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십, 그리고 사운드 (2) >
보고 또 보고, 어느덧 15분째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Four Warriors 밴드 팻시가 술에 취해서 거리에 주저앉아 있는 사진인데, 가끔 이상행동을 보이긴 했어도 이 정도로 망가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크리스틴,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뒤에서 팀장의 굵은 목소리가 들린데 이어 도넛과 커피가 그녀의 책상에 놓였다.
“자네가 밴드에 애정을 가진 건 알겠는데, 너무 깊이 관여하는 건 좋지 않아. 우리는 중립을 지켜야 하니까.”
마음을 꿰뚫리자, 여기자는 커피를 집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원한 파란색 셔츠를 입은 유대계 팀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그녀를 바라봤다.
“역시, 저는 이 사진 못쓰겠어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다.
물론 회사는 이미 파파라치에게 사진의 대가를 지급했다.
“좋아. 어차피 우리 아니어도 저질 기사를 쓸 곳은 넘치니까. 그럼 대안은?”
“글쎄요.”
스캔들만큼의 임팩트 있는 기삿거리는 도깨비방망이 휘두르듯 뚝딱 나오는 게 아니다.
“하나만 묻지.”
입술을 괴롭히던 그녀가 고개를 다시 들었다.
“밴드가 롱런할 것 같나?”
“팀장님 생각은요? 원 히트로 끝날 것 같은가요?”
밴드는 여러 이슈로 인기를 얻었다. 보컬 이시현의 연극무대, 코니아일랜드 공연, 전 보컬 데럴의 사연과 죽음 등이 연쇄 폭발처럼 이뤄져 밴드를 빌보드 차트 2위, MTV 베스트 신인상까지 견인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현 시간 밴드는 빌보드 차트 4위에 머물러 있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는 없는 법이지.”
책상에서 엉덩이를 뗀 팀장은 미련 없이 뒤돌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멈칫.
“그런데 그 소식 들었어?”
“뭘요?”
“에이전시가 밴드를 빌보드 넘버원으로 만들려고 엄청난 쇼를 준비하고 있다더군.”
“엄청난 쇼?”
**
“그래, 기사들은 내버려 둬. 물론 반박 기사는 내야지. 지인이든 관계자든 뭐든 적당히 붙여서 인터뷰하라고.”
휴대폰을 목에 붙이고, 케이시는 옷매무시를 고치며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스캔들도 곧 홍보니까 원하는 대로 같이 망가져 주자는 말이야. 아, 시현의 팬클럽 카페에 쇼 출연 소식 올리고 에이미 스콧한테는 전화 좀 해. 뭐긴 뭐야? 접근하지 말라고 해!”
전화를 끊고 휴지를 뽑아 손을 닦았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도 아깝다 보니 손길은 거칠고 투박하다.
“어떻게 해서든 이번에 분위기 돌려야 하는데.”
거울에 비친 얼굴이 일그러진다.
1위와 2위, 그사이에 존재하는 하늘과 땅만큼의 갭.
다음에 잘하면 된다? 그런 헛소리를 하다가는 밴드에게 다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했다. LA 최고의 에이전트가 아닌가.
띠리리.
화장실을 나오는데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회의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 우리 지금 바로 이동해야 한다니까.
“정 바쁘면 둘만 데려가던가.”
-제정신이야? 팻시까지 빠졌는데, 클린턴하고 로돌포만 데려가면 프레디가 반길 것 같아? 무대에서 프로레슬링 경기 볼 생각 없으니까 얼른 끝내고 시현 이쪽으로 보내.
매니저가 안달하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 프레디 공연에 밴드가 게스트로 참여하기 때문인데, 시간을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날 잡아먹는다고 없는 시간이 생겨요?”
-대체 왜 이렇게 미팅이 길어지는 거야? 쇼 관계자들에게 협박이라도 하는 거야?
케이시는 걸음을 멈췄다. 입을 열기에 앞서 피식 웃음부터 나오는데, 옆에서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랜만이네요.”
뉴욕데일리 기자.
서둘러 전화를 끊고 지나치는데 기자가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케이시, 지금 밴드를 향한 여론이 좋지 않은 거 알고 있잖아요. 팻시와 이시현의 스캔들, 팻시의 술주정 같은 기사가 연일 쏟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은 다른가요?”
여기자가 멈칫했다. 케이시도 멈춰서 뒤돌았다.
“당신이 데럴의 기사를 내준 건 개인적으로 고맙게 생각해요. 그것 덕분에 밴드가 치고 올라올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데럴의 상처가 드러났고, 멤버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에 긴 시간 자책했어요. 아닌가요?”
미세하게 일그러진 시선에, 여기자는 입술을 머뭇거렸다. 어쨌든 결과는 그렇게 됐으니까.
“그래서 날 원망하는 건가요?”
“아니요.”
케이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갑자기 미소를 보였다.
“당신에게만 하나 알려주죠.”
뭘까.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여기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Four Warriors 밴드는 지난 1년 수익의 상당 부분을 테러 희생자 가족을 위해 기부해왔어요. 그리고 현재로써는 당신 외의 기자는 알지 못하는 사실이죠. 아마도.”
“그게 정말인가요?”
놀라서 재차 묻자 케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빌보드 넘버원에 올랐을 때 터트릴 예정이었는데, 지금 상황이 그래서.”
“그걸 왜 갑자기 저한테······.”
여기자는 그 말이 진짜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시선이었다.
“내가 왜 이 얘기를 해주는지 궁금하겠죠.”
“왜죠?”
“다른 신문, 가십지들이 팻시의 망가진 모습을 신나게 실었을 때, 뉴욕데일리만은 팻시의 가장 예쁜 모습만을 실었으니까··· 라고 시현이 그러더라고요.”
얘기는 끝났다.
케이시가 뒤돌려고 하자 여기자가 재빨리 물었다.
“엄청난 쇼를 준비하고 있다던대요?”
“훗. 곧 알게 되겠죠.”
**
-오프라 윈프리 쇼, 출연 확정!
팬카페에 소식이 올라오자마자 게시판이 또다시 난리가 났다.
-오빠를 모르는 미국인이 점점 줄어드는군요.
-신곡을 발표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완전 기대!
-오빠가 진짜 월드는 월드구나. 새삼 놀랐다.
-난 솔직히 오빠가 잠깐 미국에 있다가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역시 어느 나라나 공통이구나 싶다. 좋은 건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말이야.
-저기 언니들, 그럼 한국시각으로 몇 시에 하는 거예요?
-방송 볼 수 있는 방법 좀 알려주세요.
-아 나도 미국에서 살고 싶다. 그럼 직방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천사포들아 난 지금 미국! 오늘 프레디 공연에 밴드 올라온다고 해서 엊그제 뉴욕 왔어! 지금 완전 신나서 이성 가출!
-와, 너 천사포 능력자구나··· 열라 부럽다.
-대박, 오빠 사진 올릴 거지?
-당근이지. 좀만 기다려, 끝나자마자 총알처럼 튀어와서 올릴 테니까. 근데 여기 인터넷 엄청 느려!!
-잠깐, 그럼 급똥 천사포하고 만날 수도 있겠다. 급똥 천사포 언니도 분명 거기 갔을 테니까.
-어 그러네? 근데 알아볼 수 있을까?
“오빠!!”
관중들 틈에서 내 팬이 분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나 저 단어 알아.”
프레디가 소리가 난 방향을 가리키고 낄낄 웃는다.
“시현, 네 팬한테 물어봐 주면 안 될까? 내 공연 보러 온 건지, 너 때문에 온 건지.”
굳이 내 입으로 말할 필요 있나.
엄지를 내밀어 옆에 있는 클린턴에게 질문을 넘겼다.
“프레디, 안타깝지만 동양에서 온 요정 중에 너의 팬은 없어. 물론 내 팬도 없겠지만.”
클린턴이 우울한 얼굴로 말하자 관중들 틈에서 아니라는 외침이 들렸다.
“시현, 저게 무슨 소리야.”
“네 팬도 있는 모양인데?”
웃으며 설명해줬더니 방방 뛰고 난리가 났다.
“진짜야? 진짜 내 팬이야? 확실히 물어봐 줘!”
재촉하는 바람에 관객석을 향해 다시 물었다. 누구 팬인지 이름 좀 외쳐달라고.
“로돌포!”
내 팬 아니랄까 센스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
덕분에 관객들이 폭소하고 프레디도 배를 잡고 웃자, 클린턴이 씩씩대며 로돌포를 끌어안았다.
“로돌포는 내꺼야!”
하여간 얘들 때문에 웃고 산다.
아무튼 밴드가 무대에 섰으면 노래를 해야 하는 법.
소매를 걷어 올리는 내 모습이 무대 전광판에 비친다.
“프레디, 공연에 초대해 줘서 고마워.”
“나야말로 이렇게 와줘서 고맙지. 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니까.”
“하하, 고맙긴 한데, 그렇게 말해도 출연료는 받을 거야.”
“이 나쁜 자식.”
공연장을 가득 채운 1만 관객은 유쾌한 남자들의 모습에 같이 즐거워하고 있다. 물론 나도 오랜만에 즐겁다.
“여러분, Four Warriors를 소개합니다!”
프레디가 정식으로 우릴 소개했다. 장난기 어린 웃음은 잠시 뒤로하고 관객에게 손을 흔들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밤하늘 별빛처럼 터지고, 우리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나는 참 이럴 때면 이 순간이 벅차 새삼 놀란다.
어느 때는 익숙해져 버린 내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오케이, 그럼 무슨 노래 들려줄 거야? 미리 말해두는데, 여기 모인 세상에서 가장 멋진 관객들은 웬만한 노래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고.”
그럴지 알고 오늘은 다른 노래를 준비해왔거든?
“팻시가 여기 오지 못한 걸 여러분에게 사과하는 의미로··· 새로운 곡을 부르겠습니다.”
환호···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는 말을 안 해도 알 것 같다. 준비됐는지, 언제 시작해야 할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고개를 끄덕이자 서서히 암전이 찾아왔다. 그러자 반딧불이 날아오르듯 관객석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초록빛이 움직인다.
“데럴을 위해!”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을 때, 클린턴의 기타 연주가 시작됐다.
**
‘아······.’
눈을 떴을 때, 팻시는 이곳이 병원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속은 메스껍고 머리는 깨질 것 같았다. 찌푸린 눈을 들기 위해 애쓰는데 곁에서 작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Four Warriors 맞지?”
“많이 아픈가 봐.”
“우리 가까이 가서 볼까?”
“누가 오면 어쩌려고?”
소곤거림은 가뜩이나 아픈 머리에 신경까지 거슬리게 했다. 한참을 깜빡인 끝에 눈을 뜬 팻시는 단발머리의 아이와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주친 시선에 놀란 아이들이 작은 입을 크게 벌렸다.
“꺄!”
서둘러 도망치는 아이들 모습에 팻시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기지개를 쭉 켰다.
“조그만 녀석들이 까불기는.”
하지만 애들 놀래키고 의기양양한 건 고작 1분도 가지 않는다.
“에휴. 나 뭐하는 거니.”
혼잣말을 속삭이는 것 역시 1분도 가지 않는다.
다시 침대에 벌렁 누운 그녀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이시현이 어제 데리러 왔다는 걸 알고 있다.
새벽까지 곁에 있었다는 사실도.
“응?”
이상한 느낌에 팔을 들었더니 네모반듯하게 접힌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조심히 펼친 종이에는 가사가 적혀 있었다. 이시현에게 신곡 가사를 써보라고 숙제를 내줬는데, 아마도 그 답안지인 듯 보였다.
“제목, 괜찮은 하루······.”
이별이 이렇게 찾아올지 몰랐어
대충 준비할 시간이 있을지 알았거든
참 바보 같지 조금만 생각하면 당연한 건데
삶의 많은 일은 예고 없이 찾아오잖아
그렇게 겪고도 또 이렇게 실수를 했어
언젠가 네가 바다를 보며 말했잖아
코니아일랜드에서였나? 뭐 어디였든
노을이 쏟아지던 그 앞이었을 거야.
파도가 출렁이고 물거품이 발밑에 닿던 그 앞말이야
너는 이런 말을 했어 괜찮은 하루였다고
오 친구여
우린 지금 바다로 가고 있어
그때처럼 네가 말한 괜찮은 하루를 보내고 말이야
오 친구여
거기는 어때 너도 괜찮은 하루를 보냈겠지
그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
그럼 우리 오랜만에 뭉쳐보는 건 어때
연주에 맞춰서 제대로 한번 노래해봐
저 바다의 고래든 하늘의 갈매기든 구름 너머 별빛이든 뭐가 됐든 우리 앞에 나타나서 말이야
그럼 오늘은 정말 괜찮은 하루가 될 테니까···
가사를 모두 읽었을 때, 팻시의 눈은 또다시 눈물샘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이시현이 남긴 마지막 글귀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PS. 살 좀 빼라. 무겁더라.
< 가십, 그리고 사운드 (2) > 끝
ⓒ 고고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