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스타 (1) >
「1년 후」
-기집애, 그래서 너도 지에스 가서 계란 던졌다고?
“누군 그러고 싶어 하니? 그렇게라도 해야 지에스가 일을 해요!”
여자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만지는 중에 휴대폰을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너도 참 극성이다. 그런다고 이시현이 한국에서 활동하겠냐? 미국에서 겨우 자리 잡았는데?
“오지 그럼! 우리 천사포가 이렇게 눈 부릅뜨고 있는데.”
이시현이 미국 활동을 시작한 지 어언 1년.
작년 911테러 이후 그는 미국으로 훌쩍 떠났다. 소문에는 테러로 희생된 밴드의 리더와 어떤 약속을 했다는데, 아무튼 그 빈자리를 물려받아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금발에 파란 눈 애들이 오빠를 좋아해 봤자 얼마나 좋아하겠어?”
-왜? 저번에 섹션텔레비 근황 인터뷰 보니까 난리던데. 미국 소녀들 한 무리가 이시현을 뒤 쫓더구만.
그래서 이시현이 도망치는 모습까지.
-프레디라는 가수와도 친한 것 같고.
“아 좀! 불길한 소리 좀 하지만. 그러다 영영 안 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도 저번에 왔었잖아?
“하루 있다 간 거?”
팬들에게 있어 그 하루는 잔인했다. 월드컵 4강? 그게 무슨 소용이람. 전 국민이 필승 코리아를 외칠 때, 천사포들은 공항 모여서 가지 말라고 외쳤다.
“야 끊는다. 손님 기다리셔.”
한 번 더 옷매무시를 고친 여자는 연기가 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탕비실을 나섰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잡지를 보던 남자가 고개를 든다. 그가 커피를 받자, 여자는 피팅룸으로 걸어가 안을 살폈다. 신부에게 붙은 동료 직원이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사인을 보냈다.
“커피 입에 맞으세요?”
“예. 맛있네요.”
남자는 수더분하게 웃었다.
‘어디서 본 얼굴이네.’
왠지 눈에 익은 얼굴에 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헐! 곰 매니저?’
신부가 다음 드레스를 피팅하는 동안 여자는 슬쩍 물었다.
“저 혹시··· 시현 오빠 매니저님 아니세요?”
“아. 지금은 아닙니다.”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여자는 아랫입술을 재빨리 핥고 다시 물었다.
“저, 궁금해서 그런데 오빠 언제쯤 한국에 올까요?”
“글쎄요. 아직 영화 촬영이 끝나지 않았다고 들어서······.”
실망하는 여자의 모습에 곰 매니저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곧 오겠죠. 그 녀석 팬들 걱정에 잠 못 드는 놈이잖아요.”
“그러네요.”
여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고 피팅룸을 다시 살폈다.
“신부님 준비 다 되셨습니다.”
커튼이 걷히고,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에 곰 매니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본 모양이다.
**
「LA」
“오버부킹? 그럼 아무나 끌어내라고 해! 니들 그거 특기잖아! 우린 꼭 뉴욕행 비행기 타야 한단 말이야!”
매니저는 휴대폰에 입술을 바싹대고 분노를 터트렸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뉴욕으로 날아가 MTV 행사에 참석하려면 꼭 비행기를 잡아야 한다. 그런데 오버부킹이라니.
“큰일이네··· 아!”
실랑이 끝에 이마를 북북 긁던 매니저가 눈을 번쩍 떴다.
“제니퍼! 지금 당장 프레디 쪽에 연락해서 알아봐요. 지금 LA에 있는지, 전용기 아직 공항에 있는지!”
Alta의 공연이 어제 성황리에 끝냈다. 그러니 아직도 LA에 있다면 신세 좀 질 수 있을 터. 어젯밤에 촬영장까지 찾아와서 같이 놀자고 생떼를 부렸으니 아직 있을 것 같은데.
“후!”
일단 전화를 끊은 매니저는 스태프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이시현이 촬영을 준비 중이다.
작년의 뉴욕 콘서트와 911테러 사건 이후 이시현에게는 선택지가 많아졌다.
팝의 황제라는 변수, 뉴욕데일리 특종보도, 그리고···
어떤 건 기쁘고, 어떤 건 분명 슬픈 일이지만, 어쨌든 모든 것이 밴드와 이시현에겐 유리하게 작용했다.
특히 영화제작사들의 제안이 많았는데, 기계에 지배당해 가상 세계에 갇힌 인간들에 대한 스토리, 절절한 사랑 이야기, 용병 출신의 남자가 납치된 의뢰인의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토리 등이 이시현에게 왔다.
물론 한국에서 보내온 대본도 많았다.
형사 얘기라든지, 군인 얘기라든지, 옛 추억에 관한 얘기라든지. 너무 많아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많고 많은 대본 중에서, 이시현은 스콧 에이미의 도움을 받아 계약을 체결하고 올해 4월부터 촬영 중이다.
“와, 저러니까 진짜 로봇 같네.”
스태프들이 속삭인다.
“그렇게 반대하던 아널드도 이젠 흡족해하더라고.”
“결국 감독 선택이 맞은 거야. 다들 처음에는 반대했잖아? 갑자기 캐스팅 변경이라니.”
“반대한 거야 스토리라인 때문에 그랬던 거지. 오디션에서 연기는 끝내줬잖아?”
스태프들을 지나쳐, 매니저는 금발의 여자에게 다가갔다.
“비행기 구했어요?”
케이시가 그를 힐끗 보고 물었다.
“뭐 어떻게 될 것 같아.”
“다른 멤버들은요?”
“뉴욕에서 준비하고 있겠지. 제대로 하고 있는지 걱정이지만.”
한숨 돌리고 매니저의 모습에 케이시는 안경 콧대를 매만지며 지나온 날을 회상했다.
“벌써 9월이 코앞이라니.”
많은 일이 있었다. 이시현에게도 밴드에게도.
“짐, 우리 내기할래요?”
“무슨 내기?”
“다음 주에 과연 빌보드 차트 제일 꼭대기에 밴드의 이름이 들어갈지, 아닐지.”
데럴이 남긴 ‘코니아일랜드’는 올 초 정규 앨범 발표 후 조금씩 상승곡선을 그리더니 여름이 오자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음반판매량의 급격한 변화, 라디오 방송에서의 잦은 노출.
Four Warriors가 뉴욕 클럽에서 가장 핫한 밴드가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다.
“그럼 내기가 성립이 안 되겠는데?”
매니저가 피식 웃는다.
“왜요?”
“우리 둘 다 같은 데 걸 거 아니야.”
“그런가?”
케이시가 깔깔 웃다가 멈췄다. 감독의 매서운 눈이 그녀를 쏘아본다.
“다들 조용히 해!”
그리고.
“액션!”
**
「뉴욕, 2002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레드카펫」
“우와, 사람 진짜 많네.”
로돌포가 코를 후비며 차창 밖을 바라본다.
“클린턴.”
팻시의 긴 다리가 클린턴의 무릎을 툭 찼다.
“왜?”
“왜긴 왜야. 다리를 달달 떨고 있으니까 그러지.”
“떠는 게 아니라 잠 깨려고 그러는 거야!”
“뭐하러 그렇게 해? 나한테 맞으면 깰 텐데.”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두고 로돌포가 차 문을 열었다.
“야! 같이 가!”
해마다 여름 끝 무렵이면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그해 최고의 뮤직비디오를 가리기 위해 모인다.
화려한 퍼포먼스, 유머와 위트, 웃음이 넘치는 환상적인 무대를 보기 위해 전 세계 팬들의 이목이 쏠리는 날이기도 했다.
“Four Warriors!”
카메라 플래시, 팬들의 환호성이 밴드에게 달려들었다.
최근 가장 핫한 밴드인 그들이지만 아직은 카메라가 낯설고 어색하다.
“팻시! 시현은 어디 있나요?”
“LA에서 오고 있어요!”
노래와 연기를 동시에 하느라 요즘 이시현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다.
하지만 그래야 밴드의 인지도가 올라간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시현은 힘든 기색 없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리허설까지는 와야 하는데.”
레드카펫을 벗어난 팻시가 입술을 잘끈 깨물자, 클린턴이 콧바람을 흥 뱉었다.
“걔는 늦어도 돼. 리허설? 언제부터 우리가 완벽을 추구했다고 그래?”
기세 좋게 껄껄 웃었지만, 그 웃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으로 변했다.
“이 자식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공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 현란한 조명, 무대, 수상자들의 기뻐하는 모습과 수상 멘트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이시현이 오질 않는다.
“로돌포!”
급기야 클린턴이 비장한 각오를 하고 말했다.
“왜?”
“내가 노래한다.”
“미쳤어?”
곧장 팻시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슬슬 걱정되는 가운데, 다음 시상을 위해 유명 여배우가 무대에 올랐다.
“클레어, 잘 지냈나요? 요즘 뭐 하고 지내요?”
“예, 전 어제까지 영화 촬영하고 왔어요.”
“오, 그래요?”
“예. 아주 신나고 하드한 영화죠.”
“아널드와 기계들이 등장하는 그 영화 말이죠?”
“하하! 맞아요. 그리고 또 한 사람 더 등장하죠.”
“아하!”
사회자가 눈을 찡긋하고 외친다.
“그럼, 베스트 신인상 후보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무대 화면에 후보자들의 뮤직비디오가 나오기 시작하자 모두의 눈과 귀가 멈췄다. 그리고.
“오케이, 다 함께 외칠까요? Four Warriors!”
팻시는 순간 멍해져서 눈만 깜빡여야 했다. 주위를 둘러싼 가수들이 밴드를 향해 박수를 친다. 축하와, 격려와, 부러움이 담긴 시선들···
“팻시.”
로돌포의 손길을 따라, 팻시는 떨림을 참고 무대로 올라갔다.
사회자가 건넨 마이크를 서로 미루다가 결국 팻시가 손에 쥐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겨우 두 마디 뱉었는데 가슴이 파르르 떨린다.
“아······.”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이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환호성.
“미안. 늦었어.”
“너··· 나중에 얘기하자.”
그녀가 흘긴 눈으로 건넨 마이크를 이시현은 옅은 미소와 함께 받았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카메라 플래시와 조명, 길잃은 별이 맑은 눈동자에 가득 차고서야 그는 입술을 뗐다.
“가장 빛나던 시간에, 홀로 여행을 떠난 우리의 영원한 리더 데럴에게 이 상을 바칩니다.”
**
“이날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이시현의 밴드 Four Warriors는 베스트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파워풀한 무대로 존재감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한송이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계속해서 신문기사를 읽었다.
“현재 빌보드 핫 100 차트 2위에 자리매김해 있는 Four Warriors. 과연 이시현이 한국 최초 빌보드 정상에 오를지 관심이 집중된 만큼··· 한편 당분간 이시현의 한국 일정은······.”
펄럭.
“칫. 미국에서 혼자만 잘나간다 이거지?”
테이블에 신문을 툭 던지고 콧바람을 흥 뱉었다.
“언니, 그 신문 안 보실 거면 저 가져도 돼요?”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여자아이가 신문을 가져간다.
“가져가란다고 그렇게 쏙 가져가면······.”
“송이 씨?”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성 팀장이었다.
“아, 오셨어요?”
“여기서 뭐 해? 들어가자.”
“예.”
예식장 입구에 늘어선 화환들, 관계자들, 연예인들까지.
이쪽 종사자들에겐 별일 아닌 일일지 모르나 일반인 하객들은 생전 처음 보는 풍경에 어리둥절한 듯 보였다.
“신부 측 오빠가 유명한 매니저라며?”
“이시현 매니저였대.”
“진짜? 그 이시현?”
“그렇다니까. 지금은 아예 매니지먼트 차려서 혼자 하잖아.”
“오 능력자, 한번 꼬셔볼까?”
여자들이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내며 신랑 측 부모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식장으로 들어간다. 한송이와 성 팀장은 신부 측으로 다가갔다. 최재환이 혼자서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매니저님!”
“어 왔어?”
“누구 결혼식인데 당연히 와야죠.”
“축하드려요.”
이미 넘치게 축하 인사를 받았겠지만, 최재환은 싱글벙글해서 그녀들을 반겼다.
“이럴 때 시현 씨도 함께하면 좋을 텐데. 혹시 청첩장 보내셨어요?”
성 팀장이 아쉬운 듯 물었다.
“바쁜데 청첩장은. 올 수나 있나 미국에서 여기가 어디라고. 어서 들어가, 많이 먹고.”
두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내고도 최재환의 입이 귀에서 내려오질 않는다. 그래도 인생 헛산 건 아닌지 하객들이 참 많이도 찾아왔다. 예비 신랑한테 큰소리 좀 쳤는데, 아무래도 면은 선 것 같았다.
“곧 예식 시작됩니다.”
예식장 직원의 안내에 최재환은 신랑 측 부모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후.”
시계를 한번 보며 가슴을 어루만진다.
이제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웨딩홀에 입장해야 하니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가. 가슴이 조금 답답한 이유가.
“내가 이럴지 알았어. 야, 신부 데리러 가야지!”
멍하니 있는 그에게 강 팀장이 다가와 나무랐다.
그런데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왠지 저 엘리베이터 문 한번 열리는 것만 보고 가야 할 것 같았다.
“누구 기다리는데?”
최재환은 피식 웃기만 할 뿐 말없이 엘리베이터를 계속 바라봤다.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막힌 가슴이 뻥 뚫리고 고인 숨을 쏟아냈다.
“자식··· 누가 월드스타 아니랄까 봐 꼭 마지막에 등장이야.”
< 월드스타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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