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시키는 대로 (11) >
“준비되면 얘기해주세요.”
스태프의 의뭉스런 시선이 나를 스쳐 간다.
일주일 만에 같은 장소에서 또 오디션이니 이상할 수밖에.
뭐 아무튼. 지금부터 나는 박한영과 함께 양심고백이 없었다면 누구도 알지 못했을 그 날을 재현할 거다.
실패해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성공해도 달라질지 장담할 수 없는 도박.
그러니 이제··· 집중해야 할 때다.
바닥의 삐걱거림, 작은 창, 음영이 가득한 방 안에 주눅이 든 어린 배우가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잘할 수 있어. 넌 아주 잘할 거야.”
가까이 다가가 작은 귓바퀴에 대고 속삭였다. 나른한 목소리로 어린 배우를 회유하는 동안 내 목은 흥분과 열기로 쉼 없이 꿈틀거렸다.
“이걸 진짜로 펴요?”
어린 배우가 대마초를 흔들며 말했다.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사람 좋은 미소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년은 배시시 미소 짓고 나를 바라봤다.
신이시어, 이 어린양을 제게 선물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정 그렇게 외치고 싶은 걸 참고. 늘 그렇듯 환히 미소 띠고 말했다.
“준비되면 말해.”
들썩이는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어서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햇볕이 다리 하나에 간신히 걸쳐 있는 그런 의자다.
나는 날뛰는 미소를 겨우 잠재우고 어린 배우를 지켜봤다. 아주 간단한 씬을 보고 있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빠져든다.
종일 매트리스 위에서 빈둥거리는 소년.
술을 마시고, 대마초를 피고, 잡지를 보고, 노래를 듣고.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지만 그만큼 허무한 시간들.
“됐어요.”
어린 배우는 대본을 덮었다. 나는 한 손에 8밀리 카메라를 손에 쥐고, 한 손에는 대마초와 술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주 조금만 마시고, 아주 조금만 피우면 된단다.”
그러자 내 그림자에 가려진 어린 배우는 또다시 해맑게 웃었다.
**
“······.”
이시현과 박한영의 연기 앞에서 스태프들의 얼굴은 점점 구겨졌다.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눈빛과 행동,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것들은 실제와 역겨움을 자아냈다.
타락한 감독을 열연하고 있는 이시현은 소년에게 술을 먹이고 마약을 강요했다.
소년이 머뭇거릴 때마다 같은 말이 되풀이된다.
“넌 아주 잘할 거야.”
몽롱한 정신의 소년은 침대에서 흐느적거렸다.
그나마 자신이 카메라 앞에 있다는 건 인지하는지 상체를 세우려고 노력하지만 비틀거려 쓰러질 뿐.
급기야 토사물을 쏟아내고,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몰렸다.
그제야 감독은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열기로 인해 바싹 마른 입술을 연신 핥으며 목울대를 꿈틀거린다. 바싹 수축한 빗장뼈가 윤곽을 드러내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허리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순간 여자 스태프 한 명이 고개를 돌렸다.
역겹고, 구역질 나는 장면이니까.
감독은 소년에게 다가가는 순간순간 온몸을 떨었다.
그것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극도의 흥분이었다. 연기임을 아는데도, 광기 어린 눈빛과 드러난 표정 앞에서 사람들은 절로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때였다.
“도와··· 주세요.”
소년이 속삭였다. 잠시 멈칫한 감독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같은 말을 속삭인다.
“넌 아주 잘할 거야.”
소년이 온 힘을 다해서 앞으로 기어갔다.
“도··· 와 주세요.”
그 모습을 보는 감독의 얼굴은 즐거워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다. 천천히, 소년의 뒤를 따라간다.
“도와······.”
소년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작은 손이 멈춘 곳에는 구둣발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 발에 닿았다. 마이클 본 감독의 에이전트였다.
“도와··· 주세요.”
그러자 타락한 감독은 에이전트를 응시하고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우린 같은 팀이잖아.”
한발 다가가 코앞까지 바싹 가서 다시 속삭인다.
“아주 잠깐 즐기는 거야. 너만 조심하면 영원히 즐거운 시간으로 남을 거야.”
날뛰는 웃음소리 앞에서 어린 배우의 목소리가 흐려진다.
“살려··· 주세요.”
스태프들은 입을 가린 손으로 역겨움을 견디면서도 호기심의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두 배우가 무슨 의도를 가진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에이전트도 저 안에 발을 디뎠다.
선명한 턱선은 일그러져 꿈틀거리고, 눈썹은 통제되지 못하고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시현이 박수를 치고 뒤로 물러났다.
“오케이!”
에이전트에게서 눈을 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자, 이시현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한층 여유 있는 미소와 행동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 얘기하지 않은 건 미안해. 하지만 이 장면은 꼭 필요한 장면이야.”
“안 하면 안 돼요? 겁난단 말이에요.”
어느새 바닥에서 일어난 박한영이 대사를 이어받았다.
얼굴을 찌푸리고, 간절한 눈으로 이시현을 바라본다.
“잘 들어. 여기서 아픔을 겪어야지만 그녀의 상황과 절망이 더욱더 관객에게 이입되고 몰입이 되는 거야.”
여배우는 초조했다. 힐끗힐끗 대기 중인 남자배우를 쳐다보며 감독에게 하소연했다.
“원래 없던 내용이잖아요?”
“당신은 배우잖아. 그냥 흉내만 내는 거야. 그리고 이건, 예술영화야.”
다시 한 번 설득하자 여배우는 머뭇거렸다.
주위의 스태프들, 상대 배우의 못마땅한 시선이 그녀를 압박했다. 감독은 그 머뭇거림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속삭였다.
“당신은, 아주 잘할 거야.”
감독은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옷깃에 손을 얹었다. 살살 잡아당기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 앞에 이번에도 에이전트가 서 있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우린 늘 같은 팀이잖아.”
감독의 미소 띤 얼굴. 넋 나간 에이전트의 얼굴.
극명히 다른 두 얼굴을 보면서 모두가 생각했다.
대체 저 에이전트의 역할은 뭘까.
**
더 압박해볼까.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 갈 정도로 에이전트는 지금 코너에 몰려 있었다. 이마에는 힘줄이 꿈틀거리고, 부릅뜬 눈동자는 돌출된 것처럼 볼록했다.
그래서, 과연 앞으로 10년 후에나 양심고백을 할 그가 지금 입을 열까?
어쩌면 이 일로 오히려 입을 다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도 했으면 그도 잘 알 거다.
오늘 이 순간이, 박한영과 내가 연기한 지금 장면과 내용이 결코 우연일 리 없다는 걸. 이 비밀이 언젠가는 세상에 알려질 거라는 걸.
그런데도 끝까지 입을 다문다면 오늘은 늦은 밤의 오디션으로 끝나는 거다. 결말은 오로지 그가 정하는 거니까. 그게 운명이니까.
“걱정하지 마. 내 에이전트가 저렇게 지켜보고 있잖아.”
나는 마지막 대사를 끝으로 스태프들을 바라봤다.
이제 연기는 끝났다. 고요함 속에서 평가인 듯 아닌 듯, 속삭임이 들린다.
“뒷부분은 없는 내용인데,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인가요?”
“이시현은 이제 의심할 필요가 없겠는데.”
“박한영은 누구지? 프로필 좀 찾아놔야겠어.”
“시나리오도 나쁘지 않고요.”
“하지만 상업적으로는 아니야. 마이너리그에서나 손대볼 만한 시나리오지.”
점점 커지는 대화들을 들으며, 나는 마이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놀라서 겁을 먹었을까, 아니면 떨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후회하고 있을까··· 하지만 이런 내 기대는 보기 좋게 박살 났다.
“아주 좋았어!”
마이클이, 흡족한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다.
손바닥이 붉어질 정도로 두들긴다. 즐거운 추억이라도 떠올리는지 입꼬리가 힘껏 말렸다.
저 미친놈.
할 말을 잃어버린 내 어깨에 박한영의 손이 올라왔다.
“수고했어.”
그는 땀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 역시도 이마의 땀을 훔치는데, 스태프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물었다.
“근데 왜, 오디션 중간에 감독님의 에이전트가 극에 들어간 거죠?”
“그가,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요.”
그 어린 배우에게도, 그 여린 여배우게도.
**
“와··· 배우 잘생겼고, 연기 죽이고, 화면은 더 죽이고.”
종방 현장에 모인 스태프들은 변호사 이혜리가 오열하는 장면을 보면서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식당 이모들도 이 순간만큼은 손을 멈추고 TV에 집중했다. 촬영한 배우도 이렇게 드라마에 빠져드는데, 시청자들은 오죽할까.
성당 운동회에 참여한 이혜리를 바라보는 한성수를 끝으로 스크롤자막이 올라간다.
“기다려, 기다려!”
강 피디가 아직 안 끝났다고 외치자 요란했던 박수 소리가 멈췄다.
스크롤자막이 다 올라가고 추가 씬이 이어졌다.
두 사람이 같은 길을, 서로 다른 시간에 걷는 장면이다.
닿을 수 없는 순간을 표현한 애틋한 장면.
나무가 늘어져 있는 산책길이 화면을 사로잡았다. 저걸 찍으러 대구까지 내려갔었는데. 그리고 저 때,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잠시 그때를 떠올리는 사이 여름 장맛비처럼 억센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2차는 호프집에서, 3차는 노래방에서.
그때마다 장소를 구하느라 조연출이 죽어났지만, 어찌 됐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종방연도 마무리됐는데··· 결국 난 또 유 작가에게 끌려왔다.
이 여자가 정말.
아무튼 오소리와 나, 그리고 유 작가.
우리 셋은 인적이 드문 카페에 자리 잡았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다.
“근데, 오늘 어디 갔다 왔어? 되게 피곤해 보이더라.”
유 작가의 질문에 나는 말없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오늘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주연 배우는 끝까지 좋은 주연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고생한 스태프들 얘기도 들어주고, 웃어주고, 집에 가는 것도 봐주고. 나는 내 배우들에게도 종방연 때만큼은 꼭 그렇게 하라고 했었다. 그게 서로 좋은 기억으로 남는 방법이니까.
그런데 실은··· 찝찝해서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같은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그들이 당했던 순간을 연기했더니 속이 뒤집힌 모양이다.
“소리는 많이 마셨니?”
“아니요.”
내내 말이 없던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말과 달리 눈이 게슴츠레한 것이 날 못마땅하게 보고 있다.
“아 이런.”
유 작가가 휴대폰을 보고 눈을 찌푸린다.
“왜요?”
“강 피디 집에 안 가고 여기 왔대. 나보고 어디냐고 데리러 오라는데? 아, 이 인간 낄 데 안 낄 데 모르고 말이야.”
유 작가는 투덜대면서도 카디건을 챙겨 강 피디를 데리러 나갔다. 이런. 둘만 남으니까 어색하다.
“한성수도, 이혜리도 이제 더 볼 수 없네.”
아쉬움이 담긴 내 속삭임에 오소리가 흐린 미소를 띤다.
“좋았는데··· 날 그렇게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요.”
그녀가 피식 웃고 소주 한잔을 따라 마신다. 얼마나 행동이 빠른지, 따라주려고 손을 뻗었다가 무안함만 빈손에 닿았다.
“감독 하차 요구한 거, 소문 때문에 그랬던 거예요?”
그녀가 묻는다. 원망의 시선인지, 그저 궁금한 건지.
“나한테도 귀띔해주지 그랬어요. 난 그것도 모르고 캐스팅됐다고 좋아만 했는데.”
“미안. 실망 많이 했지?”
반추를 위해서 그 새벽 달려왔던 그녀의 열정을 잘 안다.
그래서 미안해서 물었더니,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잠깐 화났었는데. 좋아하는 마음은 변하질 않더라고요.”
내가 아무래도 오늘 많이 무리한 모양이다. 헛소리가 들리네.
“뭐라고?”
“눈치챘겠지만, 제가 오빠를 많이 좋아해요. 녹음기가 고장이 나요? 새로운 매니저님이 그런 일 없었다는데?”
천장 조명이 그녀의 머리맡에 내려앉는다. 지금 순간 그녀의 눈썹도, 얼굴도, 입술도 은은한 주황색에 잠겼을 뿐인데 그 어느 때보다 나를 사로잡는다.
“저기 선배······.”
“대답하지 말아요.”
눈을 찌푸리더니, 그녀는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쪼르르···
근데 유 작가는 왜 안 오는 거야.
간절히 그녀를 기다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런. 내가 함정에 빠졌구나. 이 자리가 유 작가의 불순한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오빠도 저 마음에 들면 이 술 마셔요. 아니면, 마시지 말고.”
허. 갑자기 세게 나오니까 얼얼하다.
나는 술기운을 등에 업은 그녀의 시선을 피해서 잠시 술잔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성수는 이혜리를 지켰다.
미안해서, 죄책감에.
하지만 그 모든 이유의 바탕에는 그녀를 위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내가 오소리를 위해서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새겨진 퍼즐 조각을 맞추려 했던 건··· 아마 같은 이유일 거다.
“알았어요. 오빠 생각이 뭔지.”
그녀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잔을 향해 손가락을 뻗는다. 느릿느릿, 예쁜 입이 술잔을 집어삼킬 듯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뭐 이미 늦은 거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늦은 걸 만회하기 위해 재빨리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찌푸린 얼굴, 오므린 입술에 바싹 다가갔다. 그렇게 잠깐··· 나는 미지근해진 소주를 나눠 마셨다.
한성수는 떠나 보내고. 이제 이시현으로서.
**
「2001년 5월 4일 금요일」
“됐어.”
오디오가 잠잠해지자 차 대표는 담배를 꺼내 물고 남수혁을 쳐다봤다.
“이거 말고 또 있어?”
“있긴 한데, 아직 손볼 데가 많아서.”
남수혁은 대답을 하고 바로 숨을 들이켰다. 써놓은 곡은 넘치고 넘치니까. 다만 어떤 건 조금 밋밋하고, 어떤 건 조금 과하고, 또 어떤 건 뭔가 애매하다.
“성 팀장. 이시현이 관련한 거 뭐뭐 있어.”
“일단 지금 KIS에서 미스터 미스터리 정규 편성에 합류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이 부탁이지 통보나 다름없다.
심지어 KIS 황 국장은 기자들에게까지 넌지시 운을 뗀 모양이고.
“MNC에서는 스텝 방영 시기 맞춰서, 뮤직캠프 한번 나와달라고 합니다. 주효정 양도 같이.”
“그런데도 이 곡을 시현이가 해야 한다?”
가는 시선이 닿자, 남수혁은 마른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러자 차 대표가 피식 웃는다.
“오후의 빛깔이라. 이 노래, 마음에 든다.”
“그죠?”
남수혁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러나 성 팀장이 안경을 들썩이며 다시 말했다.
“근데, 페이 프로덕션에서 또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감독 교체하겠답니다. 이시현이 아니면··· 안 된다고.”
팩스에 열기도 식지 않은, 바로 좀 전에 온 소식이었다.
“미친놈들.”
차 대표의 싸늘한 속삭임에 남수혁의 목울대가 꿈틀거린다.
< 마음이 시키는 대로 (1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