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218화 (218/227)

<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1) >

「2003년 6월 23일 월요일, 청담동 L 카페」

“이 드라마, 처음에는 단막극으로 준비하셨다면서요? 주인공도 시현 씨가 아니었다고 하던데, 그 스토리가 궁금하네요.”

기자의 눈빛이 매섭다. 그가 손에 든 감색 수첩에 대체 뭐가 적혀 있을까를 궁금해하던 김은수 작가의 눈에 기자의 이름이 적힌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스카이데일리 마영환 기자.’

그 이름 한 번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기자들은 항상 조심 해야 한다. 질문에 담긴 속뜻을 모르고 대답을 하면 나중에 전혀 다른 결과로 돌아올 테니까.

“맞아요. 시현 씨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요.”

“왜죠? 같이 작품도 하셨잖아요?”

“아무래도 시현 씨는, 남자한테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외모가 곱잖아요?”

웃으라고 한 소리가 아닌데, 기자의 목젖이 눈앞에서 흔들린다.

“권창수라는 인물은 굴곡 있는 삶을 살았거든요. 먹을 것 하나에 주먹이 오가는 고아원 생활을 했고, 성인이 돼서는 복싱선수의 삶을 꿈꾸지만 그마저도 교통사고로 관두게 됐죠. 거기다 살인 용의자라는 멍에까지 짊어졌어요. 심지어 형사는 그의 무죄를 믿지 못하고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까지 보내게 되죠. 그리고 알츠하이머까지.”

김은수 작가는 담담히 권창수의 삶을 얘기했다. 가슴 아픈 존재. 한 인간에게 이렇게 많은 짐을 짊어지게 해도 되는지, 그걸 또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며 비운 와인이 마당 한편을 온전히 차지했을 정도니까.

“그래서 사실 성지훈 씨를 생각했어요. 예전에 815 특집드라마에서 인연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연기도 많이 늘어서 괜찮겠다 생각했죠.”

“아 그래요?

처음으로 듣는 얘기에 기자는 귀를 바싹 기울였다.

“그런데 지훈 씨가 군대에 가게 됐고, 지에스에서 역으로 저한테 제안했어요. 시현 씨가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죠.”

“아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거든요, 그래서 유가희 작가님과 얘기하다가 그럼 작가 3인이 한번 합심해보자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이야기도 커졌고, 캐스팅도 급물살을 타게 된 겁니다.”

지면에는 짧은 몇 줄로 나가겠지만, 그 과정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 했다.

성지훈에게 제안했더니 군대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이어 지에스 관계자가 찾아와서 이거 이시현이 하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했을 때는 놀라서 말문이 막혔으니까.

‘우리 오빠’의 신인배우 이시현과 지금의 이시현은 차원이 다른 사람 아닌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후 지에스에서 중국발 투자까지 끌어와서 제작을 맡고, KIS 박태 감독이 퇴사 후 메가폰을 잡는 과정의 매 순간이 드라마였다.

“시현 씨가 소화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시현 씨의 삶은 거친 사람과 거리가 있잖아요?”

“글쎄요. 쉬운 삶이 어딨겠어요. 평온한 삶이 어딨겠어요. 제아무리 잔잔해 보이는 바다도 수없이 많은 태풍을 겪어 그 자리에 있죠. 태풍이 불면 비바람도 몰아치고. 시현 씨라고 그 비바람 한번 안 거쳤겠어요? 잘할 거예요.”

“작가님이 시현 씨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시네요.”

“기자님도 아시잖아요. 시현 씨가 지금까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하하. 충분히 알죠.”

고개를 끄덕인 기자는 수첩을 덮고 미소 지었다.

“오늘 인터뷰 감사합니다.”

**

‘세상, 최고의 아빠’는 순조롭게 촬영이 이뤄지고 있었다. 1년이 넘는 시간을 준비한 만큼 배우들의 연기와 팀워크도 흠잡을 데 없었고, 편성이 9월인 만큼 여유도 있었다.

“아휴, 진 빠진다.”

오케이 컷이 떨어지자마자 카메라를 벗어난 중견배우 백성규가 의자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선생님이 엄살피우시면 어떻게 해요.”

수더분하게 웃는 스태프에게 백성규는 질린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시현이가 너무 집중하니까, 나도 힘 들어가잖아. 박태 감독은 또 어떻고? 봐라, 나 이마에 경련 일어난다.”

“아휴, 그나마 지금은 행복한 거죠. 백암산 촬영 때는 산에서 하루에 스무 개를 찍었는데.”

그때 스태프들은 박태 감독이나 이시현을 보며 둘 다 미쳤다고들 했다.

“야 그 얘기 뻥 아니야? 그게 말이 돼?”

“아휴 말도 마요. 새벽이 왔는데, 이게 촬영이 끝난 건지 시작인지 헷갈릴 정도였다니까요?”

곁에 있던 스태프도 끼어든다.

“그때야, 다들 미쳤었지. 일주일 만에 2회 분량 촬영해서 편집에 방송까지 해야 했는데. 그게 아침드라마도 아니고, 폭파 씬도 찍어야지, 심지어 시현이는 촬영 며칠 전에야 합류했고.”

그뿐인가. 폭우에 벼락까지 쏟아지는 바람에 다들 말은 안 했어도 사고 한번 터지겠거니 했을 만큼 위험한 현장이기도 했다.

“그나마 그때 시현 씨가 몸을 사리지 않고 움직여줘서 막힘없이 갈 수 있었죠.”

“맞아, 난 아직도 기억나. 우리 촬영 끝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시현이 몸 확인하는 거였잖아? 그러면 꼭 어디 하나 상처 있었는데.”

스태프들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촬영이었으니까.

근데 또 달리 생각하면 그랬기 때문에 좋은 결과물이 나온 걸 수도 있다.

“스텝 촬영 때는 어땠어요?”

노랑머리 여자 스태프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백성규는 옆에 있는 서범진에게 턱짓으로 대답을 떠넘겼다.

“우리 때는 다들 즐거웠죠.”

벌써 두 해가 흐른 촬영 현장이다. 백성규도 낄낄거리며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스탭들 배우들 사이가 좀 좋았어야지. 난 그렇게 회식 많았던 현장은 처음 봤다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드물던 사전제작 드라마였기에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가 있는 현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회식도 잦았고.

“전 그때 시현 씨한테 정말 많이 배웠어요. 현장에서 어떻게 처신 해야 하는 건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 건지, 배려가 무엇인지.”

현장에서는 상대 배우에게 많은 걸 배운다. 특히 닮고 싶을 만큼 멋있는 사람을 보면 더욱 많이 배운다. 부족해서 부끄럽고, 더 잘하고 싶은 욕심에 불타오른다.

서범진은 지금이야 차광재라는 굵직한 조연을 맡았지만, ‘스텝’에서는 단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역이었다.

사실 현장이 분주히 돌아가다 보면 다른 사람을 챙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러다 보니 단역이나 엑스트라들은 스태프들에게 있어 촬영 소품보다 못한 존재일 때가 많다.

그런 현장에서 이시현은 늘 다가와서 인사를 하고, 말을 걸어주고, 추울 때는 핫팩도 나눠주면서 사람들을 챙겼다. 회식현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때도 시현 씨는 스타였잖아요.”

어디를 가나 팬들이 몰려들 정도로 이시현이 국내에서 한창 인기몰이하는 때였으니, 그런 스타가 먼저 다가와서 소주 한 잔 따라주고 잔을 부딪쳐주니 그 기억이 어딜 가겠나.

“야, 어째 우리는 얘기만 하면 이시현으로 빠지냐.”

“그럼 선배님 얘기합니까 칙칙하게?”

“내가 어때서 임마?”

한바탕 웃음 뒤에 그들의 시선은 다시 한곳에 모였다. 재작년 그때처럼 이시현이 진동원을 챙겨주고 있었다. 꼼꼼히 대본을 짚어주는 모습을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잘생겼지, 연기 잘하지, 인성 좋지. 에잇, 다 가졌네 다 가졌어.”

백성규 덕에 웃음이 끊이질 않는 현장이다.

**

촬영을 앞두고 있지만, 오소리는 눈을 감지도 딱히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이시현을 바라보면 될 뿐이었다.

작년에 캐스팅고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상상했지만, 역시 그는 권창수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낡은 셔츠도, 밑단이 해진 청바지도.

사실 촬영에 앞서 걱정한 배우들이 많았다. 이시현이 워낙 스타이다 보니 부담이 된 부분도 있었고, 드라마가 전반적으로 무거운 분위기라서 촬영장도 그 분위기 따라갈까 봐서였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되면서부터 그런 우려는 말끔히 지워졌다.

이시현은 늘 먼저 배우들에게 다가갔고, 실제 마을에서 주거 중인 현지인들과도 살갑게 지냈다. 예전처럼 말이다. 약간 문제라면 촬영이 들어가면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상대 배우들도 연기에 힘이 들어가서 NG가 몇 번 나는 정도.

동물병원 원장이 권창수에게 느낀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거친 모습, 불행한 삶, 주위의 소문들 같은 불안 요소들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시작이 어쨌든 그 끝에서는 그를 놓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하게 된다. 알츠하이머란 불치병에 걸린 남자를 사랑하는 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좀 전에 유 작가는 그녀에게만 엔딩을 귀띔해줬다.

알츠하이머 증세가 심해진 권창수는 점점 더 자신을 잃어가는데, 더 잃을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쯤 그는 미래와 함께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 캐나다로 떠난다. 그것이 꿈이었으니까.

그런데 마치 기적처럼 그곳에서 기억이 돌아온 권창수는 오래전 사두었던 반지의 존재를 깨닫고 미래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이었다.

‘권창수는 처음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으니까 항상 쓸쓸한 눈빛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강미래는 끝까지 희망을 품고 있어야 해.’

유 작가가 그 점을 신신당부했다.

잔인한 일이다. 비록 동물병원 원장이라지만 강미래는 의학 지식을 갖춘 여자인데, 변할 리 없는 지식과 희망 사이에서 그녀는 희망을 택하고 권창수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

‘3년 전 여름··· 오빠, 우리가 함께 드라마 촬영을 할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녀가 바이바이 CF를 양보했던 순간, 이시현에게 고백했던 순간, 이후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던 순간···

‘그러네. 우리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네.’

그 모든 순간이 이어진 끝에 두 사람은 여기에 함께 서 있다.

툭.

“소리야, 이제 오소리가 될 시간이다.”

유 작가의 손이 등에 닿았다. 기분 좋은 온기가 퍼진다. 그래서 한발 내딛는데, 스태프 하나가 헐레벌떡 감독에게 다가간다.

“감독님!”

스태프가 들고 온 신문을 내밀었는데, 순간 박태 감독의 눈이 동그래졌다.

**

[2003 연예인 인지도 & 관심도 순위, 종합 1위 이시현]

-2001년 이후 3년 연속···

[현장르포] ‘세상, 최고의 아빠’ 촬영 현장을 다녀오다!

-충남 태안으로 향하는 새벽길은 우중충한 회색빛이었다. 촬영 현장에 먼저 도착한 이시현의 팬들과 동료 기자들···

[사건] 촬영을 마친 배우들의 퇴근 시간

-배우들이 스태프의 도움을 받으며 현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두 번째 사진은 이시현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팬들과 기자의 모습···

[TV이슈] 시현 씨, 그거 아세요? 당신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 밤 11시 5분 ‘세상, 최고의 아빠’를 촬영 중인 충남 태안에 방문해···

[리뷰] 드라마 ‘세상, 최고의 아빠’ 주요인물 6인 분석

-본지는 화제의 드라마 세상, 최고의 아빠를(이하 세최아) 낱낱이 분석했다···

[돋보기] 거친 남자 권창수와 도시 여자 강미래의 만남!

-권창수로 완벽히 변모한 이시현이 동물병원 가운을 입은 오소리를 바라보고 있다. 두 사람은 극 중 연인···

“요즘 다 이 친구죠. 이시현 사진 한 장만 실려도 판매 부수가 확 오르더라고요.”

하나같이 이시현으로 도배 된 편의점 가판대 앞에서 지갑을 꺼내 든 남자에게 편의점 주인의 살가운 눈길이 닿았다.

“그래요?”

“월드스타라잖아요. 젊은 친구들은 죄다 그 사람 팬이고.”

“설마 그 정도까지야 할까요.”

신문를 집어 카운터에 올려놓자, 계산하는 동안에도 주인은 신나게 떠들었다.

“언제 한번 실물로 본 적 있거든요. 키도 훤칠하고, 머리는 또 얼마나 작은지 고래 등짝에 올린 참외 마냥 작았다니까요?”

“하하.”

“아휴, 정말이라니까요. 요 앞에 그 친구 소속사가 있는데, 돈을 긁어모으는지 작년에는 건물 때려 부수고 다시 짓더라니까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거리는 온통 이시현의 포스터와 노래로 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인기가 놀랍다. 반응은 곧 수익으로 이어지는 법. 분명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을 거다.

“수고하세요.”

편의점을 나온 남자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다.

[지에스 성 팀장]

눈에 익은 그 이름을 보면서 통화 버튼을 꾹.

“안녕하세요, 성 팀장님!”

-마 기자님, 지금 어디세요?

“저야 지금 취재 중이죠.”

능글능글 웃음에 지나가던 여자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스쳐 간다. 그럼에도 마 기자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계속 말했다.

“좀 전에 편의점을 들렸는데, 신문이며 잡지며 이시현 얘기 없는 게 없어요. 하긴 그럴 수밖에 없죠. 이시현은 지금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마 기자님, 지금 우리 농담할 시간 없는 것 같은데요?

“아휴, 알았어요, 알았어.”

미소 지우고.

“이거 꽤 오랫동안 준비한 기사에요. 잠복근무도 하고, 길에서 선잠도 자고. 아시잖아요? 잠복근무 한번 하면 허리가 휘어. 내가 오죽하면 한방치료를 받아요. 그 뭐야, 벌침? 그거 효과 괜찮던데?”

-우리 마 기자님 또 없는 패 돌리신다. 특급 톱스타 A? 이렇게 말장난으로 기사 내실 분 아니잖아?

“하하. 하여간 성 팀장님은 증거 너무 좋아해. 그럴줄 알고 내가 성 팀장님 이메일에 사진 하나 보냈는데, 아직 못 보셨나 봐요?”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사이, 마 기자는 잠시 도롯가 난간에 기댄 채 그녀가 메일을 확인하기까지 기다려 줬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전화 드릴게요. 일단은 홈페이지 기사만이라도 내려주세요.

“못 내리죠. 그럼 쫄리는 것 같잖아. 그리고 저한테 전화 않으셔도 됩니다. 아시겠지만, 이거 윗선에서 처리할 일이라서.”

이게 어디 보통 스캔들인가.

마 기자는 씨익 웃고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화창한 하늘, 누군가는 저 하늘이 몰고 올 여름 태풍을 걱정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꽤 크게 보셔야 할 겁니다. 대중은 쉽게 마음이 변하는 법이니까.”

<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1) > 끝

ⓒ 고고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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