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82화 (182/227)

< 오후의 빛깔 (4) >

“안녕하세요, 배우 이시현입니다.”

마이크를 타고 내 목소리가 관객석 곳곳에서 울린다.

잔잔한 별빛과 흐린 어둠 속에서 목놓아 오빠를 외치는 팬들. 야광봉의 흔들림. 환상적이라는 말밖에 무슨 표현이 더 필요할까. 마치 반딧불이 쏟아져 내린 것 같다.

“여러분, 시현 씨가 프로포즈는 첫 출연이신데, 오늘 시현 씨 팬분들이 무려 7천 명이나 오셨어요.”

MC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잔잔한 미소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팬들의 환호는 멈추질 않았고, 무대 스크린에는 어린 소녀의 울먹임도 비쳤다.

“아휴 안 되겠네요. 먼저 한 곡 듣고 얘기할까요?”

MC가 싱긋 웃으며 제안했다.

“그럴까요?”

내 미소에 밤바람이 스쳐 간다.

조명 때문에 더 하얗게 변한 손으로 마이크를 붙잡았다.

“먼저, 이 노래부터 들려드리겠습니다. 함께 불러주세요.”

무대 스크린에 슬기, 그리고 오소리와 촬영한 ‘너라서’ 뮤직비디오가 흘렀다. 순간 어김없이 비명은 터져 나왔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너 기억나니 내 키가 너보다 좀 더 작았을 때를.

-네가 나한테 첫사랑 얘기를 했을 때를.

-그때도, 지금도, 난 이렇게 곁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지켜볼 뿐인걸.

-가슴이 아파서 가끔 눈물이 흘러, 너만 생각하면 그러는 것 같아.

팬들이 한목소리로 노래를 따라불렀다.

어느 순간 야광봉의 흔들림에 내가 흔들리는 건지, 아니면 내 상체의 흔들림에 야광봉이 따라오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팬들과 나는 어느새 하나가 되고 우리가 됐다. 그리고···

“여러분, 3W 슬기 씨를 소개합니다.”

무대 뒤에서 깜작 등장한 그녀.

짧은 노랑머리를 펄럭이며 슬기가 내 옆에 섰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노랫말을 속삭였다.

“어머 시현 씨, 벌써 가실 때가 됐어요.”

좋은 시간은 늘 그렇듯 순식간에 지나간다.

“가지마!”

팬의 격렬한 고함으로 인해 현장에 웃음이 터졌다.

그래. 사실 나도 더 있고 싶다. 밤을 새우고, 또 새벽이 찾아올 때까지 이렇게 있으면 좋겠다.

“오늘 이렇게 와주신 우리 수포 팬들, 너무 고맙습니다. 항상 잊지 않을게요. 사랑해.”

-우리도요!

웃는 팬들도, 눈물짓는 팬들도, 지금 순간 모두가 한마음이다. 아마 이 순간도 추억이 되겠지. 나는 그게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아. 이럴 거면 더 자주 무대에 설걸.

잠실종합운동장을 가득 채워야지만, 도쿄돔을 가득 채워야지만, 수만 명의 팬이 모여야지만 무대가 아닌 것을. 꼭 그런 무대에만 설 필요가 없었던 것을. 거기에 서야만 스타가 아닌 것을.

아마 나는 단단히 착각했던 모양이다. 스타를 만들기만 했지, 그들이 진짜 행복해하는 순간을 꽤 오래 잊은 모양이다.

“마지막 곡입니다.”

짧은 속삭임 뒤에 나는 카메라를 바라봤다. 스크린에 내 얼굴이 비치면 팬들이 더 잘 볼 수 있으니까.

“블랙보이 리더 남수혁 씨가 작곡한 곡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좋은 곡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마이크에 내려앉았다. 살짝 웃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요즘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코멘트를 해야 했다. 제작진도 부탁한 사항이다.

찌라시든 신문이든, 매체는 어떻게든 나하고 마이클 본을 엮고 있었다. 나야 원래 의도한 바고 노림수지만, 문제는 그 때문에 문화계와 문학계의 민낯도 드러났다는 거다.

신인 여배우뿐 아니라 경력 있는 중견 배우 중에도 과거··· 얘기를 폭로하면서 아주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

“근데, 사실 제가 겪은 일은 피해자들이 겪은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그래서 이 노래의 저작권료 일부는 그분들을 위한 치료비에 쓰일 예정입니다. 물론 남수혁 씨가 동의해주신 부분입니다. 저보다 더 적극적이더라고요. 그렇죠 수혁 씨?”

본 방 때는 전화를 꺼놔야겠다.

“그럼 불러드리겠습니다. 오후의 빛깔.”

잔잔한 기타 선율···

따뜻하게 가슴을 울리는 노랫말, 밤바람, 그리고 내 목소리.

미스터 미스터리에서 꽃미남 살인자였던 나는 이제 배우 이시현으로서, 인간 이시현으로서 팬들에게 미소 짓고 있다.

“그대여··· 항상 오후의 빛깔 속에 있어 주세요.”

목소리가 잦아들고.

나는 가슴에 고인 여운을 삼키고 카메라를 바라봤다.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언제까지고.”

**

‘수혁아 축하한다.’

‘노래 좋더라. 수혁이 멋있다!’

‘1위 축하해요!’

‘수혁 씨, 기부 너무 멋져요!’

마주치는 사람마다 칭찬 일색에 웃는 낯으로 다가오는 나날들. 심지어 늘 차갑게만 스쳐보던 차 대표도 잘했다고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갈 정도로 낯선 나날이 이어졌다.

“후······.”

하지만 남수혁은 이 낯선 상황이 기쁘기는커녕 찜찜하기만 했다.

“아니 무슨 제멋대로 저작권료를 나눠주네 마네야?”

돈이 아까운 건 아니지만.

어째 이시현에게 자꾸 휘말리는 기분이랄까.

“뭐 그래도······.”

뭐가 됐든 상황은 극명하게 달라졌다.

오전에는 1팀 유재환 팀장이 넌지시 블랙보이 복귀 가능성을 알렸고, 점심 무렵에 만난 ATTM 한지웅 팀장은 하반기 솔로 데뷔 가능성을 넌지시 귀띔했다.

슬슬 곡 준비해놓으라는 말도 덧붙였고.

물론 팬카페 반응도 폭발.

회사에 팬들의 전화가 부지기수로 오고 있었다.

‘오후의 빛깔’을 남수혁의 목소리로 듣고 싶다는 팬들 청원이 끊이질 않는다는 성 팀장의 지나가는 말까지.

‘화려하게 복귀한다!’

남수혁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이시현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그리고 이제 블랙보이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전화 한 통 없는 놈들한테 뭐하러.

굳은 의지를 다지고 있는데, 마침 샤워실 문이 열리고 아는 얼굴이 들어왔다.

“아, 선배님.”

샤워기 물줄기를 피해 머리를 숙였다. 가요계에서 선배라고 부를만한 유일한 가수.

‘그러고 보니 이 양반도 바닥 쳤다가 올라갔지?’

남수혁은 이상하게 성지훈하고는 마음이 맞는 편이었다.

말이 통한다고 할까. 은근히 처지도 비슷하고.

“오늘 스케줄 없으세요?”

“어. 정산 때문에 회사 들렀다가 오랜만에 몸 좀 풀려고 왔지. 아후, 밤무대 맨날 뛰니까 몸이 축난다 축나. 하하··· 근데 지에스 오니까 좋은 점도 있네. 너하고 샤워도 같이하고.”

성지훈은 기분 좋게 웃으며 남수혁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다시 말했다.

“근데, 너 치사하게 그런 곡을 나한테는 안 주고.”

“어떻게 그렇게 됐어요.”

남수혁이 이마를 긁적이자 성지훈이 혀를 찬다.

“너 그거 이시현한테 홀린 거야.”

“예?”

무슨 소린가 싶어 봤더니, 성지훈이 무척 진지한 얼굴로 턱을 긁적이며 흰자위를 번뜩였다.

“걔랑 있을 때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걔 은근히 사람 홀리는 타입이거든. 얼굴 곱상하잖아?”

또 혀를 차더니 피식 웃는다.

“하긴 그렇게 호리호리해서 어디 남자 구실이나 하겠냐. 딱 그게 흠이지. 걔는 스캔들도 없어요.”

성지훈은 별소리를 다 하고 있다는 혼잣말과 함께 샤워기에 몸을 맡겼다.

쏟아진 물이 그의 머리와 가슴, 다리를 타고 흐르는 동안 비누 거품을 부지런히 만드는데··· 다시 문이 열리더니 눈에 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이시현이다.

“아, 두 사람 같이 계셨네요. 웬일이래, 헬스장에서는 처음 보네.”

순간 남수혁과 성지훈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아래로 쏠렸다.

그리고 툭.

성지훈이 타올을 떨어트렸다.

**

“운동 갔다 왔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스케줄 표 앞을 서성이던 강 실장이 고개를 돌렸다. 나를 향해 미소를 보인다. 나는 옅은 미소로 화답하고 팀장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무실 저렇게 둘 거예요?”

“최 팀장 빠져나간 자리에 들어가려니까 왠지 조금 허전해서 말이야. 이제 슬슬 옮겨야지.”

빈 사무실을 바라보는 강 실장의 얼굴이 공허해 보인다.

“근데 너 그거 들었냐?”

“뭐요?”

“마이클 본 감독, 낼모레 미국으로 돌아간다더라. 대단한 양반이야. 그렇게 기사 쏟아지고 찌라시가 도는데도 꿋꿋이 일정 다 채우고 가네.”

“그러네요.”

마음이 뒤숭숭하니 뚱한 표정이 나온다. 강 실장이 내 볼을 두드린다.

“나 기콘부좀 갔다 올게.”

그가 나가고 나는 정수기에서 물을 한잔 뽑았다. 한 모금 마시고, 팀장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인 잃은 책상을 쓰다듬었다.

똑똑.

마치 노크를 하듯 책상을 두드려봤다.

‘훗.’

이제 최재환과 나는 완연히 다른 삶.

녀석은 자신의 길을 찾아서 떠났고, 나는 내 길을 멈추지 않을 거다.

‘그대여, 항상 오후의 빛깔 속에 있어 주세요.’

왠지 이 후렴구가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시간이 흘러 최재환의 오후는 어떤 빛깔이 될까.

정 엔터테인먼트 최재환 대표와는 다른 빛깔이겠지.

꼭 좋은 빛으로 둘러싸였으면 좋겠다. 내가 지켜볼 거니까.

“시현 씨!”

뒤돌아보니 여직원이 미소와 함께 나를 보고 있다.

“전화가 왔는데.”

“전화요?”

**

비상계단에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부장이 그 아래서 건물 밖을 내다보고 있다. 곁에 다가갔을 뿐인데, 찝찝함이 흠뻑 달라붙을 것 같은 등이다.

“부르셨어요?”

이우정 기자는 콧잔등과 미간을 이리저리 찌푸리며 부장이 고개를 돌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등을 보인 채로 얘길 꺼냈다.

“국정홍보처에서 공문 내려왔다.”

“국정홍보처요?”

“오늘부터 성추문 관련한 기사는 일체 내지 말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이클 본 스캔들 기사 때문에 대중문화가 위축된다는 거야.”

부장이 그녀를 게슴츠레 쳐다보며 말했다.

“위축은 무슨.”

“뭐 말은 그런데, 8월에 있을 ‘한중 문화의 밤’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아. 괜히 바깥에 맨 얼굴 보여봤자 좋을 것 없다는 거지. 평론가라는 사람들은 TV에 나와서 썩은 관행이네 어쩌네 떠들고 있고, 여배우들은 기성 신인 할 것 없이 자신들도 당했다고 폭로하고 있으니···

완전 개판이잖아?”

부장이 한숨 쉬고 뒤돌았다. 흐릿한 눈동자가 이우정을 들여다본다.

“너 임마 아주 큰 일 벌였어. 뭣 때문인지 몰라도, 이시현한테 값 제대로 받아라.”

“알고··· 계셨어요?”

이우정 기자는 눈을 깜빡이고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 놀란 반응은 아니었다.

“터트리려면 뭐라도 갖춰서 제대로 터트리던가. 이게 뭐냐? 정작 마이클 본은 멀쩡하고, 충무로만 들썩였잖아?”

부장은 못마땅한 눈길을 돌리고 계단을 밟았다.

이우정은 뒤를 쫓아 사무실에 돌아왔다. 그런데 낯선 외국인이 그녀의 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구시죠?”

다가가 물었다.

외국인이 한숨을 크게 쉬더니 조금 지친 얼굴로 말했다.

“마이클 본 감독의··· 에이전틉니다.”

떨림이 물든 눈동자.

그는 가방에서 8밀리 소형 필름을 꺼내며 다시 말했다.

“그날 있었던 일이 여기 모두 담겨 있습니다.”

“이걸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얼떨결에 건네받은 필름을 매만지며 이우정이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배우 이시현이 그러더군요. 당신이 제일 믿을만한 기자라고.”

잠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이우정은 서둘러 의자를 가져와서 말했다.

“앉으세요.”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귀를 기울였다.

**

「2001년 7월 2일 월요일」

“어, 별일 없어.”

박 상무는 삐딱하게 기대 전화기를 붙잡았다.

일주일마다 회사에 상황을 보고하곤 있는데,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지. 매주 같은 말이다. 별일 없다는 말.

“시현이 오디션? 그거 두 시간 뒨데, 갔다 와서 다시 전화할게.”

아마, 또 같은 말이 되풀이될 거다. 글렀다는 말.

“성 팀장, 전화기 삑삑거린다. 이제 끊을게. 날씨?”

전화를 끊으려던 그는 멈칫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눈앞을 지나가는 자신보다 두 뺨은 더 큰 외국인들.

“여기는 날씨 좋지. LA는 화창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다.

그래서일까, 아주 저 멀리 보이는 산에 할리우드 간판이 선명하다.

< 오후의 빛깔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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