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ne day in Las Vegas (2) >
“여기.”
“고마워.”
감독은 클럽 여주인이 내민 위스키 한잔을 들었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잔을 흔들며 무대를 바라봤다. 밴드가 슬슬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아.”
스탠드 마이크를 붙잡고 목을 가다듬는 보컬.
짙은 노랑머리에 눈매가 찢어진 놈의 이름은 데럴인데, 싸가지가 제대로 없는 놈이다. 꼭 반항의 상징처럼 낡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는다.
“로돌포! 또 반 박자 늦으면 뒤진다.”
인상을 쓰며 드럼을 노려보는 여자는 밴드 베이스 팻시.
흑진주라는 수식어가 너무 잘 어울리는 저 여자는 기가 무척 세다.
“헤헤. 팻시는 역시 귀신같네.”
미련하게 웃고 있는 저 녀석은 드럼인 로돌포. 약간 대책 없이 긍정적인 타입.
“짐, 피크 하나만 던져줘!”
매니저 짐, 밴드 기타 클린턴.
감독은 밴드 멤버들 이름을 되새기며 온더락 한잔을 여유롭게 마셨다. 한동안 계속 볼 터이니 이름 정도는 외워두는 게 좋았다. 그리고 한 사람 더.
‘시현.’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외워둬야 할 그 이름.
“아까와는 분위기가 다르네.”
클럽 여주인이 무대 앞에 있는 이시현을 보며 속삭였다.
하얀 얼굴, 빛나는 눈, 오뚝한 코, 선명한 입술. 동양인에게도 저런 피지컬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안 표정이다.
“저 남자 한국에서 왔다고 그랬죠?”
“응.”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 처음이에요, 동양인한테 끌린 적은.”
감독이 피식 웃는다. 새삼 놀라운 소리도 아니니까. 그 역시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다.
뮤직비디오 예산을 쥐꼬리만큼 짜놓는 바람에 배우 수급은 글렀겠거니 생각했는데, 웬걸 그 똥통 같은 미니버스 안에 빛이 걸어 들어왔으니 놀랄 수밖에.
“한잔 더?”
“그래 주면 고맙지.”
감독은 다시 가득해진 술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가슴이 적당히 뜨거워지자, 그는 숨을 크게 내쉬고 일어났다.
“좋았어. 예술 한번 해볼까.”
**
“그 여자가 뭐래?”
“별 얘기 없던데요.”
딱히 없었다. 거리의 여자는 내게 한마디 말도 걸지 않고 미소만 보이고 길을 떠났으니까. 이름이 뭔지,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갈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건 뭐야?”
박 상무 손이 테이블에 올려둔 카지노 칩을 가리켰다. 초록과 빨강이 여러 개다.
“모자에서 꺼내서 나눠주더라고요.”
“그래도 비싼 거 줬네.”
그녀는 말없이 비에 젖은 모자 속에는 주섬주섬 칩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나를 보고 미소 짓던 그 얼굴이 꽤 인상적이었다.
“여기, 노래 가사 해석한 거.”
박 상무가 노트를 내려놓고 테이블에서 물러났다.
일단 노트는 잠시 두고, 나는 스토리보드 먼저 손에 집었다. 기괴한 그림체지만 그래도 대충 내용은 알아볼 수 있었다.
“홍콩 영화 같네.”
콘티에서 7, 80년대 홍콩 누아르 분위기가 풀풀 난다.
아무래도 이번 감독은 꽤 준비한 모양이다.
촬영에 앞서 철저한 준비는 버려지는 예산과 시간을 아껴준다. 사실 투어 과정을 담는 기획이 아니라면 하루 만에도 끝낼 수 있는 게 뮤직비디오 촬영이다. 또 그만큼 레퍼런스도 많고.
그러니 뻘짓만 안 하면 되는데.
뭐 예산도 없으니 새롭게 시도할만한 무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배우나 감독처럼 카메라 밥 먹는 놈들은 조심해야 한다. 뭔가 꼭 이상한 욕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콘티를 내려놓고, 박 상무가 준 노트를 손에 집었다.
[Shining Time]
지금 나는 행복해요.
너무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요.
왁자지껄한 클럽에서 처음 보는 밴드의 노래를 듣고 있어요.
하긴 여기는 온통 처음 보는 사람들이죠.
항상 쓰던 위스키가 오늘은 너무 달콤하네요.
나는 왜 이제야 이런 즐거움을 안 거죠?
예 알아요.
아침이 오면 이 행복에서 깬다는 것을.
하지만 밤은 또 오잖아요?
그래서 나는 즐길 거예요.
이제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을래요.
이 순간만은 온전히, 내게 선물할 거예요.
예, 알아요.
당신은 내일 일을 하느라 나처럼 즐길 수 없다는 걸.
그렇지만 당신이 남이 잔 침대나 정리하는 걸 우습게 보는 게 아니에요.
나도 그런 일을 꽤 오래 했어요.
그냥, 나는 그 일이 되게 재미없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요, 내 사랑.
내가 얘기해줄게요.
실컷 이 밤을 즐기고 말해줄게요.
그러면 언젠가 당신 차례가 오겠죠.
당신도 나처럼 재밌게 즐길 수 있겠죠.
그래요, 내 사랑.
그럼 그때 얘기해주세요.
나한테도 당신의 밤을 얘기해주세요. 행복했던 그 시간을 얘기해주세요.
아 근데 어쩌죠?
나는 그때쯤 저 멀리 떠나있을지도 몰라요.
우리가 꿈꿨던 거기에 있을지도 몰라요.
이 밤의 별보다 빛나는 거기 말이에요.
···
다시 노트를 내려놓고, 나는 팔짱을 켠 채 생각을 곱씹었다.
가사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니 그려둔 이미지가 조금 달라진다. 밴드 매니저는 이 노래가 꿈에 관한 얘기라고 했다.
일상에 지쳐버려 꿈의 의미를 상실해버린 누군가의 얘기라고 했었다.
클럽 벽에 붙은 포스터처럼.
[One day, in Las Vegas]
때로는 어떤 장소에서, 때로는 어떤 순간에서, 아직도 기억의 조각이 불쑥 나타나곤 한다.
토요일 밤이었나.
여름이었고, 견딜만한 더위였고, 선선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넘어왔다.
지친 하루였다.
땀 흘리며 방송국 안을 뻘뻘 돌아다닌 하루였다.
3W 홍보하고, 이시현 오디션장에 데려다주고. 땜빵도 나갔었지 아마. 하···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내 꿈은 무대에서 연기하는 건데,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가끔 그럴 때가 있었지만 그날은 특히 그랬던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샤워하는 동안에도, 혼자 밥을 먹는 동안에도 그 생각이 머리에 아른거려서 기분 전화도 할 겸 비디오를 봤다.
아늑한 소파에 궁둥이를 붙이고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TV에서 퍼진 은은한 불빛이 어둠 사이를 맴돌았다.
맥주도 시원했고 영화도 재밌었다.
나도 한 번쯤, 라스베거스로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쩝.”
입맛 한번 다시고 눈을 감았다.
촬영에 앞서 배우가 할 일은 크게 없다.
뭘 하겠어. 그저 집중하고 생각하기 바쁘지.
나는 노랫말이 가진 컨셉에서 스토리를 좀 더 확장했다.
노랫말 저편에 있는 여자의 삶을 그려본다.
물론 영화 속 내용도 떠올려봤다.
오늘 저 포스터를 본 것은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미치코의 삶을 떠올리는 동안 ‘Four Warriors’가 마지막 리허설을 시작했다.
다다다다, 다다다다, 다다다다!
드럼이 쥔 스틱이 빠르게 움직인다.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까지 진동이 전해져오는 동안 기타가 따라붙었다. 잠시 뒤, 보컬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시선은 이내 베이스에게 머물렀다. 무대 위의 주황색 등 아래서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쉼 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가사를 그녀가 썼다는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함에 빠져드는 사이 노래는 클럽의 낡은 바닥, 먼지 묻은 벽, 바에 가득한 크리스털 잔에 부딪혀 더 큰 울림과 함께 내게 돌아왔다.
나쁘지 않다.
페이도 적고, 고생은 있는 대로 하고 있지만, 이렇게 혼자만의 공연을 볼 기회가 생기는 것도 나쁘진 않다.
“준비됐어?”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감독이 곁에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가 빛날 차례니까.
**
“데럴, 인상 좀 펴.”
클린턴이 제 입꼬리를 위로 올리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촬영도 잘 끝났고, 무대도 제대로 소화했다. 그런데도 데럴 얼굴에는 벼락이 내려치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순서 첫 번째로 잡지 마.”
“공연 순서 중간으로 들어가면 카메라 못 돌려. 그나마 배우가 잘해줘서 원테이크로 가는 거지.”
매니저가 어깨를 으쓱 올린다.
클럽 공연 첫 번째 순서는 메이저 밴드가 아닌 이상 관객 호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픈 초기부터 손님이 밀려들 리 없으니까.
하지만 오늘 데럴이 화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클럽을 오픈하자마자 관객들이 밀려왔다.
‘여기가 아까 그 행위예술 하던 배우가 뮤직비디오 촬영하는 곳인가요?’
‘그 섹시한 동양인 배우 여기 있죠?’
처음에는 한두 명이 묻더니, 나중에는 우르르 몰려와서 물었다.
‘여기 시현 오빠 있죠?’
그래서 결과인즉, 그 많은 사람이 밴드의 노래보다는 배우의 몸짓, 눈빛 하나에 야단법석을 떨었다.
“데럴, 혹시 질투하는 거야?”
말장난 한번에 데럴이 눈을 부릅뜬다.
“워워, 농담이야 농담.”
구겨진 입술을 드러내며 데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질적으로 숙소로 올라가는 그 모습에 매니저가 한숨을 쉬고 클린턴을 쳐다봤다.
“적당히 놀려라. 데럴이 왜 저러는지 알잖아?”
“아니까 이러는 거야. 그놈의 마음의 짐 좀 덜라고.”
회사와 계약하고 두 번째 앨범.
이번에도 결과가 없으면 다시 거리로 돌아가야 한다.
꿈에서, 다시 멀어진다는 것.
그러니 데럴이 밴드 리더로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데··· 또 그렇다고 나머지 멤버들까지 울상일 이유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는 잘 될 거야.”
로돌포가 스테이크를 한입 크게 베어 물고 말했다.
다람쥐처럼 볼록 나온 볼이 꿀렁꿀렁 움직인다.
다들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저 대책 없는 놈.
“아무튼, 오늘 잘했어.”
매니저가 카우보이모자를 쓰며 말했다. 너저분한 수염을 쓰다듬는 그에게서 눈을 떼고, 클린턴이 긴 턱을 내밀고 팻시에게 물었다.
“근데, 아까 왜 그랬던 거야?”
“뭐?”
힘없이 수프를 뜨던 그녀가 눈을 치켜뜬다.
“박자 틀렸잖아. 깐깐하기로 소문난 ‘Four Warriors’ 베이스가 말이야.”
하지만 대답 대신 근사한 제스처가 돌아왔다.
이내 중지를 거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테이블에 불어온 썰렁한 바람 속에서 로돌포의 쩝쩝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으흥으흥.”
배부른 로돌포는 콧노래를 부르며 숙소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문 앞에 팻시가 삐딱하게 서 있었다.
“로돌포.”
“응?”
어깨를 으쓱 올리자, 그녀가 벽을 팍 짚었다.
“그 자식 뭐야?”
“누구?”
“시현! 너 알고 있잖아?”
으름장을 놓듯 이름을 외치자, 로돌포가 싱글벙글 웃는다.
“들어와.”
방에 들어간 로돌포는 소형 비디오플레이어를 꺼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서 항상 들고 다는 거다.
“뭐하는 거야?”
“기다려 봐, 환상적인 거 보여줄게.”
지잉, 지잉, 시디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My older brother]
팻시는 비디오플레이어에서 나온 시디 제목을 한참을 들여다봤다.
드라마를 본 소감···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제오늘, 겨우 이틀밖에 못 봤지만, 본래 사람의 첫인상이란 아주 짧은 순간에 새겨지는 거다.
그냥 허우대만 멀쩡한 놈인 줄 알았는데.
드라마 속 이시현의 모습은 그녀가 머리에 새겼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팻시, 너답지 않네.”
로돌포가 웃으며 말했다. 비아냥이 아니다. 이 돼지는 늘 웃기만 하니까.
시디를 내려놓은 그녀가 일어났다.
방을 빠져나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혼잣말을 속삭인다.
“나 아까 왜 그랬던 거야, 대체.”
무대 앞에 있던 이시현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던 그때.
동양인이 갑자기 흘린 눈물에 그녀는 박자를 빼앗겼다.
“젠장, 마음에 안 들어.”
**
「서울, 저녁 11시」
띠리리··· 띠리리···
끊이질 않고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강 팀장은 한숨을 쉬고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아, 지금 한창 재밌는데.”
주인공이 슬롯머신에서 대박을 터트리는 장면.
-강 팀장, 어떻게 된 거야?
전화를 받자마자 특유의 찢어진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KIS 드라마국 윤 씨피였다.
“씨피님?”
-이시현, 당분간은 카메라 앞에 설일 없다면서?
“예, 그렇다니까.”
강 팀장은 소파에 등을 붙이며 말했다.
-허. 또 거짓말하네.
“아니 무슨 소리예요? 밤에 갑자기 전화 와서.”
-그러는 강 팀장은? 이시현, 지금 라스베거스에서 뮤직비디오 촬영 중이라는 게 무슨 소리야? 거리 공연도 했더구먼!
“예?”
-예는 무슨! 지금 이시현 팬클럽에 동영상이 버젓이 올라왔어, 국장님이 그거 알고 지금 난리다 난리! 강 팀장, 지금 세계가 인터넷 시대야, 어디 할 게 없어서 거짓말이야? 우리 드라마 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지, 거짓말까지 하냐?
“진짜 무슨 소리예요?”
-이시현 팬클럽 들어가 봐!
전화가 툭 끊어졌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아무튼 컴퓨터를 켜서 마우스를 클릭하고, ‘시현 수포’ 카페에 들어갔는데··· 모니터에서 뿜어진 빛이 강 팀장의 동그란 눈을 붙잡았다.
< One day in Las Vegas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