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85화 (185/227)

< 굿럭 (1) >

[Chicken Fly]

농무부 직원인 남자는 안정된 직장 덕에 좋은 집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살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제법 괜찮은 인생이다.

하지만 그의 상황은 최악. 아내의 불륜을 알면서도 꾹 참고 있고, 매력적인 직장 동료는 자꾸만 그에게 말을 걸어온다.

매일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기 전, 그는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동료에게 구애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런 어느 날, 패스트푸트점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닭을 보게 된다.

열심히 날개를 퍼덕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게로 안내하는 닭의 모습은 처절하다.

남자는 그런 닭을 보며 자신이 저 닭이 된다면 어떨까를 생각해본다. 거리에서 날개를 퍼덕여 질주하고 마침내 하늘로 날아가는 상상···

“씬 17, 테이크 5!”

스태프의 굵은 목소리 뒤로 감독의 외침이 이어졌다.

“액션!”

지금 나는 닭이다. 날개를 쉼 없이 펄럭인다.

엑스트라들 사이를 오가며 호객행위를 하지만 거절당하고, 무시당하고, 사람들에게 밀리는 초라한 닭이다.

연기는 문제없다. 문제는, 등줄기에서 땀이 샘솟고 탈 안에서 군내가 퍼진다. 아, 털 있는 짐승은 여름에 힘들겠구나.

“오케이, 컷!”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탈을 벗었다. 패스트푸드점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홍당무다. 머리카락은 말 그대로 닭털처럼 여기저기 붙어 있다.

“씬 17, 테이크 6!”

스태프가 또다시 뛰어다닌다. ‘좀 쉬었다가 하자!’ 라고 외치고 싶지만, 나는 서둘러 탈을 썼다.

“액션!”

그래 뛴다 뛰어.

사람 일은 진짜 모르는 거다.

미국에서의 첫 데뷔를 이렇게 할 줄 상상도 못 했다. 뭐 별수 있나.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은 그냥 찜닭이 될 팔자인 모양이다.

“아. 시원하다.”

LA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쯤 스튜디오를 나올 수 있었다.

닭 탈을 벗자마자 진이 빠져서 주차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힘없이 쳐진 닭 벼슬처럼, 내 얼굴도 하얗게 질려버렸다. 땀방울이 턱을 타고 똑똑 떨어지는 동안 바람이 털 옷 속으로 빨려 들어오니까, 이제야 겨우 살만하다.

“만족하냐?”

박 상무의 손이 내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가죽처럼 거친 손이다.

“그럭저럭. 재밌었어요.”

아마 지금 내 몰골이 말도 아닐 거다.

팬티가 땀에 훅 젖을 만큼 뛰어다녔으니까. 머리에 고인 열기가 하늘로 날아가니 현기증과 함께 나른한 기분에 빠져든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알껍데기를 깨고 나온 병아리의 기분이 조금 이해된다고 할까.

뭐 말이 그렇다는 거고···

근데 무슨 놈의 닭이 하늘을 날아?

특수효과처리를 위해 크로마키 세트 앞에서 한 시간 동안 와이어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그 덕분에 아직도 눈에 파란빛이 도는 것 같다.

“안 아프냐?”

박 상무가 내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안 그래도 와이어에 매달린 채로 날개를 펄럭인 바람에 겨드랑이가 쓰리다.

“버틸만해요.”

“하여간 너도 고집 하나는 최재환 못지않다.”

박 상무는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을 하고 내 팔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이게 뭐냐. 배우 이시현이.”

박 상무가 나직이 속삭인다. 듣기 좋은 넋두리지만, 별 의미는 없다.

지에스의 간판이나 대한민국의 스타 같은 그런 것들을 따지다가는 여기 LA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제가 동물들하고 인연이 있나 봐요.”

씩 웃는 나를 박 상무가 바라본다.

“젖소에 닭에, 아무래도 탈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그죠?”

하필 꼭 여름인 게 문제지만. 이거 설마 내년 여름에도 뭐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쓸데없는 소리 다 했으면 일어나자. 배고프다.”

나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여전히 다리는 휘청거리지만,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좋다.

오늘 처음으로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정식으로 입성했고, 씬 몇 개를 단독으로 잡아먹었다. 비록 닭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오늘 저녁은 햄버거 세 개는 먹어야겠다.

**

저녁을 먹고 베벌리 힐스로 이동했다.

주차장에서 배우와 싸웠던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에이전트 케이시.’

오늘 그녀는 자신의 배우가 펑크낸 일을 메워야 했고, 나는 덕분에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그녀와 달리 아쉬울 것 없는 내가 손해였지만, 지금 내 입장에선 할리우드 입성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기회이니 충분히 감수할만한 리스크였다.

“아주 좋았어요.”

케이시가 광대를 들썩인다. 소파에 앉은 우리에게 엄지를 척 내밀고 금발을 펄럭이며 담배를 입에 문다.

“당신이 오늘 내 구세주였어요. 멍청한 에디가 망쳐놓을 뻔한 걸 당신이 살려줬으니까.”

성냥개비를 흔들어 끈 그녀가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고 다시 말했다.

“약속한 보수는 확실히 챙겨줄 거예요. 물론 내 몫은 떼지 않을 거고.”

“돈은 됐습니다.”

잠자코 듣던 박 상무가 입을 열었다.

“대신,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한테는 제대로 된 에이전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디션을 알아봐 줬으면 하는데······.”

“잠, 잠깐만요.”

그녀는 서둘러 담배를 짓이겨서 껐다.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우리를 보는 눈이 살짝 기울었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여긴 할리우드예요. 동양인한테는 인종차별, 언어의 장벽이 기본으로 깔린 곳인데, 굳이 뭐하러 여기서 시작하려는 거예요? 더구나 동양인은 다들 비슷비슷해서······.”

말꼬리가 흐려진다.

박 상무가 기침 한번 하고 재차 눈에 힘을 줬다.

“해보는 데까지 해볼 생각입니다.”

우린 이런 얘기를 이미 숱하게 들었고, 오디션 때마다 매번 겪었다.

“이해가 안 가네.”

그녀가 책상에 팔꿈치를 기대고 나를 본다. 짙은 속눈썹, 금발의 눈동자, 쥐 한 마리 거뜬히 해치운 입술까지. 창백해 보이기까지 한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지고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가득 쌓인 대본 중에 아무거나 건네던 어디 에이전트와는 차원이 다른 진지함이랄까.

“모델은 어때요? 그거라면 가능성이 있어요. 내가 바로 그쪽 에이전시에 연락해줄게요.”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지만, 나는 미소를 가로저었다.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던 그녀가 한숨을 쉰다.

“우리 일은 사람 장사예요, 당신이 그만큼 값어치가 있어야지만 팔 수 있다는 말이죠. 솔직히 말해볼까요? 당신 외모에 조금 놀라긴 했어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나는 박 상무의 통역을 들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좀 전에 그녀가 나를 봤듯, 그녀의 파란 눈과 붉은 입술, 움찔하는 볼을 보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당신이 나를 원할까요? 어떻게 해야, 내가 값이 좀 나가 보일까요?”

“후. 오케이. 오디션을 알아봐 주죠. 하지만 커리어가 없어 쉽진 않을 거예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 올린다.

근데 저 말투는 대충 얘기를 끝내고 싶을 때 나오는 말투인데.

‘이거 안 되겠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발, 한발, 그녀의 책상에 다가갔다. 하얀 목울대가 꿈틀거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래요, 내가 백인이 될 수는 없겠죠.”

당장 없는 커리어를 만들 수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만들어 낼 자신이 있다.

백인 변호사 역할이라면 변호사 이시현이 될 수 있다.

백인 성직자라면 성직자 이시현이 되겠다.

백인 형사? 까짓것 형사 이시현이 되지 뭐.

“그럼 보여줘 봐요.”

오디션에서 마주쳤던 감독들처럼, 그녀가 툭 말했다.

팔짱을 켜고 의자에 등을 묻고 나를 본다.

“···사랑해.”

대뜸 뱉은 내 말에 케이시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그녀가 입술을 움찔하는 순간, 나는 차갑게 식은 열기를 눈빛에 담아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과 이혼할 거야. 그거 알아?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유일한 소원이거든. 매일 아침 당신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상상했어. 매일 저녁 당신이 집에 없기를 상상했어. 늘 나는 혼자이길 간절히 바랬어. 사랑해··· 그러니까 꺼져줘.”

치킨 플라이의 클라이맥스에서 남자는 별거 중인 아내가 불륜남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식사 중인 걸 목격한다. 그 길로 집에 돌아온 남자는 닭 옷을 입고 아내를 기다린다.

“매일 아침 나는 샤워하면서 노래를 부를 거야. 당신의 물건, 당신의 흔적을 모두 없애며 콧노래를 부를 거야. 위자료? 웃기지 마! 아, 당신이 그놈과 즐기고 온 그 레스토랑, 거기 주방에서 쥐 나왔던 거 알아?”

남자는 닭 벼슬을 흔들며 비아냥과 분노를 토했다.

놀란 아내는 멍하니 있다 집을 떠나고, 다시 혼자가 된 남자 닭 탈을 벗는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드러나고, 천천히 들썩이는 어깨, 그리고 흐느낌이 이어진다.

“please··· Come back to me······.”

나를 보는 케이시의 눈이 멍하다.

“그 스크립트를 벌써 외웠어요? 더구나, 당신 파트가 아닌데.”

“···마지막 씬이 꽤 공감돼서요.”

**

“왜 그걸 외우나 했더니만.”

박 상무가 침대에 몸을 기울이고 나를 쳐다본다. 삐딱해진 어깻죽지가 네모난 얼굴을 받쳐주고 있다.

케이시의 사무실로 가는 동안 나는 마지막 씬을 달달 외웠다. 어차피 뭔가는 보여줘야 했고, 그렇다면 오늘 촬영한 대본이 적당했으니까.

물론 예전 기억도 적절히 버무려지는 내용이었다.

쉽게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됐다고나 할까. 남자의 외로움이 너무 가슴에 닿아서 마지막 눈물은 연기가 아닌 진짜였을지도 모르겠다.

“시현아.”

박 상무 목소리에 대본에서 눈을 뗐다.

“왜요?”

“케이시한테 연락 안 오면 어쩔 거냐?”

“또 오디션 찾아봐야죠.”

당연한 대답에 박 상무가 지그시 나를 바라본다.

“LA에 오기 전에 니 캐스팅 비디오 다시 봤다.”

순간 나는 캐스팅 비디오 속 이시현을 떠올렸다.

“굳이 할리우드가 아니어도, 넌 이미 꿈을 이뤘어.”

무심한 듯 이어진 박 상무 얘기가 귓가에 내려앉는다. 내 뺨을 두드리고 일어선 그는 가슴을 크게 내밀며 기지개를 켰다.

“아무튼 지금은 즐겨라. 한국 가면 X빠지게 일해야 하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저 상무님······.”

“왜?”

“이거 해석 좀.”

박 상무가 피식 웃더니 대본을 낚아채 갔다. 빈 캔을 쓰레기통에 툭 던지고 문을 붙잡는다.

“오늘 수고했다. 쉬어라.”

문이 닫히자 적막이 찾아온다.

“하.”

홀로 남은 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천장을 보며 닭이 돼 날아가고 싶었던 남자의 마음을 떠올려봤다. 눈이 스르르 감긴다. 근데··· 진짜 한국 돌아가면 X빠지게 굴리겠지? 에이. 차 대표 눈빛이 떠오른다.

**

「에이전트 케이시 사무실」

딸깍, 딸깍.

마우스를 클릭하자 이시현 사진이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아까 사무실 구석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

스튜디오 촬영물과 비교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또렷한 이목구비와 땀에 젖은 머리가 마르면서 제멋대로 꼬인 덕에 되레 거친 맛이 있었다.

“이걸 어떻게 써먹나.”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참 운도 좋지. 어떻게 나같이 마음 약한 에이전트를 만날 수 있지?”

순전히 운만은 아닐 거다.

선뜻 닭이 되겠다던 모습도 그렇고,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 대본까지 외우고 감정을 끌어올린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니까. 한국에서 온 배우는 순간순간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끈기는 있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로, 그녀는 이시현의 연기를 다시 떠올렸다. 짧은 시간 대사를 외운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놀란 건 제법 어려운 그 씬을 훌륭히 소화해냈다는 점이다.

“연기도 제법 하는 것 같고.”

아니, 제법 정도가 아니지.

그 정도면 즉흥 연기도 무리 없이 소화할 것 같다.

“한국에서도 배우였단 말이지?”

그녀는 싱거운 웃음 뒤에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기지개를 쭉 켜며 속삭인다.

“오케이! 섹시해서 봐준다.”

< 굿럭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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