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84화 (184/227)

< 일단은 휴식 중 (2) >

“역시, 그건 하지 말걸 그랬나?”

-내가 그랬잖아요. 하지 말라고. 하여간 내 말 안 듣더니.

“하하.”

오소리의 핀잔에 괜히 민망해서 웃어버렸다.

브루스 리 흉내 좀 냈더니 그 자리에 있던 스태프들 눈이 가자미 눈처럼 변했다. 얼마나 한심하게 날 쳐다보던지. 아마 팬들이 그 모습 봤다면 기겁을 했을 거다.

-오빠.

“왜?”

-우리 사귀는 사이 맞아요?

“그럼 아닌가요?”

-글쎄요? 남자가 여자한테 확신을 못 주고 있는 것 같은데요?

너무하네. 여기서 어떻게 확신을 더 주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남녀 사이에 할 수 있는 거.

하.

“알았어, 한다 해! 사랑해!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후후. 진작 좀 그러지.

귓가를 적시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소리는 많은 걸 쏟아냈다. 차기작은 영화를 할 것 같다고, 컴필레이션 앨범 반응이 좋다고, 강 팀장은 요즘 엄청 바쁘다고 했다.

“쉬엄쉬엄해.”

나는 테이블에 놓인 대본을 집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군용 무전기처럼 생긴 수화기를 목 틈에 끼고 대본을 한 장 넘긴다. 박 상무가 번역해준 대사와 지문, 연습하며 끼적인 생각들로 빼곡한 대본.

-외롭지 않아요?

“글쎄.”

수화기를 잠깐 목에서 떼고 창밖을 바라봤다. 파란 하늘, 뭉게구름이 지나간다. 바람 한 점에 처마 밑 풍경이 흔들리듯, 내 머리카락도 살랑살랑 흔들린다.

LA에 와서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혼자라는 느낌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자유에 가깝지만.

-나··· 보고 싶지 않아요?

수줍은 목소리가 묻는다. 예쁜 손가락에 전화기 선을 돌돌 말고 있을 그녀를 떠올리며 고백한다.

“보고 싶어.”

-보고 싶다는 사람이 보름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예요? 혼나야겠네 이 사람!

눈앞에 없어도 눈을 흘기고 있을 그녀 모습이 훤하다.

“목소리 들으면 더 보고 싶을까 봐, 그래서 그랬지.”

대본에서 눈을 떼고, 일단 급한 불부터 껐다.

나 정도 나이 먹으면 감이 온다. 지금 위험하다는 감?

요정도 말치레는 해줘야 살아남을 것 같은 위기감이랄까.

-오빠는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저는 못 참겠어요. 이렇게 목소리라도 들어야 안심하지.

그 마음 이해한다. 방금 헤어져도 다시 보고 싶은 게 사랑에 빠진 연인들 아닌가. 나 역시도 그녀가 보고 싶다. 고운 볼을 쓰다듬어 주고 싶고, 눈을 마주하고 싶고, 입맞춤도···

-오디션 안 됐다고 풀 죽고 그러지 말아요. 내가 아는 배우 이시현은, 최고니까.

미소 띤 내 모습이 유리창이 비친다.

오늘까지 4번의 오디션. 조급하지 않다.

브래드 피트도 보조 출연을 전전하며 7년의 무명 생활을 했다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

-오빠, 사랑해요.

끊어진 전화에서 아쉬움이 느껴지는 신호음이 들린다.

나는 전화를 내려놓고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까부터 바람이 부는 것 같단 말이지. 기분 좋은 바람이.

**

차에서 내리자마자 박 상무는 선글라스부터 귀에 걸쳤다. 경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옆에 붙은 사무실 안내판을 쭉 훑어보고 버튼을 눌렀다.

“겨우라.”

어제 이시현에게 괜찮냐고 물었더니 겨우 4번밖에 안 떨어졌다며 헤헤 웃는다.

오디션에서 떨어진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이시현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8월까지 소득 없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여기까지 온 마당에 뭐라도 하고 돌아가야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곧바로 눈앞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할리우드에는 수많은 에이전트가 존재한다. 과장 조금 보태면 모래사장의 모래 알갱이처럼 많다.

“오케이. 이번이 다섯 번째인가?”

모래 알갱이 중 하나, 에이전트가 손가락 다섯 개를 활짝 피며 히죽 웃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상을 뒤적거리더니.

툭.

대본 하나를 올려놓았다.

“하반기에 촬영 들어가는 전쟁드라만데, 아시아계 배우가 대거 필요하대. 전쟁터에서 싸우고 죽는, 뭐 그런 역이지.”

박 상무는 대본을 들고 천천히 넘겼다. 속도가 점점 빨려져서, 휙휙 넘기고 다시 내려놓는다.

“이런 거 말고 시현이가 할만한 괜찮은 역이 없을까? 액션도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고, 연기도 충분히 통할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시현이가 제대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오디션을 달라는 거야.”

“미스터 박. 여기는 할리우드야.”

에이전트가 책상을 검지로 꾹꾹 누르며 입을 연다.

“그가 동양의 배우인지, 스타인지 관심을 가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얘기지. 처음부터 할리우드의 별이 되고 싶어? 차라리 기적을 찾는 게 빠를걸?”

얄밉도록 혀를 튀기는 에이전트 모습에 박 상무가 선글라스를 슥 벗었다. 침을 튀기던 입이 조금 겸손해진다.

“오케이, 잠깐만.”

에이전트는 수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제시!”

목청을 높이고 다리를 꼰다.

“오늘 샘이 컨디션이 안 좋았다며? 그래, 샘이 오늘 실수한 거 아는데, 최소한 한 번은 더 기회를 줘야지. 작년에 수잔이 당신만 믿고 폭스랑 계약한 거 잊은 거 아니지? 그 망할 시리즈물 말이야!”

실컷 떠들고 만족한 대답을 들었는지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박 상무를 향해 윙크하고 속삭인다.

“아시아계 배우가 하나 있는데, 괜찮은 역 없을까? 당연히 정당하게 오디션을 볼 거야. 다만 연기력을 보여줄 만한 역 말이야.”

메모지에 뭔가를 받아적었다.

“좋았어.”

전화를 끊은 그가 메모지를 내밀었다.

“가서 눈 부릅뜨라고. 여기서는 그 어떤 순간도 그냥 지나쳐선 안 되니까. 아메리칸 드림은 말이야, 아주 찰나에 지나가는 법이거든. 굿럭!”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엄지를 척.

메모를 받아든 박 상무가 선글라스를 다시 쓰며 속삭였다.

“싸가지없는 놈.”

**

나를 포함해서 가슴에 번호표를 붙인 배우들은 스튜디오 안에 일렬로 섰다. 그런 우리 앞을 스태프가 눈을 빛내며 지나간다.

“다음!”

박수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는 계속 표정을 바꿔 연기한다. 스태프는 합격자의 번호를 부르고, 탈락자 앞은 그냥 지나간다.

“다음!”

이번에도 스태프는 천천히 걸으면 서류에서 번호를 추려냈다.

“2, 4, 7··· 22······.”

내 번호는 29번. 스태프의 발길이 지나갈 듯 말 듯 하다가.

“29.”

후.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배우는 다섯으로 줄었다. 걸음을 멈춘 스태프가 얇은 입술 한번 빨아들이고 말했다.

“2, 7, 22······.”

그리고 29번도 불러야지. 내가 한 시간 동안 입에 경련이 일 정도로 표정 연기를 했는데.

“오케이. 다음.”

넋 놓을 시간도 없다.

호명되지 않은 배우들은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야 한다.

“어떻게 됐어?”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 상무를 보니 쓴웃음이 난다.

“안 됐어요.”

어깨를 으쓱하는 내 모습에 그는 한숨 한번 쉬고 선글라스를 다시 썼다.

우린 주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박 상무가 차에서 꺼낸 햄버거를 입에 물고 벤치에 앉았다.

한국에서는 집 앞 슈퍼를 가려 해도 얼굴을 꽁꽁 가리고 움직여야 했지만, 여기는 대낮 햇살 아래서 이렇게 햄버거를 맘 편히 먹는다. 한국에서처럼 스케줄이 정해져 있지도 않고. 모든 내 마음이다. 자고 싶으면 자고, 밥 먹고 싶으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이제 뭐 할 거냐?”

“클럽 갈까요?”

박 상무가 피식 웃는다.

“농담이에요. 대본 봐야죠.”

노는 거야 나중에 실컷 할 생각이고, 그전까지는 오디션을 계속 볼 거다. 지금은 경험이란 소중한 걸 얻을 수 있는 시간이니까.

“파티 갈래? 아니면, 영화 보러 갈까?”

“상무님이랑요?”

게슴츠레 눈을 뜨자, 그가 나를 외면하고 햄버거를 입에 문다.

“상무님이야말로 좀 쉬세요. 휴가잖아요? 옛날 친구도 좀 만나세요.”

“살아 있는 놈이 얼마 없어. 아니면 감옥에 있거나.”

박 상무는 섬뜩한 농담을 하고 햄버거를 크게 물었다.

입이 움직이는 모습이 굴착기가 모래를 퍼 나르는 것 같다.

‘박창수.’

사실 나는 이 양반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 대표 사람이었다. 주먹 출신에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남자, 지에스의 해결사로 살아온 박 상무.

나는 햄버거를 베어 무는 그를 나직이 불렀다.

“상무님.”

“왜?”

“저, 역할의 크기 같은 거 상관없다고 생각하든요.”

선글라스 속 시선이 나를 쳐다본다.

“그런데 지금은 이 보조출연 자리 놓친 게 너무 허무하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이거 정말 하고 싶은데,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후후.”

“니가 선택한 거야.”

박 상무는 무심히 말하고 다시 햄버거를 입에 물었다.

“그러게요. 젠장.”

화가 나서, 나는 햄버거를 단숨에 입에 욱여넣었다.

**

「서울」

“감독님, 배우 이수정 아시죠? 잘 부탁드립니다.”

자리에 앉은 남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충 끄덕였다. 쌩쌩한 에어컨 바람에 눈썹이라도 한번 흔들 법하겠구먼.

“이 친구가 말이죠, 작년에······.”

“제가 지금 바쁘거든요? 나중에 얘기하죠.”

차가운 피디의 태도에 힘주어 연 입이 스르르 다물어진다. 하지만 최재환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명함을 책상에 내려놓고 크게 인사했다.

“그럼 연락 주십시오!”

드라마국을 빠져나오면서 이수정이 한숨부터 내셨다.

“하. 대표님은 이제 오지 마세요.”

“대표님은 무슨. 필드에서 대표님이 어딨어.”

피식 웃는 최재환 모습에 이수정이 입술을 푸르르 떤다.

“이게 뭐예요.”

“뭐가 어때서? 매니저들 이런 거 일상이야.”

“시현 씨랑 있었으면 이런 대우······.”

부지런히 걷던 최재환은 잠시 멈춰 이수정을 돌아봤다.

“원래 그런 거야. 뭘 이거 가지고.”

“정말 괜찮으세요?”

“그럼 괜찮지.”

속은 좀 쓰리지만.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바뀐 평 피디들이야 둘째치고, 그나마 안면이 있던 씨피들도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정작 필요할 때는 전화를 피한다.

처음부터 예상한 일인데도 피부에 직접 닿으니 꽤 아프달까.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됐어요. 돈 아끼세요. 지금 그럴 돈이 어디 있어요?”

“그러지 말고 오늘 소고기 먹자. 다이어트를 해도 가끔은 목에 기름칠 해야 해.”

최재환은 뒷주머니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됐고요. 음료수 마시고 싶어요. 저 음료수 사주세요.”

이수정이 자판기를 가리키고 생긋 웃는다.

“아휴, 고집은.”

최재환은 미소 띤 얼굴을 숙이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동전 투입구에 백 원짜리를 하나, 둘, 셋···

“왜 그러세요?”

멍하게 서 있는 그를 이수정이 불렀다.

“아, 아니야.”

최재환은 음료수에 새겨진 젖소에서 눈을 떼고 마저 동전을 넣었다.

**

햄버거를 다 먹었으니 이제 떠나야 하는데, 우린 지금 진귀한 구경을 하고 있다.

“퍽유!”

나와 박 상무의 시선이 주차장 구석에 머물렀다.

노랑 닭 옷을 입은 남자가 지금 막 주차장 바닥에 닭 탈을 집어 던졌고, 큼직한 안경을 걸친 여자가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내가 이거 하려고 당신한테 그 엄청난 수수료를 떼이는지 알아? 퍽유! 촬영은 시작도 안 하고, 여기가 무슨 알래스카야? 고개를 좀 들어봐! 추운지, 더운지 보라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급기야 닭 머리를 짓밟는다. 붉은색 갈기가 먼지투성이가 됐는데, 내가 저 심정 잘 안다. 젖소 옷 입고 땀나게 뛰었던 게 엊그제거든.

심지어 그때는 찜통 같은 스튜디오 안이었다.

아마 100년 만의 폭염이었을 거다.

“흠······.”

박 상무가 신음하며 지켜본다. 오디션에 떨어진 기억은 어느새 저리 가고, 우린 지금 저 둘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다.

“에디, 곧 촬영 들어간다고! 안 하면 위약금 물어줘야 해!”

“못해!”

닭은 화가 나서 난리고, 그때마다 날개는 펄럭이고.

“아무도 안 하는 걸 해야지만 좋은 기회가 오는 법이야! 빨리 이거 써!”

여자가 닭 탈을 다시 주워 내밀었다. 설득하고, 설득해도 배우는 요지부동.

“기회? 그래, 지금이 당신이랑 내가 헤어질 기회야.”

끝내 배우는 허물 벗듯 닭 옷에서 빠져나왔다. 타인의 시선 따위는 상관 않고 팬티 차림으로 주차장을 떠난다. 멋있는 놈이네.

그런데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여자를 보면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저거 할 수 있는데.”

**

“못 찾았어?”

“안 보이는데요.”

“제대로 전달한 거 맞아?”

성난 감독이 부라린 시선에 스태프가 고개를 숙인다.

“29번 보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라고. 감독님이 직접 오디션 본다고.”

“그랬는데 어디 있어? 당장 찾아와! 지금 당장!”

스태프는 뒷머리를 뭉개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미치겠네. 못 들었나?”

분명히 말했건만. 설마 못 알아들은 건 아닐 테고.

“전화는 왜 안 받는 거야? 진짜 미치겠네.”

찾다 지친 스태프는 로비에 주저앉았다. 가만히 넘어갈 감독이 아니다. 원석 어쩌고 한 걸 보면 꽤 마음에 든 모양인데.

“젠장······.”

어금니를 잘근 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한숨을 푹 내쉬다가, 순간 이맛살을 접었다.

“저건 뭐야?”

눈앞에 닭 한 마리가 부지런히 지나가고 있다.

날개를 흔들면서.

< 일단은 휴식 중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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