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최하층의 그것들(1)
대체 얼마나 오래 되었을지 모르는 이 거대하고 엄청난 동굴에, 아주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동굴 전체로 보면 수많은 가지 중 하나에서 일어난 티끌만 못한 변화다.
하지만 그 변화는 분명 점점 더 몸집을 불리고 있다.
아직까지는 조용한 가운데 이 최하층의 그것들은 조금씩 더 위를 넘보고 있었다.
"아직은 파충류가 주류인가?"
[거칠고 질긴 가죽으로 무장하며, 채찍 같은 꼬리 끝엔 단단한 갑주를 두른 놈이다]
화면에 비치는건 거대한 도마뱀이었다.
대형견 사이즈인 이 도마뱀은 수북히 쌓인 박쥐들의 시체 위에서 채찍 같은 꼬리를 휘둘러 파견된 우리 병사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다시금 느끼지만 이 동굴의 생명체들, 외계의 생명체라지만 너무 강하다.
"이제 곤충 사이즈로는 어림도 없겠어."
[맞다. 이제 우리 종족이 전체적으로 한 단계 진화해야 한다는 뜻이지]
우리도 크기를 키웠다.
이제 더 이상 곤충이 베이스가 아니었다.
보다 고등하고, 진화된 형태.
제아무리 날카롭고 유연한 꼬리 채찍을 갖고 있는 도마뱀이라도 거대두꺼비의 억센 다리 근육을 팔로 옮겨 온 우리 병사들 다수를 혼자서 이겨낼 순 없었다.
병사들은 개미에게서 모방한 턱관절을 빌려, 입을 양 옆으로 쫙 벌리고 단단한 이빨을 박아넣었다.
"결국 똑같네. 솔직히 우리와 맞서려면 역시 상대방도 군단급이 되어야겠는데."
긴장에 비해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피지컬 차이가 없는 이상, 상대는 제 아무리 많아도 우리를 이길 수가 없다.
사마귀나 쥐 같이 훨씬 큰 생물들이 개미떼에게 초토화 되는 것과 똑같았다.
집단을 막기 위해선 대등한 '집단'이 와야만 했다.
[8층계는 우리가 진입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의 노림수대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 층계의 토착 생물들도 결국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우리 군단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박쥐들로 초토화된 8층계를 넘어 9층계로 진입했다.
[저것들을 봐라. 우리의 정찰을 틀어막던 거대 갑각 거미들. 하지만 이제 저 놈들도 우리의 사냥감일 뿐이다]
심지어 9층계 점령은 생각 이상으로 별 것 없었다.
한때는 넘을 수 없는 벽 같았던 저 거대한 거미들도 이제는 별볼일 없는 미물로 보였다.
[실제로 군단은,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다. 두꺼비를 베이스로 생산한 이들. 지난 번 경험을 바탕으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게 개조된 이들이다]
튼실한 몸을 가진 새로운 병사들은 땅을 기어와 자리에 섰다.
마치 자주포가 포격을 위해 스페이드를 박는 것 처럼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
동시에 피부가 찢어지며 삐죽한 뼈가시가 그 끝을 드러냈다.
[그들은 내부에서 흡수한 특정 영양분을 가시로 생성할 수 있다. 그리고 특유의 근육 기관은 고압으로 그 가시를 체외로 사출할 수 있게 조정한다. 지금 가시가 쏘아졌다. 극독을 품은 독가시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가시들이 방심하고 있던 거미들의 몸에 꽂혔다.
단단한 갑각을 가지고 있다 한들, 어차피 독가시는 그 갑주마저 부숴버렸다.
[9층계를 안정화시키려면 아직 시간이 좀 필요하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군단은 지도의 업데이트를 위해 정찰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하지."
처음이라 허술했지만, 정찰의 중요성은 이미 우리도 알고 있었다.
군단은 금세 정찰병을 대기시켰다.
[그리고 축하한다. 너는 10층계를 돌파해 튜토리얼을 클리어했다]
"...잊고 있었다."
[튜토리얼 다음은 챕터 1. 그리고 튜토리얼 보상은 네가 선택해라]
튜토리얼이라고 말만하지 실상은 그냥 전부 실전이던 녀석이 갑작스러운 선언을 하더니, 갑자기 다른 내용들이 액정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액정을 삼분할 한 세가지의 보상.
[보상 1: 타깃 1회 척살권]
[보상 2: 금 1000]
[보상 3: 1회 종족보전권]
"저기, 난 이것들이 뭔지 조금도 모르겠는데?"
멍하니 글자들을 보던 나는 눈을 비볐다.
보상이라기에 무슨 먹이나 표본등을 기대했는데, 어째 내용물은 전혀 달랐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튜토리얼 보상은 모든 플레이어들이 똑같이 받는다. 그러니 우리 종족에게만 맞는 보상은 나오지 않는다]
"척살권은 뭐야. 금은 뭔데, 상점 기능 같은거 안 열렸잖아."
[척살권은 말 그대로 척살권. 언젠가 강적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강적을 지정해 문답무용으로 척살할 수 있다]
"...미친."
말만 들어도 개사기인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조건 아끼는게 맞다.
문제는 지금 척살권을 고르는게 맞냐는 것.
"금은 내가 아는 그런 용도인가?"
[미리 말해달라니 미리 말해주지. 챕터 3이 끝나면 상점 기능이 열린다. 그곳에서 몇 가지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종족 보전권은...일종의 탈출캡슐 같은건가?"
그래도 설명을 들으니 대충 이해는 간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었다.
사실 고민을 그리 오래하진 않았다.
그 가치가 얼마인지도 모를, 아직 써먹지도 못할 금은 필요 없다.
종족보전권은 세포단위 성장이 가능한 우리에겐 비장의 한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어나지도 않은 패배를 먼저 걱정할 바엔, 승리를 위해 발버둥치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척살권으로 가지."
[보상이 너의 인벤토리로 지급되었다]
"아 따거!"
그리고 그 순간, 따끔거리는 느낌에 기겁한 나는 내 오른 손등을 살폈다.
생전 타투라고는 한적 없는 내 손등에, 검은 표식이 하나 새겨졌다.
[아이템은 현명히 소비하는게 좋을 것이다. 우리 군단도, 그리고 너도. 서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 아이템은 언제 어디서든 가장 필요한 순간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현실에서 이걸 쓸 일이 있겠냐고."
손등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이럴거면 금을 선택하고 팔아먹어 돈이나 땡길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었다.
[8, 9층계를 안정화시킴과 동시에 군단은 거미줄을 제거하고 정찰병들을 10층계로 올려보냈다. 튜토리얼 이후,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다]
웅웅 거리는 bgm이 보다 음산하게 바뀌었다.
그것 때문인지 어째 살짝 긴장되었다.
"넓네?"
[지도가 갱신중이다. 하지만 군단이 놀랄 정도였다. 이곳은 동굴의 수많은 가지 중 하나. 군단이 집어 삼킨 10계층은 사실 그 수많은 가지에서도 곁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 탭을 눌렀다.
지난날의 기록 가운데, 지금 막 생성된 세상 너머의 세상이라는 글이 내 눈에 띄었다.
[군단이 알고 있는 세상의 정의가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자신들이 점령한 영토가 실은 이 드넓은 세상의 한줌 티끌임을 알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위축된건가?"
[너는 아직도 군단을 모르는가]
괜히 한마디 얹었다가 한소리 들었다.
군단의 정찰병들은 이 드넓은 공동을 탐사했다.
이곳은 일종의 복도처럼 뻥 뚫린 곳이지만, 이내 그 옆에 자리한 '방'을 하나 발견했다.
[흐르는 물을 중심으로 식생이 발달하고 있는건 전과 같으나 그 규모가 다르다]
발광석들에 은은하게 밝은 그 현장에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거대하고 다양한 버섯 군락에서 번득이는 눈을 가진 거대한 쌍두 도마뱀이었다.
그 도마뱀은, 개구리 비스무리한 동물을 뜯어먹고 있었다.
문제는 그 크기였다.
저 도마뱀은 어지간한 소형차 수준에, 잡아먹히는 개구리도 크기가 대형견 이상이었다.
푸른 비늘을 전신에 두른 도마뱀의 두 머리 중 하나가 순간 하늘을 날고 있는 정찰병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히익!"
뿜어진 시퍼런 불길이 화면을 가득 채우더니, 이내 화면은 검게 암전해 버렸다.
[보이느냐. 이 미궁의 식생들은 만만한 이들이 아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불을 뿜는게 말이 되냐?!"
무슨 드래곤도 아니고, 도마뱀이 불을 뿜어.
물론 객관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방금 그 불길은 기껏해야 스프레이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두려운가?]
"두렵다기 보다는...이거 이래서야 지금 당장은 내가 뭘 넣어주든 도움이 안될 것 같은데..."
[그건 전혀 문제가 아니다]
녀석이 이렇게 담담하니 어째 그 도마뱀에 내가 쫄아버린 것 같았다.
[답을 찾고, 사고하고, 개조하며 행동하는건 모두 군단이 하는 일이다. 생각해봐라. 신이라는 존재가 존재한다면 극성 학부모처럼 사사건건 참견하고 개입하는게 맞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할 일은 단서와 변수를 만들어 주는 것 뿐이다]
"정말 그거면 되는거냐?"
[그들을 무시하지 마라. 지금 군단은 기뻐하고 있다. 다시 한번 흥분하고 있다. 저들은 먹이이고, 양분이다. 저것들을 먹어치우면 더 강해질 수 있다]
다시금 깨달았다.
군단은 멈추지 않으며 두려움도 없다고.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개념은 없다.
죽으면 그저 양분으로 군체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 다시 싸운다.
"삶과 죽음, 영혼에 대한 내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어."
[언젠가 그들에겐 네가 가치관이 될 것이다]
그냥 한마디 중얼거렸을 뿐인데 떠오른 글자가 의미심장했다.
언젠가라. 언젠가, 그들이 나의 존재와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를 말하는 것인지.
[8,9 층계에는 아직 에너지가 충분하다. 이 비축된 에너지를 가지고 군단은 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목표는 방금 발견한 쌍두 도마뱀이 있는 진균 숲이다]
군단은 다시 전쟁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