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208화 (208/227)

< 스타 다큐 (2) >

「스타 다큐 촬영 둘째 날」

‘사랑하는데’

영화는 서현과 영준 두 배우의 만남과 헤어짐을 세밀하게 그린다.

긴 무명의 시절을 버텨 톱스타가 된 영준.

드라마 조연, 예능 패널, 행사를 뛰며 이름을 알리고 있는 서현.

둘 다 일과 사랑을 병행하기에는 너무도 바쁜 삶이 돼버렸지만 여전히 서현과의 사랑을 지켜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영준과 달리, 얼굴을 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현의 외로움은 짙어져 가는데···

여주인공에 배우 이수정, 남주인공에 배우 송승국이 캐스팅된 영화는 현재 촬영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아. 9월인데 왜 이렇게 덥니?”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이수정은 반사판을 등지고 지친 숨을 몰아쉬었다. 스타일리스트의 부채질을 받으며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저 이제 한 씬 남았죠?”

“어. 한 시간쯤 뒤에 찍을 거니까 가서 좀 쉬어.”

빵모자 쓴 감독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는다.

“근데 카메오 누가 오는 거예요?”

이어서 촬영할 씬이자, 영화의 마지막 씬은 여주인공이 무명의 남자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비밀이라니까.”

“아 진짜 누구예요?”

매달리듯 물어봤지만 감독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알듯 모를 듯 묘한 웃음을 짓는 걸 보니 궁금증이 짙어진다.

“그럼, 조감독님이 알려줘요!”

“저 감독님한테 혼나요.”

조감독도 그녀의 눈을 피했다.

“아 진짜 뭐지.”

궁금하지만, 뭐 사실 크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누군들 올 테니까.

“감독님, 그럼 저 차에 가서 좀 쉴게요.”

“어, 딱히 디렉션 할 것 없으니까, 푹 쉬어.”

“뭐예요. 언제는 한 씬도 소홀히 하지 말라면서.”

“내가 말 안 해도 수정 씨가 알아서 할 거 아니야? 그리고 다음 씬은 그냥 잘 되게 돼 있어.”

“그냥?”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를 뒤로하고 이수정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터벅터벅, 남들 눈 신경 쓰지 않은 팔자걸음과 스태프들을 향한 걸걸한 인사가 이어졌다.

예전의 새침데기 배우 이수정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의 배우 이수정은 달라졌다.

그게 다 어떤 남자들 때문이지.

예전 일이 떠올라서 이수정은 입꼬리를 올리고 차를 바라봤다. 그녀를 변하게 한 남자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늘 낡은 청바지에, 요일마다 정해진 셔츠를 입고, 이마를 반쯤 덮는 변함없는 머리 스타일.

“곰 사장님!”

“끝났어?”

통화를 끝낸 최재환이 차에서 음료수를 꺼내 내밀었다.

칙!

“으아 시원하다!”

“여배우가 그게 뭐야.”

턱에 흐른 음료수를 손등으로 대충 훔치는 모습에 최재환이 얼른 손수건을 건넸다.

“여배우라고 뭐 사람 아닌가. 카메라 앞에서만 새침하면 되죠, 안 그래요?”

그녀의 너스레에 최재환은 피식 웃고 대본을 손에 쥐었다. 이제 한 씬 남았는데, 마음 같아서는 바로 찍고 서울로 올라가고 싶다. 하지만 대본상의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 해가 조금 기울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사장님, 나 그거 가르쳐줘요.”

“뭘?”

이수정이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물었다. 솜털이 바스락거리는 하얀 뒷목에 스타일리스트가 얼음 주머니를 가져갔다.

“축의금, 얼마 냈어요?”

“그만 좀 물어봐라. 귀에 딱지 앉겠다.”

매니저, 배우, 스태프들, 기자들까지 볼 때마다 묻는다.

이시현이 얼마나 냈냐고.

“그런 거 동네방네 떠드는 거 아니야. 액수가 뭐가 중요해?”

“저 꽤 냈거든요? 이렇게 말씀하실지 알았으면 그렇게 많이 안 냈는데.”

흠!

“그러니까, 살짝 얘기해달라는 거 아니에요.”

“아이고.”

최재환은 대본을 흔들어 머리카락 몇 번 들썩이고, 들릴락 말락 속삭였다.

순간 눈앞의 작은 입들이 쩍 벌어졌다.

“장난 아니다. 내 10년 치 월급보다 많아. 10년이 뭐야.”

스타일리스트 다리가 휘청거린다.

“이거 너희하고 나밖에 모르는 거다. 소문나면 각오해.”

“사장님은 시현 씨 그렇게 잘 될 거 알았어요?”

“응.”

최재환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요?”

“응.”

“근데 왜··· 계속 옆에 있지 않고 나오신 거예요?”

“질투 나더라고.”

“예?”

두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잘생긴 놈이랑 매일 같이 있어봐라. 질투 안 나겠냐?”

최재환은 낄낄 웃고 대본을 툭 내려놓았다.

“나 없이도 잘 될 놈이니까. 그래서 떠났다.”

“하여간 사장님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그럼 언젠가 사장님이 제 곁을 떠나면, 나도 미국에 진출하면 되는 건가?”

“너는··· 국내로 만족하자.”

“이이!”

이수정이 제 입술을 살짝 깨물고 새침하게 쏘아보며 차에 올라탔다. 등받이에 기대려다가 멈칫.

“근데 사장님, 카메오 누가 오는지 모르세요? 무명 배우요.”

“모르겠는데. 왜?”

“아니, 감정이입 해야 하는데 막상 보고 확 깰까 봐 그러지. 마음의 준비는 해야죠.”

“글쎄다. 스태프들도 얘길 안 해주네.”

뭐 크게 중요한 일도 아니지만.

**

[사랑하는데]

122# 저수지 / 낮 (황혼 시간대)

촬영을 끝낸 서현은 촬영장을 떠나지 않고 서성인다.

눈에 익숙한 풍경과 냄새는 그녀의 지난날과 오버랩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꼭 쥔 서현.

감독의 외침과 함께 무명 배우의 촬영이 시작된다.

“시현 씨, 지금 뭐 보세요?”

“아, 대본 보고 있습니다.”

“지금 가고 있는 촬영장 대본인가요?”

“예.”

나는 손에 쥔 대본을 VJ 카메라를 향해 살짝 들어 보였다.

“예전 매니저와의 인연 때문에 카메오 출연하시는 거죠?”

“그것도 그렇지만, 배우로서 탐나는 시나리오와 감독님이니까요. 내용이 정말 좋더라고요.”

“딱 한 장면 카메오로 출연하시는데, 시나리오를 다 읽으신 거예요?”

“당연하죠.”

그게 배우다.

“그럼 시현 씨, 등장하는 장면에 대해서 말씀해주실래요?”

“흠. 제가 평론가는 아니라서, 그냥 제 주관적인 생각을 얘기하자면··· 이 마지막 씬은 지문은 짧지만 사실 많은 걸 담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극이 계속 끌어온 여배우 서현의 감정을 홀가분하게 정리하는 장면이기도 하고요.”

나는 다시 대본을 보며 말했다.

“마지막 씬에서 무명 배우의 모습은, 여배우 서현과 톱스타 영준에게도 한때는 있었던 시간이었죠. 하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잖아요. 결국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되돌릴 수 없는 일이거든요. 무명의 배우가 꿈을 향해 달렸던 행복한 시간도, 불같이 사랑했던 연인의 시간도, 다툼과 헤어짐으로 상처받은 시간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거든요. 우리는 앞으로를 살아갈 존재들이니까. 뭐 그런 내용이에요.”

대본을 덮었다.

“근데 시간이 여유가 없네요.”

최대한 1시간이다.

곧바로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다음 스케줄을 이어가야 한다.

‘잘할 수 있을까.’

사실 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모든 순간에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지.

지금까지는 흥분과 설렘이 조금 더 컸을 뿐이다.

“잠깐 눈 좀 붙일게요.”

제작진에게 양해를 구하고 눈을 감았다.

상상한다. 머릿속에 떠올린다. 촬영장의 공기, 냄새, 바람, 소리, 부대끼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보는 서현의 시선··· 그리고 눈을 뜬다.

**

“아 진짜?”

울상이 된 여자가 전화기를 힘껏 붙들었다.

-그렇다니까, 오늘 촬영장에 이시현 왔었다니까! 장난 아니었다고 이년아! 카메라 앞에 서자마자 분위기 확 바뀌더라니까? 감독님이 슛 날리니까 바로 눈물 흘리는 거 있지? 수도꼭지 돌린 것 같았다니까? 와, 너도 봤어야 하는데.

“뭐야, 정말이야?”

-그러게 이년아, 내가 하루 더 알바 뛰자고 했잖아.

여자는 지난 사흘 동안 엑스트라 알바를 했다.

“이 자본주의에 찌든년아! 오늘 우리 수포 정기모임인데 어떻게 뛰어? 아 미치겠네, 어제는 성지훈 입대식에도 못 가고, 오늘은 기껏 알바 빠졌더니만 눈앞에서 놓치고.”

-그게 바로 머피의 법칙이란 거다. 아무튼 난 그 자본주의 덕에 이시현 코앞에서 봤지롱? 메롱!

“아이··· 그래서? 오빠 실물로 보니까 어때?”

작년 이맘때, 고3이었던 그녀는 성지훈에게서 이시현으로 갈아탔다. 뉴욕 클럽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오빠의 모습에 훅 가버렸기 때문이다.

-보지 않는 게 좋다.

“왜에?”

-한동안 잠을 못 이룰 테니까. 에휴 이년아, 니네 카페에 자리하나 만들어놔라. 나도 가입하게.

친구의 장난스러운 한숨에 깔깔 웃어보지만, 아쉬움이 여전한 얼굴로 전화를 끊는다.

‘이 소식을 알려 말아.’

잠깐 고민했지만, 좋은 일은 다 같이 나누는 법이다.

“부회장님!”

“어, 왜?”

손님 맞이하듯 입구에서 회원들을 들이던 조별아가 방긋 웃는다.

“오늘 시현 오빠, 경주 저수지 촬영장에 들렸대요.”

“정말?”

“배우 이수정 있잖아요? 곰 매니저님이 데리고 있는 여배우.”

“사랑하는데?”

척하면 척.

이시현과 관련된 일은 부회장 옆구리 찌르면 뭐든 술술 나온다.

“거기 왔다고?”

“예.”

“와, 역시 우리 오빠 의리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

“치. 근데 저는 좀 섭섭해요.”

“왜? 여기는 안 와서?”

“그러니까요. 우리 팬들 얼굴 한번 보러오면 얼마나 좋아요?”

“훗. 원래 소중한 건 멀리서만 보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혹시 모르는 거 아니야? 오빠가 갑자기 찾아올지도.”

조별아가 달래듯 미소 짓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부회장님, 어제 성지훈 입대하는데 가셨죠?”

“응.”

회원들 한 부대가 몰려갔었다. 그래서인지 오늘 모인 회원들 표정이 유난히 들떠 있다. 어제 얘기 떠들 생각에 다들 입이 근질거리는 모양이다.

“저 죄송한데, 예전에 부회장님 성지훈 팬클럽 회장이셨다면서요?”

“아주 오래전 얘기지, 배추도사 무도사 구름 타던 시절 얘기야.”

어깨를 으쓱하는 조별아에게 여자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팬클럽 회장이셨는데, 성지훈 머리 깎은 모습 보니까 어떠셨어요?”

조별아는 제 입술에 손을 얹고 잠시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했더라.

“별생각 없었는데?”

유통기한 지난 건 돌아보지 않는 법.

아무튼.

“자, 들어가서 앉아. 오늘은 지에스에서 여기 전세 냈다니까, 먹고 싶은 거 다 주문해!”

“진짜죠?”

“그럼!”

들뜬 회원을 들여보내고 조별아는 카페 안을 들여다봤다.

1회 정기 오프라인 모임이 엊그제 같은데···

그때보다 회원 수도 훨씬 늘었고, 친목 모임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잦아졌다.

그래서 요즘은 행복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다.

남들은 뭘 그렇게 쫓아다니냐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겠지만. 아니아니, 그건 모르는 소리다.

이시현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괜히 미소가 씰룩이고, 우울했던 마음도 위로가 된다.

“세상 어디에 그런 만병통치약이 존재해?”

그리고 전과 달리 지에스에서 지원해준다는 점도 괄목할만한 변화다. 모임 장소뿐 아니라, 촬영과 경비까지 상당 부분 지원이 들어온다.

“부회장님, 이제 얼추 모인 것 같아요!”

“아, 그럼 시현Love님은 밖에 사거리에 있는 스탭에게 전화해서 철수하라고 하시고요. 내사랑시현님은 바로 경품 추천 준비하시고요.”

“옙!”

모든 게 순조롭다. 그래서 기지개를 쭉!

**

“후후.”

1층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팬들의 모습이 보인다.

조별아가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시현 씨, 오늘 마지막 스케줄은 팬들과의 만남인가요?

“예.”

정신없는 하루였다.

“팬들이 시현 씨가 주방에 숨어 있는 거 알면 깜짝 놀라겠네요.”

“그러려고 온 거니까요.”

나는 짓궂게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봤다.

“그럼 언제 나가실 거예요?”

“일단 경품 추천할 거예요. 거기서 이제 부회장인 조별아란 친구가 이시현 실물 인형에 당첨되고, 그때 제가 상자에 들어갈 거고, 팬들 앞으로 상자가 나갈 겁니다.”

“아하.”

마침 시작한 것 같다.

마이크 울리는 소리가 아래서 들리자, 강 팀장과 매니저들이 미라 관처럼 생긴 나무 상자를 열고 말했다.

“들어가.”

몸을 욱여넣는 내 모습을 VJ가 열심히 카메라에 담는다.

“시현 씨 되게 재밌어 보이시는데요?”

“그러게요.”

깜짝 놀랄 팬들을 생각하니 입꼬리가 춤을 춘다.

“자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상자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찾아왔다.

근데 이거 되게 불편하네. 어어, 흔들린다. 강 팀장아 상자 떨어트리면 알아서 해라. 삐걱 소리, 불안한 흔들림.

그런데 너무 들뜬다. 마치 놀이 같다.

이럴 때면 팬들이 꼭 동네친구들 같다니까.

-자, 부회장님, 실물 인형 한 번 볼까요?

-예!

우렁찬 팬들의 함성.

어떻게 할까, 놀라게 해 줄까? 나가자마자 어흥! 이럴까?

어휴 심장은 또 왜 이렇게 떨려. 마치 무대에 오르기 전 같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뚜껑 엽니다!

빛이 확 들어왔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데··· 눈부심이 사라지고 폭죽을 든 팬들의 환한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다.

팡! 팡! 팡!

눈앞에서 꽃가루와 종이들이 흩날린다.

“써프라이즈!”

하. 오늘 몰래카메라 주인공은 팬들이 아니라 나였나 보다. 강 팀장 이 자식. 이런 못된 팬들 같으니라고.

“울지마!”

“울지마!”

“울지마!”

그렇게 말해도 울 거다. 기쁜 눈물이니까 오늘은 말리지 마.

“오빠, 사랑해요!”

훗.

“울다가 웃으면······.”

나를 기다려준 팬들에게 약속한다. 언제까지고 배우 이시현으로 남겠다고.

< 스타 다큐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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