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222화 (222/227)

<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5) >

「두 달 후」

“‘세상, 최고의 아빠’ 팀을 모시겠습니다!”

리포터의 요란한 박수에 맞춰 촬영이 시작됐다. 바다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바람에 부서진 파도가 바람에 실려 와 배우들 얼굴에 달라붙는다.

“안녕하세요, ‘세상, 최고의 아빠’ 연출을 맡은 박태 감독입니다.”

“안녕하세요, 권창수 역을 맡은 배우 이시현입니다.”

배우들이 차례로 인사를 끝내고 질문이 시작됐다.

“시현 씨, 그동안 촬영장을 거의 떠나지 않으셨다고 들었어요.”

이시현은 근처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정말 권창수처럼 살아왔다. 촬영 없는 날은 동네 사람들과 탁주 한 사발 기울이고, 낚시도 했다.

이곳은 권창수와 강미래가 사는 곳이니까.

바닷가 인근에는 차광재가 운영하는 카바레가 있고 천사가 다니는 학교가 있다. 그래서 그에겐 바깥세상이 오히려 텔레비전 속 세상이었다.

“익명을 요청한 제보자께서 얘기하길, 자기 촬영도 아닌데 항상 촬영장을 서성거린다. 그래서 촬영 없는 날은 서울에 좀 올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현장에서 허구한 날 버티고 있으니까 눈치가 보여 다들 제대로 쉬질 못했다. 배우들은 또 오죽하고. 제발 좀 서울에 가라고, 하셨어요. 저희가 익명이라 누구라고······.”

“저기, 큐카드 뒤에 감독님이라고 쓰여 있는데요?”

리포터가 화들짝 놀라는 연기를 하자, 박태 감독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배우 눈치 보는 감독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

“시현 씨, 이거 해명을 하셔야 할 것 같은데?”

리포터가 웃으며 묻자 이시현도 생글생글 웃는다.

“감독님이 지금 저한테 많이 섭섭해하십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제 잡은 돔이 무척 컸거든요? 근데 감독님은 붕어 마냥······.”

“야 붕어라니! 참돔이었어!”

“하하 감독님, 시현 씨와 벌써 세 번째 작품이시잖아요?”

특집드라마와 미니시리즈로 제작된 ‘우리 오빠’와 ‘세상, 최고의 아빠’ 이렇게 세 작품.

“처음 드라마 촬영했을 때와 지금의 시현 씨는 많이 달랐을 텐데, 어떠세요?”

리포터가 질문을 던지자 박태 감독이 턱을 긁적이며 이시현을 찬찬히 훑어보며 말했다.

“달라진 것 없는데. 이 친구는 항상 열심히 하니까.”

“감독님, 돔 맞는 것 같아요.”

“맞다니까!”

박태 감독이 또 엉덩이를 들썩이는 바람에 다들 웃음을 터트린다. 그중에서도 오소리의 미소가 유독 밝았다.

“소리 씨!”

“예!”

“지금 천사하고 무슨 얘기하고 계시던데, 무슨 얘기 하셨어요?”

“아. 천사한테 저하고 창수 아빠 중에 누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정말요? 그래서 답이 뭐예요?”

“저요.”

오소리가 방긋 웃자 이시현이 억울한 얼굴이다.

“천사야, 나는?”

“창수 아빠는 나보다 우리 엄마가 더 좋아하는 걸요.”

“어머, 은경아!”

카메라 밖에 있던 아이 엄마가 펄쩍 뛰었다.

“우리 천사, 언니가 격하게 사랑하는 거 알지?”

“천사 내 딸이거든요?”

오소리가 아이를 끌어안자 이시현도 질세라 아이를 끌어 앉았다. 세 사람의 모습에 카메라 감독도 흐뭇하게 미소 짓는다.

“소리 씨한테 권창수 같은 남자는 몇 점이에요?”

“4점이요.”

“4점이요?”

“제 점수는 5점이 만점이거든요.”

오소리가 이시현을 다시 보고 미소 짓는다.

“짜다, 짜. 그럼 시현 씨는요? 강미래 같은 여자는 몇 점이세요?”

말해 뭐하냐는 듯 이시현이 어깨를 으쓱한다.

“100점이요. 강미래는 정말 좋은 사람이거든요.”

남녀 주연 두 사람의 질문이 끝나고 이제 조연 배우들에게 질문이 이어졌다. 낚시한 얘기, 족구를 한 얘기, 운동회 씬을 촬영할 때는 진짜 마을 사람들과 운동회를 했다는 훈훈한 얘기들이 카메라가 차곡차곡 담겼다.

“그럼 이번에는 어느 분께 질문을 드려야······.”

리포터의 시선이 번뜩인다.

“동원 씨.”

“예, 예!”

“하하. 동원 씨, ‘세상, 최고의 아빠’가 한국과 일본 동시 방영이잖아요? 한일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흥행 포인트는 뭐가 있을까요? 딱 하나로 꼬집어 말해 줄 수 있으세요?”

“아, 흥행 포인트요? 음······.”

진동원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온다. 회사에서는 인터뷰나 예능에서는 일단 지르라고 했다. 알아서 편집해준다고. 그런데 막상 질문이 들어오니 머리가 하얗게 됐다.

“꾸, 꾸, 꿀 피부요!”

“꿀··· 피부요?”

“저희 드라마가 HD로 방송되거든요! 시청자 여러분께서는 이시현 선배님의 선명한 얼굴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거든요!”

다들 황당해서 그를 바라보는데, 천사가 까르르 웃는다.

**

타닥타닥.

모닥불 위로 불씨가 날아오른다. 한바탕 태풍이 휩쓸어 가고 술 좀 마시는 매니저들과 스타일리스트 몇 명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 결국에는 끝이 오네.”

고우희의 매니저가 투박한 손으로 맥주를 쥐었다.

짠!

한 모금씩 마시고 다들 찌푸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근데, 정말 아찔하지 않았어요?”

진동원의 스타일리스트가 번드르르한 입술을 훔친다. 흔들리는 단발머리를 고무줄로 묶으며 계속 말했다.

“스캔들 말이에요. 다들 그랬잖아요?”

“맞지. 앞으로 어떻게 하나 싶기도 하고. 이거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고.”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시현 씨 진짜 멋있었다니까.”

“그러니까요. 와, 그런 반전을 던질 줄이야.”

“역시 월드는 달라. 할리우드 여배우와 만나고 있었다니.”

이시현은 오소리가 아닌 할리우드 배우 클레어와 연애 중임을 밝혔다. 클레어 역시 다음날 열애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서 할리우드 커플이 탄생했다.

“괜히 소리 씨만 중간에서 난처해졌지 뭐야.”

“그러게. 황당한 일이지.”

오소리에게 향했던 이시현 팬들의 분노는 길을 잃었고, 대중은 처음으로 국내 배우와 할리우드 배우의 스캔들에 호기심을 보였다.

“스카이데일리 기자 차 완전 박살 났다면서요?”

“그거 새 차 뽑은 지 일주일도 안 된 차였대. 하하.”

어찌 됐든 스캔들은 스캔들인데 오히려 이시현을 더 알린 계기가 됐다. 팬들은 여전히 못마땅해하지만, 실감이 나질 않는다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다. 스캔들 상대가 외국에 있으니 실감이 날 리 있나.

“그럼, 나중에 보자고.”

강 팀장은 오명숙을 데리고 먼저 일어났다. 모닥불에서 멀어지자 오명숙이 입에 문 김밥을 물고 웅얼거렸다.

“사귀기는 개뿔.”

진실을 알면 다들 놀라 자빠질 거다.

“근데 팀장님. 회사 분위기 요즘 왜 그래요? ”

강 팀장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이시현과 차 대표 사이에 뭔가 트러블이 터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찌 됐든 우리 소리 큰일 날 뻔했네.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려요.”

“심장이 벌렁거리는 사람이 김밥을 그렇게 맛있게 먹냐? 그만 좀 먹어라.”

“맛있기는요. 배고파서 먹는 거지.”

손가락을 쪽쪽 빨며 투덜거리는 오명숙을 보며 강 팀장은 피식 웃고 먼저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곧 차에서 다시 뛰어내렸다.

“왜요?”

“조, 좀 있다 타자.”

“그러니까 왜요?”

오명숙이 그를 멀뚱히 쳐다본다.

“왜는 자식아, 그런 게 있어. 그리고 차에서 좀 떨어져.”

호들갑스럽게 오명숙을 데리고 차에서 멀찍이 떨어진 강 팀장은 괜스레 입술을 훔쳤다.

“뭐야 쟤네?”

어이도 없고 웃기기도 하고. 저러다 또 스캔들 터지면 어쩌나 싶고.

‘훗. 뭐 그때 가면 어떻게 또 되겠지.’

**

“액션!”

녹음으로 가득한 가로수 길.

지난 몇 달을 본 오소리인데 오늘은 어제보다 더 예쁘다.

바람을 등에 업고 한발 한발 조심히 내디딘다. 펄럭이는 원피스 자락, 눈앞에 늘어진 그림자를 보니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가로수 사이로 자동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마을 이장이 관광 특수를 노려 만든 야심 찬 길목이었으며 그 나름대로 마을을 살리려는 야심 찬 포부였지만,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이 도로포장 공사가 중단된 턱에 결국 마을 사람들이 아니고는 찾지 않는 곳이 돼 버렸다는 설정이 서린 길이다.

훗.

오늘은 권창수가 아닌 이시현이고 싶다.

그래서 오소리처럼 뒷짐을 쥐었다. 그녀는 가로수 끝에 카페 하나를 만들면 좋겠다며 들뜬 목소리로 나를 돌아봤다. 그래서 천천히 따라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그녀의 얘기를 경청했다.

스캔들이 터지고 그녀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었다.

담뱃불조차 꺼트리는 해풍을 맞으며 빈 담배를 문 채로 몇 시간이고 생각을 떠올렸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사람이 되어 버린 그녀였으니까.

권창수도 그랬겠지. 강미래 때문에 생기는 고민에 가슴이 여미었겠지. 뽀얀 얼굴로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까 봐 걱정되고,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토라진 그녀의 모습에 겁이 났겠지.

“사랑해.”

순간 바람이 크게 불어왔다. 그녀가 목덜미에 머리카락을 붙잡고 뒤돌아본다.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미소였다.

“뭐라고 했어요?”

못 들었으면 다시 말해 주지 뭐.

“사랑해.”

무책임할 정도로, 널 사랑해.

“컷!”

박태 감독은 단번에 환한 얼굴로 일어났다. 쏟아지는 박수 갈채 속에서 오소리가 다가와 속삭인다.

“다시 말해줘 그 말.”

“싫어.”

“어어?”

까불지 마라. 그래도 말 안 해줄 거니까.

아끼고 아껴서 아주 가끔 꺼낼 거니까.

「프랑스」

넓은 포도밭과 교회, 아담한 집들로 이뤄진 시골 한적한 마을에서 영화촬영이 한창이었다.

도시로 떠났다가 마을로 돌아온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할리우드 신예 클레어가 여주인공 르미 역을 맡았다.

“쟝, 나는 곧 파리로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 당신과 내가 가까워진다는 건, 우리 포도밭이 품평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일이나 다름없죠.”

한마디로 불가능하다는 얘기.

할 말 다하고 일어나려는 르미에게 쟝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나는 가는 사람 붙잡지 않아요. 하지만 주문한 커피는 마시고 가는 게 어때요? 꽤 아름답거든요.”

“예? 커피가 아름답다고요?”

쟝은 코를 찡긋하고 웃기만 한다.

뭐 아무튼.

“좋아요, 그럼 커피 한잔하고 일어나죠.”

긴 다리를 꼬고, 치마가 올라올까 봐 꾹 누른 르미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뒤, 카페 직원이 커피를 들고 왔다. 색바랜 머리카락을 깔끔히 넘겨 묶은 여직원이었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중년의 여직원은 따뜻한 미소와 함께 조심히 커피를 내려놓았다. 물러날 때도 미소는 변함없었다. 그녀가 사라지자 쟝이 커피가 아닌 그 뒷모습을 보며 속삭였다.

“어때요? 아름답지 않나요? 그녀의 미소 말이에요.”

그런 뜻이었나.

르미는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커피 향이 아련히 피어오른다.

“굿!”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급히 카메라 안으로 뛰어든 매니저가 클레어의 귀에 귓속말을 속삭였다.

“다음 주쯤 온다고?”

“응. 스케줄 조율하고 있어.”

이시현과의 스캔들.

할리우드는 언제든 쇼가 필요하고 그럴 때를 대비해서 계약이 존재한다. 스캔들이 뭐가 무서운가. 관심이 사라지는 게 더 무서운 법이지.

“오케이.”

고개를 끄덕이자, 매니저가 뒤로 가고 스타일리스트가 달라붙었다. 화장을 고치고, 머리 모양을 잡고,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이제 다음 컷을 가야 하는데··· 그녀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좀 전에 미소가 따뜻했던 무명의 배우에게 관심이 가서였다. 돌아보니 그녀는 건물 그림자 아래서 대본을 보고 있었다.

“저 배우 이름이 뭐예요?”

남자 배우가 미소를 짓고 말했다.

“글쎄. 진짜 이름은 모르겠고, 스탭들이 비비안이라고 부르더라고.”

“비비안?”

왠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클레어 준비됐어?”

“예!”

[비하인드]

“야 왜?”

최재환은 투덜거리며 이시현의 손길에 끌려왔다. 방파제 아래서 다들 회식 중인데, 갑자기 끌고 와서 난리야.

“나 대사나 받아줘.”

“대사?”

이시현이 대본을 내밀었다.

“야, 술 먹고 있는 사람 잡아 와서 대사 받아달라는 거야?”

기가 막혀 쳐다봤지만, 이시현은 피식 웃고 대본을 촤르르 넘겼다.

“형한테 연기 수업받으려고 그런다. 옛날처럼 제대로 한번 해줘.”

“참네.”

최재환은 마지못해 대본을 살폈다.

“여기 차광재.”

이시현이 곁에서 차광재라는 인물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어떤 관계인지. 물론 진동원의 대본을 이미 살펴봤기 때문에 최재환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아니, 범진 씨 불러서 하면 돼지.”

“형이랑 하고 싶다고.”

“아휴.”

“제대로 해? 눈물도 흘리고.”

“아 자식.”

계속 투덜대니 이시현이 대본 덮는다.

“아, 알았어.”

“형, 권창수가 정말 나라면 어떻겠어?”

“뭐?”

“내가 알츠하이머에 걸리고, 정말 기억을 잃는다면, 그런 나를 보는 형은 어떨 것 같아? 그런 마음으로 해줘. 뭐 쫄리면 관두시던가.”

이시현의 진지한 모습에 최재환도 마냥 웃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키진 않았지만, 한숨 한번 쉬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38 방파제 / 낮

“좀 잡았어?”

광재는 늘 그곳에 앉아 있었다. 방파제, 익숙한 자리, 익숙한 모습으로 낚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널찍한 등으로 낚싯대를 흔들고 있었다.

“이제 더 심해진대. 말도 더듬게 될지도 모르고, 온몸에 힘이 빠지고, 기억도 더 많이 잃어버린대. 그렇게······. 내가 아니게 된다네.”

창수는 담담히 사실을 얘기했다. 막상 얘기를 꺼내니 참 쉽구나 싶었다. 그동안 뭣 하러 그렇게 꽁꽁 숨겼었는지.

“형······.”

그가 광재를 부르는 또 다른 익숙한 이름 ‘형.’ 그 이름을 한 번 부르며 그는 흔들리는 광재의 어깨를 두 손으로 꾹 눌렀다.

“미친 자식··· 차라리 암 같은 거나 걸리든가. 신장이 썩어 문드러지거나 눈 병신이 되든가. 그럼 내가 콩팥을 주든, 눈을 주든, 심장을 주든 할 거 아니야! 이 개자식아!”

주체할 수 없는 흐느낌이었다. 광재는 풀 수 없는 화를 바다에 쏟았다. 거친 쇠 목소리와 갈라진 신음을 쉼 없이 내뱉었다.

“미안하다 형.”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광재는 의자를 밀치고 벌떡 일어섰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하냐고!”

광재의 눈은 흠뻑 젖어 있었다. 시꺼먼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창수가 광재의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지금이 두 번째였다. 교통사고로 창수가 병실에 누워 있을 때도 그렇게 서럽게 울었었다.

“카바레··· 곁에서 좀 더 오랫동안 도와주고 싶었는데. 미안하다 형.”

광재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넘쳐 버린 눈물에 콧물에 모든 게 뒤범벅됐다.

“이 자식아··· 이 자식아······.”

솜방망이 주먹이 창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선수 시절에도 그렇게 물 주먹 같더니만. 그래도 주먹은 빨랐었는데. 이제는 형도 나이가 들었구나 싶다. 얼굴에 주름도 가득하고, 정도 많아졌고, 성질은 다 죽어 버렸고.

그렇게 형은 바보같이 그에게 기대 엉엉 울었다. 거친 바람 소리도 그 소리를 없애 버리지 못할 정도로 엉엉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

창수는 천천히 광재를 밀어냈다.

“왜? 또 어디 아프냐?”

콧물 범벅이 된 광재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눈썹을 추켜세웠다.

“옷에 콧물 묻잖아. 새 옷인데.”

“이런.”

최재환은 짧은 씬 하나에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주르륵 흐를 정도로 차광재에게 몰입했다. 술기운도 실렸고.

“이 드라마 왜 이렇게 슬프냐.”

거친 눈시울을 훔치는 그의 모습에 이시현이 미소 짓고 말한다.

“역시 연극배우 출신은 뭐가 달라.”

“연극배우는 무슨. 때려치운 지가 언젠데.”

“그래도 다행이지. 권창수한테는 차광재가 있었고, 나한테는 형이 있으니까.”

이 자식은 어쩜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까.

최재환은 피식 웃고 대본을 도로 건넸다. 그러다 이시현과 눈이 마주쳤다.

“낯간지럽게 왜 그렇게 쳐다봐.”

“형.”

“아 왜?”

툭 쐈더니, 이시현이 툭 던진다.

“오디션 한번 봐라, 형.”

“뭐?”

최재환은 눈을 뜨자마자 시간을 확인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 안, 그리고 주차장이었다. 피곤해서 깜빡 잠든 모양이다.

“무슨 개꿈을 꾼 거야.”

연기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사무실에 돌아왔다.

“시현이가 왔었다고?”

“예, 잠깐 기다리시다가 가셨어요.”

약간 넋 나가 보이는 여직원이 이시현이 왔다 갔음을 알렸다.

“뭐라는데?”

“동원 씨 출연료 챙겨주려고 왔다고.”

봉투였다. 열었더니 수표가 나왔다.

“일십백천만억··· 십······.”

놀란 직원들만큼 최재환도 놀라서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그는 눈만 깜빡이다 사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큰돈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의자에 앉자마자 휴대폰을 펼쳐 들었다.

“이 미친 새끼··· 내가 뭐 달라고 했나······.”

강 팀장의 번호를 찾아서 꾹 누르려던 그는 명패를 보고 멈칫했다. 찰싹 붙어 있는 포스트잇 한 장에 적힌 글귀.

[내 매니저]

<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5) > 끝

ⓒ 고고3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