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ne day in Las Vegas (1) >
[One day, in Las Vegas]
배우 지망생인 미치코는 고향을 떠나 무작정 LA에 왔다.
할리우드의 별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LA에서의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그녀.
어느 날 거울을 본 그녀는 자신이 더는 예쁜 여배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곳에 온 지 20년이 흘렀고, 그녀는 이제 중년의 청소부일 뿐이었다.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오디션을 본 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라스베거스로 떠난다. 가까이 두고도 가보지 못한 곳, 그곳에서 멋진 하루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파티, 남자, 잭팟.
생에 가장 빛나는 시간을 보내는 미치코.
라스베거스의 어느 날이었다.
“헤이! 잠깐 이리 좀 와봐!”
무대 옆에서 스테디캠을 살피던 감독이 손짓했다. 이시현이 그에게 다가가자, 좀 전까지 서 있던 자리는 박 상무가 차지했다.
“One day, in Las Vegas.”
아까부터 이시현은 매끄러운 턱을 든 채로 이 포스터를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짠하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해서 박 상무도 포스터를 눈에 담았다.
화려한 라스베거스의 불빛 아래서 미소 짓는 여자.
입가에 걸린 미소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포스터였다.
‘이 영화 볼만했지.’
잠시 스친 기억을 뒤로하고 그는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클럽 안은 겨우 밴드 한팀이 자리를 잡을만한 공간 앞에 둥근 테이블 여러 개가 놓여있다. 미모의 클럽 여주인이 바에서 마른 수건으로 유리잔을 닦으며 이시현을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드럼이 타타타 두드리고 기타가 치고 들어올 때, 무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거야. 느린 모션으로.”
감독이 손바닥을 펴 이리저리 카메라 구도를 잡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보슬보슬 맺힌 얼굴이다.
어젯밤만 해도 보조와 둘이서 촬영에, 편집에, 장소 섭외까지 소화해야 한다며 불만을 토하던 얼굴에 지금은 진지함이 묻어 있었다.
“화장실하고 복도에서 오프닝 시퀀스 담고, 무대 앞에서는 클로즈업으로 적당히 커버치자고.”
“오케이.”
이시현이 미소를 끄덕이는 모습에 박 상무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조명은 기대도 안 했지만 화장실은 너무한데.
“걱정하지 마. 내가 개퍼 출신이라서 손에서 빛을 만들어내니까. 하하.”
감독이 이시현을 보며 수더분하게 웃는다.
“그럼 의상은 수트에 흰색 와이셔츠면 되는 건가요?”
“응. 헤어스타일은 가라앉는 스타일로. 처연하게 말이야.”
이맛살을 접어가며 디렉션을 주는 감독에게 이시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녀석은 지금 꽤 집중하고 있었다.
“좋아. 분량 점검은 끝났고··· 저녁의 밴드 공연까지는 여유가 있으니까, 라스베거스 구경 좀하고 와. 여기 왔으면 잭팟에 한번 도전해봐야지, 안 그래? 내일 떠날 건데 아쉽잖아.”
감독이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짓고 말했다. 어차피 이시현의 역할은 촬영 때만 존재한다. 밴드 리허설은 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일단 클럽을 빠져나온 박 상무는 하늘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어디 갈래?”
대답 대신 이시현이 고개를 추켜들고 하늘을 본다.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커튼의 흔들림처럼 조용히 내리는 빗줄기였다.
“하긴. 어딜 가려고 해도 시간이 안 맞네.”
박 상무는 중얼거리며 우산을 펼쳤다. 맘 같아서는 그랜드캐니언이라도 다녀오고 싶었지만, 모텔에서 나오며 물어보니 왕복 다섯 시간은 걸린다고 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요.”
이시현이 배시시 웃는다. 그 바람에 우중충한 날씨로 인해 찌푸려졌던 박 상무의 얼굴에도 미소가 따라붙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시현과 내내 있다 보니 웃음이 는 것 같다.
“찌개 먹자. 어제 보니까 한인식당 있던데.”
박 상무가 앞장섰다.
LA에서도 입이 물릴 때면 한인식당에서 김치찌개며 된장찌개를 사 오곤 했다. 그때마다 냄새 안 나게 숙소에 창문 꼭꼭 잠그고 이시현과 둘이서 소주 한잔의 낭만을 즐겼다. 술이 좀 들어가면 이시현은 말이 많아진다.
“카메라 챙겨올 걸 그랬다. 스타일리스트 데리고 왔으면 그런 거 잘 챙겼을 텐데.”
박 상무는 스타일리스트를 못 데려온 게 못내 아쉬웠다.
미국에 올 때만 해도 현지에서 스타일리스트를 조달할 생각이었지만, 이시현이 워낙 알아서 하니 굳이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관광지에 오니 아쉬움이 다시 든다.
“헤이.”
지나가던 여성들이 손을 살짝 흔든다.
“상무님이 마음에 들었나 본데요?”
“재미없다.”
박 상무는 우산을 흔들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일축했다.
“근데, 케이시한테 연락 왔어요?”
“아니.”
다시 본 오디션 결과가 꽤 늦다.
그날 오디션 대상자는 이시현 혼자였지만, 채널 12 총괄 프로듀서, 감독, 스태프들까지 참여한 꽤 큰 오디션이었다.
박 상무 역시 통역 때문에 함께 오디션장에 있었는데, 미국 와서 그렇게 큰 오디션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박태 감독을 데려다 놓는 게 더 나을 뻔한 오디션이었다. 리처드 감독이 이시현의 연기보다는 촬영에 관한 걸 많이 물었기 때문이다.
우천과 벼락은 실제냐, 저 장면은 며칠 걸린 거냐, 배우들은 훈련을 받고 촬영에 들어간 거냐 등등···
특히 촬영감독은 얘기를 들을 때마다 고개를 내저었다.
815특집드라마가 열흘 만에 크랭크업했다는 얘기에는 입을 쩍 벌렸다.
대체 감독이 누구냐고, 할리우드 진출하라고.
시답잖은 미국식 농담으로 시간만 보내다가 오디션이 끝났다.
한국의 스타를 데리고 그런 오디션이라니.
내키지 않은 오디션이었을 뿐 아니라 서울에 얘기하기도 곤란했다. 이미 기콘부와 홍보부는 9월 활동을 위해서 준비 중인데, 지금 와서 LA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상무님.”
“왜?”
“왜 이렇게 몸이 근질거리는지 모르겠어요.”
“씻어.”
이시현이 피식 웃는다.
“연기가 하고 싶어 몸이 근질 거리다고요.”
포스터를 보고 있을 때부터 분위기가 좀 이상하더라니.
이시현이 할리우드에 온 건 단순한 도전, 단순한 여행이 아닐 것이다. 그저 새로움을 원했고, 어렸을 적 꿈이 여기까지 녀석을 이끌었을 것이다.
“최미숙 선생님이 지난번에 그런 말을 했거든요. 촬영이 끝날쯤이면, 한 씬 한 씬 줄어드는 것이 너무 아쉽다고. 그 말이 지금에 와서 너무 와 닿네요.”
“좀만 참아.”
한국에 돌아가면 근질거리는 몸을 시원하게 해줄 스케줄이 넘쳐날 테니까.
“식당이 이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걷던 박 상무는 또다시 멈춰선 이시현 때문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또 뭘 보고 있나 싶더니, 거리에 서 있는 한 여자에게 시선이 머물러있었다.
얼굴이며 옷이며 온몸 여기저기 회색으로 칠한 여자가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젊은 여자는 아닌데··· 자세히 보니 일부러 저러고 있는 것 같았다.
동상이라도 흉내 내는 건가. 이 빗속에서?
“가자, 시현······.”
길을 재촉하려던 박 상무는 이마를 긁적이며 재차 한숨을 쉬었다. 이시현이 여자의 옆에 다가가더니, 그녀의 머리에 우산을 씌웠다.
**
“하여간 배우란 것들은 다 이상한 놈들이라니까.”
박 상무는 오늘 또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한 시간째, 이시현은 회색 칠의 여자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건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웬만해서는 10분도 버티기가 어렵다. 심지어 이시현은 그냥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다.
‘독한 건지 미련한 건지.’
맞은편에 서서 박 상무는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빗속에 흩어지는 담배 연기 속에서 이시현을 지켜본다.
녀석의 돌발행동이 당황스럽지만, 지난번 일본에 갔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얼핏 떠오른다.
‘저 정도로 노력을 하고, 인내와 끈기가 있었던 놈인가?’
5년을 가만뒀다고 그 시간을 온전히 버려둔 건 아니다.
회사에는 월말평가가 있고, 분기평가, 임직원 전략회의, 전체회의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어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연습생들과 소속 아티스트의 동향이 빠짐없이 보고 된다.
그럼 이시현은 어떤 평가를 받았던가.
카메라 울렁증이라는 이유로 매번 오디션에 낙방하는 놈이었다.
그래서 다들 한 번씩은 그런 말을 했다. 혹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사내자식이 의지가 없어 카메라 울렁증 하나 극복 못 한다고 말이다.
‘카메라 울렁증을 넘어서더니만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죠.’
언젠가 최재환이 그렇게 말하고 히히 웃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말도 했었다.
‘무대에 있는 녀석을 보는데, 멀어지더라고요.’
손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가는 것 같다고 했었다.
“저 두 사람 전혀 안 움직이네.”
“여자는 행색이 엉망인데··· 남자는 모델인가 본데?”
곁에서 들린 속삭임에 박 상무는 눈썹을 살짝 들었다.
주위를 보니 지나던 사람들의 발길이 하나둘 멈춘다. 여자 앞에 놓인 모자에는 비와 동전이 채워졌다. 더러는 카지노 칩도 섞였다.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있었다.
보슬비 아래서 행위예술을 하는 여자와 그 옆에서 우산을 받쳐둔 채로 서 있는 모델 같은 남자.
꽤 괜찮은 피사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표님이 조급한 이유를 알 것 같네.”
**
“그래도 아시아인은 너무하잖아. 아무리 인디 밴드라도 회사에서 지원이 너무 바닥인 거 아니야?”
“하. 또 그 얘기.”
다시 시작된 불만에 매니저는 이마를 구겼다.
회사의 투자가 한정돼 있으니 할 수 있는 것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뮤직비디오는 지역 방송에 나갈 수 있는 수준 정도로 맞추는 데 목적이 있다고, 그렇게 누누이 설명했건만.
“어차피 노래가 중요하지, 뮤직비디오 모델이 뭐가 중요해?”
“차라리 내가 할게. 그냥 돌려보내자.”
뭔 병신같은 소리를 하는 건지.
“데럴. 너 보컬이야. 니가 노래 부르는데, 니가 관객으로 등장해서 무대를 바라본다고? 무슨 복제 인간이냐? SF야?”
“그게 어때서?”
“마음대로 해라.”
체념한 매니저는 포기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밴드 기타 클린턴이 의자에 기대며 다리를 뻗고 끼어들었다.
“난 마음에 들던데. 분위기 있잖아?”
“무슨 분위기? 눈도 작아서 눈동자도 잘 안 보이더만.”
데럴이 검지로 눈가를 찢는 모양을 그렸다. 그걸 본 밴드 베이스가 무대에 엉덩이를 걸치며 나무랐다.
“그런 병신같은 짓 좀 하지 마.”
“팻시, 너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록이야, 록! 더구나 우리 첫 번째 뮤직비디오라고!”
“록은 록인데, 모던록이고, 첫 번째든 두 번째든 우리는 돈이 없어.”
매니저가 다시 끼어들었다.
“데럴, 이번에는 네가 그냥 참아. 우리 돈 들지 않는 게 어디야.”
“젠장, 로돌포! 어떻게 책임질 거야?”
데럴이 밴드 드럼을 쏘아봤다. 녀석이 에이전트 사무실에 아시아계 배우도 상관없다는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거니까.
“출발하기 전에 얘기하던가, 지금 와서 어떻게 돌려. 그리고 너, 미스터 박한테 그냥 집에 가라고 얘기할 수 있어? 걔 품에 총 있어.”
매니저가 계산서를 챙기며 속삭이자, 멤버들이 키득거린다. 그러는 사이 주크박스 기계랑 씨름하던 로돌포가 함박웃음을 입에 달고 다가왔다.
“데럴. 니가 몰라서 그래. 우리는 완전 땡잡은 거라니까.”
“또 저 소리네.”
팻시가 어깨를 으쓱한다. 주황색 천장 등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달라붙는 모습에, 로돌포가 통통한 볼을 씨익 올렸다.
“내가 장담하는데, 우리 뮤직비디오는 아시아에서도 인기 끌 거야.”
다들 어이가 없어서 피식거린다.
당장 오늘 공연에 몇 명이 올지 가늠할 수도 없는 판국이건만.
“훗. 난 로돌포의 저런 점이 마음에 들어. 대책이 없거든.”
매니저가 턱수염을 긁적이며 웃는다.
클럽 주인이 그를 보며 물었다.
“당신들 오늘 뮤직비디오 촬영하는 배우 이름이 뭐야?”
“왜요?”
팻시가 눈을 흘기고 물었다.
“그 배우, 꽤 유명한 사람인가 봐?”
“뭐라고요?”
“밖에서 보니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데. 그것도 엄청 많이.”
대체 저게 무슨 소리일까.
클린턴이 긴 다리를 뻗어 일어났다. 그는 궁금한 건 못참는다. 팻시도 머리카락을 흔들며 따라갔고, 로돌포는 두툼한 엉덩이를 흔들며 쫓아갔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얼마 못 가 클럽 주인이 얘기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거리 가득 사람들로 넘쳐났다.
“오 또 분위기가 바뀌었어. 좀 전까지 뭔가를 잃어버린 남자였는데, 지금은 마치 연인을 배웅하고 있는 것 같아.”
“와우, 이거 1인 뮤지컬 보는 것 같네.”
“근데, 나는 아직도 비가 오는 것 같아.”
수군거림. 하늘을 힐끗힐끗 보는 사람들.
“잠깐만요.”
셋은 군중 틈새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이시현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그처럼 또 다른 여자가 서 있었지만 행색이 극과 극이다. 그런데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한 폭의 그림이자 사진이었다.
“말했잖아. 우리 완전 땡잡은 거라고.”
< One day in Las Vegas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