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굿럭 (2) >
「베벌리 힐스」
파란 하늘, 쨍한 햇살, 아름다운 여자들이 지나가는 식당 앞에 파란색 페라리 차량이 멈췄다.
“왔다, 왔어!”
기다리던 파파라치들이 일제히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프레디, 여기 좀 봐요! 프레디!”
“프레디, 또 여자가 바뀐 거예요?”
“그러지 말고 포즈 좀 취해줘요!”
차에서 내린 남자는 정신없이 플래시에 귀가 먹먹한 소란에 가운뎃손가락을 힘껏 내밀었다.
“그걸로 되겠어요? 좀 더 힘껏 뻗어봐요!”
파파라치들은 식당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은 물론, 웨이트리스와 가볍게 포옹하는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 그마저도 사라지자,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와, 정신없네.”
LA에 와서 이따금 보는 풍경인데, 이 동네에선 눈앞에 할리우드 스타가 지나가면 보통 그 뒤에는 셋 중 하나가 따라붙는다.
팬, 파파라치, 경찰.
“Alta.”
“알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팝 밴드 Alta의 보컬이지.”
입을 연 박 상무의 입에서 좀 전의 남자에 관한 정보가 줄줄이 나왔다.
캘리포니아 출신 혼성 그룹으로 1집 Top of the man으로 작년 빌보드 차트 2위에 안착, 현재 2집 앨범 준비 중인 밴드.
‘아. 알타.’
그리고 나도 머리가 번뜩인다. 소속 작곡가 하나가 허락 없이 곡을 샘플링해서 저작권 논란이 생겼던 적이 있다. 뭐 그런 일이 한두 번이겠냐만.
아무튼 그때 걸려서 얄짤없이 저작권료 내고 사전에 합의가 됐던 거로 무마했던 기억. 그 밴드가 알타였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내가 음악에 조예가 깊거든.”
어울리지 않는 농담에 나는 피식 웃었다. 박 상무가 헤드폰을 끼고 음악에 심취했을 모습이 영 머릿속에 안 떠오른다.
우리는 좀 더 걸어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식당의 야외 테라스에서 케이시가 잡지를 보고 있었다.
“여기!”
그녀가 잡지를 덥고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든다. 가까이 다가간 나는 잡지를 힐끗 보며 빈자리에 앉았다.
“할 얘기가 뭡니까?”
박 상무가 선글라스 콧대를 만지며 물었다.
“왜 당신의 커리어를 얘기하지 않았어요?”
파란 눈이 나를 뚫어지게 본다.
“인터넷으로 이시현에 대해 찾아봤어요. 로스앤젤레스 한인회 환영 행사에 관련한 기사가 있더라고요. 정중히 거절했다는 내용도.”
느려터진 인터넷을 붙잡고 나에 대해 알아봤을 그녀 모습이 떠오른다.
“여기서 한국에서의 경력을 내세운들 큰 도움은 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냥 얘가 연기는 해봤구나 정도였을 거다. 실제로도 그랬고.
“좋아요!”
그녀가 하얀 손을 쭉 뻗고 말했다.
“우리, 잘해봐요.”
**
「여섯 번째 오디션, A red thread of fate」
신이 붉은 실로 서로의 발을 묶은 남녀는 반드시 맺어진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시나리오였다.
박 상무와 나는 한국의 청실홍실을 떠올렸지만 케이시 말로는 인도의 설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우린 과감히 주연 자리에 도전했지만, 아무튼 탈락.
발리우드 출신 배우가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일곱 번째 오디션, Shady man」
겉과 속이 다른 한 남자에 관한 시나리오.
남자의 직업은 살인청부업자.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그는 직장에서는 누구보다 배려심 깊고, 여자친구한테는 세상 어떤 남자보다 따듯하다. 하지만 총을 들면 괴물이 되는데···
남자의 정신과 의사 역을 노렸지만 이번에도 탈락.
감독이 나한테 추파를 던졌다. 게이였다.
「여덟 번째 오디션, 24 Hours」
하루 동안 벌어지는 납치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FBI 요원이 주인공인데, 24시간 안에 범인을 찾아내서 납치된 아이를 구하고, 8년 전 범인이 죽인 또 다른 아이의 시신을 찾는다는 시놉이다.
나는 FBI를 돕는 경찰 역을 준비했는데, 꽤 열심히 준비했지만 2차 오디션에서 탈락했다.
떨어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정말 쉽지가 않다.
그래도 여섯 번째부터는 오디션 볼 때마다 분위기가 괜찮았던 것 같은데, 결과는 매번 같았다. 아홉 번째, 열 번째도···
이제 7월의 달력을 뜯기까지 남은 하루.
“쉽지 않네요.”
차 안의 열기보다 뜨거운 한숨을 뱉었다.
오디션은 낙방, 날은 덥고, 고물 렌터카는 에어컨도 제대로 안 나온다. 그나마 차창을 활짝 열었더니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들어온다.
“언제는 쉬웠냐.”
박 상무가 차창에 팔을 걸치고 시동을 걸었다. 운전대를 크게 돌려 스튜디오를 벗어나면서 그가 말했다.
“지금 ‘스텝’ 난리 났다더라.”
“그래요?”
눈썹을 살짝 올려봤지만, 더위에 지쳐 표정도 안 나온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걸 확실히 알겠다. 2016년의 지독한 더위도 견뎠건만, 그새 LA 날씨에 적응해서 헉헉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성지훈하고 송이경은 지금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한가 보더라.”
“잘됐네.”
오랜만에 강 실장, 아니지 강 팀장이지.
아무튼 궁금한 얼굴들이 떠오른다. 강 팀장은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갔을 테고, 성지훈은 지금 물들어온다고 부지런히 노 저을 테고. 송이경은 뭐, 어차피 잘 될 친구고. 왠지 다들 보고 싶네.
“한 달 남았다.”
박 상무가 넌지시 남은 시간을 언급했다.
시간 진짜 빨리 간단 말이야.
“아까 성 팀장이랑 통화하다가 니 스타일리스트하고 잠깐 얘기했다.”
“누구요? 민지요?”
“한송이.”
윽.
그 녀석, 분명 내가 소득 없이 돌아가면 생글생글 웃으며 약 올릴 게 분명하다.
“걔가 뭐래요?”
“선물 사오라더라.”
박 상무가 헛웃음 짓고 말했다.
“그러죠 뭐. LA 갈비나 사줘야겠다. 마장동에서.”
**
케이시가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있었다. 밀가루피에 고기와 야채를 잔뜩 쌓고 한입 베어 문다.
“너무 실망하지 마. 이 정도로 뭘.”
실컷 웅얼거리더니, 박 상무를 보며 눈을 찌푸린다.
“사무실에서는 선글라스 좀 벗으라고! 대체 몇 번째 얘기했는지 모르겠네.”
“얘는 다 좋은데 참견이 많아.”
박 상무는 안 좋은 얘기를 할 땐 영어를 쓰지 않는다.
“아, 미스터 박. 결혼했어?”
다람쥐처럼 빵빵해진 볼을 움직이며 케이시가 뜬금없는 걸 물었다.
“이 여자가 정말. 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근데 진짜 하셨어요?”
구시렁대던 박 상무가 나를 보고 얼굴을 찌푸린다. 뭐 그냥 궁금해서.
“제니퍼가 그쪽 마음에 든다는데.”
“제니퍼?”
케이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사무실 유리 벽을 가리켰다. 복도에서 백발의 외국인이 우리에게 윙크하고 있다. 저 비서 이름이 아마 제니퍼였지?
“이 여자 진짜 마음에 안 드네.”
둘의 티격태격을 계속 구경하는 것도 재밌겠지만, 오늘 온 건 다음 오디션 때문이다.
케이시는 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접시 하나를 순식간에 비우고 새로운 대본을 책상에 올려놨다. 그런데 손을 뻗은 나보다 앞서 그녀의 보라색 손톱이 대본을 꾹 눌렀다.
“오디션을 계속 알아봐 주는 건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머지않아 널 데려가는 행운아가 나타날 거라고, 나는 확신해.”
기분 좋은 말이긴 한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서론이 길까. 불길하게.
“하지만 주류는 되기 힘들 거야.”
그녀가 눈에 힘을 주고 나를 쳐다본다. 입에는 겨자 소스를 잔뜩 묻히고.
“그래도 계속할 거야?”
나는 냅킨 한 장을 꺼내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건넸다. 입가에 묻은 거나 좀 닦으라고.
“뭘 또 물어. 잘 알면서.”
**
숙소로 오는 길에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왔다. 맥주와 과자, 안주를 잔뜩 샀다.
“케이시 얘기, 그냥 니 편하게 생각해라.”
박 상무가 봉지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툭, 던진 걸 냉큼 받았다.
“창문 좀 열까요?”
대답도 듣지 않고 창을 열었다. 활짝 열었더니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좀 비싸서 그렇지 숙소는 잘 잡았다. 뷰도 괜찮고. 저 반대편 숙소에는 누가 지내고 있으려나. 왠지 가끔 궁금한 말이야.
치익!
박 상무가 침대에 엉덩이를 기대고 맥주를 입에 물었다. 꿀꺽꿀꺽, 튀어나온 목젖이 힘차게 꿈틀거린다.
“팬레터냐?”
번들거리는 입술을 닦으며 박 상무가 침대 머리맡을 가리켰다.
“예.”
미국에 오면서 몇 통 챙겨왔다. 외로울 때마다 보려고.
“저, 상무님.”
“왜?”
“뭐 없을까요? 짧지만, 강렬하게 데뷔할 방법이.”
질문은 했지만, 정작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디션도 통과 못 하면서 그다음을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글쎄다.”
과자를 깨작거리며 고민하는 박 상무를 보며, 나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계속 중얼거렸다.
“진짜 뭐 없을까. 짧지만, 강렬하게, 캐스팅도 쉽게 될만한······.”
확실히 미국은 넓은 땅이다. 채널이 끝도 없네. 한참을 넘기다가 MTV에서 멈췄다.
“알타!”
내 단발마에 박 상무가 맥주를 마시다 말고 TV로 눈을 돌렸다.
지난번 거리에서 본 프레디가 나오고 있었다.
2집 준비 중이라더니, 이제 본격적인 활동을 하는 것 같았다. 뮤직비디오도 괜찮은 것 같은데···
순간 머리에 뭔가 번뜩인다. 얼른 자세를 고쳐앉고 박 상무를 바라봤다. 그가 선글라스를 벗는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속삭였다.
“뮤직비디오.”
그래 뮤직비디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
“여기 올려놓으면 되나요?”
감독이 손을 까닥거리자 스태프는 가져온 스크랩북과 비디오테이프들을 책상에 올려놨다.
“이게 다야?”
“아직 더 있어요. 바로 가져올게요.”
사무실 문이 닫히자, 감독은 수염을 매만지며 책상에 다리를 턱 하니 올려놓았다.
이번에 채널 12에서 제작하는 드라마는 세계 2차대전을 다룬다.
이탈리아, 독일, 일본과 대립한 연합군의 감동적 이야기를 다를 계획이다. 그러니 한때 일본의 식민지이기도 했으며, 수차례 전쟁의 고통을 겪은 한국은 꽤 중요한 참고자료일 수밖에 없었다.
휙휙···
스크랩을 넘기면서 그는 지난번 놓친 배우를 떠올렸다.
“에이.”
괜히 입맛이 쓰다. 메인 스튜디오, 보조 스튜디오를 다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던 그 배우. 이상하게 눈을 끄는 뭔가가 있었는데.
“잡았어야 했는데.”
구시렁거리면서 팔을 뻗은 그는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집었다.
“815··· 특집 드라마?”
비디오 데스크 앞에 너저분하게 늘어진 서류를 밀어내고 테이프를 밀어 넣었다. 책상에 다시 두 발을 떡하니 올리고, 과자를 깨작거린다.
“어?”
여유롭게 의자에 기대던 그가 멈칫하고 눈을 부릅떴다.
눈에 익은 배우가 오프닝부터 비바람이 쏟아지는 산을 달리고 있다.
총탄이 빗발치고, 사방에서 폭음이 들리고, 죽어 나가는 시체들을 넘어가는 군인.
“감독님.”
감독은 노크 소리도 듣지 못하고 TV에 집중하고 있었다. 스태프가 뭔가 싶어 고개를 내밀었다가 흠칫 어깨를 떤다.
TV에 그때 그 배우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타타타! 으아아! 콰쾅!
철모 아래 드러난 눈동자에 살기가 가득하다.
한계, 절망, 고통 같은 감정들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저 감독님······.”
줄어든 스태프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돌린 감독이 다시 말했다.
“저거 못 잡아 오면, 너 해고야.”
“그러지 않아도 찾았어요. 그 배우.”
감독이 벌떡 일어났다.
“뭐 하고 있어! 당장 데려와!”
< 굿럭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