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최고의 아빠 (1) >
「2003년 5월 5일, SBC 드라마 제작발표회 현장」
“웬일로 강남에서 제작발표회를 하지?”
“유가희, 김은수, 임예진까지. 유명 작가 3인이 합작하는데 강남 정도는 돼야지.”
“글쎄, 캐스팅고 보니까 그닥 끌리진 않던데? 알츠하이머에 걸린 주인공과 존재도 몰랐던 딸의 만남이라는 설정도 진부하고, 주변 인물과의 관계도 너무 인위적이고.”
“아니지. 오히려 그런 소재가 한번 터지면 안방 휘어잡는 거지. SBC가 겜블로 주도건 잡은 김에 아예 신파극으로 굳히기 들어가겠다는 거 아니야.”
제작발표회에 도착한 기자들은 작품에 대한 의견부터 공유했다. 유명 작가 3인의 합작 사실도 특이한데, 캐스팅부터 오늘의 발표까지 외부 노출 없이 진행되다 보니 기자들이 가진 정보가 전혀 없었다.
“지금부터 ‘세상, 최고의 아빠’ 제작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을 맡은 탤런트 이성연의 목소리가 울리자 기자들의 손길이 분주해진다. 노트북을 펼치고, 마이크를 점검하고, 카메라를 움켜쥔 기자들의 시선들이 무대에 쏠렸다.
“우선 감독님과 작가님들 모시겠습니다. 박태 감독님, 유가희 작가님, 김은수 작가님, 임예진 작가님을 소개합니다.”
감독과 작가들을 필두로 SBC 담당 프로듀서와 외주제작사 관계자까지 연이어 무대에 올라왔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제작발표회였다.
하지만 배우들이 나타나면서부터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오소리 씨는 마을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강미래 역을 맡아 자상한 동물병원 원장으로, 또 당찬 도시 여자의 해안가 마을 적응기를 보여줄 예정입니다."
검은색 탑 원피스로 멋을 낸 오소리가 무대에 올라왔다. 한층 물이 오른 미모에 웃음꽃까지 만개해서 기자들의 포즈 요청이 쇄도했다.
‘미스터 미스터리’에서 아역 이미지를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은 그녀는 작년 한일합작 드라마에 출연해 열연을 펼치기도 했다.
오소리 이후 무대에 오른 배우들도 연기 좀 한다는 인물들이었다.
이름있는 작가 3인이 합심한 만큼 급 있는 배우들이 연달아 등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역배우와 이시현의 호흡이 이 드라마의 신파를 책임지는 만큼, 아역배우에 대한 궁금증이 클 수밖에 없었다.
“천사 역의 신은경입니다.”
올해 9살의 아역배우가 깜찍한 미소와 함께 무대에 등장했다.
“오, 신은경이네.”
“쟤 우는 거 잘하지.”
기자들 입가에 부모 미소가 피었다.
지금까지는 캐스팅이 넘치다 못해 훌륭했다. 이제 마지막 배역 하나가 남았는데, 남은 배우가 보이지 않았다.
“남자 주인공 권창수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실 배우··· 께서는 오늘 스케줄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진행자의 설명에 기자들이 다시 술렁였다.
황당한 일 아닌가. 주연 배우가 제작발표회에 불참하다니.
일부 기자는 ‘강대호’ 역을 맡은 중견배우를 바라봤다.
후배들한테 쓴소리하기로 유명한 배우였기에 지금의 사태를 곱게 보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는 유유자적하게 작가와 귓속말을 소곤거리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상황에, 기자 한 명이 손을 높이 들고 물었다.
“세레데이 서울의 이우정 기잡니다. 권창수 역의 배우가 누군가요?”
질문을 귀담아들은 진행자가 미소 띤 얼굴을 배우들에게 향했다.
“오소리 씨가 말씀해주시겠어요?”
잠시 마이크가 이동하고.
오소리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등에 올리고 장내의 기자들을 두루 바라봤다. 뜸 들이듯 마이크를 매만지더니, 조심히 입을 열었다.
“권창수 역에, 배우 이시현 씨가······.”
채 말이 끝나가지도 전에 장내 분위기가 뒤집혔다.
기자들에게 설명은 필요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회사에 소식을 전한다. 지금 순간 이곳은 속보, 특종, 단독이라는 외침들이 뒤죽박죽 쏟아지는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해버렸다.
**
-8개월 만이다!
-역시 오빠는 우릴 버리지 않았어!
-속보, 3W 슬기도 제니 역에 캐스팅됐다는 소식!
-여기저기 속보투성이네.
-우리 언니 연예부 기잔데, 제작발표회 현장 완전히 뒤집혔대. 기자들 아무도 몰랐다가 오소리 입에서 오빠 이름 나오자마자 다들 벼락 맞은 얼굴이었다는 거야.
-지에스 이런 깜찍한 놈들! 그동안 일 안 한다고 했던 발언 철회!
이시현의 드라마 출연 소식은 폭탄이자 축제다.
예상은 했지만 밀려드는 전화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 스케줄이 워낙 많잖아.”
팬카페에 올라오는 글들을 확인한 강 팀장은 목 틈에 붙인 휴대폰을 다시 쥐었다.
“끝까지 어떻게 될지 몰라서 발표를 미뤘던 것뿐이지. 아이고, 보도자료 내용이 다라니까? 그래, 새로운 소식 있으면 제일 먼저 알려줄게.”
끊어진 전화를 내려놓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쉰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연락해오는 기자들 때문에 그뿐 아니라 직원들은 사무실과 밖을 오가기 바빴다. 물론 각자 요령껏 적당량의 정보만 풀고 있다.
강 팀장 역시 기자에게는 이시현의 스케줄 문제로 발표를 미뤘다고 했지만, 작년 차 대표가 미국 방문했을 때 결정된 일이었다.
“보도자료 외의 내용은 일절 얘기하지 마! 애매한 건 전부 홍보부나 기콘부에 넘기고, 누가 미국에 연락해서 시현이 귀국시간 정확히 알아놔!”
“예!”
직원들의 대답을 들은 강 팀장은 소매 단추를 풀었다.
아무래도 오늘 집에 가긴 그른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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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에 집중한 이시현의 뒷모습은 무척 고요했다.
불과 1시간 전 JFK 공항을 마비 상태로 만든 세계적인 스타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작년부터 준비했음에도 뭐가 그렇게 부족한 것인지.
대본을 펼칠 때마다 반복되는 풍경에 언제가 한번은 클린턴이 대본을 빼앗으면서 뭘 그렇게 고민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이시현은 같은 대사와 지문을 두고 매번 다른 생각을 한다는 대답을 했다.
단순히 보면 처음에는 극 중 역할에서의 대사와 지문, 배경 같은 기본적인 것을 숙지하고 이후엔 다른 인물과의 대화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감정의 흐름을 숙지하며 역할에 파고드는 식이었다.
인생이란 것이 지나가면 고칠 수 없는 반면 연기는 다르다는 말도 덧붙었다. 카메라에 담기기 전까지 연기는 언제든 변할 수 있기에 그때까지 제일 나은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그걸 계속 반복하다 보면 어느샌가 자신은 극 중 인물이 되고,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 서성인다고 했다.
대답을 들은 클린턴은 이시현을 한마디로 정의했다.
‘연기에 미친 놈.’
더 나아가 이시현은 작품의 선택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채널 H, CBS, ABC, 폭스에서 거액의 출연료를 제시했지만 결국 한국을 선택한 걸 보면 말 다했다. 물론 지에스 대표가 요구한 일이기도 했지만, 거절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
케이시는 생각을 관두고 손에 든 대본을 펼쳤다.
[세상, 최고의 아빠]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형사.
불운 속의 떠돌이 삶에 살인 누명까지 쓴 권창수.
육교에서 추락한 여학생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의사.
해안가 마을에서 동물병원을 여는 게 꿈이었던 강미래.
관광지에 근사한 카바레 하나 여는 게 꿈이었던 차광재.
술집을 전전하며 살아온 여자 소라.
그녀의 딸 천사.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해안가 마을에 모이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드라마는 앞으로 3개월 동안 한국에서 촬영이 이어진다. 그 기간 이시현은 촬영에만 집중하고, 끝나면 바로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후.’
다시 대본을 덮은 케이시는 이시현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더 이상 그는 볼 순 없었다.
역시, 클린턴 말이 맞는 모양이다.
**
「3일 후」
-지에스 엔터테인먼트는 이시현이 현재 촬영준비에 매진하고 있으며 당분간 촬영 외의 활동 계획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두서없이 흐르고 있다.
물론 세상은 지금 이시현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지에스 앞에서 울부짖는 팬들 모습이 며칠째 저녁 뉴스 메인을 장식할 정도니까.
-제작발표회 직후 광고가 완판됐다는 얘기 들으셨나요? 심지어 아직 촬영도 시작 안 한 드라마를 리메이크하겠다고 중국이며 일본에서 러브콜을 보내고 있답니다. 와, 이시현 씨의 인기는 정말 굉장하네요······.
최재환은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손에 쥔 기계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번에 3W가 CF모델을 하게 된 제품인데, 요 손가락만 한 기계로 라디오뿐 아니라 녹음에 음악까지 들을 수 있다. 용량이 무려 256메가.
참 세상 좋아졌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시디도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시디가 뭔 필요야. 그냥 인터넷으로 바로 사서 들으면 되는 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잠시 기술의 발전에 대해서 생각해본 최재환은 눈앞의 엘리베이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놈은 잘하고 있나.’
지금은 세상일 따윈 뒤로하고 내 배우 신경 쓸 때.
엊그제 박태 피디한테서 연락이 왔다.
지금 한창 난리인 ‘세상, 최고의 아빠’에 캐스팅된 조연 배우가 사정이 있어 하차했으니 오디션을 한번 보라는 얘기였다.
당연히 흔쾌히 받아들였다. 절호의 기회니까.
극 중 송범진은 차광재가 운영하는 바닷가 마을 카바레에서 웨이터 일을 하며 권창수의 주위를 맴도는 인물이다. 한때 권투 선수였던 권창수를 우연히 만나게 됐고, 그가 좋아서 붙어 있는 순진한 친구다.
한마디로 신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캐릭터.
튀지 않고 적당히 비중은 차지하면서 시청자들의 기억에 미움보다는 호감으로 남겨지는 캐릭터. 거기다 드라마는 이미 성공 가능성 백 퍼센트. 이건 출연료 안 받고, 아니 돈을 내고 계약해도 백번 이득이었다.
하지만 노리는 회사들이 꽤 많은 모양인지 얼마 전에 데뷔한 남자가수도 좀 전에 오디션을 치르고 떠났다. 뭐 녀석은 안될 것 같지만.
‘자식이 바퀴 달린 신발이나 찍찍 끌고 말이야.’
후후.
왠지 콧바람이 나온다. 내 배우 생각만 해야 하는데, 이시현이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괜스레 입술을 긁적이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최재환의 눈에 카바레 웨이터가 비친다.
“야, 왜 말이 없어?”
신호등 앞에 차가 멈추자, 최재환은 옆을 슬쩍 보며 물었다.
오디션을 봤으면 어떻게 됐는지, 잘했는지 망쳤는지 가타부타 뭐든 말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근데 녀석은 오디션을 보고 나와서는 계속 저기압 상태다. 대충 예상은 되는데, 입만 산 놈이 그러고 있으니 더 안쓰러워 보였다. 들어갈 때만 해도 한방에 붙어 나온다고 큰소리치던 놈 아닌가.
“이시현도 5년을 죽 썼어. 오디션 한두 개 떨어진 것 같고 뭘 그렇게 울상이야. 배고프지? 오늘 고기 먹자.”
“사장님.”
“알았어. 소고기 사줄게.”
쿨하게 지르고 바뀐 신호에 출발하는데, 녀석이 속삭였다.
“저··· 송범진 됐어요.”
끼익.
갓길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 물었다.
“진짜야?”
근데 왜 울상인 걸까.
의아했지만, 최재환은 잠시 대답을 기다렸다.
녀석이 아랫입술을 연거푸 빨아들이니 결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안에 이시현 선배님 계시더라고요.”
“뭐?”
그럴 리가. 올라가는 걸 못 받는데.
“다른 방에서 지켜보고 계셨나 봐요.”
“근데?”
놀랄 일이긴 하지만, 울상 지을 일은 아니다.
“저한테 송범진에 대해서 많이 얘기해주셨어요. 선배님 대본을 슬쩍 보니까, 그냥 다 까맣더라고요. 선배님이 송범진의 대사에서 어떤 걸 느꼈는지, 극 중 권창수가 송범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것들··· 그런 것들 다 얘기해주셨어요.”
얘길 들어보니 아무래도 이시현이 신경 좀 써준 모양이었다. 그럼 어찌 됐든 좋은 일인데.
“근데 넌 왜 이러는 거야?”
“대사를 한번 맞춰봤는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녀석이 대체 뭘 보고 온 걸까.
“원래 다 처음에는 그래. 니가 시현이 연기에 기가 좀 죽은 모양인데, 그거 좋은 거야. 자기 모자란 부분 느끼는 거, 그것도 하나의 재능이야.”
“그게 아니라··· 사장님은 모르세요, 직접 보셔야 해요.”
“뭘?”
“선배··· 우리가 아는 그 이시현이 아니었어요. 마치······.”
녀석의 눈동자가 제멋대로 흔들린다.
“들개 같았어요.”
< 세상, 최고의 아빠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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