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십, 그리고 사운드 (3) >
「2002년 9월 11일」
“5분 뒤에 생방송 들어갑니다.”
스태프의 안내에 사람들은 방청석에 앉기 시작했다. 이시현에게 붙어 있던 스타일리스트도 서둘러 스튜디오에서 빠져나왔다.
“오우 살 떨리네. 생방송이라니.”
매니저는 팔뚝의 우툴두툴한 닭살을 연신 쓸어내렸다.
“근데 뭔 질문들이 이렇게 강해?”
미리 받은 질문지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스캔들부터 시작해 인종차별에 관한 언급까지. 아무래도 오늘은 고생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요. 시현이 적당히 잘 넘길 테니까.”
“실수라도 할까 봐 그렇지.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 케이시가 피식 웃는다.
“짐, 당신은 아직도 이시현이라는 사람을 잘 모르네요.”
이시현은 사람들 앞에선 늘 미소 짓고 있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빈틈을 찾기가 힘들다. 자신한테 유리한 질문은 크게 부각하고, 불리한 건 재빨리 넘긴다.
영리하고, 나이에 맞지 않는 여유와 노련미를 갖추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스타인지도 모르지만.
“근데 케이시, 밴드가 다 함께 출연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시현 혼자서 나온 건 실수인 것 같은데.”
가뜩이나 이시현을 미국인이 아닌 외지인으로 보는 시선들이 늘고 있는 마당에 그 혼자 전면에 내세워 좋을 것 없어 보였다.
하지만 케이시는 그런 우려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어차피 오늘 주인공은 시현이 아니니까.”
“뭐?”
매니저의 눈썹이 껑충 솟아오른다.
**
“엠마? 엠마 어디 있나요?”
오프라가 방청석을 바라보자 붉은 머리칼의 여성이 손을 들었다.
“시현, 이번에는 엠마의 딸이에요. 준비됐나요?”
“예.”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전화 통화가 이어졌다.
“여러분, 주디를 소개합니다. 안녕 주디!”
-안녕 오프라!
“주디, 나이가 어떻게 돼요?”
-7살이에요.
“주디, 시현의 팬이라고 들었어요. 언제부터 그의 팬이 됐나요?”
-작년에, TV에서 요정을 봤거든요.
“하하. 주디, 그럼 시현과 통화할 준비 됐나요?”
-예!
힘찬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기분 좋게 웃고 그녀에게 인사했다.
“주디······.”
입을 열기 무섭게 어린 비명이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방청객들의 웃음도 덩달아 터졌다.
“주디, 우리 간단하게 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Four Warriors 보컬 이시현이라고 해요. 물론 당신의 요정이기도 하죠.”
후후.
-저는 주디에요. 그리고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엄마한테 얘기 들었어요. 어디가 아파요?”
-잘은 모르는데, 많이 아픈 병이래요.
얘기와 달리 아이의 목소리는 너무도 밝았다.
“주디, 고마워요. 아플 텐데도 밝게 얘기해줘서.”
-저는 항상 밝게 얘기해요. 그래야 엄마가 덜 힘들어하거든요.
“씩씩해서 보기 좋네요. 제가 주디한테 해줄 게 있을까요?”
-간호사 언니가 머리카락을 깎아야 한대요. 그래서 모자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 피자도 먹고 싶은데.
나는 아이의 엄마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주디, 병원이 어디에요? 제가 모자를 선물해줄게요.”
-정말이요?
흥분한 목소리에 정말이라고 화답하자 의외의 대답이 이어졌다.
-팻시가 입원해 있는 병원이에요.
“팻시? 우리 밴드 베이스 팻시?”
오마이갓.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수록 스튜디오의 웃음소리는 커졌다.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오프라가 미소 짓고 물었다.
“정말 주디를 찾아갈 건가요? 그냥 팻시한테 지금 전화해서 시켜도 될 것 같은데.”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서 나는 깍지낀 손을 무릎에 올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방청석 가득한 사람들, 쇼 스태프들, 우리 쪽 스태프들, 진행자를 차례로 바라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낸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네요.”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한 지가 1년 정도 됐죠?”
지금 내 앞에 오프라의 미소가 있다.
무려 25년의 진행 기간, 평균 시청률 2천2백만, 전 세계 140개국에서 방영된 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토크쇼를 촬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럴 때가 아닌데. 정신을 차리자.
“1년 동안 당신이 집중했던 게 무엇이죠?”
“아마도 음악, 영화, 팬들 이 셋이겠죠. 아, 저희 곧 새 앨범 나와요. 녹음 스케줄은 유니버설에서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으니까, 곧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후후··· 멤버들에 대해서 얘기해주세요. 클린턴, 로돌포, 팻시에 대해서 말이죠.”
지난 1년을 함께한 녀석들에 대해 얘기하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몇 개 꺼내는 동안 스튜디오 모니터에 멤버들의 익살스러운 사진들이 이어졌다.
한껏 폼 잡고 있는 클린턴, 애니메이션에 빠져 있는 로돌포, 해변에서 늘씬한 몸매를 뽐내고 있는 팻시, 매니저 짐도 보인다. 늘 보는 카우보이모자에 약간은 취기 어린 얼굴까지.
“제 사진은 없나요?”
“망가진 사진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오프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웃음 뒤에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시현, 프레디가 말하길··· 아 프레디와 제가 친하다는 건 알고 있나요?”
“오프라, 그렇게 돌려 말하지 않아도 이제부터 당신이 엄청 무서운 질문을 할 걸 알고 있어요.”
손사래 치고, 방청객들을 향해 엄살 좀 피웠다.
“좋아요, 그럼 정말 무서운 질문을 하기 전에 적당히 무서운 거로 시작할게요. 이것부터 얘기해 볼까요?”
그녀가 눈을 찡긋하고 꺼내 든 건 할리우드 가십지였다.
카메라가 지금 순간을 줌인하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얘기에 귀 기울였다.
“알코올중독, 주정뱅이, 문제아, 악동··· 팻시를 향한 다양한 시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오프라, 당신도 알겠지만 팻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저 지금은 조금 방황하고 있을 뿐이에요.”
“데럴을 얘기하는 건가요?”
그 이름이 훅 들어왔다. 순간 마이클 본부터 시작해서 코니아일랜드에서의 무대, 데럴과의 마지막 통화까지 눈앞을 빠르게 스쳐 갔다.
“시현, 지금 당신이 괴로운 대답을 해야 하는 걸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궁금하거든요. 데럴과 마지막 통화를 했고, 그것 때문에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단 걸 아니까요··· 마지막 통화는 어땠나요?”
한번은 거쳐야 할 질문이었기에 그때의 전화 통화에 대해서 담담히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사실 우린 그 밤에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던 데럴의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생생하다.
“데럴의 죽음이 당신과 밴드에게 어떤 변화를 주었나요?”
“좀 전에, 지난 1년 동안 제가 집중한 게 뭐냐고 물었죠?”
대답 대신 질문을 하고 오프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1년 동안 당신이 집중했던 게 무엇이라고 했죠?”
“···음악, 영화, 팬들. 그리고 사실 하나가 더 있어요. 이건 저뿐만 아니라 멤버들 모두가 겪은 거죠.”
“그게 뭐죠?”
“무기력이었죠.”
지난 1년 미국인들은 분노, 두려운, 악몽 속에 살았다.
테러는 누구도 원하지 않은 충격이었고 누구도 손을 쓸 수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물론 우리도 피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데럴이 고통받던··· 그 순간에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의 기억이, 그 감정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무기력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실 테러는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내가 이 일을 겪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걸까? 이번 삶에서는 거쳐야만 하는 일이었을까?
그런데 언제는 세상일이 이유를 말해준 적이 있어야지.
결국은 이겨내든 대충 아물든 간에 앞으로 또 가야 하는 게 인생 아닐까.
“멤버들 역시 저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물론 팻시의 행동은 잘못된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아주 혼을 내줬습니다. 지금쯤은··· 아, 너무 혼내서 또 술을 마시는 건 아닌가 걱정이네요.”
스튜디오에 가벼운 웃음이 다시 터지자,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1년, 5년, 아니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우리는 그때 일을 잊기 힘들 겁니다.”
그날의 충격과 아픔이 치유되는데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약속하건대, 우리는 이겨낼 겁니다. 여러분과 함께 말입니다.”
파도처럼 큰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오프라는 미소를 유지하고 있는 내 얼굴을 잠시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손에든 큐카드 한 장을 뒤로 휙 던지며 말했다.
“사실 다음 질문은 데럴과 마이클 본에 관한 얘기였어요. 하지만 이건 질문할 가치도 없는 거죠. 그래서 그냥 물어볼게요. 마이클 본에게 할 말이 있나요?”
“물론이죠.”
밴드를 대표해서 이 얘기는 꼭 해주고 싶다.
“마이클 본, 우리가 곧 당신을 찾아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 이건 선물.”
나는 카메라를 향해 중지를 쭉 내밀었다.
놀라는 사람들, 환호하는 사람들, 박수 소리···
오프라가 심호흡을 하고 다시 말했다.
“여러분, Four Warriors가 테러 희생자 가족을 위해서 기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려드려야 할 것 같네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멤버들 모두가 원했고, 나 역시 돈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으니까.
“오늘자 뉴욕데일리 기사예요.”
펼쳐진 신문에 팻시의 사진이 실려있다. 술주정하는 사진이 아닌 예쁘고 단정한 사진이었다.
“사고뭉치 멤버들 때문에 Four Warriors는 여러 이슈를 낫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사고뭉치의 가면을 쓴 숫기 없는 천사들일지도 모른다. 밴드는 지난 1년 수익 대부분을 세계무역센터빌딩 구조 현장에서 사망한 경찰관과 소방관들의 가족을 지원하는 센터에 기부해왔다······.”
기사를 읽는 동안 부드럽게 기울었던 오프라의 시선이 내게 이어졌다.
“꽤 큰 금액인데, 아까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아니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웅을 위해서 쓰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큰 박수갈채가 이어지자, 큐카드를 내려놓은 오프라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지금까지 Four Warriors 보컬 시현과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오늘 우리 쇼의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
다들 숨죽여 TV를 바라봤다. 클린턴은 팔짱을 켠 채로 벽에 기대서, 로돌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팻시는 붉게 변한 눈시울을 들고.
-시현, 오늘의 주인공을 소개해주실래요?
오프라의 제안에 이시현이 일어나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방청석 쪽으로 다가가자, 이미 한차례 카메라에 잡혔던 여자가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인다.
-엠마, 먼저 당신을 당황스럽게 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당황스럽게 해서 미안해요. 계속 당신을 소개해도 될까요?
-아, 예.
-당신에 대한 얘기는 저희가 기부하는 지원센터를 통해 알았습니다. 또한 당신을 초대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제가 제안했습니다. 참고로 당신 가족들은 이 일을 알고 있습니다.
-대체 지금 뭐가 뭔지······.
-제가 알기로 당신의 남편 하딩은 소방관이고, 작년 그 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구하고··· 엠마와 주디의 곁을 잠시 떠났어요. 사실인가요?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몇 명이 남편의 도움을 받았는지 알고 있나요?
-잘은··· 모르겠어요. 전해 들은 얘기가 없거든요.
이시현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했다.
-사실 오늘 이 자리에 그때 도움을 받은 사람이 함께하고 있어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붉게 변한 눈시울에 어느덧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정말인가요? 보고 싶어요. 잘 지내는지, 건강하게 지내는지, 혹시 내 남편을 기억하는지.
그러자 이시현이 방청객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여기서, 하딩에게 도움을 받았던 분은 일어나주시겠습니까.
어디 있을까.
궁금증과 걱정, 당황스러움 속에서 엠마의 시선이 움직였다. 애타는 시선을 따라 한 여성이 일어났다.
남편이 목숨을 바쳐 살린 사람, 남편의 죽음이 분명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여성이 일어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또 한 사람, 또 한 사람.
-세상에······.
엠마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됐다. 마침내 그녀만 남겨놓고 방청석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시현의 볼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엠마,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모두가 당신 남편 하딩이 구해준 사람들이에요.
목이 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렀다.
-엠마, 이제야 이 말을 해서 미안하고 또 영광입니다.
이시현은 한쪽 무릎을 굽혀 그녀의 눈물을 잠시 지켜보고 말했다.
-당신 남편은··· 영웅입니다.
묵직한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여전히 그날의 공포에 떨던 사람도, 무기력함을 앓았던 사람도, 살아남은 이유를 찾던 사람도 지금만은 한마음 한뜻으로 박수를 쳤다.
-엠마, 주디가 많이 아프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최근 힘든 일이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
-그래서 엠마, 당신이 괜찮다면 우리가 도움을 주고 싶어요. 허락해··· 주실래요?
엠마가 눈물만 흘리고 있자 클린턴이 주먹을 쥐고 외친다.
“허락해, 허락해, 허락하라니까!”
로돌포도, 팻시도, 방청객들도 모두가 한마음으로 외쳤다. 허락하라고.
-예.
< 가십, 그리고 사운드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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