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최고의 아빠 (2) >
‘7년 전 내 딸이 죽었다.’
이야기는 여학생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육교 아래서 차갑게 식어간 여학생, 용의자 권창수.
7년이 지난 현재, 창수에게 그때 일은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억울한 누명이 아픔과 상처를 주었지만 이미 벌어졌고 지나가 버렸다. 하지만 딸의 아버지인 한 형사는 다르다. 둘은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한 사람은 과거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으며, 한 사람은 현재를 버틸 뿐이다.
“시현아. 거의 다 왔다.”
강 팀장 손이 대본 위에 살짝 올라왔다.
차는 충남 태안에 있는 촬영장으로 향하고 있다. 제작진이 섭외한 촬영지 중 가장 넓은 데다 카바레 세트장까지 지어진 촬영지다.
“비가 올 것 같네요.”
차창 너머 비구름이 보이니 마음이 바빠진다. 고사도 지내야 할 테고, 배우들과 안면도 터야 할 테고. 첫 촬영일이니만큼 해야 할 게 많다.
하지만 내 가슴에 꿈틀대는 것은 걱정보다는 설렘이다.
이제 마음껏 권창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 한편이 뜨거워진다.
도대체 권창수는 어떤 놈일까.
대본을 만진 이후부터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7년 전의 사건, 여학생의 죽음, 불운 같은 과거의 조각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지만 그는 과거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여태 그러했듯 하루의 일을 마치고 맥주 한 캔에 오늘도 아무 일 없이 지났음을 확인하는 삶일 뿐이다. 성격 참 무뚝뚝한 놈이지.
촤르르.
대본을 펼쳤다.
2# 동물병원 / 밤 (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미래는 천둥과 함께 들려온 낯선 소리에 잠에서 깬다. 불길함 속에서 병원으로 내려온 그녀는 문밖에서 비를 맞고 있는 남자를 보게 된다. 번개가 내려치고, 남자의 품에 안긴 아이를 확인한 그녀는 서둘러 문을 연다.
영양실조에 걸린 천사를 데리고 동물병원을 찾아가는 씬이자, 권창수와 강미래의 첫인상이 만들어지는 씬이다.
거칠고 투박한 남자 권창수와 도시에서 온 여자 강미래.
이제 곧 만날 것 같다.
**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박태 감독 얼굴이 복잡미묘해졌다. 우천 씬이라도 컨트롤이 안되는 대자연은 사양이기 때문이다. 뭐 ‘우리 오빠’ 촬영 때 질리게 촬영해봤으니 문제는 없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거 밀지 좀 맙시다!”
“안 밀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먼저 왔거든요?”
“여러분 싸우지 마시고요! 거기 선 넘지 마세요!”
“싫어요! 오빠 못 보면 아저씨가 책임질 거예요?”
촬영지 입구에 기자들과 팬들이 진을 치는 바람에 도무지 질서란 걸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우리 오빠’ 촬영 때는 성지훈 팬들이 엉망을 만들어놓더니, 지금 상황은 오히려 그때가 그리울 정도다.
“세상에, 대한민국 카메라를 다 모였나 봐요.”
조연출이 혼이 나간 얼굴이다.
“얘기 잘 끝났어?”
“예, 뭐 알겠다고는 하는데······.”
기자 대표와 팬클럽 부회장과 밀고 당긴 끝에 마을로 들어오지 않기로 했지만, 이시현이 나타나면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 백 프로다. 저 좀비 떼들.
유가희 작가가 입에 문 담배를 흔들며 속삭였다.
“다들 이시현 보면 깜짝 놀라겠네.”
“놀라야죠. 그러라고 꽁꽁 감춘 건데.”
귀국 전부터 이시현 측은 카메라 노출을 자제해왔다. 어디를 가도 모자와 마스크는 필수였다. 귀국 후에도 일절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준비했을지는 몰랐는데.”
박태 감독은 얼마 전 오디션 장소에 찾아온 이시현을 떠올렸다. 그동안 전화통화를 하면서 제대로 준비하고 있구나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곤 깜짝 놀랐다.
권창수였으니까. 뉴욕에서 온 이시현이 아니라, 해안가 마을에서 방금 막 서울에 올라온 놈이 눈앞에서 꾸벅 인사하는데 어떻게 안 놀래.
“안녕하십니까!”
생각에 빠진 박태를 향해 말끔하게 생긴 친구가 빗속에서 허리를 꾸벅했다. 송범진 역의 신인배우 진동원이었다.
“야, 거기 있지 말고 들어와.”
“예!”
빗물을 밟고 한달음에 들어온 진동원은 동물병원 세트장을 마냥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준비 열심히 해왔어?”
“예! 열심히 준비해왔습니다!”
진동원은 우렁찬 대답을 하고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비 때문에 목소리가 안에서만 맴돈 탓에 다들 인상을 쓴다. 오소리만이 미동도 하지 않고 대본을 보고 있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 줄만이 살짝 흔들린다.
“안녕하세요.”
옆에서 불쑥 손이 들어왔다.
동물병원 간호사이자 강미래의 사촌 동생 남세영 역의 고우희가 반듯이 편 손을 한 번 더 뻗었다.
“아, 안녕하세요, 송범진 역의 진동원입니다!”
다른 배우들이야 대본 리딩을 통해 서로 얼굴을 익혔겠지만 진동원은 오늘 처음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듣기로는 이시현도 대본 리딩에 참가하지 않았었다고 했지만, 비교할 수 없는 상대다.
“송범진 역에 대체 누가 오나 했더니만, 이렇게 멋있는 분이 오셨네요?”
호수처럼 맑은 눈이 눈앞에서 기울자 진동원은 당황해서 뒷머리만 긁적였다.
‘오소리에, 고우희까지. 아, 슬기도 있었지.’
촬영 막바지에 캐스팅돼서 쪽대본이나 받은 신인배우는 앞에서 고개도 못 들 정도로 대단한 여자들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예!”
그래도 고우희와 인사를 하니 긴장이 살짝 풀린다.
감독의 진중한 얼굴도, 유가희 작가의 범접할 수 없는 기운도, 촬영감독의 찌푸린 얼굴도 왠지 정이 간다고 할까.
“근데, 시현 오빠 보셨다면서요?”
“예, 오디션 볼 때 잠깐 오셨거든요.”
“그래요? 어때요?”
“뭐가요?”
“여전히 잘생겼냐고요.”
피식 웃는 고우희의 모습에 진동원은 입술을 머뭇거렸다.
“뭐야. 뭘 그렇게 고민해요? 농담이에요, 농담.”
“그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시현을 봤을 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설명을 해주려 잠깐 고민하는데, 갑자기 번개가 내려쳤다.
바로 옆에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엄청난 소리였는데··· 진동원은 눈을 깜빡인 뒤에야 그게 번개가 아니라 팬들의 함성임을 깨달았다. 세상에나. 이시현이다. 전쟁이다. 난리가 났다.
‘이런 거구나. 스타가 등장한다는 게.’
기자들, 팬들, 구경 온 사람들이 한데 뒤엉킨 가운데 여러 대의 검은색 밴이 멈춰섰다. 동물병원 안에서 비를 피하던 배우들은 너도나도 나와 까치발을 든다. 딱 한사람 오소리만 빼고.
“어? 어?”
“뭐야?”
“세상에······.”
차에서 내린 이시현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 고우희 역시도 입을 쩍 벌렸을 정도다.
이시현 하면 대표적인 것이 하얀 피부와 부드러운 미소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시현은, 아니 이시현은 여기 없다.
**
날림 공사하듯 고사 지내고 배우들 상견례까지 끝냈다.
“와. 독한 놈들.”
마침내 첫 삽을 앞두고 박태 감독은 넋 놓고 하늘만 쳐다봐야 했다. 헬기 때문에 바로 촬영을 들어갈 수가 없어서였다. 이시현 찍겠다고 헬기까지 띄운 걸 보면 혀를 내두를 정성이다.
조연출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해결하는 동안 배우들을 살폈다. 이시현과 오소리는 동선을 한번 맞춰보고 떨어져 있었다.
극 중 로맨스 라인이지만 아직은 초반이니만큼 거리를 두는 모습이었다. 뭐 감정씬이야 둘이 알아서 잡을 테니 걱정은 없었다.
문제는 아역배우와 이시현인데, 극 중 천사와 권창수는 부녀지간이다. 다만 권창수는 천사를 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칠고 차갑게 대한다. 그러다 서서히 마음을 주면서 변화하는데.
‘뭐 이시현이 잘 끌고 가겠지.’
충분히 신뢰가 되는 배우니까.
“감독님! 헬기 치웠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조연출의 보고에 현장이 분주해졌다. 오소리는 동물병원 계단에서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었고, 분장팀은 아역배우 신은경에게 물을 붓기 시작했다. 이시현에게도 무리 지은 스태프 떼가 달라붙었다.
첫 씬은 영양실조로 쓰러진 천사를 품은 권창수가 동물병원에 무작정 찾아온 씬이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흠뻑 젖은 상태.
“세상, 최고의 아빠 촬영 들어갑니다!”
조명, 카메라, 붐 마이크를 쥔 스태프도 스탠바이.
숨죽이는 사람들, 심호흡하는 배우들, 슬레이트를 쥔 스태프의 카운트 다운.
“권창수 준비됐습니까?”
박태 감독은 신은경을 품에 안고 비를 맞고 있는 이시현을 불렀다. 뭔가 문제가 있는지 눈을 감고 있다.
“시현아!”
재차 부르기 무섭게 이시현이 눈을 떴다.
“준비됐습니다.”
낮은 목소리, 지친 눈빛, 권창수의 일그러진 표정이 단번에 카메라에 잡혔다.
유 작가와 스태프들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비치자, 박태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액션!”
첫 씬, 첫 테이크가 지금 막 시작됐다.
“애가 식은땀을 흘리고 시름시름 앓고 있어요.”
이 새벽 찾아온 불청객은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뾰족한 턱에 고인 빗방울이 어김없이 아이의 얼굴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이봐요! 빨리 애 안 보고 뭐 합니까?”
“아니 이보세요, 애가 아프면 119를 불러야죠.”
망설이는 강미래를 대신해 남세영이 나섰다. 잠긴 목소리로 남자를 꾸짖고 짜증을 뱉으면서, 그러면서도 소파에 옮긴 아이의 이마에 서둘러 손을 얹었다.
“세상에, 열나는 것 봐.”
급한 대로 비에 젖은 아이의 몸을 닦으려 수건을 찾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건 테이블에 놓인 식어 버린 시루떡을 덮어 놓은 수건이었다. 우선은 그거라도 손에 쥐어 물기를 닦아야 했다.
“도무지, 이 새벽에 아이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온다는 게 말이 돼요? 119를 불러야죠?”
“애가 아프다고 했잖아요. 시내 병원까지 언제 오고 갑니까? 어찌 됐든 당신들도 의사 아니야?”
남세영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남자의 쉰 목소리는 쏟아지는 빗줄기에 갇혀 병원 안에서 맴돌았다.
한 번 더 아이의 이마를 만진 남세영은 숨을 씩씩대며 소파에서 벗어났다. 프런트에 놓인 수화기를 손에 들었을 때였다.
“119죠? 여기 동물병원······.”
미쳐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는 수화기를 빼앗았다. 그러더니 수화기뿐 아니라 전화기를 높이 치켜들었다.
“꺄!”
대본과 달리 카메라는 멈추지 않았다. 촬영 들어가기 전 감정선이 좋으면 그대로 이어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박태 감독은 혀를 훔치고 강미래를 바라봤다.
그녀는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남세영과 권창수 사이를 가로막고 눈을 감고 있었다. 늘어진 전화선이 권창수의 얼굴 앞에서 덜렁덜렁 흔들린다.
“그냥··· 그냥 좀 부탁합시다. 경찰에 신고해도 좋은데, 애 먼저 보고 신고를 하든 뭘 하든 하면 될 거 아닙니까?”
권창수는 어금니가 다 부서질 것처럼 턱을 씰룩이고 있었다. 화가 들끓는 눈빛, 일그러진 턱, 보기에 따라선 그건 마치 굉장한 참을성과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저씨 미쳤어요?”
세영은 아랫입술을 깊게 빨아들였다.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그만 좀 얘기하고 애나 좀······.”
권창수가 또다시 화를 읊조리는 순간, 찰싹 소리에 이어 뺨에 붙어 있던 빗방울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오케이!”
오소리의 손이 이시현의 뺨을 내려친 순간 감독은 컷을 외쳤다. 그리고는 한참을 모니터 속 이시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감독님?”
자리에서 일어나자 스태프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강미래의 시선도, 남세영의 시선도··· 권창수의 시선도.
“박 감독 어디가?”
촬영감독이 불렀지만 박태 감독은 비가 오는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빗속을 두리번거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인생작이다!’
강렬한 느낌이 찾아왔다.
< 세상, 최고의 아빠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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