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어는, 결국 바다에서 죽는다 (1) >
“저 아이는 누구냐?”
박 상무가 쓴 선글라스에 선생님에게 질질 끌려가는 꼬마 모습이 선명하게 비친다.
“저 보고 동료하재요.”
“무슨 말이야?”
“그리고, 저 보고 요정이래요.”
나를 돌아본 박 상무 이마가 구겨진다. 나도 안다. 실없는 놈이라고 한소리 들어도 할 말 없는 거. 근데 쟤가 진짜 그랬다. 나보고 요정이라고.
“저녁에 여기서 연극 공연이 있나 봐요.”
나는 귀를 두드리며 계단에 앉았다. 미국에 온 지도 3개월쯤 되니 이제 제법 귀가 뚫리는 것 같았다. 불어온 바람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 넓다.”
한눈에 공원 전경이 들어온다. 마치 올림픽 경기장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불현듯, 여기가 미국이구나 싶다.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려면 최소 반나절은 각오해야 하고, 조금만 도시를 벗어나면 끝없는 지평선과 거대한 자연이 펼쳐지는 이곳.
“여기서 공연하면, 한마디로 월드 스타라더라.”
옆에 앉은 박 상무가 깍지낀 손을 무릎에 올리며 하늘을 바라봤다.
새까만 선글라스 알에 노을이 내려앉는다.
서서히 깔린 노을에 물들어 기암절벽의 붉은색은 한층 진해지고, 절벽에 둘러싸인 원형극장에는 그림자가 스며든다.
“저기에, 설 수 있을 것 같냐?”
박 상무가 무대 쪽으로 검지를 내밀고 물었다. 계단식으로 이뤄진 관객석과 경사진 그 아래 무대가 눈에 들어온다. 못해도 1만 명은 차지 않을까.
“글쎄요.”
다른 건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만으로도 가슴은 두근거린다. 저 무대 위, 수많은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건, 분명 끝내주는 기분일 테니까.
“손에 든 건 뭐냐?”
“이거요?”
나는 아이가 불쑥 주고 간 빨간색 표지의 노트를 쓸어내렸다.
아이는 해맑은 얼굴로 뭐라뭐라 하던 중에 선생님께 끌려갔다. 도와달라고 간절히 손을 뻗던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지.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박 상무에게 노트를 건넸다.
“대본인 것 같아요. 상무님도 보세요.”
살짝 훑어봤는데, 인물과 배경이 있는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였다. 외톨이 사자가 좋은 동료들을 만나 위로와 자신감을 얻는다는 훈훈한 이야기···
그런데 박 상무는 금세 흥미를 잃은 모양이었다. 노트를 내려놓고 묻는다.
“밴드 노래, 어떤 것 같냐?”
왜 갑자기 밴드 얘기를 하나 싶지만.
“나쁘진 않은데··· 그렇다고 확 끌리지는 않아요.”
함께한 시간은 짧아도 판단은 할 수 있다.
라스베거스와 유타 공연을 통해 밴드의 노래는 충분히 들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누군가. 재능을 찾는 눈과 귀를 가진 남자 아닌가.
“맞아. 밴드 실력 자체는 괜찮은데 노래가 밋밋해. 뭐랄까, 집 반찬 먹는 느낌이랄까.”
그래, 색이 느껴지지 않는다.
몬스터에게서 느꼈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그 색깔.
관객 반응도 밋밋해서 밴드 역시 무대에서 제대로 못 놀고 있다.
“팬들 때문에 그러세요?”
“그것도 있고. 한국에 돌아가면 기자들한테 뭐든 던져줘야 하니까.”
박 상무가 선글라스 콧대를 천천히 올리며 말했다.
아마 뮤직비디오 촬영 소식이 전해지면 내 팬들은 자연스레 밴드에 관심을 가질 거다. 기자들도 이것저것 쏟아낼 테고.
그럼 결국 문제는 음악 그 자체인데, 팬들이 듣기에는 아쉬운 게 사실이다. 회사 역시 보도자료로 활용하기에는 너무 무명의 밴드고.
이시현이 미국까지 가서 고작 이런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한마디로 일하는 상대도 고려해야 하는 법이다.
물론 한국과 여기 일을 같은 선에서 볼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공원이 주는 여유 때문에 박 상무가 잡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뭐든 해보자고 시작한 일이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저것 따지면, 여기 온 의미가 없으니까.”
웃는 내 얼굴에 박 상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무튼. 불어오는 바람에 웃음을 실어 보내고 다시 무대를 바라봤다.
한여름 밤, 무대에서 퍼진 목소리는 바위에 부딪혀 관객과 나를 흠뻑 적시겠지. 어떤 기분일지, 상상만으로 가슴이 들썩인다.
“저 녀석들도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조금 떨어진 계단에 앉아있는 클린턴과 로돌포.
내내 수다를 떨던 그들은 지금 경건하게 앉아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쟤들 마음을 알 것 같다. 나와 같겠지.
언젠가는, 저기에 내가 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박 상무는 휴대폰을 다시 쥐고 물었다.
-외부에 노출되는 거 최대한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여행 중이던 팬들이 귀신같이 알고 찍어 올렸더라고요.
그러니까, 라스베거스에서 찍힌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는 얘기였다.
-이제 보름도 안 남았네요. 빨리 한국 오고 싶으시죠? 상무님 없으니까 일이 안 돼요.
성 팀장의 너스레가 친근히 들려온다.
-아, 그리고 콜로라도 한인회에서 시현 씨 초청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대표님이 거절하라고 하셨어요.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은 그는 다시 원형극장 앞으로 돌아왔다.
세계적인 스타들이 선다는 무대가 오늘은 아이들 차지다.
관객석은 아이들 가족들로 채워지고 있었고, 해가 기운만큼 조명은 강해졌다.
박 상무는 그 사이로 이시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주 잘 보이는, 저 무대 위에 있으니 말이다.
그곳에서 녀석은 무릎을 굽혀 아이들과 눈을 마주하고 있고, 애들 좋아할 법한 미소를 띠고 있다.
“다시 해볼래?”
달래듯 묻자, 나무 분장을 한 아이가 망설이던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자 이시현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그런데 눈에 좀 더 힘을 주면 좋겠다. 우리 다시 해볼까?”
이시현의 목소리는 애들에게도 잘 통하는 것 같았다. 발음도 제법 많이 좋아졌고. 하긴, 저렇게 사근사근 웃으며 말하니 잘 들을 수밖에 없다. 아주 조련사가 따로 없다.
“시현아, 이제 가자!”
박 상무는 무대를 향해 다시 한번 외쳤다.
“잠깐만요. 얘만 좀 봐주고.”
이번에는 해바라기 분장을 한 아이다.
‘하. 저리 순해서.’
박 상무는 한숨 한번 쉬고 무대 밖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클린턴과 로돌포를 바라봤다.
저 두 놈 탓이다. 그 짧은 시간에 이시현이 배우라고 동네방네 떠든 탓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저놈들을 안쓰럽게 여겼다니.
힘없이 고개를 흔들던 박 상무는 문득 무대 옆에 설치된 카메라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저건 무슨 카메랍니까?”
옆에 있는 갈색머리 선생님에게 물었다.
큼지막한 안경알에 아까부터 이시현만 비추고 있던 여자다.
“지역 방송국이요.”
“방송국?”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박 상무는 이맛살을 구겼다. 그때, 해바라기 분장을 한 아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사자야, 내가 너의 동료가 돼줄게. 하지만 부탁이 있어.”
“무슨 부탁인데?”
이시현이 대사를 받았다.
“자꾸만 새들이 나를 쪼아 먹는단다. 네가, 새들을 설득해줄 수 있겠니?”
“까악! 까악!”
하. 박 상무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클린턴과 로돌포가 무대 앞에서 새소리를 내고 있다. 저놈들을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 내가 도와줄게. 그럼 내가 새들을 만나고 올 테니까, 너는 그동안 나를 기다려주겠니?”
“응. 언제까지고 기다릴게.”
“오케이, 아주 잘했어.”
이시현이 아이의 파란 눈을 들여다보고 환히 웃는다. 칭찬받은 아이도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가야 한다. 날도 어두워지고 있고.
“시현아, 가자.”
그런데 또 한 명이 이시현을 붙잡고 있다. 근데 저 아이는 아까 선생님에게 끌려갔던 애 아닌가?
“요정은 내가 대사 맞춰줄게!”
“아, 니가 사자 역이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이시현이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요정은 어디 있어?”
순간, 무대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이시현을 바라봤다.
“나?”
이시현이 제 가슴을 가리킨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 모습에, 뭔가 잘못된 걸 느낀 박 상무가 여선생을 돌아봤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저분들한테 아까 부탁드렸는데··· 요정으로 무대에 올라와 주실 수 있냐고.”
“이 자식들!”
박 상무의 눈이 즉각 두 놈에게 향했다. 쏘아붙인 시선에, 클린턴이 딴 곳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원래 재능은 쓰라고 있는 거야. 그치 로돌포?”
“그게, 나는 곤란하다고 말했는데······.”
“이 치사한 자식아! 나 혼자 미스터 박 총에 죽으라는 거냐!”
서로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두 놈 모습에 박 상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멍청이들을 더 지켜봤다가는 화병이 날 것 같아서, 선생님이 쥐고 있는 빨간색 노트를 낚아챘다.
휙휙···
모두 다 넘기고,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자제하라는 성 팀장의 얘기가 귓가에서 아른거린다. 그러니 무대에서 내려오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시현이 아까 했던 말이 또 귓가에 아른거렸다.
‘이것저것 따지면, 여기 온 의미가 없잖아요.’
**
“리나! 뭐하니? 출발해야지, 공연 끝나겠다!”
문을 활짝 연 여자는 조카의 모습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렇게 불러도 대답이 없더니, 벽에 붙은 포스터에 푹 빠져서 넋을 놓고 있었다.
“리나! 시간 없다니까?”
일단 조카의 손목을 잡고 집을 나왔다.
“리나, 그 남자 보려고 라스베거스 간다고 그랬다며?”
운전대를 잡으면서 여자가 포스터 속 남자에 관해서 물었다.
“맞아요.”
조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좋니? 난 영 별로던데. 아, 내일 프레디가 덴버에 온다는데, 우리 같이 점심 먹을까?”
“아니요.”
조카는 단칼에 거절했다. 포스터 속 남자가 아니면 할리우드 스타 따윈 트럭째 가져와도 싫다는 얼굴이다. 세상에, 프레디를 까는 십 대라니.
“리나, 아빠하고는 사이좋니?”
“딱히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어요. 백인 아빠라고 특별한 건 아니니까.”
“학교생활은 어때? 요즘에도 동양인이라고 못되게 구는 애들 있어?”
조카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는 더 질문하려다 관뒀다. 애들한테 꼬치꼬치 캐묻는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공원에 도착하자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사이, 조카는 계단을 성큼성큼 밟았다.
“그래 알아봤어?”
-리처드가 괜찮은 배우를 발견했었나 봐.
그녀는 전 남자친구와의 통화가 찜찜해서 친구에게 이것저것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었다. 리처드의 ‘굿럭’이 불길했다고나 할까.
“발견했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한국이라는 나라 알아?
“아시아?”
숨이 헉헉 나오는 와중에도 그녀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하, 미쳤네. 그 인간 어디 나사 하나 빠진 거 아니야?”
비아냥거리며 되물었지만, 리처드 눈이 그 정도로 엉망은 아닐 텐데.
“어떤 배우야?”
-뭐, 걱정할 것 없어.
“어?”
-말했잖아. 발견했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끝났거든. 그 배우가 페이 프로덕션이랑 트러블이 좀 있나 봐. 그러니 할리우드 진출은 물 건너갔지.
“그래?”
어떤 트러블인지 잠깐 궁금한 이때, 낯익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놀라서 계단을 뛰어 올라간 그녀는 드넓은 관객석과 무대, 그리고 조카를 볼 수 있었다. 넋 나간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세상에··· 세상에······.”
“리나, 무슨 일이야? 너 괜찮은 거니?”
몇 번을 묻자, 조카는 파르르 떨리는 얼굴을 끄덕였다. 그제야 여자는 안심하고 놀란 가슴을 달랬다.
“아, 전화··· 여보세요?”
-에이미, 무슨 일이야?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잠깐, 배우 이름만 알려주고 끊을게.
귀에서 휴대폰을 잠시 떼고, 에이미는 다시 조카에게 물었다.
“너 정말 괜찮은 거니? 대체 누굴 봤길래 그래?”
“이··· 시현······.”
조카가 여전히 넋 나가서 입술만 벙긋거릴 때, 휴대폰에선 친구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이시현.
< 상어는, 결국 바다에서 죽는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