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어는, 결국 바다에서 죽는다 (5) >
“블랙보이가 늦는 바람에 바로 무대 올라갔잖아요.”
나는 하늘을 보며 기억을 떠올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맞아 그랬었지. 아무튼 이번에는 슬기가 없으니까, 니가 혼자 완곡해야 하는데··· 가능하지?”
“예”
“오케이, 그럼 여기서는 ‘너라서’ 무대를 하고······.”
우리는 지금 지난겨울 팬미팅 콘서트 무대를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이번 팬미팅을 위한 큐시트를 짜는 중이다.
“게스트가 없으니까, 가능한 토크 위주로 가야 해. 그러니까 에피소드 몇 개 정해놓는 게 좋아. 촬영 뒷얘기도 좋고, 연예계 선후배 얘기도 좋고.”
박 상무가 입에 문 볼펜을 흔들며 고민한다.
“그럼 다만빠 때 얘기할까요? 그 촬영 아쉬움도 많이 남고, 하고 싶은 얘기도 많은데.”
“그래, 그 프로그램 한인 사회에서도 꽤 이슈였다니까, 그 얘기 하면 좋겠다.”
‘다시 만난 우리 오빠’는 분단의 아픔을 품은 프로그램이었다. 고국이 그리운 교민들에겐 충분히 가슴에 와 닿는 프로그램이었을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했다.
“연예계 선후배 얘기는 스텝 촬영 때가 좋겠네요. 최근 작품이니까요. 성지훈 선배, 최미숙 선생님, 백성규 선생님, 이경이까지··· 다들 보고 싶네.”
촬영 현장이 떠오른다. 스태프들도 보고 싶고.
슛 들어가면 긴장하고, 컷소리에 한숨 고르던 그때 그 현장의 공기가 마셔지는 기분이랄까.
“이렇게 하면 어떻게든 될 거는 같은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
나뭇가지처럼 뾰족한 앞 머리카락 사이로 박 상무의 구부러진 눈썹이 보인다.
그래, 팬미팅을 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게 한둘이 아니다.
그걸 일일이 찾아서 보완하고 채워 넣기에는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
“상무님.”
“왜?”
“제 편들어줘서 고맙습니다.”
박 상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내 얼굴이 선글라스에 비친다.
지금 회사로선 나란 놈은 고집쟁이에 통제가 안 되는 문제아다. 그렇다고 무작정 떼를 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박 상무가 내 편을 들어줘서 다행인 게 사실이다.
박 상무가 노트를 접어 내 가슴을 툭 치고 말했다.
“고맙긴 뭐가 고마워. 한국에 돌아가는 건 무조건 일정 맞출 거고, 단순히 팬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되니 큰 준비 할 필요 없다고 한 거 너잖아? 그리고 너 말려도 결국 할 놈 아니야?”
이 양반 이제는 나를 너무 잘 안다.
“너 한국 돌아가면 이번 일까지 감안해서 제대로 굴릴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대표님이 아주 벼르고 있어 임마.”
이상하다. 혼나고 있는데, 웃음이 자꾸 나온다.
“웃기는.”
“상무님도 웃고 계시는데요?”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법.
박 상무는 생각보다 좋은 친구인 것 같다.
“장소 구하는 건 기콘부에서 알아서 할 거야. LA 한인회와 연락해서 이삼천 명 모일 장소로 알아본다니까, 일단은 뉴욕 촬영 끝날 때까지는 뮤직비디오 촬영만 전념해. 이제 이틀 남았으니 유종의 미는 거둬야지.”
“예.”
참네. 회사의 말보다 매니저의 한마디 말이 더 힘이 되는 걸 보니 나도 이제 연예인 다 된 모양이다.
“그런데 차를 고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박 상무가 도로 한 구석에 멈춰 있는 차를 돌아봤다. 첫날부터 소리가 영 이상하더라니, 역시 한번은 퍼질 줄 알았다.
“클린턴! 너 진짜 고칠 수 있는 거야?”
팻시의 미간에 일자 주름이 깊이 새겨졌다. 클린턴이 엔진룸에 머리를 박은 채로 엉덩이를 들썩인다.
“짐! 아무래도 얘 못 믿어! 그냥 사람 부르자니까!”
“여기 전화가 안 터진다고, 몇 번 말해.”
밴드 매니저가 무전기 크기의 휴대폰을 흔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독수리 한 마리가 고공비행하고 있고, 주변은 바위와 흙, 도로밖에 없다.
“그러게 그깟 톨비 좀 아끼겠다고 빙 돌아가니까 이러지!”
팻시가 구시렁거리는 그때였다.
클린턴이 엔진룸에서 머리를 빼고 깊은숨을 모아 쉬었다.
“후!”
“고쳤어?”
다들 기대의 눈으로 바라보자, 녀석이 웃으며 엄지를 척!
“시동 걸어봐.”
“오케이!”
매니저가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다음 순간 엔진이 부르르 떨기 시작하더니··· 엔진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으아!”
“야 이 미친놈아!”
어느새 멀찍이 도망간 클린턴, 고함을 지르는 팻시, 소화기를 챙겨온 로돌포. 그들을 보며 박 상무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시현아.”
“예?”
“한국 돌아가면, 우리 얘들 뮤직비디오 찍었다는 얘기는 하지 말자. 쪽팔리다.”
박 상무의 표정, 진심이다.
**
한가한 햄버거 매장에서 촬영팀은 늦은 저녁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다만빠 촬영 때 이시현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지. 나는 솔직히 얼굴 반반한 애들 잘 안 믿거든? 너희들도 알잖아? 근데··· 믿을만한 사람도 있더라고.”
당시 다만빠 작가였던 그녀는 이시현에 대해서 회상했다.
“할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얘기 듣고 정말 하늘이 무너진 얼굴이 되더라니까.”
여태 숱하게 많은 프로그램을 연출했지만, 시청률만으로는 논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이 있다.
작가에게 있어 ‘다시 만난 우리 오빠’가 그런 경우였다.
시청률 역시 말 그대로 대박을 쳤다.
“이시현이 사람 괜찮지.”
잠자코 듣던 서브 작가가 귀걸이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너도 이시현 본 적 있어?”
“예. 저 색션에 있을 때, 그때 인터뷰할 때 봤죠. 싹싹하지, 예의 바르지, 주변 사람 잘 챙기고, 나이도 어려서 앞으로가 기대되고.”
기억을 헤집는 그녀의 입가에 은은히 미소가 퍼진다.
아무튼 이시현 얘기는 잠깐 멈추고.
“그럼 내일 오후 스케줄은 이대로 하자고.”
메인 작가는 스케줄 표를 정리했다.
“근데, 선생님이 한인회 환영행사는 사양하자는데요? 다들 먹고 살기 바쁜데, 자기가 뭐라고 그거까지 해서 사람 귀찮게 하냐고. 남자들 흔히 말하는 군대에서 사단장님 오신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그래도 그쪽에서 준비한 성의잖아. 이제 와서 어떻게 취소해. 그리고 선생님이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을 만인의 연인 속에 사셨는데, 환영행사는 당연한 거지. 지금 ‘스텝’ 열풍도 엄청나잖아? LA에서 비디오 대여 1위래요, 물론 불법 복제지만.”
메인작가의 발언에 다들 피식 웃는다. 막내작가도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선생님이 참 겸손하세요. 어제도 그러시더라고요. 배우 인생 30년이 뭐라고, 그거 가지고 해외까지 나와 촬영하는 거 창피하다고. 차라리 음식장사를 하는 게 낫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작가들이 까르르 웃는다.
“음식장사? 뉴욕에서 선생님이 직접?”
“하긴 생각해보니 재밌긴 하겠다. 선생님이 주방에서 요리하시고, 음, 게스트가 카운터 보고. 그래, 이시현이 하면 대박 터지겠다.”
“이시현을 카운터에? 에이, 차라리 음식프로그램보다는 가이드가 어때요?”
“가이드?”
“예. 젊은 배우가 중견배우와 함께 여행하는 거죠. 서로 세대 차도 있을 테고, 배우라는 동질감도 있을 테니까. 청춘스타와 여배우들이 함께 떠나는 해외여행! 여행 과정에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 좌충우돌!”
“하하. 다큐찍니? 아예 시골에다 박아넣지 그러니? 같이 농사시켜버리지 그냥.”
여자들 수다가 끝을 모른다.
이시현은 앞에 없는데, 이시현 얘기로 다들 들떴다.
하지만 이내 잠잠해진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메인작가가 햄버거를 손에 쥐고 속삭인다.
“욕심나네··· 이시현.”
현재 ‘여배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을 촬영차 뉴욕에 온 MNC 촬영팀은 어제저녁 한국에서 소식을 전해 들었다.
톱스타이자, 청춘스타 이시현이 미국에서 팬미팅을 한다는 소식.
“이시현 찍어가면 대박인데.”
“이시현을 찍고 싶은 거니, 그냥 만나고 싶은 거니?”
핀잔하듯 묻자 막내작가가 혀를 빼죽 내민다. 그 모습을 서브 작가가 가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보면, 함부로 눈 마주치면 안 된다.”
“왜요?”
“눈을 뗄 수가 없거든.”
마치 본드에 달라붙은 것처럼.
깔깔 웃는 사이에, 홍 피디가 통화를 끝내고 매장에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그는 미소 짓고 작가들을 바라봤다.
“잘 들어.”
다들 집중한다.
“국장님한테 전화 왔어.”
“그럼······.”
“지에스하고 조율했어. 우리가, 이시현 팬미팅 촬영한다.”
작가들이 순간 주먹을 불끈 쥔다.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국장님이 그러시더라. 못 찍으면 한국 돌아올 생각하지 말라고.”
안경을 들썩이며 웃은 홍 피디.
그는 다시 안경 콧대를 만지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선생님한테는 뭐라고 그러냐.”
모자란 장비와 인력은 LA 지부에 요청하면 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아무리 이시현이라는 대어가 왔어도, 일단 이번 촬영팀의 메인은 여배우기 때문이다.
“에이, 선생님이랑 이시현이랑 사이좋대요. 어제도 이시현 얘기하시면서 그렇게 칭찬하시던데요?”
작가가 환히 웃으며 얘기하는데, 마침 당사자가 매니저와 함께 매장에 들어왔다.
수수함과 기품이 물든 검은색 드레스에, 선글라스가 돋보이는 여배우.
“선생님 여기요! 최미숙 선생님!”
**
「서울」
“단독, 이시현 미국에서 팬미팅··· 훗.”
최재환은 콧바람을 들썩이며 신문을 내려놓았다.
역시, 이시현.
미국을 맨몸뚱이로 간 것도 대단한데, 거기서 또 팬미팅을 하겠다는 걸 보면 정말 미친놈이 맞다.
누구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독단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고, 제멋대로라고.
이시현도 그걸 잘 알 거다.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런데 어쩔 수가 없었겠지. 아마 미국에서 우연히 팬을 만나고 그런 생각을 했을 게 분명하다.
최재환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잘 알고 있으니까. 이시현이 팬을 대하는 자세를.
“근데, 진짜 둘이서 뭘 어떻게 하려는 거야?”
이시현이 박 상무와 단둘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최재환은 걱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무래도 강 팀장에게 전화해서 돌아가는 상황을 좀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는데, 노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열렸다.
“사장님, 손님 오셨는데요?”
“손님?”
여직원의 뒤를 힐끗 보자마자 최재환이 벌떡 일어났다.
“대표님!”
차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에 들어왔다.
“여긴 어떻게··· 일단 좀 앉으세요.”
그를 소파에 앉힌 최재환은 직원에게 커피를 부탁하고 마주 앉았다. 뿌드득, 가죽 늘어지는 소리에 등줄기 식은땀이 구른다.
“사무실은 이렇게 좁은데, 소파는 왜 이렇게 커?”
“시현이가 보낸 겁니다. 책상이며 소파며, 컴퓨터까지. 묻지도 않고 사서 보냈더라고요.”
차 대표의 시선이 벽에 걸린 액자에 달라붙었다.
이시현과 함께 찍은 사진인데, 크게 확대해 액자로 만든 걸 녀석이 보내왔다.
“징그러운 자식들, 사내새끼들이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이시현이 소식 들었지?”
다리를 꼰 차 대표가 최재환에게 툭 물었다.
“예.”
“내가 지금 이놈을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최재환이 걱정을 담아 그를 바라봤다.
차 대표는 소속 아티스트의 고집을 봐준 적이 없다. 그 점에서는 단호했다. 그런데 이시현을 미국에 보낸 것도 그렇고, 여길 찾아온 것도 그렇고.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걸까.
“이시현이 그러더라. 지 고집에 여러 사람이 힘들어질 걸 잘 알고 있는데, 그 미안함보다 팬들에게 더 미안해서 어쩔 수 없다고.”
탓하듯 말하곤 있지만, 차 대표의 입가에는 미소가 스며있었다. 하지만 금세 사라졌다.
“너, 미국에 좀 다녀와라.”
“예?”
잘못 들었는지 알았다.
“시현이를 데려오라는 말씀입니까?”
“니 회사 일은 우리가 최대한 지원할 테니까, 니가 가서··· 이시현이 도와줘.”
그게 무슨.
최재환은 입술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하지만 저 혼자 가서 뭘 어떻게······.”
“너 혼자 보내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가서 팬미팅 성공시켜.”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최재환은 너무 궁금해서 차 대표를 바라봤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확 풍기는 향수 냄새에 코를 찌푸렸을 때, 그가 말했다.
“이시현은 지에스 간판이야. 그 간판이 미국까지 가서 헛짓했다는 소리, 내가 들어야겠어?”
**
“야 임마!”
클린턴이 펄쩍 뛰며 차를 향해 삿대질했지만, 차는 브레이크 한번 밟지 않고 멀어졌다.
“그렇게 해서 되겠냐?”
매니저가 답답한지 일어나 카우보이모자를 벗었다. 한 손에 쥐더니, 도로를 향해 슥 내민다. 마침 저 멀리 또 차가 한 대 오고 있었다.
슝!
거친 먼지 바람만 일으키고 지나간 차.
“야 이 자식아!”
다들 배꼽이 빠지라 웃는데, 팻시가 한숨을 내쉬고 일어났다.
“쯧쯧.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자들 같으니라고.”
훌렁.
그녀는 입고 있던 청재킷을 벗었다. 그러자 브라톱 하나만 걸친 그녀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검은 물결처럼 탄력 있는 피부와 매끄러운 곡선이 드러나자, 로돌포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로돌포, 남자라면 이럴 때 침 좀 흘리는 거야.”
가벼운 훈계 뒤에 그녀는 청재킷을 허리에 질끈 묶고 도로에 나갔다.
“구경이나 해.”
매니저에게 뒤로 가라고 손짓하고.
“안 꺼져?”
클린턴에게 발길질 한번 하더니 늘씬한 포즈와 함께 엄지를 척 내밀었다.
“못 말리겠군.”
박 상무가 고개를 흔든다.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별의별 걸 다한다. 히치하이크라니.
하지만 저 녀석들이 무엇을 하듯 상관없다는 듯 데럴은 버스에서 홀로 기타만 치고 있었다. 자식, 같이 좀 웃지. 저렇게 재미없게 살다 죽으면 엄청 억울할 텐데.
아무튼 저기 또 차 한 대가 온다.
“잘 봐!”
팻시가 외쳤다. 포즈가 좀 더 요염해진다. 그러자 차가 지나가는 듯하더니.
끼익!
멈췄다.
다들 입을 벌리고 박수치자, 팻시가 우리를 돌아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린다. 그녀의 하얀 치아에 노을이 내려앉는 사이, 차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내렸다.
“고마워요! 우리 차가 고장이 나서······.”
팻시가 그를 반기며 다가갔는데, 남자는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니, 나한테 오는데?
두 팔을 활짝 펼친 남자가 다짜고짜 나를 안으려 다가온다. 이 말을 외치며.
“오 마이갓! 당신 요정 맞지?”
< 상어는, 결국 바다에서 죽는다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