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203화 (203/227)

< 마이 히어로 (4) >

-고작 5분짜리 날씨 코너를 위해 헬기를 띄웠다는 거야?

“날씨가 좋아서!”

티 없이 맑은 하늘 아닌가.

이럴 때 헬기를 띄우지 또 언제 띄운단 말인가.

-날씨가 좋아 뉴욕까지 가서 헬기를 띄웠다는 게 지금 제정신으로 할 소리야?

“하하! 아무리 우리 ACN이 메이저 네트워크에 빌붙어 사는 신세라지만, 겨우 헬기 한 대에 이렇게 난리실까.”

-지금 웃음이 나와! 돌아오면 경위서 쓸 각오해!

쩌렁쩌렁 귀를 때리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피디는 얼른 휴대폰을 보조피디에게 넘겼다.

“중계차 스탠바이 됐지?”

“예! 그런데 보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그냥 국장님한테 제대로 얘기하고 촬영해가죠?”

헬기 소음 때문에 보조피디가 입가에 손을 모으고 외쳤다.

“요정이 노래를 부른 그 1분에 올해 최고 시청률이 나왔어! 그날 이후 콜이 천 통이 넘게 왔고!”

“그러니까 정식으로 촬영해가서 편성 받으면 되잖아요? 위에서도 그러라고 했고, 그런데 굳이 날씨 생중계에 끼워 넣을 필요 없잖아요?”

“임펙트!”

“예?”

“오늘이 지나면 사람들은 궁금해서 미칠걸?”

피디가 지상을 가리키고 말했다.

“저 해변이 사람들로 가득 찬 이유가, 저 무대의 주인공이!”

**

“젠장, 돈 날렸네.”

마지막으로 무대 점검을 끝낸 홍 피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깨까지 숙이는 모습에, 메인작가가 손을 벌리는 시늉을 하며 낄낄 웃는다.

“그런다고 받을 거 안 받을 저 아니거든요? 그러게 함부로 내기하시는 거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돼? 타국에서, 그것도 겨우 열흘 전에 공지했는데 저렇게 많이······.”

홍 피디는 무대 안전펜스에 기댄 여자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웃음 가득한 얼굴들, 반짝이는 눈, 건강미 넘치는 구릿빛 피부의 여자들. 무대는 시작도 안 했건만 이곳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어쩌겠어? 그게 말이 됐는데.”

“후. 이거 정말 뭔 일 일어나는 거 아니야?”

머리를 흔든 그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멀리 하늘에 헬기가 보인다. 눈 부신 햇살에 잠시 미간을 좁히는데, 무전기에서 스태프 목소리가 들렸다.

-입장 인원 7천 명 넘었습니다! 근데 아직도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현장 카운터 스태프의 목소리에 대기실이 웅성거렸다.

흥분한 스태프, 주먹을 불끈 쥔 스태프, 입을 쩍 벌린 스태프까지.

“지금 뭐라고 그런 거야?”

구석에서 기타를 조율하던 클린턴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7천 명 넘었다고.”

“뭐?”

믿지 못하겠는지 클린턴과 로돌포가 무대에 쏜살같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밖에 지금 장난 아니야! 요정들이 사방에 쫙 깔렸어!”

“놀랄 시간에 연습이나 더 해.”

팻시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녀의 손이 살짝 떨린다.

그 모습에 피식 웃던 박 상무는 데럴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설마 또 약 먹고 조는 건 아닐까 싶어, 다가가 슬쩍 말을 붙였다.

“데럴.”

못 들은 척하면서 귀는 쫑긋 세운다.

“사람 많이 와서 쫄았냐?”

중지가 그럴싸하게 올라오자, 박 상무는 콧바람을 흘리고 최재환 어깨에 손을 올렸다.

“7천 명이라. 이 추세면 금세 1만 넘겠어.”

“다들 이시현 팬은 아닐 겁니다. 유원지에 놀러 온 사람들도 있고, 근처에서 아직 페스티벌이 계속되고 있다니까, 오다가다 들린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최재환은 애써 차분하게 상황을 살폈다.

“최미숙 선생님이 사회를 본다니까 오신 분들도 많을 테고···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예?”

“오늘 얼마나 오던 중요하지 않아. 그저 준비한 만큼 보여주면 되는 거지.”

그래, 맞는 얘기다.

“무대 30분 전입니다!”

하지만 스태프의 외침에 심장이 다시 두근거린다.

괜히 입이 타서, 최재환은 물 한 모금 마시고 최미숙에게 다가갔다. 마침 그녀에게 붙어있던 스타일리스트가 한발 물러섰다.

“오다가다 들릴 수는 있어도, 그냥 떠나지는 못할걸?”

큐시트를 쥔 최미숙이 웃으며 말했다.

“예? 아······.”

좀 전에 한 말을 들은 모양이다. 최미숙이 다시 말했다.

“쟤는 예상했을까? 저렇게 많은 팬이 자기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그녀의 손이 메이크업 중인 이시현을 가리켰다. 녀석은 눈을 감고 스타일리스트에게 얼굴을 맡기고 있었다.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네.’

하긴. 언제는 못생겼었나. 저놈 삶에서 단 1초도 그런 순간은 없었을 거다.

‘훗.’

최재환이 픽 웃는 이때,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렸다.

“대표님!”

차 대표가 들어와 매서운 눈초리로 대기실 안을 살핀다. 숨죽여 서 있는 스태프들을 보고, 메이크업을 마친 이시현을 바라본다.

“준비됐냐?”

“예!”

“그럼 뭐 하고 있어? 올라가서 놀아야지!”

**

“시현 씨, 무대 올라갑니다!”

스태프의 목소리에 맞춰 나는 무대에 발을 내밀었다.

후.

걸음걸음에 심장이 들썩인다.

오로지 나를 보기 위해서 먼 거리를 달려 기꺼이 찾아온 팬들, 그들 앞에서 내가 보여줄 것들, 준비했던 시간,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이 두근거림과 함께 눈앞을 스쳐 갔을 때···

나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항상 그렇듯 익숙한 시선과 미소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미처 날뛰던 심장이 고요해졌고, 마침내 나는 팬들 앞에 섰다.

하지만 지금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눈을 질끈 감고 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뿐이다.

환호는 팬들이 내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니까. 너무도 소중해서, 포장지조차 뜯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한 선물.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나만 선물을 받을 순 없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이런.

목청껏 외쳤는데, 갑자기 목이 콱 멘다.

“역시, 내가 이럴지 알았어!”

최미숙이 드레스 자락을 흔들며 무대에 올라왔다.

환한 호박꽃 미소에 유난히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파도치듯 흔들린다.

“안녕하세요, 배우 최미숙입니다!”

그녀가 전광판에 비치자 팬들의 환호가 더해졌다.

“여러분, 제가 내기를 했어요. 먼저 오늘 팬미팅에 얼마나 많은 분이 오실지를 두고 MNC 피디랑 내기했답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도 짐작하시겠지만, 제가 이긴 것 같네요. 지금까지 카운트 숫자가 무려 만이천백오십삼 명! 물론 지금 순간에도 계속 늘고 있습니다.”

최미숙이 진행을 이어가는 동안 나는 눈물을 닦기 바빴다. 제발 좀, 눈물아 좀 멈춰라!

“그리고 또 하나 내기했거든요. 과연 시현 씨가 무대에 올라가서 몇 분 만에 울까.”

정말이야? 잔인하다 진짜. 근데 누구랑 내기를?

“근데 이번에는 제가 졌어요. 저는 시현 씨가 안 울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얘가 이래 봬도 은근히 독하거든요. 여기 미국도 혼자서 무작정 왔으니까 말이에요.”

깔깔 웃음 뒤에 그녀가 나를 훑어본다.

“그래서 누가 이겼냐? 시현 씨 매니저가 이겼네요. 최재환이라고 있어요. 아마 팬들은 아실 거예요. 곰탱이 하나 있는데,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오늘은 시현이가 울 것 같다고. 그러면 이말 한마디만 해주라고.”

무슨 말을···

나는 눈물을 마저 훔치고 그녀를 바라봤다.

“잘생겼으면서 여리기까지 하면 반칙이라고요.”

빵 터진 팬들 웃음에 최미숙이 잔잔히 웃고 다시 말했다.

“농담이고요, 실은 이렇게 말했어요··· 넌, 최고야.”

하.

“으, 닭살! 사내들이 하여간 유별나요? 안 그래요?”

유별나기보다는 이상한 관계일 거다.

“시현 씨, 계속 그렇게 울고 있진 않을 거죠?”

최미숙이 입가에 웃음을 지우고 물었다.

나는 마이크를 다시 붙잡았다. 그리고 잠깐 생각했다.

그날 레드록스 공원에서 날 보며 눈물 흘린 팬 앞에서, 그때도 이 생각을 했었다.

‘여기서 내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나는 이 아이의 기억에 어떻게 남을까하는 그런 생각.

이런, 또 눈이 흐려지네.

오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목메면 노래 못하는데, 메이크업 지워지면··· 그건 별 상관없으려나. 이 얼굴이야 뭐.

“스텝 OST ‘영웅’ 불러드리겠습니다.”

제발 그냥 두면 안 되겠니

꼭 그렇게 괴롭혀야겠니

그냥 겁이 났을 뿐이야 그래서 주먹을 쥐었을 뿐이야···

**

「채널 12 스튜디오, LA」

타타타!

콰쾅!

리처드 감독은 의자에 기대 TV를 보고 있었다.

포탄에 파헤쳐진 진흙더미, 그 위를 달리는 군인들의 모습 같은 전쟁터의 처참함과 비장함이 화면 가득 넘쳐흐르고 있었다.

“도무지 모를 일이군.”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저런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 전 그는 한국의 연출 감독이랑 통화해 이것저것 물었다. 이름이 박태였던가. 아무튼 대화 중에 믿기 힘든 얘기를 들었다.

불과 촬영 열흘 만에 크랭크업했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믿기지 않아 재차 물었는데, 더 놀라운 얘기가 돌아왔다.

주연배우 이시현은 촬영 이틀 전에 캐스팅이 됐다는 거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미친 거 아니냐고 물었을 정도니까.

그럼 이시현이란 배우는 대본을 볼 시간이 불과 이틀밖에 없었다는 얘기인데··· 그게 말이 된단 말인가?

할리우드에서는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연출가로서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프로덕션에 찍혔다면 별수 없지.”

리처드는 다시 한번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미련을 남겨 좋을 것 없으니 깨끗이 포기한다. 어차피 배우는 널리고 널렸으니까.

비디오테이프를 뺀 그는 또 다른 테이프를 꺼냈다.

출장 중인 캐스팅 디렉터가 촬영해 보내온 영상이었다. 별생각 없이 밀어 넣고 소파에 다시 등을 기댔다.

10분 뒤.

“맙소사!”

벌떡 일어난 그가 전화기를 움켜쥐었다.

“지금 콜로라도에 있는 캐스팅 디렉터가 누구야? 당장 연결해줘! 연극 무대의 그 요정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이야!”

잠깐 전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분명 그 동양인이야!’

이런 재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그래, 까짓것 프로덕션이 뭐 어쨌다고.’

리처드는 지금 막 다시 그 동양인을 부르자고 결심했다. 그가 거절하진 않을까 우려가 조금 되지만, 기회를 주겠다는데 싫어할 리가 있나. 에이전트도 아주 구걸하듯 쫓아왔었으니까.

이때, 전화가 다시 울렸다.

-지금 ACN 채널 확인해보면 된다는대요?

“뭐?”

눈을 찌푸린 채로 리모컨을 들었다. 채널이 계속 바뀌고, 리모컨을 든 손이 내려간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

“Four Warriors, 무대 올라갈 준비 합니다!”

입장객 카운터가 이만 명을 넘어선 가운데, 밴드는 데럴을 선두로 무대 옆에서 대기했다.

‘이런 기분인가.’

문득 저 많은 사람이 내 팬이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머리에 자리 잡는다.

얼마나 좋을까. 행복하겠지? 되게 신나겠지? 저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한다는 거 말이야. 그런데··· 그럼 왠지 또 무섭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수라도 하면? 실망이라도 시키면?

‘스타는 이런 중압감을 가지고 있는 거구나.’

그래서인지 무대 옆에서 보이는 이시현의 옆모습이 새삼 너무도 커 보였다. 왠지 든든하고, 왠지 거대하다. 그런 그가 외친다.

“이번 무대는 제가 미국에 와서 가장 친해지고, 가장 좋아하게 된 밴드가 부릅니다. Four Warriors!”

이시현의 외침과 스태프의 큐사인에 맞춰 밴드는 무대에 나갔다.

지난번 촬영에서처럼 같은 방향으로 팔을 흔들고, 다리를 내밀며 로봇처럼 줄지어 선 밴드를 향해 팬들이 박수와 환호로 반긴다.

“여러분 여기가 어디죠?”

한목소리가 된 팬들이 세상이 떠나가라 외쳤다.

그 외침의 한가운데서 이시현이 은은한 미소와 함께 밴드를 바라봤다.

“Four Warriors가 부릅니다. 코니아일랜드.”

-이만 오천··· 죄송합니다. 지금 너무 많이 들어와서 셀 수가 없어요!

이미 수용인원은 초과했다.

절정으로 치달은 무대로 인해 해변의 열기 역시 후끈했다.

하지만 무대 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다.

지금 대기실에 들어온 사람들 때문에 지에스 식구들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나마 박 상무가 선글라스를 벗고 속삭일 뿐이었다.

“Alta, 프레디?”

그가 여길 왜··· 어떻게···

하지만 박 상무의 시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더 움직여서, 프레디의 뒤에 있는 곱슬머리 남자를 본 순간, 선글라스는 바닥에 툭 떨어졌다.

< 마이 히어로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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