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201화 (201/227)

< 마이 히어로 (2) >

“밴드에 대해서 얘기해주시겠어요?”

“저희는 보컬, 기타리스트, 드러머, 베이시스트로 이뤄진 4인조 록밴듭니다.”

“어떤 음악을 주로 하나요?”

“그때그때 다르긴 한데, 굳이 꼽자면 우리 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편이죠. 하고 싶은 얘기든, 혹은 지나간 시간에 대해 아쉬움이든. 우리 속에 숨어 있는 걸 끄집어내려고 노력합니다.”

“몇 가지 질문 더 드릴게요.”

“무엇이든.”

“이시현과의 작업은 어떠셨나요? 그가 한국에서 스타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기자의 질문에 매니저는 잔뜩 허황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밴드가 어쩌고, 내면이 어쩌고. 계속 듣기 민망할 정도로 소설을 쓰고 있다.

“저거 완전 사기 아니야.”

지켜보던 팻시가 눈꼬리를 치켜뜨자, 철조망에 기댄 클린턴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내버려 둬. 저럴 때라도 매니저 티 내는 거지.”

그리고 오늘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클린턴은 하품같은 긴 한숨을 내쉬고 밤하늘을 바라봤다.

“후··· 이런 무대는 정말 오랜만이네.”

무대를 내려온 이후 계속 이 상태다. 흥분이 좀처럼 가슴을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후회돼?”

“무슨 후회?”

“Alta에 계속 있을 걸 하는.”

“하하. 아니.”

클린턴은 콧바람을 들썩였다. Alta라고 처음부터 유명 팝 밴드는 아니었다. 그들도 허름한 클럽을 전전하던 시절이 있었고,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높은 곳에 섰을 뿐이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오늘따라 왜 자꾸 질문이야? 좋은 기분 날아가게.”

끈적이처럼 자꾸 붙는 시선을 피해 클린턴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주차장을 바라봤다. 이시현 주위가 온통 사람들이다.

“왜 Alta에서 빠진 거야?”

“내 키가 좀 커? 높은 곳은 싫었을 뿐이야.”

그리고 우연히 너희들을 만났을 뿐.

“우와, 저 여자 끝내준다!”

금세 시선이 팔린 클린턴이 페로몬을 쫓아 떠나자, 팻시는 문득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봤다. 로돌포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재밌었지? 오늘 무대.”

로돌포의 천진한 얼굴에 팻시는 주머니에 감춘 손을 꾹 쥐었다. 무대의 여운이, 기타 줄의 떨림이 여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짐이나 챙겨.”

어차피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 또 그대로니까.

하지만, 이시현의 빈자리가 조금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근데, 데럴 이 자식은 또 어딜 간 거야?”

**

“기자님은 오자마자 일이세요?”

“열심히 해야죠. 기껏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그냥 갈 순 없죠.”

혀를 내두른 성 팀장에게 이우정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못 말리겠네. 그래서 무슨 얘기 하셨어요?”

“오늘 시현 씨가 어떻게 무대에 올라간 건지 물어봤죠. 그리고 미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이것저것.”

마치 금광을 캐듯 열심히 비하인드 스토리를 긁어냈다.

“무대, 어떠셨어요?”

이우정은 노트를 탁 접고 물었다. 연예부 기자로 살면서 놀랄 것 많이 보며 살았지만, 오늘만큼 놀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이시현이 미국에 있던 3개월,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자님, 혹시 아까 무대 찍으셨나요?”

“아니요. 시현 씨가 무대에 설지 알았나. MNC 팀에 물어봤는데, 그쪽도 카메라 안 가져왔대요. 짐가방에서 카메라 꺼내는 거 5분도 안 걸리는 건데, 그 5분 아까워서 그냥 나왔다가 후회막심이네요.”

땅이 꺼지라 한숨을 쏟자, 성 팀장이 나직이 웃는다.

“놓친 거야 어쩔 수 없죠. 그거 하나 아쉬워하기에는 앞으로 시현 씨가 보여줄 게 얼마나 많아요?”

“그러게요. 그건 기대되네.”

이번 팬미팅에서 이시현이 뭘 보여줄지 기대된다.

지에스 각 부서 팀장급들이 미국까지 왔고, MNC 촬영팀까지 섭외됐으니 분명 뭐라도 보여줄 건 자명한데.

‘솔직히 큰 기대 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 콘서트나 팬미팅의 경우는 그들만의 리그였으니까.

하지만 아까 그 무대, 클럽에서 열광하던 사람들의 반응.

‘그나저나 MNC는 뭔가 잘 안 되나?’

**

“그거 가지고 안 된다고요! 카메라 더 필요해요. 인력도 더 필요하다니까요!”

-선생님이 그런다고 왜 너까지 덩달아 난리야? 지에스에서 3천 명 정도 생각하고 있다잖아. 무슨 콜로세움에 서는 것도 아니고.

“아휴, 그게 그러니까······.”

설명하려는데, 옆에서 손이 불쑥 나왔다. 험악한 인상이다. 작가는 공손히 전화를 건넸다.

“홍 피디님, 저 박 상무예요.”

-아 박 상무.

“저희 쪽에서 계획이 좀 수정될 것 같습니다.”

-진짜야? 거 쉽지 않을 텐데. 내 보기에는 3천 명도 많은데··· 지금 당장 그만한 장소도 찾기도 힘들고, 뭣보다 여기 미국이잖아?

“인원이 문제가 아니라 장소가 문제라서. 3천 명 들어찰 공간이면 무대 크기야 안 봐도 뻔한데, 거기에 시현이를 올리기가 좀 그러네요.”

-그럼 어떻게 하자고? 우리도 지금 한계야. 장비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박 상무는 전화를 작가에게 돌려주고 뒤돌았다.

한 팀장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럼 대표님에게 보고할게요.”

“잘 얘기해.”

“잘 얘기할 게 뭐 있나요. 본대로 보고하면 되지.”

하지만 오늘 목격한 무대의 열기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음 주까지 시현이 준비시킬 수 있겠어?”

박 상무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어쩌겠습니까, 해야지.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예요? 매번 별일 없다는 말만 하시더니.”

“별일 없었어.”

“별일이 없긴. 저 녀석이 3개월 만에 저렇게 변했는데 별일이 없다고요? 스케일이 달라졌는데?”

한 팀장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이시현을 보며 물었다.

“오늘 무대는 또 뭐예요? 그동안 이시현이 밴드랑 공연까지 했어요?”

“아니.”

“그럼 뭔데요?”

“오늘 처음이야.”

“처음이라고?”

한 팀장 눈이 확 켰졌다.

“그래 처음. 오늘 처음으로 무대에서 호흡 맞춘 거야.”

“허.”

처음치고는 무대 호흡이 끝내줬는데. 그럼 대체 무대 오르기 전까지 얼마나 준비한 거람.

“이시현 저 연습벌레. 밴드를 아주 닦달했겠네요.”

한 팀장의 속삭임에 박 상무가 다시 말했다.

“오늘 처음이라니까.”

“그러니까요······.”

재차 기막히다는 듯 웃던 한 팀장 입이 순간 확 벌어졌다.

“처음이라는 게··· 리허설도 없었다고요?”

“리허설? 노래도 1시간 전에 처음 듣고 외워서 올라간 거야.”

“···그게 가능해요?”

그 질문에, 박 상무는 이시현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불가능한 건 또 뭔데?”

**

“바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인을 해주고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몇 달만이더라. 저 미소를 본 게. 스텝 촬영이 3월에 마쳤으니, 대충 계산해도 5개월 남짓.

“선생님······.”

일부러 울상 가득한 얼굴로 최미숙 팔에 달라붙었다.

“시현이 넌 어쩜 매번 날 이렇게 놀라게 하니?”

“놀라셨어요?”

“놀라지 그럼 안 놀라? 난 아까 쓰러지는지 알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냥 무대에서 죽어도 되겠구나 싶었다. 꼭 뭐에 홀린 것처럼 말이지.

“너 이러다 아주 이 길로 나가는 거 아니야?”

“에이, 저 배우 이시현입니다!”

“아주 능청이 더 늘었어.”

웃는 내 볼을 그녀가 살짝 꼬집는다.

“오랜만에 뵈니까 그러죠. 좋아 죽겠거든요.”

“아휴, 내가 이 얼굴을 보고 싶어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네.”

한바탕 웃고서 그녀가 내 얼굴을 다시 들여다봤다.

“얼굴이 아주 수척해졌네. 박 상무는 애를 얼마나 고생시킨··· 뭐야? 지금 쟤 웃은 거야?”

멀리 있는 박 상무를 본 최미숙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와, 나 박 상무 웃는 거 처음 본다? 이야, 이시현이랑 석 달 같이 있더니 우리 박 상무가 저렇게 변했어? 내가 아주 못 볼 꼴을 보네.”

하긴. 그러고 보니 요즘 박 상무가 많이 변하긴 했지.

미소도 많아지고.

“시현 씨, 저희는 안 반가워요?”

작가들이 장난스럽게 눈을 흘긴다.

“설마요. 작년 말에 다만빠 팀 모이고 나서 처음이네요.”

“맞아, 그때 시현 씨 덕에 잘 먹었는데.”

“맞아요! 시현 씨가 지갑도 선물해주고, 콜택시 불러서 집까지 바래다줬잖아요!”

“완전 감동이었는데. 프로그램 끝나면 나 몰라라 하는 게스트 한두 번 봐? 바쁘다 뭐다, 그러면서 나중에 보면 가식적으로 반가운 척이나 하고.”

“얘. 꼭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얘기 같다?”

“에이 선생님도 참!”

다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래도 되는 밤이지만.

“근데 저 때문에 또 이렇게 오시게 해서 어떻게 해요?”

나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기콘부 성 팀장, 한 팀장, 이우정 기자··· 다들 날 위해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바다를 건너왔다.

그래서 고맙고 미안한데, 도무지 차 대표의 의중을 모르겠네. 왜 이렇게까지 나한테 잘해주는 걸까.

“아, 시현 씨.”

메인작가가 안경 콧대를 올리고 나를 본다.

“이 질문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질문.

“이시현에게 팬이란 뭐예요? 꼭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그거야 뭐.

“전에, 어떤 친구가 그런 질문을 했어요. 팬들이 쫓아다니는 스타가 되면 어떤 기분이냐고.”

저 멀대가 말이지.

“그래서 뭐라고 답했어요?”

“좋다고요.”

“좋다고?”

그 답을 하고 나는 미소와 함께 다시 말했다.

“팬들이 절 쫓아다녀서가 아니라, 나를 봐주는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거··· 그게 좋더라고요.”

나를 만들어준 직원들과 나를 존재하게 하는 팬들.

그래서 더, 그들을 실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잠시만요.”

나는 그녀들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터벅터벅 다가오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무대에서 본 게··· 환상이 아니었구나. 저 얼굴이 진짜 내 앞에 있구나.

“시현아.”

“왜?”

“내가 비행기 타고 오면서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뭘?”

“넌 정말··· 미친놈인 것 같다.”

“미투.”

내가 미친놈이면 너도 미친놈이니까.

훗.

사내 둘이서 이 밤에 낄낄 웃고 있다. 여기 미국인데, 설마 이상하게 보는 거 아니겠지?

“형, 나 영어 많이 늘었지?”

“3개월을 버터를 먹었으면 그 정도는 해야지.”

“버터는 무슨. 여기 한인 스토어도 있어. 고추장도 팔아.”

“그래? 아 난 그것도 모르고 고추장 사 왔는데.”

그걸 농담이라고. 안 본 새 개그감이 많이 죽었구만.

“근데 일이 없나 봐? 대표님이 가란다고 여길 오게.”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잘 안다. 니가 여길 왜 왔는지. 오로지 나 때문이란 것도.

“임마. 내가 누구냐?”

누구긴.

내 매니저지.

「한국」

라디오에서 음악이 흐른다.

이시현의 ‘너라서’

너 기억나니 내 키가 너보다 좀 더 작았을 때를

네가 나한테 네 첫사랑 얘기를 했을 때를

그때도 지금도

난 이렇게 곁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지켜볼 뿐인걸

가슴이 아파서 가끔 눈물이 흘러

너만 생각하면 그러는 것 같아···

수백, 수천 번을 들어도 미소가 나오는 노래.

“여우가 시집가나? 호랑인가?”

맑은 하늘인데 보슬보슬 빗방울이 흩날린다. 그래서 손님이 없는 건가. 한적하고, 나른하고, 왠지 흐느적거리는 오후의 카페.

“별아. 너 성지훈 팬클럽 회장이었다며?”

“에에? 누가 그래요?”

“색션텔레비에 나오더만. 성지훈 전 매니저가 폭로했잖아. 성지훈 팬클럽 회장 조별아가 이시현 팬클럽으로 넘어갔다고! 하하하.”

점장이 깔깔 웃는다.

“넘어간 게 아니라, 떠난 거죠.”

그건 배신이 아니야. 암.

“이시현 실물이 그렇게 잘생겼다며? 안티도 실제로 보면 단박에 팬 된다던대?”

안티 얘기에 조별아는 고개를 힘차게 내저었다. 그녀 역시 한때는 피켓을 들고 백암산 앞에서 이시현에게 계란을 던졌으니까. 으이구 이 못된 손. 못된 손!

“점장님, 그거 아세요?”

“뭘?”

“시현 오빠는요··· 선물이에요. 영어로 기프트.”

발음 한번 시원하게 굴리자, 점장이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손님도 없는데 가서 좀 쉬어.”

“앗싸!”

조별아는 커피 한 잔 타들고 창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흠흠.”

늘 그렇듯 콧노래와 함께 마우스를 클릭.

“어? 이거 뭐야. 뉴욕 클럽에 나타난··· 시현 오빠?”

조별아 눈이 대뜸 커졌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이 보이지 않는다.

“쟤는 아주 이시현한테 푹 빠졌네.”

점장이 그녀 모습에 웃는 이때, 딸랑딸랑 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렸다. 교복 입은 여학생 셋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점장이 사근사근한 인사로 반기자, 여학생들이 다가와 묻는다.

“여기 조별아가 누구예요?”

“그러는 그쪽은 누구신데, 음료 하나 안 시키고 질문부터 하실까?”

경계의 시선으로 훑어보자, 여학생들이 쏘아본다.

“우리 지훈 오빠 팬이거든요? 조별아 어딨어요! 여깄는 거 다 알아요!”

앙칼지게 외쳤을 때, 옆에 있던 여학생이 속삭인다.

“저 언닌가 봐?”

그녀들을 제외하고 카페에는 여자가 둘밖에 없었다.

눈앞의 여자, 창가 쪽 컴퓨터 앞에 앉은 헤드셋 낀 여자.

점장이 미쳐 말릴 틈도 없이 여학생들이 소매를 올리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조별아가 벌떡 일어났다.

“아··· 오빠······.”

흐느낌 같은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 널브러진 조별아.

그 바람에 헤드셋이 컴퓨터에서 빠지고, 스피커에서 노래가 터져 나왔다.

여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모니터에 달라붙었다.

모자를 눌러쓴 가수, 밴드, 그리고 귀를 때리는 팝송까지···

「2001년 8월 22일 수요일」

시현 수호천사들&포에버 카페 회원 수 280,003명 기록.

< 마이 히어로 (2) > 끝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