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81화 (181/227)

< 오후의 빛깔 (3) >

“시현이 왔구나.”

이영태 작곡가가 우리를 반겼다.

“수혁이도 왔냐?”

“안녕하세요.”

남수혁이 심드렁한 투로 인사를 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뭐 하루 이틀 저러는 것도 아니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올 테니까, 니들은 준비하고 있어라.”

아직 시간에 여유가 있는지 이영태가 최재환의 어깨를 툭 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일단은 소파에 앉아서 기지개부터 켰다.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며 머리를 비우려고 애를 쓰는데, 남수혁이 다짜고짜 노트를 내밀었다.

“뭐야?”

나는 파란색 표지를 보며 물었다.

“수정한 가사요.”

자식. 좀 부드럽게 내밀면 어디가 덧나나. 아무튼 바뀐 가사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어디 보자···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눈을 감으면 그때의 내가, 그때의 당신이 보이니까요.

전 항상 당신처럼 말하고 당신처럼 웃었습니다.

때로는 같은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당신을 떠올리며 수줍게 웃으면서요.

지금도 그때와 같은 미소가 있을까요.

우리를 비쳤던 오후의 빛깔이 여전히 그대로 있을까요.

그대여, 항상 오후의 햇살처럼 있어 주세요.

그대여, 항상 오후의 빛깔 속에 있어 주세요.

눈으로 한번 훑고··· 두 번 세 번을 본 뒤에 녀석을 바라봤다. 아직 솜털이 깃든 매끄러운 피부가 눈에 들어온다.

“왜요?”

남수혁이 내 눈치를 보며 묻는다.

‘블랙보이.’

1세대 아이돌인 그들은 가요계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대단했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에스를 성장시켰고, 차 대표가 가장 빛났던 시절이기도 하니까.

그런 블랙보이 리더 남수혁도 결국에는 다 쓴 건전지 신세가 되어 버려진다.

물론 블랙보이는 내가 해체했지만.

좀 말을 안 들었어야지. 어차피 잡음도 많고 하락세였기에 결정한 일이었다.

근데··· 지금 막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옳은 판단이었을까.

“별로예요?”

“아니. 좋아서.”

“아. 그런 말 좀 하지 말아요.”

살짝 미소 짓고 녀석을 바라봤더니, 닭살이라도 돋는지 제 팔을 거칠게 쓸어내린다. 투덜투덜.

“근데 너··· 설마 이것도 이상한.”

“아니거든요! 이번엔 진짜 고민 좀 하고 썼어요. 뭐, 지난번 가사도 고민하고 쓴 거지만.”

녀석이 이마를 찌푸리고 입술을 빼죽 내민다.

“일단 저하고 한 소절씩 맞춰봐요. 뭐 박자는 대충 아시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남수혁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가사에 따라 노래는 확연히 달라진다.

괜히 스타 작사가가 있는 건 아니니까.

어찌 됐든 노래의 서정적인 멜로디는 그대로지만 가사는 확연히 바뀌었다.

1절은 오래전 스쳐 지나간 인연을 떠올리며 그때를 담담히 얘기하고 있고, 2절은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얘기하고 있다.

참네. 이 자식 진짜 뭐지?

용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저 나이에 이런 가사를 쓸 수 있다는 게.

“무슨 생각하면서 불렀어요?”

합을 맞추고 나서 남수혁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나 역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내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

**

[단독] 이시현, 블랙보이 리더 남수혁과 의기투합!

-배우 이시현이 작곡가 이영태의 녹음실에서 극비리에 블랙보이 리더 남수혁과 함께 불명의 곡을 녹음한 사실을 본지에서 독점 취재했다. 서정적인 멜로디에 잔잔한 가사가 어우러진 곡으로, 이시현의 독보적인 보이스가 더해져······.

“이시현 또 노래하네.”

“나도 그거 봤어. 근데 왜 남수혁 같은 애 노래를 부르는 거야? 좋은 노래 많을 텐데. 블랙보이 2집에 담긴 자작곡들 완전 허접하던데.”

“보나 마나 망삘이야. 회사가 시키니까 하는 거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여자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긴 머리와 짧은 머리의 아가씨들인데, 이십 대의 싱그러운 웃음소리가 들린다.

‘시현이 팬들인가.’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쳐 갈 정도로 분명히 들린 목소리였다.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보다 더.

-정말 이렇게 나올 거지?

황 국장의 목소리에 으름장이 잔뜩 섞였다. 아마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겠지.

“죄송합니다, 국장님.”

-죄송하다는 말은 그만하고, 답을 달라고 답을.

“6월에 MNC에서 ‘스텝’ 방영하는데, 어떻게 7월 편성된 KIS 드라마에 출연합니까.”

-안 걸치게 하면 되잖아?

“그걸 어떻게 장담하세요.”

한 주라도 결방되면 겹치기 출연 논란 일어날 거야 뻔한 일이다.

배우한테 전혀 득 될 것 없는 일이고.

최재환은 한참을 더 황 국장의 불만을 듣고서야 휴대폰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후······.”

진저리가 날 정도로 집요한 전화가 끊어졌더니 기다렸다는 듯 문자 알림음이 울린다.

강 피디와 유 작가의 문자였다.

[재환 씨, 나는 모르는 일이야. 국장님이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거야.]

[재환 씨, 너무 걱정하지 마. 국장님 원래 저러잖아.]

한 명은 발 빼고, 한 명은 위로해주고.

이 사단이 애초에 두 사람 때문에 일어났다는 걸 보면 아이러니다. 그렇게나 이시현을 잡으려고 발버둥을 쳤으면서.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최재환은 쌓인 문자를 계속 확인했다.

[재환 씨, 나 홍 피디야. 잘 지내? 한번 얼굴 좀 보자고.]

[최 매니저님, 시현 씨 이번에 컴백하면 우리 음뱅부텁니다!]

[나 한밤 송 피딘데, 우리 시현 씨 인터뷰 한 번만 잡읍시다. 우리가 시현 씨 좋은 쪽으로다가···]

[매니저님, 저 황동태입니다! 잘 지내시죠? 다름 아니고 제가 이번에 입봉하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어째 문자들이 사심이 담기지 않은 게 없다.

하나하나 넘길 때마다 왠지 지쳐가서,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문자를 읽었다.

‘피곤하네.’

호기 좋게 회사를 나가기로 했는데, 이것저것 정리하고 준비하면서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일이라도 덜면 모르겠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일 투성이고.

일단 페이 프로덕션 쪽과는 앞으로 지에스 법무대리인이 해결할 문제고, 소속 연기자들 문제는 다른 매니저들이 알아서 잘할 테고.

‘시현이는······.’

커피잔을 가만 바라보던 끝에 한 모금 삼키고 속삭였다.

“알아서 잘하겠지.”

생각해보면 지금도 신기한 일이다.

카메라 울렁증이 어느 순간 슥 사라지더니, 제대로 날개를 폈다. 앞으로 큰 스캔들만 없으면 영화판이든 드라마판이든 녀석을 찾을 곳은 넘치고 넘쳤다. 그뿐인가. 노래는 또 어떻고.

최재환은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장연화 교수는 이시현의 노래는 시간이 완성해주니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성장할 거라고 했지만··· 녀석의 나이 이제 스물여덟.

더구나 도미파 레코드사 한희영 대표는 지금이라도 이시현의 로드맵을 음악 쪽으로 전면 개편해야 한다고 난리인 상황이고.

‘하지만··· 그래도 시현이는 배우지.’

팔짱은 무겁고, 한숨은 가볍다.

어찌나 잦은 한숨인지 옆 테이블에서 곁눈질할 정도다. 아까 그 팬들이다.

‘쟤들, 혹시 나 알라나.’

하지만 조용한 걸 보니 수포 회원은 아닌 모양이다.

이시현의 팬이 곰 매니저를 모를 리 없으니까.

신경 쓰이는 시선을 무시하고 최재환은 이시현의 미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봤다.

기콘부에 가득 쌓인 대본들.

어떤 건 우편으로 오고, 어떤 건 작가가 캐스팅고를 직접 들고 온다.

하나같이 고치고 고쳐 손때가 느껴지는 대본들이다.

물론 모든 대본이 친절한 건 아니다. 어떤 대본은 불친절하다. 명확하게 인물에 대한 설명과 안내가 있는 대본도 있지만, 어떤 건 그저 한 줄로 간단히 적힌 것도 있다.

미스터 미스터리도 그다지 친절한 지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시현이 맡은 순간, 꽃미남 살인자 이미지에 아주 깊은 슬픔과 사연이 새겨졌다.

그래서 최재환은 기콘부에 늘어진 대본을 주워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시현이 이역을 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표현할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훗.’

내내 한숨 쉬다가 피식 웃었더니 또 옆에서 쳐다본다.

‘어디 나뿐일까.’

배우 혹은 가수의 꿈을 포기하고 매니저가 된 사람이.

그래서 이시현이 더 특별했다. 그에게는 없는 걸 가졌으니까.

“안녕하세요.”

불쑥 다가온 소리에 최재환이 고개를 추켜들었다.

“어, 왔니?”

눈앞에는 170센티미터 정도 키의 앳된 얼굴이 서 있었다.

짧은 머리 때문인지 더 어려 보이는데, 쭈뼛쭈뼛 낯가리는 얼굴로 제 입술만 괴롭히고 있는 아이를 두고 또 옆에서 난리가 났다.

“와, 저 애 대게 예쁘장하게 생겼다.”

“여자아이 같은데?”

“근데 저 아저씨는 뭐지? 사채업잔가?”

사채업자라니. 도대체 쟤들은 여기까지 들린다는 걸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최재환은 일단 눈앞의 아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앉아.”

“예.”

남자아이가 자리에 앉고 그를 마주 봤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오래전에도 본 모습 같아서, 최재환은 피식 웃고 말했다.

“왜? 무섭니?”

“아저씨··· 사기꾼 아니시죠? 진짜 지에스 매니저 맞으세요?”

“하하.”

“그게 웃긴가.”

남자아이가 의심의 눈을 쉽게 거두지 않는다.

“예전에 누구도 그런 말을 했었거든.”

최재환은 커피잔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그래, 내가 사실은 더는 지에스 매니저가 아니야.”

“예?”

“독립하거든.”

“독립이요?”

괜히 왔다는 표정이다.

“내가 회사를 차린다는 뜻이야. 그리고, 니가 만약 나랑 계약한다면··· 첫 번째 연기자가 되는 거지.”

최재환은 커피를 마저 비웠다. 남자아이가 눈치를 보다가 묻는다.

“정말, 제가 배우가 될 수 있어요?”

최재환은 빈 잔을 내려놓았다. 오래전에 이시현에게 똑같은 질문을 받았고, 그때는 될 수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글쎄.”

“에이, 뭐예요? 된다고 해서 온 건데.”

“앞날은 모르는 거잖아 이놈아.”

무척 실망한 남자아이의 얼굴을 보며 최재환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항상 너의 매니저일 거야. 네가 배우든, 아니든.”

다시 또 그렇게 시간은 흐를 것이다. 차곡차곡.

**

「2001년 5월 26일 토요일」

“그만 좀 화 푸세요.”

차 대표는 옅은 웃음을 보이며 잔부터 채웠다. 하지만 황 국장은 채워진 잔을 바로 마시지 않고 눈부터 흘겼다.

“웃기는.”

“자꾸 그러실 겁니까. 그래서 프로포즈에서 첫 무대 하는 거 아닙니까.”

“에휴.”

조금 누그러졌는지, 황 국장은 잔을 비우고 번드르르한 입술을 훔쳤다. 그래도 불만은 계속 튀어나왔다.

“말은 하여간. 그것도 우리 이용하는 거잖아? 야외 특설무대에, 음향장비에, 팬들 뒤치다꺼리까지.”

“에이. 장비야 우리 쪽에서 해결한 거고, 팬들 이동도 우리가 다 알아서 했습니다.”

그 때문에 녹화 날 지에스 직원들이 총동원됐다.

야외 특설무대에 이시현 팬들 7천 명이 모인 날이었다.

“뭐, 오늘인가?”

황 국장이 육회를 입안 가득 넣고 눈꺼풀을 깜빡인다.

차 대표는 피식 웃으며 시간을 살폈다.

“지금쯤 방송하고 있겠네요.”

「종로 극장」

“오빠 나온다!”

스크린에 이시현이 나온 순간, 극장 안에 비명 소리가 출렁거렸다.

오늘 수포 회원 백 명이 종로 극장에 모였다.

참가 신청자 2만 명, 경쟁률 2백 대 1을 뚫고 그녀들이 모인 이유는 KIS의 예능프로그램 ‘프로포즈’를 시청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시현이 나오니까.

< 오후의 빛깔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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