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88화 (188/227)

< 굿럭 (4) >

-벌써라니. 8월 금방 간다.

수화기 속 목소리에 박 상무는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이란 게 순식간에 지나가는 법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차 대표의 목소리는 미리부터 9월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긴. 애초부터 차 대표는 ‘설마 이시현이 되겠어?’ 같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이시현의 해외 활동은 없다는 게 이사회의 결정이었으니까.

불확실한 스케줄로 투자자들에게 불안을 심어주는 대신, 국내활동에 주력하면서 주변 아시아 시장에 발을 넓힌다. 그게 바로 지에스가 그린 이시현의 미래다.

-이시현은?

“조깅하러 갔습니다.”

박 상무는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를 보며 대답했다.

이시현은 늘 그렇듯 근처 한 바퀴를 달리러 나갔다.

-조깅이라. 확실히 젊은 게 좋아.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한숨을 내리 쉬었다. 한참을 창에 맺힌 빗방울을 바라보던 박 상무는 조깅을 마치고 온 이시현을 볼 수 있었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숙소 계단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응?’

잠깐이지만 반대편 모텔 방에서 커튼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아마도 이시현을 보는 모양이다. 하긴. 저렇게 멋있는 놈이 열기를 뿜으며 들어오는 데 관심이 안 가면 이상한 일일 거다.

‘가만 보면 최재환이 진짜 독한 놈이지.’

회사에서는 저 물건을 가지고도 창고에 박아두기만 했는데, 끝내 꺼내서 닦아내고 광내더니만 저렇게 만들어버렸다.

철컥.

옆 방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숙소는 복도식이라 지나가는 사람의 발소리며 문소리가 아주 잘 들린다. 잠시 뒤에 화장실 물소리가 들리자, 박 상무는 전화기 옆에 놓인 메모지를 들었다.

[빨리 연락 바람]

대머리 에이전트 놈이 몇 번이나 전화했다는데···

휙.

구겨버린 메모지는 쓰레기통에 던지고, 케이시가 보내준 서류를 손에 집었다.

일단은 LA 인근에서 활동하는 인디 밴드를 중심으로 미팅을 잡았는데, 딱히 들어본 이름들은 아니다.

“샌타모니카. 글렌데일. 샌타애나.”

오늘은 LA를 돌며 그들을 하나하나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비가 그치면.

**

“할리우드는 에이전트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에요.”

케이시는 금발을 흔들며 눈앞의 배우에게 설명을 계속했다. 영국에서 온 신인배우는 할리우드의 꽃이 되기 위해서 그녀를 찾아왔다.

“에이전트 중에는 홀로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에이전시에 소속돼 있죠.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명의 에이전트, 거기에 사무직까지 더하면 직원이 수천 명인 에이전시도 있거든요. 아, 저는 얼마 전까지 데이비드 에이전시에 소속돼 있었어요. 들어봤죠? 할리우드 최고의 에이전시.”

케이시는 빙긋 웃고 서류를 내밀었다.

“음, 할리우드에서는 감독들이 장난삼아서 에이전트에게 등급을 매긴다던데, 당신은 무슨 등급이죠?”

신인배우가 멋쩍은 미소를 보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케이시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답했다.

“A”

배우가 돌아가고 케이시는 창가를 서성였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고 있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보던 그녀는 문득 이시현을 떠올렸다.

‘뮤직비디오라니.’

냉정하게 따져보면 지금 이시현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머잖아 할리우드에서 적당한 포지션을 잡을만한 외모와 실력임은 확실했다. 문제는, 이시현에게는 한국의 매니지먼트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놈의 계약서 때문에.

“훗.”

방금 계약을 체결한 그녀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연기 말고 다른 건 없을까.”

그 피지컬로 연기 외적인 부분을 노려본다면 괜찮을 텐데. 모델 활동도 좋고. 노래라도 좀 부르면 좋은데. 한국에서 음악 활동도 했다고는 하는데, 아직 확인해보진 못한 그녀였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파티를 가던가.”

할리우드에서는 파티에 참석하는 것도 오디션만큼 중요한 일이다. 코리아타운에 가면 아시아 여자한테 푹 빠져서 정신 나간 감독이 어디 한둘인가.

“아휴.”

짧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펄럭이는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제니퍼, 미스터 박한테 밴드 명단 보냈어요?”

“예.”

비서의 입가 주름이 오늘따라 깊어 보인다.

“아, 케이시.”

문을 닫으려던 케이시가 멈칫했다. 뒤돌아 눈썹을 올리는 그녀에게 비서가 다시 말했다.

“채널 12 스튜디오에서 연락 달라는데요?”

“채널 12?”

**

“뭘 그렇게 보냐.”

먼저 차에 탄 박 상무가 이맛살을 접고 물었다.

“하늘이 예뻐서요. 상무님 그거 아세요? 비 그친 날 바닷가 가면 정말 예쁘대요.”

하늘이 놀랍도록 파랗다.

“누가 그래?”

“있어요. 그런 사람.”

LA에 놀러 왔었는데, 말리부 해변이 그렇게 예뻤다던 오소리의 얘기가 떠올랐을 뿐이다.

“시현아. 우리 오늘 바쁘다.”

경적이 빵! 울린다. 나는 서둘러 차에 올라타 안전띠를 둘러맸다. 그리고 검지를 내밀었다. 누구처럼.

“출발!”

「클럽 A (샌타모니카 2번가)」

무대 위의 남자들이 헤드뱅잉을 하고 있다.

새하얀 얼굴, 붉은 입술, 저건 아이섀도야 뭐야? 아니면 마스카라가 번진 건가? 꿈에 나올까 두려운 스모키 화장에 나는 지금 넋이 나갔다.

위이이잉!

귀가 먹을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일렉트릭 기타.

타타타타!

흥에 빠져 아무렇게나 두드리고 있는 드럼.

“love it! love it! love it!”

세상 떠나가라 마이크를 붙잡고 있는 보컬까지.

옆을 보니 어느새 박 상무는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클럽 B (글렌데일 이스트 브로드웨이)」

여기는 들어올 때부터 느낌이 싸하다 싶더니···

언제 세상을 떠나실지 모를 어르신들 넷이 무대 위에서 마지막 힘을 쥐어짜고 있었다.

“시현아.”

박 상무가 나직이 부른다. 나는 겨우 미소를 띠고 말했다.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스토리보드 봤잖아요? 나쁘지 않던데? 황혼의 열정과 젊음의 에너지를 대비해서 예술적인 영상을······.”

나름 긍정적으로 상황을 보던 나는 순간 목을 움츠렸다.

지금 막 무대 위에서 노인 한 분이 쓰러졌다. 뮤직비디오 촬영보다 병원이 더 급한 듯 보인다.

「목적지 클럽 C (샌타애나 이스트 4번가)」

샌타애나로 가는 길은 하늘이 완전히 갰다. 바람도 선선하다.

“근데 케이시한테는 참 고맙네요.”

닭 탈 한번 써준 것 치고는 그녀에게 꽤 많은 걸 얻고 있었다.

“그것도 다 니 운이야.”

그래 운도 하나의 능력이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어느 날 갑자기 스타를 만들기도 하니까.

하지만 LA에 와서는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운은 존재하는 걸까.

“다 왔다.”

우리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그런데 여기는 하늘이 유난히 짙은 주황색을 띠고 있다.

“샌타애나는 해가 밝네요?”

내 말에 박 상무가 선글라스를 살짝 들추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는 하늘이 밝은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탕! 탕!

클럽 앞에서 자동차 한 대가 불타고 있고 멀리서 총소리가 들린다. 아··· 여기는 미국이지.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내 모습에 박 상무가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 말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바다나 보고 가자.”

**

「2001년 8월 8일 수요일」

“하하하!”

날 좋은 오후의 점심을 먹으며 어제의 일을 얘기했더니 케이시가 배꼽을 잡고 웃는다.

한참 끅끅거린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훔쳐내고 말했다.

“이거 한번 봐.”

시디 한 장을 내민다.

“Four Warriors?”

박 상무와 내가 표지를 보는 동안 그녀는 설명을 덧붙였다.

“열흘 일정으로 라스베가스, 유타, 덴버, 아이오와, 시카고, 뉴욕에서 클럽공연이 있는데 그 과정을 담아서 뮤직비디오로 제작할 거래.”

다큐멘터리 형식인가 보네.

“얘들, 메이저 레이블 배급망 한번 타면 게임 끝이야. 그때는 시현 얼굴이 바로 MTV 타는 거야.”

잭슨에, 브리트니에 이어서, 이번에는 MTV라.

아무래도 얘 약간 허언증 있는 것 같은데.

“배급망?”

“인디 밴드는 인기를 얻으면 처음엔 소규모 회사하고 계약하거든. 흔히 말하는 인디 레이블. 그러다가 좀 더 반응이 좋으면 그때는 메이저 배급망의 도움을 받는 거야. 그럼 이제, 아 우리가 좀 떴구나 하는 거지.”

그녀는 잠시 멈춰 와인을 꿀꺽 삼키고 다시 말했다.

“메이저 배급망을 타고 판매량이 좋으면 진짜 메이저로 데뷔하는 거야. 유니온 같은 회사랑 다이렉트 계약하는 거거든. 여기선 그게 정석이야. 영국 록 밴드도 여기오면 그렇게 거쳐야 해. 브릿팝이라고 다를 거 없거든.”

“그래서, 얘들이 메이저급으로 올라갈 것 같다?”

이것저것 다 빼고 요점을 묻는 내 모습에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빛난다.

“촬영 기간은 열흘. 이번 일요일에 라스베가스로 출발. 다큐멘터리 무비 형식이라서 아마도 투어를 따라가야 할 거야. 뭐 어려운 건 없어, 그냥 촬영할 때만 카메라 앞에 서는 거니까.”

이동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다만 촬영 기간이 열흘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좀 긴데···

“한번 믿어봐. 내 안목을.”

믿음이라. 세상일이 믿음대로 되면 좋으련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낭패에 빠지는 일도 다분하다.

하지만 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바로 이어진 케이시의 확신이 내 맘을 굳게 만들었다.

“나는 운을 믿거든. 스타가 될 시현의 운.”

“오케이.”

그녀가 미소를 씩 보인다. 그래서 나도 미소와 함께 넌지시 부탁했다.

“근데 뮤직비디오 촬영 끝날 때까지 오디션 하나만 더 잡아줄래? 돌아오면 바로 볼 수 있게.”

뮤직비디오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니까.

촬영을 마치고 오면 한 번 더 오디션을 볼 시간이 있다.

“두 개는 아니고?”

케이시가 놀리듯 묻고 빙긋 웃었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실은, 좋은 소식이 있어.”

“좋은 소식?”

“치킨 플라이 출연료 400달러. 200달러 주겠다는 걸 내가 힘 좀 썼지. 물론 수수료도 떼지 않았어. 처음이니까.”

400달러.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번 돈.

신기해서 수표를 꺼내보는데, 케이시가 봉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잘 기억해, 400달러야. 할리우드에서의 너의 시작이 말이야.”

시작이라···

그 단어 하나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어린애처럼 들뜬 얼굴로 박 상무에게 수표를 내밀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옆자리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냈다.

“조?”

대머리 에이전트.

“하 시현, 종일 찾아다녔다고. 근데 그거 알아? 여기가 LA에서 제일 맛없는 곳이야. 저녁은 내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대접하지. 좋지?”

불쑥 찾아온 대머리가 과한 미소와 액션으로 나를 본다.

내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케이시가 친절하게 한마디를 꺼냈다.

“이 머저리는 뭐야?”

“그러는 이 가슴만 큰 여자는 뭐야?”

둘 사이에서 레이저가 부딪치는 사이 박 상무가 입술을 닦던 냅킨을 툭 내려놓았다.

“조. 우린 할 얘기가 없는 거로 아는데?”

“나도 알아, 나한테 조금 섭섭했던 거. 하지만 말이야, 아주 큰 계획이 있었다고. 누구나 있는 그런 계획이 아니거든. 하하하! 그리고 내가, 그 계획을 드디어 실행에 옮겼지.”

조가 두 팔을 벌리더니 어깨춤을 춘다.

그래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눈썹을 쫑긋 올리자, 뾰족한 코가 눈앞에 바싹 다가왔다.

“지난번에 오디션 본 거 있지? 채널 12말이야. 그거 내가 잡았어! 리처드 감독이 널 마음에 들어 한다니까?”

두 주먹을 불끈 쥔 백인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른다.

채널 12라고 하면, 치킨 플라이를 찍던 날 떨어진 오디션인데 그걸 잡았다고?

나는 영문을 몰라서 케이시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간다. 깍지 낀 손에 뾰족한 턱을 얹더니.

“리처드 감독이 시현이 널 마음에 들어 한다는 얘기, 그거 사실이야. 나한테도 연락이 왔거든. 내가 치킨의 주인 맞냐고.”

이번에는 조를 돌아보고 씨익 웃는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지. 물론 오디션 일정도 잡았어. 내일모레 금요일.”

얘기를 마친 그녀는 입술을 닦고 일어났다.

드르륵.

바로 이어 박 상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대머리 어깨에 손을 얹고 선글라스를 쓰며 말했다.

“굿럭.”

**

똑똑.

“청소하러 왔어요!”

모텔 매니저는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다음에요.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고양이 숨 쉬듯 들렸다.

‘하. 또야?“

모텔 매니저는 이마를 찌푸렸다. 청소를 거절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 방의 손님은 벌써 한 달 가까이 하우스키핑을 거절하고 있었다.

“내일은 꼭 열어주셔야 해요!”

늘 그렇듯 같은 말을 외치고 뒤돌아서려던 모텔 매니저.

하지만 어깨를 틀던 그녀는 멈칫하고 문 옆에 달린 창을 바라봤다.

블라인드가 살짝 움직인 것 같았다.

안에서 자신을 본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던 모텔 매니저의 시선이 문득 반대편에 있는 모텔에 머물렀다. 주차장을 가운데 끼고 야자수에 둘러싸인 곳인데, 지금 위치에서 보면 그 남자가 머문 곳이 보인다.

동양에서 온 섹시한 남자. 매일 오후 조깅을 하는 남자.

‘설마.’

반대편 모텔과 창문을 번갈아 본 그녀는 피식 웃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렇게 반쯤 내려와 다시금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굳게 닫힌 문.

“저 방 손님 이름이 올리비아였지?”

생각해 보니 한때 그녀가 좋아하던 영화 속 여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이름과 같았다. Close your eyes.

“에이 설마.”

그저 우연일 뿐이겠지.

< 굿럭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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