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기억 (1) >
[단독] ‘세상, 최고의 아빠’ 어젯밤 촬영 종료
또다시 1면을 차지한 이시현 기사가 거리를 채운 아침.
출근하는 직장인이며 학생 할 것 없이 신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거 사진 잘 나왔다!”
“어제 카페 후기 올라온 거 봤어?”
“봤어, 봤어!”
작은 여자아이가 말총머리를 흔들며 방방 뛰었다. 입가에 함박웃음이 번진다.
“촬영 끝나고 오빠 기분 짱 좋아져서 팬들하고 얘기 나눴다며?”
배우들과 촬영팀이 모두 철수하는 가운데 이시현은 촬영장 앞에서 텐트 치고 파라솔 치며 상주해온 팬들을 불러 같이 도시락 나눠 먹으면서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 때문에 카페에 후기가 쏟아져 올라왔었다.
“다 같이 사진도 찍고 분위기 완전 훈훈했다는데.”
“그동안 자주 못 봐서 미안하다고 사인도 해주고 얘기도 들어주고.”
“더 대박은 버스도 불러줬다잖아.”
“아, 맞아.”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차가 없는 팬들을 서울까지 안전하게 챙겼다는 감동적인 스토리까지.
“난 오빠가 그래서 좋다니까? 잘생긴 걸 떠나서 우리 마음 너무 잘 알아주고 자기도 힘들 텐데 우리부터 챙기고. 막 가려운데 긁어주는 거 있잖아?”
“그래 스캔들 그까짓 거, 클레어 정도면 눈 질끈 감아주지 뭐.”
여학생들의 수다는 버스가 오고서야 멈췄다.
우당탕 버스에 올라탄 그녀들, 이번엔 조금 전 신문을 산 직장인들이 버스정거장 의자를 차지했다.
[이시현 한 해 수입 400억 or 그 이상!]
-본지는 이시현의 국내외 스케줄과 CF, 공연, 음반 판매고를 분석한 결과, 미국의 에이전시와 국내 매니지먼트를 맡은 지에스엔터테인먼트, 그 밖의 관계사와의 배분을 제외하고도 그의 작년 한 해 수입이 400억 이상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Four Warriors의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1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400억을 1년 만에? 장난 아니구먼.”
“얘가 불과 몇 년 전에는 라면으로 삼시세끼 끼니 때웠다잖아.”
“인생 한방인 거지. 인기 얻어, 돈 벌어, 거기다 할리우드 톱스타 여자친구까지.”
혀를 내두른 직장인들은 또 다른 기사를 부러움을 담아 읽어내려갔다.
[단독] 이시현 오늘 프랑스로 출국!
-이시현은 연인 클레어를 만나기 위해 오늘 오후 프랑스로 출국할 예정이다. 공식적으로 연인 사이임을 인정한 두 사람은 파리에서 재회, 긴 촬영으로 인해 꾹 눌러뒀던 마음을 뜨겁게 녹일 계획이다. 한편 이시현은 이번 방문에서 Four Warriors와 합류해 파리 공연을··· (사진은 에펠탑 앞에서 Four Warriors의 공연을 환영하는 프랑스 팬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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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머리를 누르고 있어?”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는 내게 케이시가 물을 내밀었다.
“그냥 좀 어지러워서.”
꽤 정신없었으니까.
물 한 모금 크게 마시고 그녀에게 물었다.
“애들은 내일 입국이지? 준비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준비는 무슨. 클린턴은 오늘 클럽에서 파파라치한테 찍혔고, 로돌포는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갔어.”
“팻시는?”
“그 둘 잡으러 갔고.”
잔소리하고 있을 팻시가 떠올라서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튼 파리에서 첫 일정은 클레어와 영화인모임 참석이야.”
케이시가 스케줄표에 동그라미를 치며 주의사항을 얘기했다.
비록 쇼윈도 연애지만 진짜 연애처럼 철저해야 한다.
클레어가 어떤 옷을 즐겨 입는지, 어떤 음식을 못 먹는지, 어떤 음악 성향을 가졌는지. 그녀와 함께하면서 인터뷰와 라디오, 잠깐의 팬미팅 같은 스케줄도 소화할 거다.
물론 프랑스에 가는 목적이 그녀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 파리 공연을 시작으로 밴드는 유럽 투어에 들어간다. 한국에서의 드라마 촬영기간 동안 기다려준 만큼 이제는 내가 밴드의 스케줄에 최대한 협조할 때니까. 아 맞다, 온 김에 박한영도 보고 가야겠다. 정희수랑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네.
“지에스는 어떻게 할 거야? 그가 이대로 만족할까?”
케이시가 얘길 꺼내고 찝찝한 표정을 보인다.
차현성 대표.
한 번쯤 부딪칠 걸 알았지만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결국 그렇게 될 일이었다. 근데 그 양반도 그렇지 어째 수법이 그렇게 변함이 없냐. 아. 변함이 없는 게 아니라 변하기 전이겠다.
“일단은 만족할 거야. 하지만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아니면 벌써 시작했을지도.”
“시작?”
내가 차 대표라면 나에 대한 의존도를 점차 줄여갈 거다.
황금알은 낳지만 가질 수 있는 게 몇 개 없다면, 그때는 새로운 거위를 찾아야 할 때니까.
“그럼 스케줄 정리는 다 끝난 거지?”
“하나 더.”
케이시가 영화인모임 참석 명단을 내밀었다. 유명 인사들이 빼곡하다. 케이시의 빨간색 볼펜이 부욱 소리를 내며 명단에 적힌 이름 하나에 동그라미를 쳤다.
“여우가 드디어 굴 밖으로 나왔네?”
이 여자, 미소가 꽤 음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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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축하드립니다, 마이클 본 감독님.”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자는 축하 인사와 함께 작은 선물을 건넸다. 털이 수북한 손이 상자에서 꺼내든 건 8밀리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의 흑백사진이 담긴 액자였다.
“오우, 감사합니다.”
마이클 본은 싱글벙글 웃으며 액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이 마음에 드시나 보죠?”
“예. 아주 오래전 추억이 떠오르거든요. 이 8밀리 카메라로 아주 많은 걸 담았죠.”
소년과의 추억, 소녀와의 추억.
마이클 본은 다시 한번 흐뭇하게 미소 짓고 액자를 곁에 내려놓았다.
“아주 좋은 선물 감사합니다.”
“그럼 귀띔 좀 해주세요. 다음 작품은 뭐가 될지.”
“흠. 좋습니다.”
“예? 정말이요?”
흔쾌한 대답에 기자가 깜짝 놀란다. 하지만 곧 눈을 빛낸다. 세계적인 작가의 머릿속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일 테니까.
마이클 본은 불룩 나온 배를 바싹 당기고 얘길 꺼냈다.
“다음 작품은 단순한 영화가 될 겁니다.”
“단순한 영화요?”
“선악이 구분되지 않는 영화죠. 그렇기에 누가 죽더라도 죽은 자가 선인지, 살아 있는 자가 악인지 판단하기 모호하실 겁니다."
기자는 턱 끝을 매만지며 어떤 영화가 될지를 잠시 유추하는 듯했다. 다리를 푼 그녀가 궁금함을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배경은 90년대 초반으로 하죠. 주인공은 예술에 목마른 가련한 남자입니다. 그런 어느 날 영악한 소년을 만나죠.”
“소년······.”
기자가 입술을 달싹거리는 바람에, 마이클 본은 검지를 흔들고 얘기를 계속했다.
“영악한 소년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남자에게 접근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소년에게 중독되죠. 소년에게 빠져들수록 몸과 마음이 망가지지만, 결국에는 소년만이 자신의 예술을 이해해준다고 믿게 됩니다.”
중독.
“자, 소년은 처음부터 남자를 이용하려고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소년에게 중독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영화는 소년과 남자가 둘 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가 얘기를 멈추고 기자를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에 그녀가 움찔하자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이 영화가 새드엔딩이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기자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하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마이클 본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프로덕션 관계자가 기자에게 인터뷰가 끝났음을 알린다. 카메라와 기자가 방을 빠져나가자 마이클 본은 소파 옆에 둔 가방에서 신문을 꺼냈다.
부스럭.
[Four Warriors 리더 이시현 프랑스 내한. 연인 클레어의 영화 촬영을 응원하기 위해···]
부스럭.
잠시 신문을 내려놓은 그는 바로 옆에 좀 전에 기자에게 받은 액자를 나란히 내려놓았다. 흑백사진의 젊은 마이클 본과 컬러사진의 아름다운 이시현이 눈앞에 나란히 있었다.
“어쩜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났지만 이시현의 외모는 변함이 없었다. 눈빛도, 미소도, 하얀 피부도 그대로다.
마이클 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머릿속에 이시현의 모든 것이 그려진다. 그래서 아주 잠깐, 가상의 촬영장에 이시현을 초대했다. 감독으로서 배우에게 디렉션을 하고, 함께 모니터링을 하고, 와인 한잔을 나누며 영화 얘기를 하는 그 순간들. 비록 가상이지만 가슴이 벅차오른다.
한차례 들썩이는 숨을 고루 쉰 그는 이번에는 가방 안에서 봉투를 꺼내 들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물론, 그 어린 소년도 알고 있는 일이지만.]
봉투 속 네모반듯한 종이에 적힌 내용은 해마다 오는 일종의 초대장 같은 거였다. 예전부터 누가 보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종이에 친절하게도 ‘그 어린 소년’이라고 적혀 있으니까.
단지 최근 몇 년은 보내는 사람이 다른 것 같았다.
필체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 어린 소년’은 사고로 죽었으니까.
그래서 너무 기쁘다.
이렇게 잊지 않고 기억을 해주고 있으니까.
‘중독.’
이시현의 마음 한 부분을 자신이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이클 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퍼질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종이를 봉투에 다시 넣고 신문을 곱게 접에 가방에 도로 넣었다.
“감독님 출발하셔야 합니다.”
마이클 본은 미소와 함께 일어났다. 이제 만나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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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오늘 무슨 행사가 있나요?”
“Four Warriors 리더가 방문하거든요.”
남자의 친절한 안내에 노인은 이마를 찌푸리고 다시 물었다.
“유명한 스타인가요?”
“그러니까 저렇게 많이 모였겠죠?”
남자는 빙긋 미소 짓고 레드카펫을 가리켰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준비된 보안 요원이 70명, 거기다가 수를 셀 수 없는 기자들과 팬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있다.
“근데 다들 뭘 부르고 있는 거예요?”
“밴드의 노랩니다. 노래 괜찮죠?”
이시현을 보기 위해 일찌감치 자리 잡은 팬들이 플랜카드, 브로마이드, 앨범, 인형 같은 선물을 손에 들고 밴드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안녕 나의 친구들 잘 지내고 있지?
오늘따라 너희들이 너무 보고 싶어
잠을 설치고 새벽에 일어났더니 푸른 안개가 가득했어
그때부터 나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고 있어
피자와 맥주 몇 병에 새벽까지 떠들던 그 시절 말이야
그건 너무도 아름다운 기억이지
아마 너희도 가끔 생각했을 거야
우리가 걱정이나 두려움 따위를 떠들던 그때 말이야
좀 더 어렸고 조금 덜 성숙했던 시간이지···
언제가 내가 타임머신에 대해서 떠든 것 기억나?
그걸 타고 우리는 다시 그날에 모이기로 약속을 했지
하지만 타임머신은 당분간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빌어먹을 과학
근데 사실 이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왜냐하면 그건 너무도 아름다운 기억이기 때문이지
안녕 나의 친구들 잘 지내고 있지?
너희에게도 그때가 아름다운 기억이었을까···
2집 앨범 수록곡 ‘아름다운 기억’.
팻시의 기타연주와 이시현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4분 48초 동안 이어지는 노래는 이시현이 직접 작곡했는데, 인터뷰에서 그는 노래에 얽힌 비화를 얘기한 적이 있다.
클린턴이 사온 싸구려 와인과 중국 음식을 먹으면서 멤버들이 웃고 떠든 날.
새벽에 일어났더니 어스름한 푸른 공기가 창문 너머에 가득했다고 한다. 숙취가 조금 있었지만 펜과 노트를 들고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웠고, 이리저리 쓰다 보니 가사가 완성. 그래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꿈에서 데럴이 나타나 가사를 보면서 기타를 쳤다고 한다. 살아 있을 때의 그 건방진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사는 나쁘지 않네.”
“크크크.”
파란 눈의 팬들은 인터뷰 기사를 얘기하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시현이 처음에 밴드에 합류했을 때 데럴이 완전히 반대했다는 거 들었어?”
“그뿐이야? 둘이 맨날 티격태격했대. 시현이 그랬잖아? 데럴이 자기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고.”
두 사람에 대한 일화를 모르는 팬들이 없다. 멤버들은 인터뷰든, 방송출연이든, 혹은 콘서트든 언제 어디에서건 데럴을 추억했으니까.
“데럴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클린턴의 얘기대로라면, 성격은 더러운 놈이었지만 보고 싶은 놈이라던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얘들아 신문, 신문!”
금발을 휘날리며 허겁지겁 달려온 팬이 잉크도 마르지 않은 따끈따끈한 신문을 내밀었다.
“뭐야 이거?”
하지만 신문을 본 팬들은 인상을 구겼다.
일면에 이시현과 나란히 마이클 본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타이틀 또한 자극적이다.
[이시현 VS 마이클 본]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빛나는 마이클 본 감독. 그런 그를 비난하는 Four Warriors 리더 이시현. ‘과연 누가 선인가?’ 많은 영화인은 마이클 본의 예술성이 과거의 사건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과연 과거의 일로 마이클 본을 비난하는 게 옳은 행동인가? 이 미친 기자!”
팬들은 기사를 더 읽지 못하고 신문을 짓이겼다.
땅에 내동댕이친 신문을 짓밟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씩씩거렸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영화인이 감독을 지지하는 게 사실이다. 그의 영화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왔다!”
갑자기 터진 누군가의 목소리.
마침 검은색 중형세단이 멈춰 서고, 그 안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그가 나온다. 순간 팬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 아름다운 기억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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