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99화 (199/227)

< 상어는, 결국 바다에서 죽는다 (6) >

뉴욕, 뉴욕, 뉴욕.

노래 가사처럼 화려한 불빛과 온갖 소리로 가득한 세상.

빌딩 숲이 만든 그림자 속에서 기타를 맨 셋과 그냥 뚱뚱한 한 명이 상점에 진열된 브라운관 TV를 보고 있다.

푸른 빛이 넘실거리는 바다에서 상반신을 탈의한 남자, 금발을 휘날리며 기타를 치는 여자, 경쾌한 리듬과 힘 있는 목소리까지.

“와, 프레디 저 자식 진짜 멋있네.”

클린턴이 혀를 내두르고, 로돌포는 눈을 번쩍거렸다.

“난 LA에서 본 적 있어. 파란색 페라리 정말 멋있던데.”

“나도 나중에 파란색 페라리 살 거야! 옆자리는 늘 비워둘 거야! 혹시 모르잖아? 히치하이크 중에 요정을 발견할지. 팻시가 아까 뭐라고 그랬더라? 고마워요, 우리 차가 고장이 나서··· 푸하하!”

클린턴과 로돌포가 배를 잡고 낄낄거린다.

오는 내내 저렇게 까불다 쥐어박히고도 또 저러는 걸 보면 참 대단한 애들이라니까. 아니면 팻시의 손맛에 중독이라도 된 걸까.

나는 녀석들에게서 눈을 떼고 횡단보도 맞은편 도로를 바라봤다.

카메라를 세팅하는 뮤직비디오 감독이 보인다.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라 그런지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렇지만.

“여기, 콘티요.”

모자 푹 눌러 쓴 스태프가 횡단보도를 건너와 콘티를 건넸다.

“이거라고?”

콘티가 아니라 비틀스 앨범 표지.

스태프가 모자챙을 끄덕거렸다. 어쩐지, 뉴욕에 오자마자 횡단보도부터 찾더라니.

아무튼 밴드 멤버들이 기타를 메고 일렬로 섰다.

보컬 데럴.

기타 팻시.

베이스 기타 클린턴.

드럼 로돌포.

카메라 앞에 선 넷의 모습이 뻣뻣하다. 양팔을 동시에 움직이는 녀석들을 보며 감독이 볼을 씰룩거린다. 웃음 참느라 눈까지 충혈된 것 같다. 뭐 근데, 카메라 앞에 처음 서면 다들 저러니까.

“니들 전봇대냐? 태풍 불 때까지 기다릴래? 팻시, 이래서 언제 끝낼래? 좀 움직여!”

차가 오면 멈추고, 사람들이 지나면 멈추고, 둘 다 없으면 쪼르륵 건너오고.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 밴드는 횡단보도를 수십 번 오가야 했다.

“에휴, 그만하자. 잘라 붙이면 대충 나오겠지.”

결국 포기한 감독은 손을 흔들고 내 어깨를 툭 쳤다.

이제 내 차례.

나는 건물 그림자로 기어들어가는 멤버들과 바통터치를 하고 횡단보도 앞에 섰다.

맞은편 도로의 카메라를 잠깐 보고 잠시 주위를 살핀다.

교차로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 뜨거운 햇살, 빌딩 숲의 그림자, 차들의 경적. 그리고 지금 순간 나는 이 안에 녹아든다.

“컷!”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감독이 오케이를 외쳤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넷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본다.

“뭐야? 한방에 끝난 거야?”

그 말에 감독이 콧바람을 흘리며 한마디를 뱉었다.

“니들 같은지 아냐?”

**

최미숙이 깍지낀 손을 테이블에 올리고 작가진과 홍 피디를 바라봤다.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그럼 난 뭐하면 돼?”

“선생님은 ‘여배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계속 촬영하셔야죠. 그게 메인이니까, 저희 선생님 촬영 절대 소홀히 하지 않을 거예요.”

“뭐야? 그럼 나는 시현이 일에 끼는 거 아니야?”

제작진이 자기 프로그램 열심히 촬영해주겠다는데도 그녀는 오히려 실망한 반응이다.

“그러지 말고 나도 일거리 하나 줘라.”

“에? 무슨 일거리요?”

홍 피디가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내가 홍 피디를 몰라? 단순히 팬미팅 촬영만 할 거 아니잖아? 분명 오늘부터라도 이시현한테 카메라 잔뜩 붙여서 24시간 밀착 취재할 거 아니야? 다큐 찍을 생각인 거 다 알아.”

뜨끔.

“아휴 선생님도 참, 다큐는 무슨! 지에스에서 들으면 난리 날 소리를 하시네.”

“그러지 말고, 나도 조인하자.”

“조인요?”

“같이 움직이자고. ‘여배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 이시현 얼굴도 비치고, 나도 이시현 다큐에 얼굴 비치고. 상부상조하자고.”

그 말 하고, 최미숙이 다시 말했다.

“나, 그럼 내레이션 할까?”

“아······.”

홍 피디는 이마의 땀을 식히려 연신 냅킨을 흔들었다.

사실 지에스에서 촬영허가를 받은 이 기회에 이시현을 집중 조명할 생각이었다.

미국이란 나라에 도전한 이유에 대해서도 묻고, 그래서 소득은 있었는지, 현실과 이상 앞에서 뭘 깨달았는지 등등···

지에스도 정신이 없는지 조건 같은 것도 내세우지 않은 상황이라서 일단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미숙이 그걸 알고 발을 들이밀고 있다.

‘역시 최미숙.’

이 바닥에서 괜히 롱런하는 게 아니지.

“그거는 뭐. 나중에 다시 얘기하시죠.”

한발 물러선 홍 피디는 얼른 말을 돌렸다.

“일단 지에스에서는 한 3천 명 규모로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3천 명?”

최미숙은 고개를 갸웃했다.

작년에 했던 이시현 팬미팅 콘서트가 5만이라더만.

“겨우 3천 명 초대해서 뭐하려고? 윷놀이하게?”

“에이 선생님도 참. 그 정도 선에서 깔끔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너무 판 키우면 감당 안 돼요. 시간도 촉박하지, 인력도 없고. 그리고 이시현이 팬미팅한다고 얼마나 오겠어요? 현지인은 오지도 않을 텐데. 교민들이나 좀 오겠지.”

아무리 이시현이라도 여기는 미국.

“왜? 그래도 시현이 미국에 온 지 3개월 정도 됐잖아?”

“3개월 동안 뭘 할 수 있었겠어요. 듣자니까 회사 연줄 하나 없이 맨몸뚱이로 왔다는데. 더구나 아시아 사람이?”

콧바람을 들썩이는 홍 피디 모습에 잠자코 있던 작가들이 전투력을 불태운다.

“시현 씨가 어때서요?”

“맞아. 이시현 정도면 미국에서도 안 꿀리지!”

“그래, 이미 타고나길 월드 스펙 가지고 태어났는데.”

쫑알쫑알.

“아휴, 무슨 말을 못하겠네. 야, 여기서 무슨 이시현이 프로그램을 찍었겠냐? 영화를 찍었겠냐? 아님, 무대를 섰겠냐?”

“그거야 모르죠. 우리가 모르는 뭔가 있을지.”

여전히 뱁새눈의 작가들 탓에 홍 피디는 입맛을 쩝 다셨다. 그러자 최미숙이 눈웃음을 기울이고 말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뭐가요?”

“3천 명은 분명 넘어. 훨씬 많이 올 거야.”

누구도 미래의 결과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미숙은 왠지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무슨 근거로요?”

“이시현은 말이야, 예상을 뛰어넘거든. 그게 뭐든.”

“하하. 그래서 얼마나 올 것 같은데요?”

홍 피디와 작가들의 시선이 달라붙자, 최미숙은 손등에 턱을 받치고 옅게 웃었다.

“아주, 엄청 많이 올 것 같아.”

어쩌면 이미 바람이 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자, 그럼 시현이한테 가볼까?”

**

남자는 귀에서 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에라이! 니가 채널 H 캐스팅 매니저면 나는 스캇 보라스다!”

방송국에는 하루에도 수십 통의 사칭 전화가 온다.

“또 요정에 대해서 물어?”

동료의 질문에 남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겨워서 넌더리가 난다. 요즘 전화만 받으면 다들 그 질문이니까. 요정이 누구냐고.

“지가 채널 H 캐스팅 매니저라는 거야.”

“그 정도는 약과네. 나는 아까 프레디라는 사람한테 전화 받았어.”

“프레디? Alta의 프레디? 하하하!”

두 남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울상짓고 말했다.

“뭘 그거 가지고 웃어요. 나는 아까 마이클 전화 받았어요.”

“잭슨?”

이번에는 좀 전보다 웃음이 배는 커졌다.

실컷 웃음이 들썩인 뒤에 여자가 말했다.

“근데 요정하고는 진짜 연락 안 되는 거예요?”

그날 이후 방송국 직원들은 그를 요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양인. 콜로라도를 뒤흔든 신비의 남자.

“보스가 숙소를 찾아갔더니 콜로라도를 떠났다는 거야.”

“그럼 어쩌나. 이렇게 난린데.”

여자는 전화기를 바라봤다.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손도 대지 못할 만큼 울려대서, 다들 한숨만 내쉰다.

“그럼 보스는 어떻게 한대요? 위에서 찾아오라고 난리잖아요?”

“그거 듣기 싫다고 휴가 떠났잖아. 어쩌면 지금 물 좋은 클럽에서 몸을 불사르고 있을지도.”

**

“결국에는 여길 서는구나.”

Four Warriors 멤버들이 무대를 보고 있다. 지금까지의 클럽 무대보다 훨씬 큰 규모와 분위기 앞에서 혼이 반쯤 나간 얼굴이다.

“왜 이렇게들 쫄았어? 겨우 뉴욕까지 왔는데!”

매니저가 멤버들 어깨를 탁탁 두드려가며 힘을 실었지만, 좀처럼 얼굴들이 펴지질 않는다.

“근데 데럴은 왜 안 오는 거야?”

“차에서 자고 있나 보지.”

“뉴욕까지 와서도 속을 썩이는구만.”

소매를 걷어붙인 매니저가 녀석을 찾으러 간 동안, 뮤직비디오 팀은 마지막 촬영준비를 시작했다.

“한방에 끝내자. 홍 피디하고 선생님 오고 계신다니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벗은 재킷을 박상무에게 건넸다.

마지막 씬은 옛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인데, 회상 컷도 있어서 눈물 씬도 들어가야 한다.

“그나저나, 너무 시끄러운데······.”

박 상무 이맛살이 구겨진다. 리허설을 준비하는 팀이 우리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무대에 오를 밴드와 가수들, 스태프들이 모두 리허설을 대기 중이다.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저들이 우리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당연히 없고.

그러니 여기서 어떻게든 해야 한다.

나는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눈을 감았다.

미국에서의 모든 순간을 떠올린다.

끝의 순간에 시작의 순간을 회상하는 건 열심히 한 자의 특권이니까.

박 상무와 함께 긴 시간을 보낸 고물 렌터카, 에이전트 케이시를 만난 순간, 닭 탈을 입고 와이어에 매달렸던 때, 뮤직비디오 계약, 라스베거스의 거리공연, 덴버에서의 연극 무대, 그리고 뉴욕.

그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사무치게 그리워지겠지. 추억이 되겠지.

후.

나른한 숨을 내쉬고 다시 눈을 뜨려는데, 곁에서 나직이 노랫말이 들렸다.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아

우리가 뛰어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야

옷을 주워 입을 생각은 집어치워 비키니가 아직 소금에 덜 절여졌잖아

상어가 있어도 겁을 먹지 마

그깟 녀석은 코를 한방 갈기면 되니까

자 나랑 시합해볼까

네 서핑 실력 좀 보여줘 파도를 뚫고 날아가 봐

바다에 좀 빠지면 어때 내가 있는걸.

해가 졌다면 서핑이 싫다면

그럼 근사한 보트를 타고 가는 거야.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한판 붙자

아침이 오면 창피할 게 분명하지만 일단은 지금만 생각해

다른 생각은 머리만 아프잖아

상어가 있어도 겁을 먹지 마

그깟 녀석은 코를 한방 갈기면 되니까

그럼 언젠가 바다에서 깊이 잠들겠지···

“코니아일랜드. 우리의 신곡이야.”

노래를 마친 팻시가 눈을 뜬 내게 설명했다. 그리고 넌지시 묻는다.

“어떤 것 같아?”

일단 눈물에 젖은 볼을 닦고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헐레벌떡 들어온 매니저가 세상 놀란 얼굴을 하고 외쳤다.

“큰일 났어!”

**

“얘 왜 이래?”

박 상무가 혀를 차며 물었다.

데럴이 차 뒤에 드러누워 있었다.

“뉴욕 공연이라고 긴장하더니만, 술이랑 약이랑 처마시더니······.”

매니저가 고개를 휘휘 젓는다.

“약?”

“신경안정제.”

하.

어째 조금 귀여운 구석이 생기더라니.

“이제 어떻게 해? 한 시간도 안 남았어.”

팻시가 입술을 깨문다. 무대는 코앞인데, 보컬이 약에 취해 자고 있으니까. 최악도 이런 최악이 있나.

“뭘 어떻게 해. 망했지.”

매니저가 고개를 휘휘 젖는다.

보컬이 없으면 밴드는 산 송장이나 다름없다.

“상무님.”

“왜?”

“모자 하나만 구해주세요.”

“모자?”

“모자라도 쓰고 올라가야죠. 딱 한 번이니까.”

내게 달라붙은 클린턴과 로돌포의 뽀송뽀송한 시선, 지진계처럼 흔들리는 팻시의 시선까지.

“Shining Time 가사는 알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나는 다른 걸 요구했다.

“코니아일랜드 가사 적어줘. 음도 알려주고.”

“뭐?”

팻시의 눈이, 아니 모두의 눈이 커졌다.

“신곡을 부르겠다고? 미쳤어? 너 조금 전에 처음 들었잖아?”

“노래 어떤 것 같냐며?”

망설이는 그녀의 눈을 보고, 나는 다시 말했다.

“끝내줬어.”

기가 막히게도 말이야.

그러니 얘들아, 니들은 지금 배팅을 해야 해.

판은 커졌으니까.

< 상어는, 결국 바다에서 죽는다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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