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83화 (183/227)

< 일단은 휴식 중 (1) >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에 눈을 떴다. 허리를 펴고, 나는 늘어진 하품과 함께 기지개부터 켰다. 오디션 준비로 새벽녘 겨우 잠든 탓에 몽롱한 아침이다.

촤르르···

블라인드를 활짝 젖히니 7월의 선선한 하늘이 보인다.

“후.”

방 안에 스민 햇살에 둥둥 떠다니는 먼지를 보며 침대를 벗어나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일찍 일어난 새는 아니어도 게으른 돼지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여 한다.

“Don't move or I'll blow you.”

씻고, 옷을 입는 동안에도 내 입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대사가 입에 달라붙을 때까지는 멈출 수도 없다.

“I'll blow you··· I'll blow you··· I'll blow you.”

LA는 시간 장소 가리지 않고 매일 오디션이 있다.

영화는 물론이고, 위성, 공중파, 케이블을 망라한 방송 채널이 패키지 종류에 따라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개. 그러니 드라마 하나에 주조연 배우 수십이 합류한다고 계산했을 때, 이곳은 배우들에게 있어 기회의 땅이 분명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란 말이지.

지난 한 달, 나는 3번의 오디션을 봤고 모두 아웃이다.

언어의 벽, 동양인의 핸디캡 같은, 안 좋은 조건을 골고루 안고 있으니 특이한 일도 아니다.

그러니 차 대표가 미국에 가서 오디션을 보겠다는 나를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본 거지.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다. 선글라스를 쓴 박 상무가 문 앞에 서 있다. 파란색 와이셔츠 깃을 바람에 펄럭이면서. 저 거뭇거뭇한 입술은 도통 미소가 없다.

“밥 먹으러 가자.”

“예!”

남방셔츠를 챙길 동안 박 상무가 먼저 움직였다.

나도 서둘러 모텔 계단을 내려와 조금 떨어진 식당으로 뒤쫓아갔다.

늘 그렇듯 박 상무는 감자튀김과 도넛을 주문했고, 나는 피자 두 조각과 버거 두 개를 주문했다. 물론 둘 다 커피 한 잔씩 입에 물었다.

“안 질리냐?”

피자를 입에 욱여넣는 내 모습에 박 상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안 질리는데요?”

맛만 있다. 새벽까지 대본을 붙잡느라 온몸의 세포가 아우성이다. 더 먹으라고.

“나는 질린다. 김치찌개에 백반 먹고 싶네. 더 먹어라.”

그가 반쯤 남은 도넛을 내밀었다. 웬 떡인가 싶어 단숨에 입에 넣자, 박 상무가 얼굴을 찌푸리고 묻는다.

“컨디션 어때?”

“좋아요.”

“대사는?”

“Don't move or I'll blow you.”

나는 씨익 웃고 감자튀김도 마저 먹었다.

에이전트한테서 오디션용 대본이라고 건네받는 게, 때로는 한 장, 때로는 몇 장짜리 원고다. 어느 때는 오디션 전날에 줄 때도 있어서 대본을 외우는 게 가장 힘든 일이다. 물론 언어도 다르고.

“할만하냐?”

“할만하네요.”

내 대답에 박 상무가 피식 웃는다. 오늘 처음 보는 미소다.

“아. 날씨 좋다.”

식당을 나온 나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

살짝 감긴 눈꺼풀 위로 햇살이 쏟아진다.

오늘 오디션도 이렇게 기분 좋기를.

**

-여기는 날씨 좋지. LA는 화창해. 그럼 수고.

박 상무 특유의 싱거운 말투를 끝으로 통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성 팀장은 달력을 톡톡 두드렸다.

“8월까지라.”

차 대표가 이시현의 도전을 허락한 시간.

미국행이라니. 다들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반추가 뒤집히고, 회사는 이시현의 국내 활동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기콘부와 홍보부 전 인력이 배우와 가수를 넘나들 기획을 준비했다.

마침 ‘미스터 미스터리’로 인해 불이 솟구쳤고, 남수혁 작곡 ‘오후의 빛깔’이 부채질을 더 했다. 거기에 C&C가 제작한 드라마 ‘스텝’이 MNC에서 방영을 확정하면서 기름을 쏟아부었고.

그러니 2001년은 이시현의 세상이 분명했는데, 결국 미국이라니.

“그럼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 하나?”

성 팀장은 깨문 입술 사이로 고민을 속삭였다.

박 상무 말로는 LA에서의 오디션은 순탄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직원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이시현이 미국에서 오디션에 합격하고, 할리우드에 진출할 거라는 그런 기대.

왠지 이시현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현실은 이토록 냉정한 법이다.

“으아··· LA는 화창한데, 한국은 아침부터 비라니.”

성 팀장은 두 팔을 힘껏 뻗으며 신음했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창가에 다가갔다. 흐린 하늘, 창문을 타고 빗방울이 쉼 없이 흐르는데 저 아래 우산을 든 한 무리의 소녀들이 보인다.

“아휴. 쟤들은 집에 좀 가지. 시현 씨 팬인가?”

공식적으로, 현재 이시현은 휴식기를 맞아 미국 여행 중이다.

물론 그가 없다고 지에스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다시 살아난 남수혁.

‘스텝’ 방영을 코앞에 두고 바빠진 송이경과 성지훈.

3W 복귀 프로젝트까지···

기콘부는 항상 정신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인데 성 팀장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 이렇게··· 허전하지?”

한잔의 진한 커피면, 이 허전함이 달래지려나 모르겠다.

**

오디션이 있는 스튜디오 복도가 사람들로 붐빈다.

다들 각자 준비한 대사를 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준비한 역할과 번호표를 가슴에 붙이고 차례를 기다린다. 그 틈에서 나 역시도 부지런히 입술은 움직이고 있었다.

‘Don't move or I'll blow you.’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렸다.

마약 거래를 뒤쫓는 형사, 그를 도와 뉴욕 갱과 한판 싸우는 쿵푸 고수.

불법체류 중인 동양인이 사실은 쿵푸 고수였다는 설정이지만, 비중도 작고 대사는 짧은 몇 줄 정도다.

뭐 역할이 크든 작든 상관없지만.

지금 내가 잡을 수 있는 오디션은 이 정도가 최선이다.

“33번!”

출입증을 목에 건 스태프가 다음 순서를 불렀다.

감은 눈을 뜨자, 푸른 눈에 짙은 속눈썹 사이로 귀찮음이 역력한 눈빛이 보인다.

“33번!”

아마 33번은 그냥 가버린 모양이다.

체념한 스태프가 손에 든 서류를 한 장 넘겼다.

흔한 일이라서 아무도 동요하지 않는다. 기다린들 3분 남짓 시간에 준비한 대사의 반도 못 보이는 경우가 빈번하니까. 어느 때는 3분은커녕 30초의 기회도 얻지 못할 수 있다. 심지어 기다리는 중간에 오디션이 끝나는 일도 있고.

도대체 누가 미국이 효율적인 나라라고 한 거야?

여기 와서 본 다수의 스태프는 자기 일만 딱딱이다.

융통성은 찾아볼 수도 없고, 제 일 아니면 신경도 안 쓰고.

인종차별 얘기도 안 할 수가 없지.

할리우드 영화의 포커스는 주로 백인 주연에게 집중된다. 동양인 역할은 과장된 연기와 황당한 행동으로 관객을 웃길 뿐이다. 그래서 박 상무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다.

‘넌 이런 상황에도 뭐가 그렇게 즐겁냐?’

즐거울 수밖에. 시도가, 실패가, 이런 도전이 너무 즐거워 미치겠는걸.

“34번!”

스태프가 다음 번호를 외치고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그래서 나는 숨을 고르게 내쉬고 일어났다. 내 번호는 35번이니까.

**

“10분만 쉰다고 전해.”

감독은 서류들을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 천장을 바라봤다. 에어컨 바람에 온몸을 맡긴 채 헝클어진 머리를 북북 긁는다.

“연기를 못하면 차라리 외모라도 좋던가. 젠장.”

지루한 오디션, 엉망인 연기들을 보고 있으니 엉덩이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이런 날은 해변에서 서핑도 하고, 석양을 보며 맥주 한 모금을 마셔도 시원찮건만. 아, 시호!”

창 너머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던 그가 문득 옆을 돌아봤다. 서류를 살피던 동양인 여자가 귀걸이를 흔들며 고개를 들었다.

“왜요?”

“마이클 본이 프랑스로 튀었다며? 에이전트가 양심고백 했다는 게 사실이야? 당신 여기 오기 전에 페이 프로덕션에 있었잖아?”

“예. 그 일로 페이 프로덕션에서는 마이클 본 감독과 계약을 해지했고, 감독은 도망치듯 프랑스로 출국했어요.”

여자는 대수롭지 않은 얘기라는 듯 표정 없이 대답했다.

“소문을 들으니 배우 하나 때문에 그 일이 불거졌다던데, 당신은 누군지 봤어?”

“글쎄요.”

보면 본거지 글쎄요는 뭐람.

감독은 마음에 안 드는 대답에 콧잔등을 한번 긁고 서류를 집었다.

“다음 사람!”

하지만 힘주어 외친 것과 달리 기대감은 여전히 바닥이었다. 손에 쥔 볼펜이나 흔들며 문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런데 삐걱 소리와 함께 들어온 저 배우···

‘모델인가?’

의자에 기댄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여태의 동양인들과는 다른 존재다. 아니면 혼혈인지도 모르겠다.

내내 없던 흥미에 감독은 앞에 놓인 서류를 다시 집었다.

‘어디 보자, 경력이··· The liar, Full of hell, Asian wild dog 오디션?’

이마가 구겨진다. 서류에 경력이라고 적힌 것들이 최근 한 달 사이 LA에서 있었던 오디션들이었다. 물론 다 떨어졌으니까 여기 있는 걸 테고.

“이게 다야?”

황당해서 물었는데, 배우는 미소만 끄덕였다.

“홈스쿨링 자원봉사 이력까지 쑤셔 박은 배우들에 비하면 신선하긴 하네. 어지간히도 능력 없는 에이전트인가 보지?”

다시 툭 내려놓은 서류.

“뭐 일단은. 준비한 것부터 봅시다.”

연기를 끝낸 배우는 다시 차분한 얼굴이 됐다. 쉴 새 없이 뒤바뀌던 표정도, 바람 소리를 내며 뻗던 주먹도 제자리를 찾았다.

“어떤 것 같아?”

감독은 스태프들의 생각을 먼저 물었다.

“전 괜찮은 것 같아요. 근데 복싱을 했었나? 자세가 보통이 아니던데.”

“하지만 가정을 둔 40대 동양인 역할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영어도 좀 부족한 것 같고.”

“연기야 스크립트대로 하면 되는 거고, 분장을 하면 40대 동양인 역은 무난하지. 다만······.”

다양한 의견에 오디션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앞서 오디션을 본 배우들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연기 자체를 두고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는 점이었다. 단지 딱 하나 걸리는 점이라면.

“동양인인데, 동양인 같지가 않아. 눈도 크고, 얼굴도 하얗고, 키도 크고 말이야.”

감독은 팔짱을 풀며 중얼거렸다. 의자를 끌어서 좀 더 상체를 책상에 붙이고 배우를 바라봤다. 마음에 들면서도, 뭔가 내키지 않는, 그런 기분이다.

“시호, 당신 눈에는 어떤 것 같아?”

“글쎄요.”

여자는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배우를 바라봤다. 찬찬히 훑어보며, 콧잔등의 솜털까지 눈에 담고 말했다.

“다른 거 또 준비한 거 있나요? 우리가 당신을 캐스팅해야 할 강렬한 이유 같은 거 말이죠.”

그녀의 제안에 잠시 생각하던 배우가 자세를 다시 잡았다.

‘자, 그래 뭘 보여 줄 거지?’

스태프들 얼굴이 진지해진다. 좀 전과는 달리 기대감이 맴돌고 있었다.

감독 역시 내심 기대하고 배우를 바라봤다.

“준비됐으면 시작해요.”

천천히 두 발과 두 팔을 벌리는 배우. 그러더니 인상을 찌푸리고 오만상이 됐다. 왜 저러나 싶은데, 느닷없이 콧잔등을 힘껏 쓸어내리고 외친다.

“아뵤오!”

< 일단은 휴식 중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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