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4) >
“이 부분하고 여기 좀 고치자. 몇 군데는 그냥 안고 가자고.”
대본이 문제가 있으면 고치겠지만 이미 지난 1년을 준비하면서 고치고 또 고친 대본이다. 손댈 곳 없었다. 그러니 더 머리가 아플 수밖에.
그나마 마지막 회는 유출 안 됐으니 그걸 위안 삼으며 꾸역꾸역 회의를 이어갔다.
“그리고 촬영은 지에스에서 스태프들 추가로 지원해준다니까, 아휴··· 일단 한숨 돌린 것 같은데.”
박태 감독은 볼펜을 툭 내려놓았다.
대충 불길은 잡았으니, 그럼 이제 다음 순서.
“자수해라.”
유출한 놈이 누군지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안 일어날 테니까.
“추적하면 바로 나온다.”
책 대본 스캔이라면 배우들이나 그쪽 스태프들이겠지만, 이번에 인터넷에 올라온 건 파일이었다. 이건 제작 스태프 중 하나거나, 작가들 쪽이다.
“말 안 한다 이거지?”
기회를 주고 있지만, 컨테이너 안에 모인 스태프들은 고개만 푹 숙인 채로 있었다.
“그럼 뭐 경찰서에서 보자. 내가 다시는 이 바닥에서······.”
“잘못했습니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노랑머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대뜸 무릎을 꿇고 바로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야?”
“차에 뒀던 USB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감독님 잘못했습니다!”
두 손 닳도록 비는 그녀의 모습에 박태 감독은 이를 악물었다. 욕을 쏟아내도 모자라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얘기해야지!”
“잘못했습니다!”
눈물범벅인 스태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박태 감독.
두 사람의 모습에 다들 숨죽일 때였다. 컨테이너 문이 열리고 최재환이 들어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들어온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본 박태 감독의 미간이 천천히 펴졌다.
“감독님! 저희 왔습니다!”
“동태야··· 유선아?”
황동태와 반유선.
지금은 KIS를 이끄는 평피디지만, 작년만 해도 박태 감독의 손발이 돼 뛰어다니던 친구들이다.
“하도 전화가 안 와서 저희가 찾아왔습니다. 거 도와달라는 얘기 좀 하면 어떻다고, 연락이 없어요?”
능청 떨며 다가오는 황동태의 모습에 박태 감독 얼굴에 퍼졌던 붉은끼가 눈가로 몰려든다.
**
「2003년 6월 25일 수요일, 지에스엔터테인먼트」
-김 기자, 지금 배우 이시현 씨의 스캔들로 인해서 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고 하죠?
-아직까지 배우 이시현 씨의 스캔들이라고 확정이 된 건 없습니다. 하지만 S 일간지에서 ‘특급 톱스타 A’의 스캔들 보도를 예고했고, 여기에 사용한 실루엣 사진이 배우 이시현 씨의 입국 사진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렇다면 거의 사실이라고 봐야겠네요?
-현재 S 일간지에서는 금요일이면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김 기자, 지금 팬들이 배우 이시현 씨의 소속사인 지에스엔터테인먼트와 S 일간지 앞에 모여 있다는데 어느 정도인가요?
-어제는 1천 명 규모였지만, 오늘은 3천 명 규모의 팬들이 모여 침묵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팬은 금요일까지 지켜보자는 반응입니다. 지금까지 SBC······.
띡.
성 팀장의 손이 리모컨을 꾹 누른다.
TV 소리가 사라지자 이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블라인드를 살짝 제치고, 건물 앞에 가득 모인 팬들을 본다.
“시현 씨.”
이시현의 얼굴에는 씁쓸하면서도 체념 어린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성 팀장은 일부러 크게 미소 짓고 말했다.
“이거 별일 아니야. 수익 나누는 거야 뭐, 아시아 쪽만 건드는 거고, 또 좋게 생각하면 그동안은 스카이데일리에서 좋은 기사만 내줄 테니까.”
별의별 특집기사를 만들어서 이시현을 응원할 거다.
그래야 정찬성 사장의 통장이 빵빵해지지.
“그 쪼잔한 황 국장님이 지원해줄지는 몰랐지만, 다행히 촬영도 문제 없을 테고.”
“예.”
이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 팀장은 천장을 가리켰다.
“이제 올라갈 시간이다. 가요.”
대표실에는 차 대표와 박 상무, 정 이사, 스카이데일리 정찬성 사장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성 팀장의 눈에는 늙은 여우들로만 보였다. 한여름이었으면 납량특집 분위기라도 나지, 어중간한 날씨에 장마철 습기가 달라붙는 것처럼 온몸이 찝찝하다.
“인사해. 여기는 스카이데일리 정찬성 사장님.”
차 대표의 소개에 정찬성 사장은 넙데데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일어났다.
“반갑습니다. 정찬성이라고 해요.”
“이시현입니다.”
“이런 자리가 탐탁지 않겠지만, 우리 일이 이런 거라서 어쩌겠어요? 그러니 우리 다르게 생각하자고요.”
“뭘 다르게 생각하자는 거죠?”
이시현의 날카로운 질문에 정찬성은 당황해서 차 대표를 바라봤다.
“아이고 대표님, 시현 씨가 많이 화가 났나 보네요.”
“그럼 화가 나야죠. 나도 화가 나는데.”
“하하. 그러네요. 내가 이거 적진 한가운데서 내 편을 찾으려고 했네.”
정찬성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기사가 나가면 시현 씨가 손해 볼 거 뻔히 아는데, 우리라고 무조건 국민의 알 권리를 고집할 순 없다는 거죠.”
국민의 알 권리?
성 팀장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그리고 이건 종속관계 그런 게 아니에요. 서로 윈윈하자는 거지. 우리야 앞으로 시현 씨 밀어줄 거고, 혹 다른 데서 시현 씨 스캔들 터트릴 거면, 우리가 미리 알아내서 지에스에 언질 줄 거고.”
그가 계약서를 내민다.
“강요하는 거 아니니까 일단 찬찬히 읽어봐요. 선택은 시현 씨가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시현은 계약서를 보지 않았다.
“이 방법밖에 없는 겁니까?”
차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설명은 박 상무가 했고, 성 팀장이 옆에서 적당히 위로해줬으니,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을 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사인을.”
혹여 마음 바뀔까, 정찬성 사장이 서둘러 볼펜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시현은 볼펜을 건네받지 않았다.
“사인은 기자회견이 끝나고 하겠습니다.”
“기자회견? 굳이 기자회견까지 할 것 있나.”
“어차피 아니라고 밝혀질 거, 가능한 확실히 마무리했으면 좋겠는데요.”
“아니 그래도 사인은.”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다른 곳에서 터질지도 모르니까.”
“아이고, 대표님 상대하기도 벅찬데 시현 씨도 만만치 않네.”
내키지 않지만, 정찬성 사장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이시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표정을 보니 딴말할 것 같지도 않고.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
「2003년 6월 26일 목요일, 강남 N 호텔」
기자들의 눈은 스카이데일리 마영환 기자에게 달라붙었다.
“저 새끼는 어떻게 그걸 딴 거야?”
“독사 마영환, 역시 한 건 하네.”
“근데 이우정은 뭐했어? 이시현하고 친한 거 아니었어?”
“듣는다 들어.”
“니들도 이시현 마킹했지 않아?”
“했지, 그런데 뭐 나왔어야지. 다람쥐 쳇바퀴처럼 촬영장, 회사, 방송국만 돌던 친군데.”
“그러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순간 이동을 하면서 만난 것도 아니고, 거기다 이시현은 외국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오소리와 열애설이라니.
“둘이 잘 어울리기는 하잖아.”
“잘 어울려? 이시현 팬들 앞에서 그래 봐라, 울고불고 지금 난리도 아니다. 오소리 죽이겠다고 써놓은 플랜카드 봤어? 와 소름 돋더구먼.”
“난 솔직히 좀 시시하더라.”
“뭐가?”
“아니 이시현급 정도면, 좀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거 아니야? 오소리가 요즘 인기가 붙었어도 큰물은 아니지.”
기자회견장이 어느덧 시장통마냥 시끌벅적했다. 방송 3사까지 나와서 카메라 자리도 미워 터지고 있었다.
“오늘 저녁 뉴스는 죄다 이시현 내보내겠네.”
열애설이 터지고 사흘이 지났지만 지에스와 이시현은 아무런 코멘트도 않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기자회견을 자처했다는 건 열애설을 부인할 가능성이 크다.
“이시현이다!”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올라온 이시현에게 곧바로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이시현은 잠시 말없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맡겼다.
하얀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플래시에 파묻힐 정도였다. 결연한 표정, 허리를 숙이고 펴는 순간에도 표정은 변함없었다.
“이시현 씨! 열애설 사실입니까?”
“시현 씨! 오소리 씨와 얼마나 만나신 겁니까?”
“두 분 결혼 계획은 있으세요?”
기자회견인 만큼 어차피 모두 해명할 자리였지만 그새를 못 참고 질문들이 쏟아진다.
이시현은 쓴 미소를 머금고 준비된 단상에 앉았다.
마이크 앞에서 심호흡하는 그 모습에, 기자들의 소란이 잠시 가라앉는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른침을 삼키는 초연한 그 모습에 일부 여기자들은 안쓰러움에 눈살을 찌푸렸다.
“다들 저녁 드시고 오신 거죠?”
이시현이 애써 미소 짓고 물었다. 하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카메라 플래시뿐이었다. 이 미소가 내일 어떤 타이틀이 붙어 신문 1면을 차지할지 알 수 없다.
“너무 늦게 모셔서 죄송합니다. 지금이 6시 조금 넘었네요.”
심지어 지에스는 기자회견을 내일 한다고 했다가 오늘 한다고 급하게 알렸다. 그것도 불과 2시간 전에. 일부 신문사는 윤전기도 멈췄을 테고, 어떤 신문사는 다행히 내일 조간은 잡을 수 있었다.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정이냐, 부인이냐. 기자들의 눈이 쏠린다.
“열애 사실은··· 맞습니다. 좋은 사람과 연애 중입니다.”
인정이다.
“하지만 그 상대는 오소리 씨가 아닙니다.”
기자들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예?”
“뭐라고?”
“야, 지금 이시현 뭐라고 그런 거야?”
또다시 난리가 나자, 이시현은 제 입술을 핥고 말했다.
“저는 지금··· 프랑스에서 영화촬영 중인 클레어와 연애 중입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자들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휴대폰을 든 기자들, 노트북을 두드리는 기자들, 카메라를 쥔 기자들.
다들 이 새로운 소식에 머리가 정신없이 돌아간다.
어떤 기자는 두 사람의 스토리를 그리고, 어떤 기자의 머리엔 월드스타와 월드스타의 만남이란 주제를 가진 소설 한 페이지가 뚝딱 채워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중요한 건 전화.
“부장, 이시현이 할리우드 배우 클레어와 연애 중이랍니다!”
“진짜라니까요! 윤전기 멈추라고요!”
“맞다고, 오소리가 아니라 클레어래! 지금 당장 클레어에 대해서 뽑아놔 지금 당장!”
이 난장판 속에서 웃고 있는 유일한 기자는 단 한 명.
세러데이 서울 이우정 기자만이 미소를 머금고 이시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정찬성 사장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쩌렁쩌렁 울린다.
-이런 식으로 사람 물 맥일 수 있어요? 할리우드 여배우하고 스캔들? 이거 막가자는 거죠?
“정 사장님, 그만하시죠.”
-뭘 그만합니까? 내가 지금 제대로 물먹었는데!
“일단 나중에 다시······.”
-나중이 어딨어요? 계약은 이행하셔야죠. 나 이시현이랑 계약한 거 아닙니다. 대표님이랑 계약한 거지. 이번일 차 대표님이 주도한 거 이시현이 알게 되면···
정 사장의 협박에 차 대표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더 손해일까? 이 일 떠벌이면 그쪽 주머니는 다 털릴 텐데. 스캔들 약점 잡아서 거머리처럼 뜯어먹는 거 토해낼 곳 많을 텐데.”
-차 대표님!
전화를 끊어버린린 차 대표는 닫혀 있는 문을 보며 인터폰을 꾹 눌렀다.
“들어오라고 해.”
손을 떼자, 곧이어 이시현이 안으로 들어왔다.
“앉아.”
차 대표는 선반에서 양주를 꺼냈다. 크리스털 잔에 붓고, 이시현에게 내밀며 물었다.
“케이시가 시킨 거야?”
차 대표는 소파에 등을 묻고 이시현을 바라봤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궁금한 거?
“처음에 절 미국에 보내주신 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911테러 사건 이후 저를 다시 미국에 보낸 건 솔직히 이해가 안 가서요. 왜 그러셨습니까?”
코니아일랜드 콘서트 이후 국내외에서 이시현에게 관심이 급증하던 때였다. 그런데도 차 대표는 미국행을 흔쾌히 허락했다.
“훗.”
지금이 웃을 상황이 아닌데, 차 대표는 예상외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손에든 잔에서 술이 출렁인다. 보고 있으니 마치 기억이 술에 녹아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돈 버는 재미보다, 키우는 재미가 더 클 때가 있거든.”
빈 잔을 내려놓은 그는 이시현의 눈을 보고 말했다.
“어디까지 클지 보고 싶었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건 무슨 의미일까.
“오늘 회사에 오는데 미국에서의 투어가 떠오르더라고요. LA에서 출발해 뉴욕에 도착하기까지 버스의 덜컹거림, 더위, 멤버들의 투덜거림, 라디오에서 흐르는 수만 가지 목소리들이 엉덩이에 박혀 있는 기분···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제가 나가면 보세요.”
대봉투 하나만 덩그러니 놓고 이시현은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그 행동이 너무 절제돼 있어서 차 대표는 이마를 찌푸리고 지켜만 봤다.
“이게 뭐야.”
뒤집은 대봉투에서 쏟아진 서류들을 본 순간, 그는 눈을 부릅떴다.
PR비를 챙겨준 방송국 국장, 피디들 명단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 둔 것 같은 자료였다.
“어떻게 이걸······.”
서류에서 눈을 뗀 그는 닫힌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해가 안 되는데, 정말 말이 안 되는 건데, 답을 해줄 이시현은 이미 문을 닫고 사라졌다.
마치 저 문 너머, 다른 세계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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