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후의 빛깔 (1) >
“죄송합니다만, 그일 관련해서는 아직 드릴 얘기가 없네요. 예, 물론이죠. 저희도 곧 입장 발표해야죠.”
사무실 여직원이 붉은 입술 사이로 연거푸 한숨을 쏟았다.
전화 응대 중이던 또 다른 매니저는 눈을 꾹꾹 누르며 하품이다.
“실장님 어떻게 해요? 팬들도 그렇고 기자들도 그렇고, 전화가 끊이질 않네. 일단 뭐라도 코멘트 해야 할 것 같은데··· 아, 저 방송 또 하네? 벌써 몇 번째야.”
여직원이 볼멘소리를 읊조리며 TV로 고개를 돌렸다. 연예정보 프로그램에서 대중문화평론가와 MC가 문제의 영화 장면을 두고 대담 중이었다.
-해당 장면을 보시면, 이게 연기라고 보기 어렵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실제 상황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만약 이 장면을 후자의 상황이라 가정을 한다면, 여배우 얼굴에서 그녀에게 닥친 고통과 공포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장면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꽤 빈번하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떻게 보세요?
MC가 큐카드를 넘기며 묻자, 얼마 없는 앞머리를 쓸어올린 대중문화평론가의 설명이 이어졌다.
-촬영 당일에야 여배우에게 노출 씬을 요구한다든지, 여배우 동의 없이 키스 씬 촬영을 진행한다든지. 사실 지금 이게 배우 이시현 씨와 마이클 본 감독을 두고 일어난 논란이지만, 문화계 안팎에서는 여럿, 감독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화면 속 여배우의 공포에 질린 모습에 미간을 가득 찌푸리고 보던 강 실장이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턱을 받치고 TV를 보던 여직원이 그에게 넌지시 묻는다.
“이거 괜히 다른데 불똥 튀는 거 아니겠죠?”
“글쎄. 이상하게 퍼지네.”
지금 상황이 애매한 것이 평론가 말처럼 여타의 다른 감독들한테도 불꽃이 튀어버렸다.
마이클 본은 침묵하고 있는데, 괜스레 충무로 분위기만 뒤숭숭해지는 기현상.
“어쨌든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강 실장은 여직원을 뒤로하고 팀장실로 발길을 돌렸다. 문을 두드리려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최재환이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기자님은 믿으세요?”
최재환은 창 너머로 보이는 오후의 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천천히 흐르는 구름 사이로 노을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예. 믿어요. 시현 씨 얘기 듣고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봤어요. 확실히, 그건 연기라고 하긴 어렵더라고요. 평론가도 그렇다고 하잖아요?
이우정 기자가 넌지시 반문하고 힘없이 웃는다.
웃음이라기보단 씁쓸한 한숨 같았다.
“근데 이 소문,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아세요?”
-왜요?
최재환의 질문에 이우정 기자의 목소리가 치솟았다.
“너무 뜬금없이 들썩인 것 같아서요. 출처도 확실히 없고.”
때맞춰 이시현의 행동도 묘하게 이상해졌다.
박한영과 가경 작가가 서울에 온 것도 이상하고.
-글쎄요. 창피한 일이지만, 사실 팩트 따지는 기자 얼마 없어요. 오히려 꼬리 물어서 소문의 출처를 찾는 게 더 빠를 때도 있고요. 그리고 출처가 어디 있어요? 모두 사실이라는데.
“예, 알겠어요. 아무튼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최재환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문득 고개를 돌린 곳에 이시현의 브로마이드가 붙은 사무실 벽이 눈에 들어온다. 드르륵, 서랍을 열자 작년에 가경 작가에게 받은 냅킨 계약서가 눈에 들어왔다.
꾹꾹 눌러쓴 글씨가 여전히 선명하다.
당시 급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받은 상징적인 의미의 계약서였다.
‘그래도··· 반추는 했으면 했는데.’
깃털처럼 가벼운 냅킨 한 장인데, 지금의 최재환이나 이시현에게는 너무 무거웠다.
[나 가경 작가는 차기작 주연에 배우 이시현을 캐스팅할 것이며 이시현 역시도 이 영화에 출연할 것을 약속한다]
마치 눈동자에 영원히 새길 듯, 최재환은 냅킨을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부스럭 소리와 함께 가스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쩔 수 없지.’
흔들리는 불꽃 위로 냅킨을 놓으려는 때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강 실장이 문에 기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통화 끝났냐?”
“왜?”
“시현이 데리러 안 가?”
“가긴 어디를 가. 말도 안 듣는 놈을.”
퉁명한 말투와 달리 최재환은 피식 웃고 냅킨을 도로 서랍에 넣었다.
“시현이는 더 클 거야. 음악도 체계적으로 계속 배우고.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이제부터는 쓸데없는 일에 엮이면 안 된다.
무조건 직진만 해야 한다.
“누가 뭐라냐.”
“그러니까, 니가 곁에서 잘 챙기라고.”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지에스를 떠날 날이.
“자기가 하면 될 걸, 왜 나한테 떠넘겨.”
강 실장은 투덜거리면서도 코끝을 가볍게 훑었다.
남들은 최재환의 선택이 섣부르다고 하지만, 결국 매니저들이야 독립이라는 종착점을 향해 달리는 것 아닌가.
“그리고 말이야. 체통 좀 지켜라, 강 팀장아.”
“야 내가 무슨 체통을 안 지켰다고··· 팀장?”
그제야 강 실장이 이마에 깊은 주름을 새겼다. 입술을 머뭇거리더니, 마른침 한번 꿀꺽 넘기고 묻는다.
“진짜야?”
“대표님 결재 났어. 축하한다, 강현 팀장님.”
강 실장을 바라보는 최재환의 입가에 미소가 아른거린다.
그동안 이시현 데리고 다니라, 송이경 챙기랴, 그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야, 그럼 나 월급 얼마나 오르냐? 너 얼마 받아?”
한참을 눈만 깜빡이던 강 실장이 묻는다.
**
“오빠, 저 언제부터 오빠하고 일하는 거예요?”
쫑알쫑알.
계속되는 질문과 따가운 눈초리에 고개를 살짝 돌렸더니, 머리카락 한 올 달라붙은 훤한 이마가 눈에 들어온다.
“송이야.”
“예, 오빠!”
한송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고개를 내밀었다.
하여튼 얘는 대답 하나는 기똥차다니까.
“너, 니 가수 챙겨라. 왜 내 옆에 있냐?”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성지훈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저 녀석이 요즘 돈독이 올라서 밤낮이 없는데, 그래도 잘 되고 있으니 다행이다.
“챙길 거예요. 오늘도 챙기고, 내일도 챙기고··· 제가 항상 챙기거든요?”
불만이 가득 찼는지 볼이 불룩하다. 거기다가 눈을 살짝 찌푸린 채로 나를 보는데, 섬뜩해서 누가 벌써 에어컨을 틀어놨는지 알았네.
“또 눈 그렇게 뜬다. 그러다 때리겠다?”
“에이 오빠, 저 연약한 여자예요.”
한송이가 발랄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지금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얘 대체 성지훈한테 가서 뭘 배운 걸까.
“죽을래?”
미용 가운 사이로 주먹을 살짝 내밀자 작은 입에서 치! 소리가 흘러나온다. 근데 얘는 그렇다 치고··· 내 등 뒤에는 또 다른 여자가 눈을 흘기고 서 있다.
“자기, 이러기야? 샵을 옮기는 게 어디 있어? 나한테 얘기도 없이!”
오늘 무슨 날인 모양이다.
“그래서 다시 왔잖아요.”
“옛말에 두 집 살림하는 사람과는 얘기도 하지 말라고 했어!”
“그래요? 그럼 한 집만 이용해야겠다!”
솜솜 원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흥정에 실패한 장사꾼은 얼른 입꼬리를 올린다.
“농담이야, 농담!”
속 좋게 웃어넘기는 그녀 모습에 괜히 미안해졌다.
그래도 내 말 듣고 성형수술 부작용은 피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아무튼. 사실 삼성동 N 샵이 여기보다는 동선이 편하고 좋다.
다만 유 작가가 N 샵 단골이라는 얘기에 생각을 바꿨다.
작가와 친해지면 좋긴 해도, 당분간 유 작가와는 조금 거리를 둘 생각이다. 그녀의 입이 무겁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시현아 다됐다.”
곱게 묶은 머리에 붓 하나 꽂은 디자이너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어요, 누나.”
일어나는 김에 거울을 살짝 들여다봤다. 여전히 잘생긴 얼굴을 봐서 뭐하겠냐만은.
운동화, 청바지, 체크무늬 남방셔츠.
많고 많은 의상이 있지만 나는 이 차림이 제일 편하다.
“아, 끝나셨어요?”
기다리던 기콘부 백유진이 나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는데, 오늘 꼭 내 대답을 들어야겠다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시현 씨 의견은 어떠세요?”
소파에 마주 앉자마자 그녀가 가져온 바인더를 뒤적이며 물었다.
“글쎄요.”
CF 콘티, 시놉시스, 행사 서류, 공문서 등등.
일거리가 가득한 바인더를 앞에 두고 괜히 입안이 쓰다. 이렇게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나는 아직도 반추에 미련이 남은 모양이다.
여전히 마이클 본 감독의 에이전트가 양심고백을 할 것 같고, 가경 작가가 다시 합류할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성심그룹 김은재가 될 것 같은··· 하지만 반추의 포기 여부에 따라 달라질 게 많기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물론 결정은 내렸고.
“당분간은 좀 쉬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 어차피 6월부터 MNC에서 스텝이 방영되니까, 좀 쉬다가 가을쯤 음반활동 및 영화촬영 병행해도 되고요.”
백유진이 내 맘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원래 그게 맞는 건데.
“기콘부에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질문을 돌리자, 그녀가 잘 넘기던 바인더를 멈춰 세웠다. 윗입술을 빨아들이며 생각하다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반추 때문에 조금 돌아가긴 했는데··· 사실 저희도 비슷한 생각이었어요. 뭐 시현 씨야 원하는 곳이 넘치는데요. 굳이 해외까지 가느라 출혈을 감수할 필요는 없죠.”
그녀가 싱긋 웃고 바인더를 다시 넘기는데, 마침 프린트된 악보 한 장이 소파에 흘러내렸다.
나는 ‘오후의 빛깔’ 악보를 손에 들고 물었다.
“이 노래 들어보셨어요?”
종이 질감을 느끼며 적혀 있는 노랫말을 눈에 담는 동안 백유진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예. 노래 좋더라고요.”
그녀의 시선에 살짝 기대감이 서려 있다.
아무래도 기콘부는 음반활동을 기대하는 모양이다.
근데··· 한가지 모르겠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남수혁이 이 노래를 나하고 하겠다는 이유다.
나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이번에는 왜?
단순히 내가 멜로디 라인을 잡아줘서일까, 아니면 내가 지금 상승세라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종잡을 수 없는 놈인 건 분명하다.
생각은 관두고 잠시 악보를 들여다본 끝에 결정을 내렸다.
“할까요?”
팬들을 위해서.
“다만······.”
**
휴대폰을 내려놓은 남수혁이 이마를 찌푸린다.
일단 이시현이 다시 전화를 준다니 기다리긴 하는데.
“바꿔? 뭘 바꿔?”
혀를 차며 마우스를 클릭한 그는 익숙하게 ‘블랙보이’ 팬 카페에 들어가 [남수혁]을 쳤다.
늘 그렇듯 셀 수없이 많은 게시물이 주르르 펼쳐졌다.
하지만 하루 이틀 전의 게시물은 찾을 수가 없었다. 팬들도, 슬슬 잊어가는 거다. 그걸 잘 알기에 입술을 빨아들이면서 그나마 가장 최근의 게시물을 클릭했다.
잘 나온 사진 아래 댓글이 주르륵.
-수혁이 오빠는 왜 안 나오는 거야?
-우리 수혁이 오빠 정말 죽을 병 걸렸나요?
“얘는 왜 엄한 사람 환자 만들어?”
투덜거리면서도 계속 눈으로 훑었다.
-미스터 미스터리 본 사람? 그거 오빠가 한다는 소문 있었잖아.
-안 하길 잘했지.
-솔까말, 데뷔 때 외모는 아니잖아.
-너님 언젯적 남수혁 얘기하는 거니?
“내 얼굴이 어때서!”
순간 가슴에서 욱하는 열기에 남수혁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너희들 그거 아니? 수혁 오빠가 작사 작곡한 노래를 배우 이시현이 부른다는 소식, 이시현이 노래 듣고 극찬했대···
키보드를 두들기던 손가락이 점점 힘을 잃더니 우뚝 멈췄다.
손끝이 굳은 것처럼 움직여지질 않고, 눈앞에는 이시현이 스쳐 간다.
촬영장에서 몰입하던 이시현 모습이, 팬들에게 다가가던 이시현 모습이 스쳐 간다. 그리고 모니터에 얼핏 비친 자신의 모습까지··· 근데 왜 이렇게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는지.
“하.”
한숨 쉬며 일어난 남수혁은 리모컨을 손에 쥐고 소파에 발랑 드러누웠다.
“또 재방이네?”
KIS에서 미스터 미스터리가 재방송 중이다.
축 늘어진 상태로 화면 속 이시현을 바라본다.
이제는 의미 없는 일이지만, 이시현의 연기를 보면 납득되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 자리는 솔로 남수혁의 자리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스쳐 간다.
아쉬움 속에서 그는 화면을 보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시현의 입술에 눈을 고정한 채 계속 속삭인다.
“나는 살인잡니다. 하지만··· 내가 죽인 그들도 살인자였습니다.”
대본은 이미 다 외웠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머릿속 대사를 뱉을 수 있다.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속삭임을 멈추지 않았다.
속삭임이 이어질수록, 남수혁은 정말 자신이 한성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상대 배우인 오소리에게 점점 마음이 이어지는 기분까지 살짝 느꼈다.
이래서 배우들이 ‘호흡 호흡’ 하는구나 싶다.
스크롤자막이 올라가고서야 그는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휴대폰도 타이밍을 맞춰 울렸다.
“여보세요?”
-나다.
나는 무슨.
“뭘 바꿔요?”
퉁명하게 묻자, 퉁명한 대답이 들렸다.
-가사.
“가사를 왜요?”
기껏 고심 끝에 쓴 걸 왜.
“저기요, 내가 이렇게 부탁하니까 그쪽이 뭔가 대단한······.”
-싫으면 말고.
“거··· 참··· 성격 급하시네.”
어떻게 바꿔줄까.
< 오후의 빛깔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