.

문제는 저 붉은 번개는 그녀의 의지로 발현된게 아닌 것 같은데.

"게임의 비밀을...엄수..큭.."

"기, 기다려요!"

우리가 굳어버린 사이 예상과는 달리 오윤아가 앞에 나섰다.

"이 사람들은 내 사람들. 어차피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요. 입막음할 필요 없어요!"

"...다행이네."

오윤아의 해명에 그녀의 번개가 점차 사그라졌다.

식은 땀을 흘리는 차지연은 진심으로 기뻐보였다.

"이제 안전한 곳으로 피하죠."

우리는 그녀를 따라 달렸다.

어차피 그 뒤로는 별 것 없었다.

몰려 온 헌터와 무장 경찰들이 고블린들을 전부 쫒아냈으니까.

살아남은 놈들은 게이트로 도망쳤다.

수많은 희생자와 피랍된 포로들을 데리고.

10년만에 돌아온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재앙, 그리고 재앙의 시작이었다.

*

"그래서, 걔가 뭐라디."

"오빠한텐 잘 설명해서 무마하래."

"그게 끝이야?"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나는 강도연과 멍하니 인도 경계석에 앉아 있었다.

"허당 같은데."

"걔가 공부만 잘하지 좀 허술하긴 해."

녀석이 피식 웃었다.

그 말대로 오윤아는 어딘가 어설픈 구석이 있었다.

당장 나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랬다.

강도연에게 듣길, 더 이상 낙인을 찍을 수 없어 날 봐주겠다나.

그래놓고 입막음 한다는게 죽이는게 아니라 그냥 동생을 시킨 신신당부였다.

물론 그녀석 입장에선 동생이 인질로 잡힌 셈이니 효과가 없진 않지만.

어쨌든 서로 목숨 한번씩 살려준 셈이긴 했다.

나는 고블린에게서, 그녀석은 차지연에게서.

"그래도 윤아도, 차지연 그 사람도 오빠에 대해선 몰라. 잘 된거지."

"맞아. 어찌 잘 넘겼지."

"오빠의 유닛들이 있는 세상...어딘지 알아?"

"아니."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은 커녕 지금 땅 속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일단 집에 가자. 이제...여기 더 못있겠어."

"그래."

나도 더 이상 울음소리와 고함 소리는 듣기 싫었다.

오윤아는 차지연과 함께 사라져버렸으니, 더 이상 있을 이유도 없고.

우리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친데 정말 없으니까...커흑."

"아, 엄마 그만...윽."

집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전화해둔 어머니가 달려와 엉엉 울며 우리를 으스러지듯 껴안았다.

그걸 겨우 말린 나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직접 느끼고서야 알았다.

시간이 그리 넉넉치는 않으며, 진짜 위험하단걸.

"확인 된거냐?"

[그렇다. 군단은 지금 새로운 표본을 완벽히 해체 분석하고 있다. 이건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어쩌면 이번 표본은 우리의 진화에 진일보를 가져올지 모른다고]

휴대폰 액정 속.

그곳엔 죽어 나자빠진 고블린들의 시체가 둥지에 의해 몇 구 소화되고 있다.

자리를 벗어나기 전에 차에 치였던 놈들의 시체를 몇구를 찍은 것이다.

놀랍게도 유닛이라 한들 시체는 전송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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