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8화 (18/254)

18화-게임판(1)

수많은 세상 수많은 이들이 얽히고 설킨 게임판.

그 게임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됨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생물들 중 절대 다수는 그 게임과는 관계 없는 이들이다.

게임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닥쳐오는 혼란과 혼돈에 희생될 뿐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지연아! 갑자기 회사를 나가겠다니!"

"못들으셨나요? 저는 더 이상 회사의 의뢰대로만 움직일 순 없어서."

"대체 어째서..."

헌터 기업 개벽의 사장 강승용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쭉 회사에서 일해온 C급, 아니 이제 A급이 된 간판 헌터 차지연이 이직을 목적으로 사표를 쓴게 그 이유였다.

"너...진짜 이유가 뭐야. 내가 너 고딩때부터 봤어. 너 지금, 진심 아니잖아."

"...묻지 마세요."

그의 말에 움찔한 차지연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궜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

사실 그녀는 이직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등가 교환, 기브앤 테이크. 이 세상의 법칙이자 너무나 당연한 것.

자신이 받은 만큼 일해야 하는게 현실이었다.

"대체 어디로 이직하려고? 설마...이번에 나온 미국의 에볼루션?"

"맞아요."

"그놈들이 대체 너와, 아니 '너희와' 무슨 커넥션이 있는건데?"

강승용은 어렵지 않게 그녀의 행선지를 알아맞췄다.

사실 모르는게 더 이상했다.

최근 빠른 성장으로 화제가 되었던, 일명 스텝 업 헌터들이 어느 기점을 중심으로 하나의 회사 아래 뭉치고 있었으니까.

그중 하나인 그녀의 행보도 사실 뻔했다.

"그건 저의 의무에요."

"그러니까 그 의무가 무..."

"사장님!"

두 사람의 대화는 급박하게 뛰어 들어 온 직원에 의해 끊겼다.

그가 자신을 노려보든 말든, 그 직원은 헉헉 거리며 갑자기 사장실에 놓인 티비를 틀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뉴, 뉴스...큰일..."

직원이 헥헥거리며 튼 뉴스는 생방송 속보였다.

차지연은 그것을 보고 올것이 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오크?"

"제가 에볼루션으로 가는 것, 저것 때문이에요."

"일개 오크 무리가...아닌 것 같은데."

마물이 산짐승보다 흔해진 이 시대에 괜히 속보로 내보내는게 아니다.

현재 뉴스가 중계하는 곳은 미국의 한 도심으로, 오크라고 불리는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오크는 C등급의, 약하지도 너무 강하지도 않은 적.

"저놈들, 오크 맞아..?"

그러나 강승용은 눈을 휘둥그레떴다.

지금 화면에 나오는 수백마리 오크들은 절대 평범한 오크들이 아니었다.

변변찮은 천조각이나 두르고 곤봉이나 휘두르던 녀석들이 질 좋은 강철 갑옷으로 무장하고 무기를 들었다.

그 강함과 조직력 역시 확실히 상승했다.

충격은 미군의 헬기가 쏘아낸 헬파이어 미사일을 푸르스름한 방어막으로 막아낸 오크 주술사의 등장에 최대치를 찍었다.

"절대 평범한 오크들이 아니에요."

"아니 이게 대체..."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충격 받은 강승용이 말을 잃은 사이, 차지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저 오크들은 그녀가 속한 집단의 경쟁자이자 적이었다.

하지만 역시 만만찮다.

"봐. 사람들을 잡아가고 있어. 지금까진 그저 때려죽이고 잡아먹기만 하던 놈들이."

"...맞아요. 분명 어디든 쓰려는 것이겠죠."

미국의 헌터들이 도착해 군대와 함께 놈들과 싸웠다.

그런 와중에, 카메라에는 오크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로잡은 사람들을 질질 끌어 자신들이 나온 게이트에 집어 던지는게 보였다.

"너, 너는 저놈들에 대해 안다고?"

"알지만 말 못해요. 하지만 사장님도 곧 알게 되실 거에요. 저놈들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러니 대비하세요. 아주 길고...끔찍한 전쟁이 계속될 수도 있어요."

그녀는 슬픈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서로 끝없이 죽고 죽이는 무한 경쟁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 와중에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것은 늘 그렇듯 힘 없고 모르는 사람들일 것이고.

그녀는 충격에 빠진 강승용을 내버려두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명령대로, 우선 동맹을 구해라]

"지구에 있는 '플레이어'를."

[인간들 중 어떤 놈들이 타 플레이어의 유닛일지 모르는 가운데 가장 믿을 수 있는건 타 세계의 플레이어다. 단, 그 플레이어의 유닛들이 어느 세상에 살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미 임무는 받았다.

자신의 동료들 중 일부는 지구의 헌터들을 끌여들어 동맹을 맺어 그 세력을 불리고, 그녀를 포함한 일부 유닛들은 다른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탐색의 임무를 받은 이들은, 은총을 받으라]

그녀의 눈 앞에 빛이 번쩍이더니 작은 돌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주문이 새겨진 신비로운 돌, 마나석.

이미 몇 번 사용해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

"난리도 아니다."

뉴스를 본 나는 어느때보다 심각했다.

단순히 뉴스에서 떠드는 것 처럼, 오크들이 강해져서 그런게 아니다.

저 오크들은 분명 플레이어와 상호작용하는 유닛들이다.

이 정체불명의 나레이션이 경고했던 것이 현실로 닥치고 있는 것이었다.

"...밝히는건 오반데 진짜."

나는 강도연 생각 때문에 복잡한 머리를 박박 긁었다.

사태가 이렇게 커진 이상 가족들에겐 말해야 하는거 아니냐고.

내가 망설이는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뭔가 해결을 보는 건 맞았다.

일단심각하게 굴던 녀석이, 막상 그날 이후로는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잘 지내고 있긴 한데.

다만 주마다 50만원이라는 큰 돈을 가져오는건 신경이 너무 쓰였다.

"정말로 그애가 플레이어, 혹은 유닛과 엮인거면 어쩌지?"

[생각 잘해라. 유닛이어도 문제지만, 만약 플레이어라면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플레이어는 무조건적으로 같은 플레이어의 목숨을 노릴 수밖에 없다]

플레이어의 적은 플레이어, 유닛의 적은 유닛.

내 정신이 확들었다.

결국 망설이던 나는 결단을 내렸다.

솔직히 말해보자고.

마침 내 말의 증거가 되어 줄 사건들도 전세계에서 빵빵 터지고 있는데.

"야. 얘기좀 하자."

"...들어와."

노크하자마자 답이 왔다.

나는 방문을 열었다.

녀석은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네가 이 말 믿을지 모르겠는데. 지금 뉴스 미국에 나타난 오크들로 난리난거 알지?"

"..."

"그놈들, 절대 평범한 놈들은 아니야. 그놈들은 사실...으픕!"

심각하게 말하던 내 얼굴에 배게가 날아들었다.

당황한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굴렸다.

강도연이, 어느새 일어나 내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녀석의 눈이 굉장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잡고 손등을 빤히 바라봤다.

그 가느다란 팔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다.

"말, 하지마."

"우읍?"

"혹시라도 플레이어니 게임이니 유닛이니 하는 말 하지 말라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일단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온 힘을 주고 있는데도 뿌리치질 못하겠으니까.

"나, 나도 알아. 그 이상한 어플, 플레이어. 나, 나 당했어. 당해버렸어...그, 그래서 들으면 안돼. 명령 받았어. 나 그런거 들어버리면..."

말더듬이 심해지고 눈은 더 심하게 흔들렸다.

이녀석이 이렇게까지 패닉에 빠진거, 딱 한번 본적 있다.

10년 전 그순간. 아버지가 우리 눈앞에서 죽은 그날.

"천천히 이야기해. 절대 말 안할테니 걱정 말고."

겨우 입을 푼 나는 차분히 안심시켰다.

다행히 패닉은 금세 잦아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건데?"

오히려 나는 점점 침착해졌다.

"윤아 걔가 나를 자기 꼭두각시로 만들었어."

"...그 건물주 딸?"

강도연이 내게 자기 손목을 보여주었다.

뽀얀 피부에 선명히 찍힌 흉터에 이가 갈렸다.

기억난다. 아담하고 착하고 밝은 친구였는데, 설마 이딴 짓을 하다니.

"그, 그애는 그 힘을 자신의 유닛들에게 받았다고 했어. 자기 유닛들은 청산족이라 불리는 사람들로, 땅과 바람의 주술에 능통한 유목민들이래."

"...그래서. 네게 무슨 짓을 시켰어."

"아무짓도. 그 이후로도 그냥 평범한 친구처럼 지냈어. 대신 윤아는 내게 주마다 봉급이라며 돈을 줬어. 50만원씩."

"그걸 왜, 나한테 준건데."

"그, 그게..만약에 나 죽으면..."

녀석이 다시 말을 떨기 시작했다.

열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내 마음은 차갑다.

이성적, 효율적으로 생각하자. 군단처럼.

"다른 명령이 그 정보수집 명령이야?"

"으응, 혹시라도 언젠가 누구에게든 플레이어니 어플이니 하는 이야길 들으면 즉각 보고하라고."

"다행히 답이 없는건 아니네?"

대답을 다 듣고 정보를 종합한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듣다보니 길이 보일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 애를 죽여버리면 될 것 같은데?"

나는 척살권이 새겨진 손등을 보았다.

명분도, 필요성도, 수단과 방법도 모두 완벽하다.

내가 내 동생을 희생양으로 만든 그 여자애를 죽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아니야."

그때 내 말을 강도연이 부정했다.

살짝 놀랐다.

그러나 창백한 얼굴로 헐떡이는 동생의 눈빛은 전과 달랐다.

"이건 이용할 수 있겠어."

"...그게 무슨 소리지?"

"듣자니 관계가 상당히 복잡한 것 같던데."

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녀석이 정신 없이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홀린듯이 그 이야기에 집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