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217화 (217/227)

< 세상, 최고의 아빠 (3) >

무섭게 쏟아지던 장대비가 그치고 비구름이 갠다.

담벼락 아래 민들레에 햇살 한줄기가 내리자 촬영팀도 다시 바빠졌다.

“스케줄 표하고 1부 대본 줘봐.”

“여깄습니다.”

박태 감독은 조연출이 내민 대본을 서둘러 넘겼다.

이번 드라마는 최종고만 남겨놓고 15회차 대본까지 모두 탈고된 덕에 촬영 스케줄을 잡기가 수월한 편이었다. 배우들은 뒤의 흐름을 알 수 있어 감정의 흐름을 잡기 좋고, 촬영팀은 널뛰기 촬영 때문에 흐름이 끊기는 걸 방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오후에 1부 마지막 씬 연달아 가죠.”

후딱 끝내자는 제안에 촬영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태 감독은 조연출에게 대본을 돌려주며 물었다.

“창수 어딨냐?”

“은경이랑 같이 있습니다.”

“천사 임마. 이제부터 현장에서 배우 이름 부르는 사람은 벌금 만원이다.”

회식비 늘린다는 소리에 스태프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모니터 앞에 모여 있는 배우들이 혀를 내두르는 소리가 먼저 들린다.

“와 이거 진짜 선명하네.”

이제부터는 High Definition. 즉 HD 시대.

높은 해상도와 선명한 화질을 담을 수 있는 카메라에 이시현과 오소리가 잡혔으니 영화가 따로 없었다.

“나 메이크업 다시 해야겠는데?”

“이거 모공도 잡힌다며?”

“야, 실제로 보니 장난 아니네. 기술 대단하네.”

배우들이 너도나도 감탄하며 물러났지만, 감독들은 마냥 기쁜 얼굴은 아니었다.

일단 HD 카메라가 익숙지 않아 포커스 맞추는데 까다로운 데다 인물과 배경의 노출차가 커서 어느 한쪽에 포커스를 맞추면 다른 한쪽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양의 조명이 필요했다.

“아휴, 카메라가 왜 이렇게 지랄 같냐.”

촬영 감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박태 감독이 낄낄웃으며 말했다.

“왜, 그래도 색상 끝내주잖아.”

바다 위에서 출렁이는 붉은 노을만 담아도 충분히 시청료 값어치는 할 터인데, 실제로 잡힌 영상미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거기다 카메라 업체에서 이시현이 촬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술진까지 지원해준 덕에 나름 수월하게 촬영을 하고 있었다.

“이거 방송되면 사람들 충격 좀 먹겠는데요?”

조연출이 인중을 길게 늘어트린 채로 모니터를 들여보며 속삭였다.

“이시현, 아니 권창수 실물 느낌 제대로 나잖아요.”

“실물 느낌?”

조명 감독이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식사들 안 하세요?”

이시현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스태프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러자 조명 감독이 모니터와 이시현을 번갈아 보더니 새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 느낌.”

**

“야 반사판 더 가져와!”

스태프들이 촬영 준비에 여념 없는 사이 감독은 배우들에게 디렉션을 하는데 여념 없었다.

1부의 엔딩은 갑자기 사라진 천사를 찾는 과정에서 강미래가 권창수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씬인데, 믿고 쓰는 배우들이니 디렉션이라기보단 타협점을 찾는 과정이었다.

“이번 씬에서는 최대한 담백하게 가자. 표정 강하게 가지 말고 차분하게 말이야. 근데 약간 좀 티격태격하면서 재밌게.”

“예.”

“어차피 인물들 사연 풀어가다 보면 시청자들 공감하니까, 굳이 억지 신파 만들려고 힘 안 줘도 돼.”

권창수가 아픈 천사를 데리고 병원에 갔을 때와는 대조되는 배경이자 분위기다. 몰아치는 빗속이 아닌 노을 지는 해안가 산 중턱이고, 거친 숨소리 대신 고요한 숨결이 필요한 씬이었다.

“그럼 들어갈까?”

배우들이 얼추 준비된 것 같아서, 박태 감독은 미소를 끄덕이고 카메라 밖으로 빠졌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슛이 떨어지자마자 화가 잔뜩 난 강미래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도 대충 들어서 알고는 있어요. 아무리 친딸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잖아요? 키우는 게 무리일지는 몰라도 지켜 줄 수는 있는 거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나 몰라라 해요? 애가 없어졌다잖아요?”

그녀의 시선이 닿은 권창수의 등은 화려한 카바레 입구의 네온사인과 달리 어둡고 축 늘어져 보였다. 그 등에서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외면하고 뒤돌려는데,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따라와요.”

“예?”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흠칫했지만, 가지 말까 하는 망설임은 그것 나름대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에 그녀는 힘겹게 발을 내디뎠다.

카바레를 벗어난 권창수는 두 손을 주머니에 꽂고 부지런히 앞서 나갔다. 발걸음이 빠른 편은 아니었다.

“저기.”

얼마 걷지 않아 강미래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냐고 물을 참이었다.

이사 온 지 이제 겨우 사나흘이나 됐을까.

권창수가 가는 길이 산으로 가는지 바다로 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 상태로 꼼짝없이 제주도로 끌려가도 모를 판이었다. 더구나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어디서 이리로 왔는지,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만 물읍시다.”

권창수의 등에서 굵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어떤······.”

“그쪽이라면, 천사를 키울 수 있겠습니까?”

섣불리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냉정하게 얘기하면 못 키우겠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여자와 남자의 경우는 다르지 않냐고 볼멘소리나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혼인신고가 돼 있고, 그 덕에 생판 남인 아이가 자신의 호적에 올랐으니까. 그럼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수많은 감정의 기복을 권창수는 짧은 질문으로 그녀에게 깨닫게 하고 계속 앞서 나갔다.

“도대체 어디 가는 거예요?”

“내키지 않으면 그냥 되돌아가도 됩니다. 뭘 걱정하는 겁니까?”

멈춰선 권창수가 그녀를 돌아봤다. 무심한 시선이 닿자 강미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느낌일 뿐이겠지만 카바레에서부터 온전히 그의 페이스에 휘둘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요, 가요, 가!”

괜히 오기가 생긴 구두 굽을 흙바닥에 쿡쿡 찍어가며 그를 지나쳐 앞장섰다.

“어디 갑니까?”

뒤돌아보니, 권창수는 방향을 틀어 그녀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컷!”

황당해하는 오소리의 모습에서 다시 컷이 떨어졌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씬인데 강미래의 표정 덕에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계속 갑니다!”

액션.

“성질 더럽고 매너 없고 예의 없는 사람 같으니!”

강미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을 권창수가 들을 수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퍼부으며 그를 뒤쫓았다.

나뭇가지들이 머리카락에 걸리고, 갑자기 나타난 새의 날갯짓에 서너 번 정도 경기를 일으키다 보니 어느새 그의 뒤꽁무니에 바싹 붙은 격이 됐다.

언제 끝날지 도통 알 수 없던 길은 권창수의 움직임이 멈추자 끝이 났다.

그곳에 천사가 있었다.

자동차 두 대 정도 들어설 공간에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아이가 누워 있었다.

“천사야.”

아이는 듬성듬성한 잔디 위에서 자고 있었다. 새근새근. 작은 코에서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권창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 아래는 어둠이, 하늘 꼭대기에서는 불기둥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바닷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 언덕배기였다.

오는 동안 어둠에 익숙해진 그녀의 눈은 저 멀리 해안가 시장을 수놓은 가로등 불빛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찰랑거리는 파도와 언덕의 경사까지도 선명히. 그것은 절경이었다.

“여기에. 이 녀석 엄마가 자고 있어요.”

넋을 놓고 절경을 보던 강미래는 권창수를 다시 돌아봤다. 그는 어느새 천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잠에 취한 아이의 포근한 모습과는 달리 그는 너무 쓸쓸한 표정이었다. 세상을 달관한 듯한, 바꿀 수 없는 현실들에 순응한 얼굴이었다.

“자고 있다고요?”

그녀의 눈 어디에도 무덤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은 아니어도 어렴풋이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이곳에서 소라, 천사의 엄마가 바다를 향해 떠났을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딸은 엄마가 그리워 이곳을 찾아와 잠든다.

왔던 길을 되돌아오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권창수는 아까와는 달리 부지런히 걷다가도 이따금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아마도 천사를 생각해서인 것 같았다. 천사가 깨지 않게, 흔들리지 않게. 어쩌면 깨면 귀찮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했지만.

“그래도 곁에서 돌볼 수는 있잖아요. 언제가 헤어지더라도, 그동안은······.”

그녀가 조심스레 못다 한 말을 이었다. 뭔가를 가슴에 담아 두면 안 되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계속되는 침묵에 가슴 한편이 답답해서였다.

“마음속에 그 언젠가는이라는 걸 가지고 아이를 대해도 됩니까?”

권창수는 묵묵히 걸으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무슨······.”

“아이의 눈을 보고, 아이와 밥을 먹고, 아이의 옷을 사고, 그러는 동안에도 언젠가는 헤어지더라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권창수의 목소리는 다소 자조적이었다. 이유를 알 리 없는 슬픔이 묻어난 목소리였다. 엄마 잃은 아이는 여전히 그의 품 안에서 곤히 자고 있다. 어쩌면, 꿈속에서 지금 엄마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어차피 떠나 보내야 한다면······.”

강미래는 무슨 말이라도 더 해볼까 했지만 그냥 포기해 버렸다.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했지만 이런 것은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 배울 수도 없는 것이다. 그저 상식선에서 생각하고 답을 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답이란 것도 결국엔 멋대로 떠드는 추상적인 얘기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졸지에 애 아빠가 되었고, 그래서 천사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그 어느 하나 타인인 그녀가 그 마음을 헤아릴 순 없을 것이다. 이해하는 척할 뿐이었다.

권창수는 묵묵히 외길을 내려와 지난번 천사와 헤어진 길목에서 멈췄다. 우측으로 더 가면 그녀의 병원이 나오고, 좌측으로 가면 제니란 여자의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저기······.”

겨우 입술을 열었지만, 그가 좀 더 빨랐다.

“떠나는 것과 버려지는 것은 다른 겁니다.”

옹알이하던 그녀의 입술은 그 상태로 멈춰 버렸다.

‘떠나는 것과 버려지는 것은 다른 겁니다.’

어떻게 그런 표정이 나올까.

진동원은 이시현의 연기를 보고 나서 감탄하기 바빴다. 초월했다고 해야 하나. 체념했다고 해야 하나. 이시현의 표정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원 씬 원 테이크,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 보니 더 대단했다. 카메라가 멈췄다 돌아가면 보통은 표정이나 행동이 튈 수밖에 없는데, 이건 뭐 게임 저장파일 불러들이는 것도 아니고 너무 완벽하게 이어져서 기가 막힐 정도니까.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배우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야 ‘이시현이 그렇게 잘한다며?’ 하고 쳐다봤지, 이제는 제 걱정들 하기 바빴다. 경력이 있는 배우들은 그 경력 탓에, 그마저도 없는 배우들은 쫄려서.

‘하지만, 나 진동원이라고.’

진동원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위로 붉은 노을과 흐릿한 달이 보인다. 마치 달빛을 본 늑대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흥분과 알 수 없는 고양감이 머리끝에서 맴돈다.

그래, 이시현도 첫 촬영에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는데 못할 것 있나. 대사도 딱 한 줄. 보여주는 거다. 스태프들에게, 이시현에게, 여배우들에게.

진동원은 대본을 다시 들여다봤다.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권창수를 마주치고 인사하는 씬.

‘형, 오셨어요?’

이 한 줄.

이걸 수백 번 읊고 있었다. 자신 있다.

“송범진 뭐하냐!”

“예! 준비됐습니다!”

박태 감독의 외침에 진동원이 카메라 안으로 총알처럼 달려갔다.

“잘 들어······.”

감독의 디렉션이 귀에 콕콕 박힌다.

“너 왜 이 씬 마지막에 찍는지 알아?”

집중한 진동원의 모습에 박태 감독은 입맛을 쩝 다시고 말했다.

“너 NG 많이 날 테니까.”

박태 감독이 껄껄웃으며 물러났지만, 진동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전의가 불타고 있었다.

‘형, 오셨어요?’

‘형, 오셨어요?’

‘형, 오셨어요?’

준비는 끝났다.

“액션!”

흐릿한 공기를 뚫고 걸어오는 창수가 보인다. 빈 담배 한 대를 입에 문 그의 등에는 붉은 노을이, 그의 머리카락에는 바닷바람이 달라붙었다. 통 큰 카고바지와 색바랜 티셔츠가 펄럭인다.

“감독님.”

“어?”

조연출의 속삭임에 박태 감독은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컷을 외칠 생각도 못 하고 잠깐 빠져 버렸다. 그도 그런 게, 저 녀석이 대사를 안 하니까.

“저거 아주 넋이 나갔구만.”

하긴. 저게 진동원 탓인가.

남들 드라마 찍을 때 혼자 화보 찍는 저놈 탓이지.

“다시!”

< 세상, 최고의 아빠 (3) > 끝

ⓒ 고고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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