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211화 (211/227)

< 가십, 그리고 사운드 >

「LA」

“엄마.”

코끝을 찌르는 약 냄새에 인상을 찌푸린 어린 소녀가 엄마의 옷깃을 붙잡았다.

“주디, 엄마 지금 입원 서류에 사인하고 있잖니.”

“나 피자 먹고 싶어요.”

엄마는 꽤 많은 서류에 사인하느라 그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간호사와도 많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

“주디!”

마침내 엄마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엄마 지금 바쁘다고 말했잖니.”

“저기에 TV에서 보던 사람이 있어요.”

“응?”

엄마는 천천히 일어나 로비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그녀 말대로 TV에서 보던 여자가 카우보이모자를 쓴 남자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놔. 놓으라고.”

술에 취한 팻시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말도 꼬이고 다리도 꼬이고 모든 게 정상이 아니다.

“짐··· 여기가 어디야?”

“병원이지 어디야.”

매니저는 체념하고 허리를 폈다. 팻시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느라 등에 쥐가 날 정도다.

“정신 차렸으면 좀 일어나자. 시현 귀국했잖아, 나 또 잔소리 듣기 싫거든?”

“우욱!”

또다시 팻시의 허리가 새우처럼 굽어졌다.

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쏟아지는 걸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으.”

매니저는 눈을 찌푸렸다.

“하. 잘했다. 내일 뉴욕데일리 1면은 또 니 차지다. 아, 자랑스러워라!”

뉴욕데일리뿐일까. 가십지란 가십지는 신나게 떠들겠지.

알코올 중독자라는 타이틀은 식상하고, 이번에는 뭐가 붙을까.

그나마 천만다행은 운전면허가 없어서 차 몰고 사고는 치지 않는다는 거다.

“다시 들어!”

함께 온 경호원들이 팻시를 일으킨다.

**

“제니퍼!”

구두굽 소리, 휘날리는 머리카락, 날카로운 목소리가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이어졌다.

“이 딜은 거지 같아요! 우리 배우가 자선사업간지 아는 건가? 이 계약서에 사인하느니 우리 사무실에서 연기를 시키는 게 낫겠어. 킬!”

온갖 불만을 터트리며 케이시는 비서가 준 종이 뭉치들을 헤집었다.

“뭐? Four Warriors 밴드의 이시현을 조연으로 쓰겠다고?”

콧방귀와 함께 휙!

“이건 또 뭐야?”

“그건 한국에서 온 대본인데, 유명 작가 3인이 참여해서 쓴 작품이래요.”

“세상, 최고의 아빠?”

케이시의 발길이 멈췄다. 눈이 가늘어진다. 한국에서 온 대본은 동양인의 정서가 담겨 있기 때문에 서양인의 시선에서 판단하긴 애매하기 때문이다.

“시놉을 보니까, 알츠하이머에 걸린 남자가 존재도 몰랐던 딸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네요.”

“새드?”

“아마도.”

휙!

“이건?”

“그건 워너에서 이번에 한국 영화 판권을 몇 작품 샀거든요? 그중 하나예요. 장르는 로맨스 판타지.”

“시··· 월애?”

발음도 어렵다.

집어 던지려는데, 마침 전화가 울렸다. 귀에 대자마자 여름철 곰팡내 같은 찝찝함이 밀려온다. 휴대폰을 목 틈에 잠깐 붙이고, 케이시는 비서에게 서류를 건네고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열.

“그래서?”

-알아요, 당신이 지금 LA에서 최고의 에이전트라는 거.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작품이에요, 작품.

“오 산드라, 몇 번을 말해. 이번에 연기 정말 좋았다니까? 캐릭터도 두드러졌고, 스릴러물 특유의 분위기도 잘 이끌었잖아. 당신이 보여준 내면 연기는 뭐랄까, 정말 판타스틱했어. 어메이징!”

-케이시, 듣기 좋은 말은 매니저한테서 충분히 들었어요. 평론가들이 뭐라는지 알아요? 양들의 침묵 아류작이니, 전개가 약하다느니, 캐릭터만 이상할 정도로 두드러진다느니···

“그냥 떠들라고 해. 어차피 걔들은 입 달린 가십지일 뿐이니까.”

-아무튼 이젠 스릴러도 드라마도 죄다 지겨워요. 로맨스나 SF 같은 건 없어요?

“아,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 게 하나 있는데.”

케이시는 비서에게 손짓했다. 종이 뭉치 중에서 좀 전에 집어 던지려했던 대본을 두드리고 말했다.

-그럼 바로 보내줘요.

“알았어, 제니퍼가 바로 보낼 거야.”

-케이시.

“왜?”

회의실 문을 잡다가 다시 멈췄다.

-그건 어떻게 됐어요?

그거라···

케이시는 기억을 헤집은 끝에 찌푸린 미간을 폈다.

“조만간에 시현하고 저녁 약속 잡을게.”

-멤버 중에 만나는 사람이 있다던데? 팻시?

“할리우드 생활 하루 이틀이야? 끝내주는 드레스나 준비해놓고 있으라고!”

툭 끊어진 전화는 비서에게 던지고 콧잔등을 찌푸린다.

“식사는 무슨.”

길게도 얘기했지만, 결론은 마지막 부분이었다.

“제니퍼, 시현 지금 어딨는지 확인해봐요.”

이제 정말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굿모닝!”

음반회사와 에이전시의 직원들이 밴드의 현재 활동을 재점검하고 다음 앨범 콘셉트를 잡기 위해서 한자리에 모였다.

투자, 기획, 제작, 마케팅··· 등등.

파묻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각 파트의 전문가들이 준비해온 서류와 자료들이 회의실에 빼곡하지만 목적은 심플하다.

밴드가 최고의 위치에 서는 것.

“자 여러분, 지금부터 Four Warriors의 컨셉 회의를 시작합니다!”

케이시는 테이블을 퉁퉁 두드렸다. 찌푸린 눈썹에 직원들도 긴장한다.

“우리한테 가장 시급한 문제가 뭐죠?”

“밴드가 빌보드 차트 4위로 내려앉은 문제입니다.”

여직원이 안경 콧대를 들어 올리며 눈을 빛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젤까?”

“밴드에겐 스토리가 있어요. 이는 전 미국인이 모두 공감하는 사실이죠. 하지만.”

BUT.

“시현이 문제죠. 실력이야 검증됐지만 밴드의 스토리에 편승했다는 시선이 지배적이니까요. 거기다 동양인이라는 마이너스까지. 올해 2월부터 지금까지 미 국적의 가수들이 빌보드 탑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밴드에겐 불리한 요소죠. 한마디로 시현은 스토리가 부족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내실을 다지고 불씨를 살려야 합니다. 써먹을 건 다 써먹어야 합니다. 프레디든, 마이클이든 쓸 수 있는 패는 다 꺼내서 전 미국인이 그를 아메리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맞았어!”

케이시는 손이 쩌릿할 정도로 책상을 내려쳤다.

직원들의 보고가 환상적일 정도 명확하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지금부터 우리가 Four Warriors를 빌보드 넘버원으로 만듭니다. 광고든, 협박이든, 이슈든! 쓸만한 건 모조리 찾아요!”

그래야 에이전시도 산다.

“후!”

숨을 몰아쉬는 케이시 곁에 비서가 다가왔다. 귓가의 속삭임에 그녀의 눈이 번쩍 뜨인다.

“에이미 스콧?”

**

비가 올 듯 말 듯 애매한 구름.

적당한 날씨, 적당한 햇살 아래서 우리는 점심을 즐기며 에이미 스콧의 얘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

방송계의 핫 아이콘, 사자, 괴물, 미다스의 손···

폭스로 이적 후 첫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론칭한 그녀에건 수많은 별칭이 달라붙었다.

“아메리칸 아이돌 시청자가 자그마치 3천 8백만 명이야. 내년에 시즌 2에 들어가면 그보다 훨씬 많은 미국인이 TV 앞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응원하고 투표하겠지. 그 오프닝 무대를 Four Warriors한테 준다니까? 아, 켈리가 너 한번 보고 싶다는데?”

용건 얘기하고 말 돌리는 걸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데.

“조건은요?”

“우리 사이에 조건은 무슨······.”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눈치를 보며 제 입술을 핥았다.

“우리와 드라마 계약.”

역시. 내가 그 얘기 나올지 알았다.

“글쎄요. 지난번에도 얘기 했던 것 같은데, 그때 폭스에서 제시한 출연료가 백인 출연자와 30퍼센트나 차이가 났었죠? 조금 달라진 게 있나요?”

“15퍼센트. 그 정도 갭은 이해해줘야 해. 하루아침에 차별을 싹 뒤집을 순 없다고. 여긴 할리우드니까.”

“그럼 회사와 얘기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세부사항도 조율해야 할 테고.”

물어뜯는 건 내 역할이 아니다. 에이전트의 역할이지.

“어디 회사? 음반회사? 에이전시? 한국의 회사?”

에이미가 못마땅한 얼굴로 아스파라거스를 집어 깨작거린다.

그녀 말대로 밴드는 메이저 음반회사에만 소속돼 있지만 나는 세 곳에 발을 걸치고 있으니까. 근데 복잡해 보여도 별다른 거 없다.

그냥 나를 뜯어 먹는 곳이 세 곳이라는 거?

“니들은 먹지만 말고 얘기 좀 해봐!”

손톱만큼 남은 아스파라거스가 클린턴의 모자를 툭 때렸다.

“에이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쟤랑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 할아버지랑 얘기하는 것 같다니까? 로돌포 니 생각은 어때?”

클린턴이 핫도그를 입 안에 욱여넣고 책임을 옆으로 넘겼다.

“난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지금까지 공연하고 영화촬영하고 무리 없이 소화했잖아?”

로돌포가 유난히 긍정적인 얘기를 하고 케이크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에이미가 주먹을 불끈 쥐는 반면, 나와 클린턴은 녀석을 게슴츠레 쳐다보고 있다.

“로돌포, 너 뭐 받기로 했냐? 애니메이션 시디? 켈리 클락슨 사인? 비디오 플레이어?”

로돌포의 인중이 피노키오 코처럼 길어진다.

하. 도대체 어떤 드라마길래 저러는 걸까. 이럴지 알았으면 미드 좀 봐둘걸.

하지만 묻지 않는다. 어차피 계약은 못 하니까.

와인으로 입가심을 하고 일어났다.

“에이미 미안해요. 이미 잡힌 계획이 있어서 폭스하고는 당분간 힘들 것 같아요.”

“무슨 계획?”

따라 일어난 그녀가 괜히 로돌포의 의자 다리를 툭 걷어차고 물었다.

“내년에는 투어를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활동할 계획이 없어요.”

“또 한국에서 활동한다고?”

“아니요.”

에이미를 향해 씨익 웃고 말했다.

“중국.”

슬슬 비가 내린다.

레스토랑을 나가려는데, 로돌포가 내 팔을 톡톡 건드렸다.

“전화.”

**

쏴아아.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차에서 내렸다.

누구를 찾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할리우드에서는 날파리들이 가득한 곳에 스타가 있다.

팻시는, 도로 한복판에 주저앉아 비를 맞고 있었다. 가슴에는 카세트플레이어를 안고 있고, 파파라치는 그녀를 찍고 있다.

하. 무릎은 또 어디서 다친 거야.

찢어진 청바지 천이 붉게 물들었다.

“안 꺼져? 꺼지라고!”

클린턴이 파파라치에게 화를 내보지만, 저건 오히려 저들을 즐겁게 할 뿐이다.

“시현, 둘이 사귄다는 소문 사실이에요?”

“이미 결혼 서약도 했다면서요?”

그녀를 괴롭히는 카메라 플래시가 나한테 달라붙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투둑투둑···

우산을 펼치자 팻시의 시선이 내 발, 무릎, 허리를 거쳐 올라왔다. 초점 잃은 시선 주위로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기가 가득하다.

“데럴···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가자.”

“하. 아직 더 마실 수 있는데.”

“아프겠다.”

나는 그녀의 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은 손도 댈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고, 입술은 얼마나 깨물었는지 상처로 가득하다.

“우리 병원 가자.”

남들은 밴드에게 성공했다는 말을 한다.

화려한 세상에 발을 디뎠다고 한다.

어떤 잡지는 데럴의 죽음이 날개를 달아줬다는 말도 한다.

개자식들.

니들이 모르는 게 있다. 작년만 해도 클린턴은 클럽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고, 로돌포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애니메이션에 빠져 살았다는 걸.

그래도 팻시는 잘 버티는 것 같았는데···

마음의 상처는 알게 모르게 곪아 버린 모양이다.

이런 녀석들을 두고 가다니. 데럴, 너 진짜 나쁜 놈이다.

팻시가 끌어안은 카세트플레이어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Shining Time]

지금 나는 행복해요.

너무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요.

왁자지껄한 클럽에서 처음 보는 밴드의 노래를 듣고 있어요.

하긴 여기는 온통 처음 보는 사람들이죠.

항상 쓰던 위스키가 오늘은 너무 달콤하네요.

나는 왜 이제야 이런 즐거움을 안 거죠?

예 알아요.

아침이 오면 이 행복에서 깬다는 것을.

하지만 밤은 또 오잖아요?

그래서 나는 즐길 거예요.

이제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을래요.

이 순간만은 온전히, 내게 선물할 거예요.

“가자.”

비에 흠뻑 젖은 채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팻시.

그녀를 달래 일으키는 내 모습.

그런 우리를 찍는 파파라치들.

빗소리가 거슬린다.

하지만 이 빗소리가 팻시를, 로돌포를, 클린턴을, 그리고 나를··· 빌보드 넘버원으로 이끌 서곡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 가십, 그리고 사운드 > 끝

ⓒ 고고3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