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십, 그리고 사운드 (4) >
아이는 많이 놀랐는지 말도 못 꺼내고 오밀조밀 모인 눈코입을 꿈틀거렸다. 그래서 무릎을 살짝 굽혀 에메랄드빛 맑은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주디, 인사해야지.”
엠마가 빨갛게 익은 주디의 얼굴을 보며 속삭였다.
“Four Warriors··· 시현······.”
용기를 내 벌린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만나서 반가워, 주디.”
“정말 맞아요?”
요 의심쟁이.
“음··· 모자를 사러 갔을 때 백화점 직원이 깜짝 놀랐고, 병원에 왔을 때 간호사 언니도 헉하고 놀랐고, 그리고 주디도 이렇게 놀라는 걸 보니까··· 맞는 모양인데?
“주디, 저거 다 거짓말이야. 쟤 별로 사람들한테 인기 없어. 입만 살았다니까.”
간만에 능청 좀 떨었더니 팻시가 그새를 못 참고 끼어들었다.
“에이 들켰네. 하긴 인기는 팻시가 많지. 유명인사잖아. 그치?”
눈을 찡긋했더니 그제야 주디가 배시시 웃는다. 꽤 오래 보고 싶은 만큼 예쁜 미소였지만 계속 볼 수는 없었다. 주디가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엄마를 위로해줘서.”
잠깐 이대로 가만있었다.
그런 다음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나도 속삭였다.
“나도 고마워. 주디가 씩씩하게 나를 맞이해줘서.”
그러니 엠마 이제 그만 울라고요. 팻시 너도 그만.
병실 안에 순식간에 눈물 바이러스가 퍼졌다.
“주디, 약속을 지키려고 왔어.”
아이의 눈을 다시 들여다봤다. 이제 약속을 지킬 차례다.
쓰고 있는 모자를 슥 벗어 아이의 머리에 씌워졌다. 그러자 아이의 눈이 지금까지보다 한층 더 커졌다.
“머리가······.”
짐도, 클린턴도, 로돌포도, 팻시도 모자를 벗자 시원하게 민 스포츠머리가 드러난다.
별거 아니다.
작년에 기부를 결정했을 때처럼, 그냥 누가 주디를 위해 머리를 깎자는 말을 해서 다 같이 그러자고 했을 뿐이다. 어차피 새 앨범 콘셉트도 새로 잡아야 했고, 스포츠머리도 나쁘지 않아서.
“다들··· 절 위해서 깎은 거예요?”
주디의 맑은 눈이 한사람 한사람 거치자 클린턴이 한껏 뽐내며 말했다.
“뭐 주디를 위해서라면 내 잘생김을 조금 포기할 수 있지.”
“이상하네.”
가만있던 로돌포가 고개를 갸웃한다.
“뭐가?”
“클린턴은 잘생긴 적이 없었는데?”
“뭐어? 이 날다람쥐가!”
로돌포의 촌철살인과 함께 시작된 둘의 야단법석에 주디의 입가에 너무도 밝은 미소가 피었다.
**
평소와 달리 에이전시 안에 활력이 넘쳐 흘렀다.
“신문, 뉴스, 잡지, 인터넷 너나 할 것 없이 밴드 얘기로 난립니다.”
“광고는?”
“타임스퀘어 광고, 3시부터 올라갑니다!”
“실질적인 수치 변화는?”
“앨범판매량, 라디오 스트리밍 횟수, 여론조사 호감도까지 모든 수치가 급상승 중입니다. 인터뷰 요청도 쇄도하고 있어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추락하는 새는 날개가 없다고? 헛소리! 밴드는 훌륭히, 그리고 더 높이 날아올랐다.
“케이시, 유례없는 분위기예요.”
직원들의 고무된 얼굴을 보니 정말 유례가 없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아직 나는 빌보드 넘버원에 밴드 이름이 오른 건 보지 못했어. 유니버설 협조 얻어서 새 앨범 녹음 과정 빠짐없이 언론에 흘리고, 아, 최고의 엔지니어들이 함께한다는 거 강조하고··· 근데 우리의 악역은 지금 뭐 하고 있지?”
“마이클 본은 아무런 코멘트도 없어요.”
“오케이, 여우가 굴속에 숨어 있다면 튀어나올 때까지 더 연기를 밀어 넣어야지, 장작 쑤셔 넣어!”
악당이 부각될수록 정의는 빛나는 법이다.
“다들 뭐 하고 있어? 움직여!”
박수 한 번에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사무실로 향하는 케이시의 뒷모습에 들뜬 기색은 없었다.
“역시, 우리 대장은 다르네.”
“홈런 한 방 갖고 들뜨면 대장이 아니지.”
“이게 홈런 정도야? 전 미국인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는데.”
사무실은 온갖 소리로 가득했다.
직원들의 수다,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 그리고 심장 소리.
두근두근.
개인 사무실에 발을 들인 케이시는 블라인드부터 쳤다. 아무도 보이지 않자 숨을 크게 들이켜고···
“됐어!”
주먹을 움켜쥐었다. 껑충껑충 뛰고 발까지 동동 구른다.
드디어, 빌보드 넘버원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
“친구가 있었기에 아픔을 견딜 수 있었고, 그래서 밴드도 그 아이의 친구가 되어 아픔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후, 이제 끝났나요?”
“짐, 그건 제가 묻고 싶네요. 인터뷰 스케줄을 대체 얼마나 잡은 거예요?”
“글쎄요.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네.”
짐은 어깨를 으쓱 올리고 지친 웃음을 흘렸다. 케이시는 미국에 있는 모든 매체에 밴드가 실려야지 직성이 풀릴 모양인 것 같다.
“기사는 이틀 후에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기자가 녹음기를 가방에 챙겨 넣고 일어났다. 늘씬한 다리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가는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아, 뭐가 떨어진 것 같아서.”
대충 얼버무리는데.
“짐, 내가 장담할게요. 밴드가 빌보드 넘버원이 되는 건 시간문제예요.”
기자의 말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얘기지만, 곧 일어날 것 같은 일이기도 했다.
“하하. 그러면 좋겠네.”
웃으며 모자를 쓰자, 기자가 로비를 떠나며 말했다.
“실컷 즐겨요. 이제부터 역사를 피부로 느끼실 거니까.”
“역사를 피부로 느낀다고?”
짐은 잠시 앉아 로비에 드러눕는 오후의 햇살을 바라봤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기분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정신없이 휘몰아쳤다.
그래 맞아. 그녀의 말대로 이제부터 하루하루, 매시간, 1분 1초가 역사로 향하는 길목이자 질주다.
이 세상이 미치지 않는다면, 다음 주에 전쟁이 나지 않는다면, 우주가 소멸하지 않는다면 Four Warriors는 역사에 기록 될 거다.
“좋았어!”
입술을 잘끈 깨물고 일어나는 그는 유니버설에서 고용한 최고의 엔지니어들과 밴드가 녹음을 앞둔 녹음실로 향했다.
‘후.’
왠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제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매니저인 그는 마치 구경꾼 같은 느낌이 든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케이시처럼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갑자기 불안함에 가슴에 멍울이지는 것 같은데··· 녹음 부스에 들어가던 클린턴이 그를 슥 보고 말했다.
“짐.”
“어, 어?”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있어. 그 카우보이모자가 눈앞에 안 보이면 괜히 신경 쓰이니까.”
“···하하. 내가 가긴 어디를 가?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니들 때문에 화장실도 못 가는구만.”
“잘만 싸면서.”
투덜대면서 녹음 부스에 들어가는 멤버들.
이시현이 그에게 엄지를 척 내밀고 씨익 웃는다.
‘젠장할 놈들. 이러니 박봉에도 붙어있지.’
피식 웃는데, 엔지니어가 외쳤다.
“준비됐습니까?”
“아 잠깐.”
밴드는 가만있는데 짐이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그는 재빨리 움직여 준비해온 걸 밴드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걸어 놓았다.
“이제 됐습니다.”
멤버들의 시선이 데럴의 사진에 닿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경건한 시선 속에는 전의가 불타고 있었다.
‘데럴 보고 있냐?’
니가 시작한 밴드가 새로운 도약을 하려는 모습을 말이야.
“첫 번째 곡 녹음 시작합니다. 제목······.”
마이클 본, 지옥에나 떨어져라!
**
「일주일 후, 타임스퀘어」
“뉴욕은 여전하구만.”
차 대표와 지에스 직원들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눈에 담았다. 지금 뉴욕은 911테러 2주기를 기념에 각종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기부와 축제의 결합에 하루가 멀다 하고 공연이 이어지고 있죠.”
박 상무의 설명에 차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밴드는 잘되고 있는 거야?”
보고는 여태 받았지만, 미국에서의 실질적인 인기 정도를 가늠하긴 힘들었다.
“글쎄요.”
박 상무는 대답 대신 묘한 미소를 짓고 앞으로 나아갔다.
“상무님 그냥 이 근처에서 먹죠?”
뒤따라오던 성 팀장이 안경을 들썩이며 말하자 정 이사도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죠 대표님, 저도 힘듭니다. 하하.”
“그럴까. 창수야 이 근처에서······.”
차 대표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피다가 멈칫했다.
굳은 얼굴로 멍하니 있는 그 모습에 정 이사도 고개를 들다가 멈췄다.
타임스퀘어 거리 전광판 속에 밴드가 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전광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웃고 즐기고 있었다.
“제가 단언하건대, 여기 있는 사람들 반 이상은 이시현의 미국 팬들일 겁니다.”
박 상무의 유별난 자신감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차 대표는 자신의 손으로 키운 배우가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장면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찌 흥분되지 않을까.
그런 그에게 박 상무가 나직이 속삭였다.
“대표님,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십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엄청난 인파가 매디슨 스퀘어 가든 앞에 모였다.
가수들의 자선공연을 보러 온 팬들이었는데, 방송국 카메라도 이 진귀한 광경을 촬영하고 있었다.
“엄청나네요.”
정 이사의 속삭임에 차 대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대로 이시현을 만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고 싶었다. 이시현의 미국 내 인기가 진짜인지를.
“Four Warriors의 출연 확정 소식에 암표 가격이 8백만 원까지 뛰었습니다.”
박 상무의 얘기는 놀라운 것투성이다.
뉴욕이 밴드와 이시현에 열광하고 있다는데, 도무지 믿겨야 말이지.
사실 지난번 왔을 때도 뉴욕 거리에서 온도를 느끼기는 어려웠었다. 음반 매장에나 가야 노래를 들을 수 있었는데.
“오마이갓! 오마이갓!”
“왔어, 왔어! 그가 왔어!”
차 한 대가 멈춰 서자 갑자기 난리가 났다.
다양한 피부색, 머리카락색을 가진 소녀들이 뒤엉켜서 이시현을 찾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밴드 지금 내립니다!”
경호원들의 보호 속에 멤버들이 한 명씩 차에서 내린다.
마지막으로 내린 이시현, 순간 차 대표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팬들의 비명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들썩인 것은 물론, 이시현에게 달라붙는 팬들의 모습은 상상 그 이상이었으니까. 심지어 어떤 팬은 가슴을 확 드러내는 돌출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시현, 질문 몇 개만 할게요. 괜찮죠?”
어느새 붙은 리포터가 싱긋 웃는다.
“오늘 신곡을 발표하나요? 지난번 프레디 공연에서 잠깐 들려줬던 노래 맞죠?”
“예, 맞아요. 다만 그때와 다른 건 오늘은 팻시가 우리 곁에 있네요.”
웃으며 말하는 이시현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다.
“신곡이 한 곡이 아니죠? 굉장히 하드코어 스타일의 음악도 준비돼 있다던대요?”
“예? 잘못 들었어요.”
이시현이 리포터의 눈을 들여다볼 정도로 고개 숙여 귀 기울인다.
“너무 가까이 오면 제가 질문을 할 수가 없어요. 심장이 두근거린다고요! 하하, 그럼 다른 질문을 할게요. 그동안 밴드의 기부 사실을 감춘 이유가 있었나요?”
“리포터님도 알겠지만, 우리의 기부 사실은 사람들에게 그때 일을 떠올리게 해요. 그건 원치 않은 상처가 될 수도 있거든요. 상처를 건드려봤자 그 안에서 나오는 건 고름밖에 없잖아요?”
“그럼 왜 지금에야 공개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쇼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많은 고민과 생각 끝에 이제는 준비가 됐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언제까지고 저들이 준 상처에 고통받지 않을 거라고 말이죠. 우리는 강해지기로 결심한 거예요. 여러분 모두와 함께.”
**
장마철 불어온 바람에 밤새 시달린 창문은 어쩌면 이런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스탠드마이크에 기대 간신히 버티고 있다.
다음 곡을 불러야 하는데, 가슴은 제멋대로 뛰고, 머리는 쥐라도 난 것처럼 저린다.
그런 우리에게 팬들은 박수 치고, 두 손을 내밀고, 환호하고, 웃고, 응원하고, 한목소리로 외친다.
“Four Warriors!!”
그래, 아직 무대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멤버들과 눈을 마주했다.
드럼 로돌포··· 밴드 기타 클린턴··· 밴드 베이스 팻시··· 그리고 이 자리에는 없지만, 아니 어쩌면 지금 함께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녀석까지.
왠지 까칠한 시선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늘 내가 공연 분위기에 제대로 취한 것 같다.
“다음 곡은······.”
“아 잠깐만요, 잠깐만!”
마이크를 움켜쥐는데, 진행을 맡은 클레어가 무대에 뛰어 올라왔다. 새하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오더니 영문을 몰라서 당황한 우리에게 미소를 보인다.
“여러분, 지금 막 저희가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아직 발표되지 않은 건데, 뭐 근데 처음부터 확정된 사실이나 다름없었죠.”
눈을 찡긋하는 클레어의 모습이 무대 대형 전광판을 가득 채웠다.
“후우!”
그녀가 마이크를 잡고 크게 심호흡했다.
“여러분 Four Warriors가 마침내······.”
어? 지금 뭐라고 그랬지?
갑자기 팬들이 함성을 질러서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귀가 먹먹하다. 인이어가 잘못됐나 싶어 귀를 만지며 뒤를 돌아봤다.
다음 순간 내 눈에 차례로 들어온 건 무대에서 껑충 뛰어오른 클린턴, 두 주먹을 불끈 추켜올린 로돌포, 또 엉엉 울고 있는 팻시··· 그리고 무대 전광판이었다.
[Four Warriors, 1 album in the US on the Billboard Charts!]
< 가십, 그리고 사운드 (4) > 끝
ⓒ 고고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