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럭 (3) >
「채널 12 스튜디오」
“잠깐.”
눈을 부릅뜨고 있던 리처드 감독이 손가락을 뻗었다.
“여기서부터 다시.”
잠시 멈췄던 CCTV 영상이 천천히 이어졌다. 촬영 중간에 닭 탈을 벗는 남자의 모습과, 젖은 머리카락이 붙은 하얀 얼굴이 선명히 드러났다.
“저 남자 섹시하네.”
보안요원이 입술을 핥으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마도 아시아계 여자의 눈에는 저 닭이 꽤 매혹적인 모양이다.
“리처드, 저거 우리 쪽 드라마예요?”
“아니, 잭 리처 감독 영화야. 특수효과촬영 때문에 여기서 작업했거든.”
“후후, 저 닭 너무 귀엽다.”
리처드 감독은 그녀의 들뜬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경비실을 나왔다. 한시라도 빨리 오디션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전화기를 향해 손부터 뻗었다. 그런데 손끝이 닿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울렸다.
“뭐야 이 재수 없는 타이밍은.”
불길함에 눈살을 찌푸리고 전화를 받았다.
-나야.
“웬일이야? 채널 H 총괄 프로듀서 에이미 스콧께서.”
감독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비아냥거렸다.
한때는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그녀의 전화가 썩 내키지 않는다. 세상사 그렇듯 살을 맞댄 남녀도 침대가 부서지면 적이 되는 법이다.
-우리 드라마 소식 좀 전해주려고 전화했지.
리처드는 그녀가 어떤 드라마를 얘기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채널 H에서 방영 예정인 작품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밴드 오브······.’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스토리는 제작비 1억 5천만 달러, 제작기간 3년, 투입된 감독이 셋, 국민배우 톰 행크스가 제작자로 참여했다. 현재는 후반작업을 마치고 방영 예정이었다.
-당신 그거 알아? 우리 드라마는 최고 중의 최고가 될 거야. 앞으로 나오는 모든 전쟁드라마는 우리 거랑 비교될 수밖에 없을 테고. 뭐, 부담 좀 될 것 같아서 말이야. 걱정돼서 전화했지.
그 말인즉, 후발주자로서 자신이 있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황하는 반응을 기대했을지 모르겠지만, 리처드 감독은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에게는 없는 배우를, 지금 막 찾았으니까.
“굿럭.”
**
빗줄기가 얼마나 세찬지 후드티가 쇳덩이처럼 무겁다.
‘후.’
LA에 와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조깅을 한다. 박 상무가 아침은 위험하다고 해서 점심 무렵에 등줄기가 땀에 젖을 때까지 뛰고 와 햄버거를 먹는다. 물론 아주 꿀맛이고.
오늘은 비 덕에 평소보다 다리가 무겁다.
그래서일까. 왠지 ‘스텝’ 촬영이 생각난다. 섀도복싱 티저 영상을 촬영하려고 살수차를 동원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드라마 ‘우리 오빠’ 촬영도 잊을 수 없지.
전남 순천까지 내려간 야외 촬영 때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우천 씬으로 우회했던 일도 있었다.
아니지, 지독한 비라고 하면 단연 백암산 촬영이지.
질릴 정도로 비를 맞고 촬영했으니까.
‘잭슨이나, 브리트니라고?’
뮤직비디오 얘기를 꺼냈더니 케이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괜히 시간만 소비한다고 우리를 말렸다.
잭슨이나 브리트니가 우리를 쓰겠냐는 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는 거 아니냐고 그녀를 설득했다. 꼭 잭슨이나 브리트니여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한국에서도 신인들의 등용문으로 뮤직비디오를 택할 때가 많고, 나 역시 처음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너라서’ 뮤직비디오 촬영 날도 저녁에 비가 왔었구나.
아무래도 비가 나에게는 좋은 신호가 아닐까 싶다.
아니. 그냥 그렇게 생각할 거다.
‘지금은 어떤 기회가 눈앞을 스쳐 갈지 모르니까.’
잠시 횡단보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반대편에서 우산을 쓰고 있는 외국인의 시선이 느껴진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뒤를 돌아보니 옷가게 유리 벽에 내 모습이 비쳤다. 등에서 식은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신호가 바뀌고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 끝에 매달린다.
‘나한테 얼마나 시간이 있을까.’
뮤직비디오는 바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후반작업도 해야 할 테고, 공개되는데 시간이 걸린다.
물론 아직 어떤 그룹, 어떤 가수, 어떤 밴드가 될지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럼 촬영은 또 얼마나 걸릴까.
너무 길면 안 되는데. 나한테는 시간이 많지가 않다.
8월도 금방 지나갈 거다. 벌써 한국에서는 내가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을 테고.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
기회가 올 때, 놓쳐선 안 되니까.
**
「서울. 여의도 MNC D공개홀」
“오빠아!”
소녀들의 비명이 주위를 꽉 채운다.
매니저의 보호 아래 성지훈은 곧바로 차에 올라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팀장님, 저 지에스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비록 출연 분량이 많지 않았지만, 드라마 ‘스텝’의 인기에 편승한 덕에 요즘 성지훈의 입가에는 웃음꽃이 떠나질 않았다. 행사 역시 끊이질 않아서 이미 재정문제는 해결한 지 오래전.
“그럼 시현이는 이달 말에 오는 거예요?”
성지훈이 눈을 감고 물었다. 스타일리스트 한송이가 그의 얼굴에 화장솜을 두드린다.
강 팀장은 손에든 신문들을 넘기며 나직이 대답했다.
“어.”
[‘스텝’ 방송 5회 만에 시청률 30프로 돌파.]
[전국은 지금 ‘스텝’ 앓이!]
[나도 한번 이시현처럼? 복싱 열풍 심상치 않다!]
[그런데 이시현은 어디에?]
[4회 리뷰··· 권투를 다시 시작한 장태원을 용서하지 못한 권여름. 그녀는 도장을 찾아와 장태원의 뺨을 때리는데···]
8월 말이면 이시현의 미국 체류도 끝난다. 그러니 이제 올 때를 준비해야 했다. 9월이 시작되면 방송가에 또다시 폭탄이 쏟아질 테니까.
지에스는 언제라도 이시현이라는 융단폭격을 쓸 준비가 돼 있다.
“하여간 시현이도 참 특이하다니까. 야야, 천천히 두드려라.”
슬며시 눈을 뜨니 한송이의 넙데데한 얼굴에서 뜨거운 콧바람이 쏟아졌다. 뭔가 잔뜩 심술이 난 모양인데, 이 여자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럴 때 한번 도전해보는 거지.”
강 팀장의 혼잣말 같은 대답에 성지훈은 눈을 감고 다시 물었다.
“오디션 본 건 반응이 어떻데요?”
“글쎄다. 아, 난 여기서 내려줘라.”
강 팀장은 도로변을 가리켰다. 차에서 내린 그는 하늘 한번 쳐다보고 높은 고갯길을 바라봤다. 천천히, 여름의 더위를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후··· 진저리나게 덥네. 미국도 이런가. 나도 따라갈 걸 그랬나. 안 그럼 언제 또 미국을 가겠어.”
이미 떠난 버스를 그리워한들 의미는 없지만.
최재환이야 이시현과의 특수 관계 때문에 따라다녔지, 팀장으로서 어느 한 사람 따라다니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시현과 함께 미국에 가질 못했다. 갔으면 좋았을 텐데.
강 팀장은 땀을 뻘뻘 흘린 끝에 눈앞에 마주한 학교 현판을 바라봤다.
[한국 K 외국인학교]
교문을 지나 인공잔디로 채워진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스탠드 계단을 밟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여보세요?”
-어디세요?
성 팀장 목소리다.
“재인이 학교에 왔어요.”
몬스터 신재인.
-아, 그렇지.
“가을에 활동 들어가려면 학교장 허가받아야 하니까.”
지난번 ‘오후의 빛깔’은 순전히 팬서비스 차원의 활동이었다. 그마저도 프로포즈 방송 이후 이시현은 모든 활동을 중단했었다.
뭐 덕분에 남수혁만 노났지만. 아무튼.
융단폭격의 시작은 이시현과 몬스터의 합작 프로젝트가 맡는다.
차 대표가 모든 것을 걸었던 몬스터 프로젝트는 한때 좌초될 위기를 겪었지만, 신재인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준비했다.
‘천재와, 천재의 콜라보.’
바로 이날을 위해서.
**
끼익!
급히 멈춰선 차는 주차장 바닥에 선명한 스키드마크를 새겼다.
차에서 내린 대머리는 신경질적으로 차 문을 닫고 움직였다. 비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눈코입을 잔뜩 찌푸린 채로 차 키를 찰랑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내가 이럴지 알았어! 끝내 일을 저질렀어, 끝내!”
채널 12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이시현이 누구냐고.
왜냐고 물었더니 리처드 감독이 당장 스튜디오로 들어오라고, 안 들어오면 다신 채널 12에 못 들어올지 알라고 으름장을 놨다.
“대체 뭘 한 거야? 시키는 대로 오디션이나 보면 되는 거 아니야!”
걸음걸음에 저주와 욕을 퍼부으며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옷에 묻은 비를 털어내는 손길이 거칠다.
“한국에서 왔다고? 할리우드에 도전한다고? 에이!”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남자가 선이 얇고 호리호리하다. 눈웃음은 또 어떤지. 게이가 분명할걸? 거기다 곁에만 가도 마늘 냄새날 것 같은 동양인.
“혹시 그 갱 두목같이 생긴 놈이 살인이라도 저지른 건가?”
머리가 지끈거린다. 한국에서 온 골치 아픈 두 놈이 그의 에이전트 인생에 최대 피로감을 안기고 있었다.
제작지원실에 모인 임원들은 TV 화면에 집중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가로지르는 군인의 모습에 매료돼 다들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다.
타타타! 콰쾅!
포탄에 흙이 파이고 총알에 전우들이 죽어가는 전쟁터.
맨손으로 적을 죽이는 군인의 모습은 괴물 같으면서도 가슴 한편을 울리는 괴로움이 있었다. 임원들은 하나같이 찌푸린 얼굴로 그 괴로움을 공유하고 있었다.
피와 흙, 연기로 검게 변한 군인의 얼굴에서 오직 눈동자만이 그가 가진 감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허무함, 외로움, 고통, 아련함 같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가슴을 울리는 감정이 제작지원실에 켜켜이 쌓였다.
그리고 바람.
주저앉은 군인의 턱 끈을 바람 한 점이 흔들고 스쳐 가고.
전쟁터의 소리가 점점 사라지면서 바람 소리가 커진다.
스크롤 자막이 올라가자 창가 블라인드가 걷히고 방안에 불이 켜졌다.
“저 배우를 주연으로 쓰겠다는 건가?”
사장이 펜을 굴리며 본론에 들어갔다.
“물론 아니죠.”
주연은 백인이다. 이는 불변하다.
리처드 감독이 얘기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꽤 괜찮은 조연이 될 겁니다. 저 배우는 채널 H 드라마에는 없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요.”
한마디로 그런 거다. 이 녀석은 커피 원액이다. 그것도 아주 진하다. 그러니 이제 물과 설탕만 있으면 아주 괜찮은 커피를 마실 수가 있는 거다. 그런 단순한 이치다.
“그리고 알아보니까, 한국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다녀온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캠프에서 훈련은 다시 받아야겠지만.
“론, 우리는 언제부터 촬영이지?”
“내년 2월이요, 배우들 훈련소 입소부터 시작이죠.”
프로듀서가 안경 콧대를 만지며 알리자, 사장이 콧잔등을 긁으며 고민한다.
“흠, 스크립트를 수정한다······.”
결국에 감독이 바라는 것은 시나리오의 일부 수정이었다.
프로듀서의 허락이 없는 한 시나리오 수정은 절대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그 배우가 지금 어디 있는 데?”
사장이 눈을 빛냈다. 청신호에 리처드가 서둘러 입을 열려는 이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감독님.”
조감독 목소리에 그는 잠시 밖으로 나왔다. 그토록 기다린 배우의 에이전트가 눈앞에 있었다. 반가움에 손을 내미는데 갑자기 에이전트가 어깨를 으쓱한다.
“리처드, 당신이 지금 오해하고 있는데, 나 걔랑 아무 관련도 없어. 계약서도 없고, 금전 거래도 일절 없고, 우린 결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절대!”
대머리는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눈을 크게 떴다.
리처드 감독의 이마가 점점 찌푸려진다. 그러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대머리가 입술을 훔치고 속삭였다.
“이게··· 아닌가?”
< 굿럭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