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시키는 대로 (10) >
뺨을 긁적이던 마이클은 무릎을 탁 치고 결론을 내렸다.
‘뭐, 나쁘지 않겠지.’
예고 없이 찾아온 가경 작가가 각색이 완료된 최종 탈고본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이번처럼 자신의 각본이 아닌 타인의 각본으로 연출할 때는 원작자의 반응을 한 번쯤 살필 필요가 있으니까.
‘근데 그 메시지는 뭐야?’
1997년이 언급된 기분 나쁜 메시지는 뭘까.
누가 보낸 걸까. 왜 자꾸 보내는 걸까. 한두 번이 아니다.
궁금증에 달라붙은 먼지처럼 오래전 일이 떠오르자, 마이클은 다시 가경 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넝마 같은 옷차림부터 기이한 행동까지 상식을 벗어난 남자. 영감을 찾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게 뻔한 남자.
누가 그랬더라.
천재와 미친놈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마이클.”
에이전트가 곁에서 속삭여 그를 불렀다.
“정말, 그 여자를 또 정신병원에 보낼 거야?”
쓸데없는 에이전트의 걱정에 마이클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냥 내버려두면······.”
“닥쳐.”
일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멎었다.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가경 작가의 손이 빨라지고 있었다. 휙휙···
“어떻습니까?”
마지막 장까지 넘어가자 마이클은 내심 기대를 갖고 물었다. 심혈을 기울였고, 제작사에서 원하는 비용과 효율을 고려해 각색했다.
‘뭐야?’
하지만 좋은 반응을 기대했던 그의 기대와 달리 가경 작가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싱거울 정도로 의미 없는 턱짓이다.
더 물어도 저 입이 열릴 것 같지 않아서 대화 주제를 바꿔봤다.
“근데 서울에는 무슨 일로 왔습니까?”
“한국에서 오디션을 보려고 합니다.”
“오디션이요?”
반추에서 하차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의아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에게 가경 작가가 덧붙여 말했다.
“좋은 작품에 참여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부탁이 있는데, 감독님도 오디션 심사에 참여해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구슬처럼 작은 눈동자가 마이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
“야, 아까 들어간 사람 박한영 맞지?”
“대박. 나 박한영도 완전 좋아했는데.”
“난 실물로 처음 봤는데··· 역시 연예인은 괜히 연예인이 아니야.”
“근데, 은퇴한 거 아니었어?”
“어? 곰 매니저다!”
건물 앞에 모여 웅성거리던 팬들이 최재환의 등장에 작은 입을 벌려 낮은 비명을 질렀다. 이시현이 오면 저 입이 대뜸 커지고 입가에는 두 손까지 모아 악을 지른다.
“매니저님! 시현 오빠 왔답니다!”
“좀 전에 오빠 뽀글이 매니저님이랑 같이 왔어요!”
최재환은 귀에 익숙한 소란을 무덤덤한 얼굴로 지나쳤다.
쟤들은 저게 놀이니까.
출입문을 통과해 로비에 발을 들이자마자 한숨 한번 고르게 내쉬고 손에 든 커피를 로비 여직원에게 한잔, 그다음에는 똥머리의 여자에게 내밀었다.
“희수야.”
“고마워요.”
정희수가 커피를 받으며 생긋 미소 짓는다.
두 사람은 로비 한편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시현이 왔다며?”
아직 이시현을 보지 못한 최재환은 팬들의 재잘거림을 떠올리며 물었다.
“전 아직 못 봤어요. 지하주차장에서 바로 올라갔나 봐요. 아마 지금쯤 오빠랑 만났겠네요.”
“강 실장이 많이 놀랐겠네.”
최재환은 커피에 후후 바람을 불며 잔잔히 웃었다.
박한영을 보고 깜짝 놀랐을 강 실장을 떠올리니 옆에서 보지 못한 게 아쉽다.
“놀라기는 저도 많이 놀랐어요. 우리 롤리팝 주방 보조가 이렇게 인기가 있었나 싶어서요. 저 팬들이 다 시현이 보러 온 거라면서요?”
정희수가 불투명한 출입문을 보며 피식 웃는다.
“세상이 달라졌거든.”
최재환도 피식 웃고 말했다. 지나온 날들을 뒤적거리며 서로의 근황을 얘기했다. 그리고, 최재환의 입에서 가장 궁금한 게 튀어나왔다.
“근데, 무슨 일이야?”
박한영이 갑자기 서울에 왔다. 그리고 여기에 왔다.
물론 어느 정도 짐작은 가는 게 있었다. 박한영과 가경 작가의 관계를 잘 알고 있으니까.
“시현이한테 연락이 왔어요. 제가 필요하다고.”
예상치 못한 그녀 얘기에 최재환의 눈썹이 삐뚤어졌다.
“농담이에요.”
“후후. 너 이제 좋아 보인다?”
쿡쿡 웃는 그녀를 보며 최재환이 말했다.
박한영과 헤어지네 마네하던 그녀였는데, 비구름이 가득 고였던 그때 얼굴이 이젠 화창한 봄이고 푸른 여름이 됐다.
“그럼요. 맨날 맛있는 요리, 맛있는 남자··· 는 아니구나.”
작은 어깨를 으쓱 올리고 웃는다. 커피를 마시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시현이가 오빠한테 가경 작가님하고 연락할 방법을 물었어요.”
역시나.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작가님, 지금 서울에 있어요.”
“정말?”
최재환은 커피잔에서 입을 뗐다.
잠시 눈을 깜빡였다가 다시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지금 와서 가경 작가가 서울에 있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알아보기로는 반추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는 것 같았는데··· 그가 뭘 할 수 있을까. 작가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럼, 너희 둘은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가경 작가야 둘째치고 박한영이 프랑스에서 서울까지 온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이시현이 불렀다면 그것 나름 골치 아픈 일이라서 최재환의 눈빛이 달라졌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최근에는 도무지 이시현 속을 알 수가 없다.
“그게······.”
붉은 입술을 꿈틀거리던 정희수가 엘리베이터로 눈을 돌렸다.
숫자가 빠르게 바뀌더니, 잠시 뒤 이시현이 혼자서 내렸다. 최재환을 보며 능글능글 미소를 띠고 다가오던 녀석이 정희수를 알아채고 눈이 커졌다.
“부주방장님?”
“하하. 그 소리 오랜만에 듣네.”
“와. 너무 아름다워져서 몰라보겠는데요.”
“야··· 그거 느끼하다. 얘 원래이래요?”
정희수가 떨떠름한 얼굴이다.
최재환은 빈 컵을 버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 저랬어. 근데 넌 왜 혼자 내려왔어?”
“애들 얼굴 좀 보려고. 잠깐만 보고 올게.”
이시현이 웃으며 출입문을 가리킨다. 말릴 틈도 없이 출입문으로 성큼 다가가는 그 모습에 최재환은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희수야, 귀 막아라.”
“예?”
불투명한 유리문이 열린 순간 정희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귀를 막아야 하는 이유를.
**
「2001년 5월 3일 목요일」
[KIS ‘미스터 미스터리’ 정규 편성 확정]
[4부작이 아니다, 이젠 16부작이다!]
[이시현 합류는 미지수. 팬들 이시현 없으면 의미 없어]
차 대표의 미간이 선명하게 찌푸려졌다. 핏줄이 튀어나온 굵은 손이 연예 가십지 칼럼과 연예면 기사를 스크랩한 보고서를 쥐고 있다.
“이시현은?”
“저녁에 ‘미스터 미스터리’ 종방연 참석 때문에 지금은 집에 있습니다.”
최재환은 깍진 낀 손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집에 있는 거 확실해?”
“예.”
재차 대답하는 그를 보던 차 대표가 다른 종이를 손에 들었다.
[소문 무성한 감독. 하차를 택한 이시현.]
[팬들의 진실 요구 물결이 술렁인다!]
[Close your eyes의 성폭행 장면은 연기였나 실제였나]
[한국판 Close your eyes··· 마이클 본 감독을 둘러싼 잡음에 빨간불!]
[대체 이시현과 반추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이시현은 반추 계약서까지 쓰고 촬영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감독이 바뀌었다··· 한데 그 감독이 문제가 있는 감독이라서 이시현이 반추에서 하차 의사를 내비쳤다. 그 문제는 바로······.”
콧바람을 들썩이며 종이를 흔들던 차 대표가 손을 뻗어 테이블에 놓인 수화기를 들고 이마를 찌푸린다.
“전에도 돌았던 내용이라며?”
“그때는 Close your eyes라는 작품만 문제였는데, 그 이전 영화에서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상습범이라고.”
툭 던져진 질문에, 소파 끝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성 팀장이 입술을 핥고 말했다.
“그래?”
차 대표는 다시 최재환을 쳐다봤다. 꾹 다문 입이 흔들리지 않고 마주하자, 스피커 버튼을 누르고 수화기를 내려놨다.
“사장님, 일전에 물어본 거 답 좀 나왔습니까?”
-계속 알아보고 있는데, 그 감독 인디 시절에 꽤 미친 짓을 많이 했다는 것 같아. 왜, 전에도 한 번 들썩였는데 그때 배급사에서 발 빠르게 막았거든.
“그래요?”
-사실 이게 뭐 딱히 그렇게 이슈가 될 일은 아니잖아?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일을 우리가 알아서 뭐하겠어. 근데, 이시현이 꼈으면 얘기가 다르지. 안 그래 차 대표?
“알았습니다.”
전화가 끊기고. 차 대표는 목 언저리에 붙은 찝찝함이라도 털어내듯 목 단추 하나를 풀었다.
“스카이데일리에서 이 정도 얘기하는 거면, 뭔가 있긴 한 것 같습니다.”
최재환은 조심스럽게 생각을 얘기했다. 그러자 검지로 입술을 매만지던 차 대표가 삐딱한 시선으로 물었다.
“이거 찌라시, 시현이하고 관련 있는 거야?”
“아닙니다. 시현이가 어떻게요.”
“그럼 감독을 바꾸네 마네 했던 건 뭐야?”
차 대표의 시선이 최재환을 누른다. 이시현이 여전히 말 잘 듣는 놈인지, 반항아가 됐는지 확인하는 시선이다.
“아무래도 먼저 이 찌라시를 봤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믿기 곤란한 내용이니까 저한테 얘기하기는 그렇고, 그러다 보니 찜찜해서 빠질 구실이 필요하니 그렇게 얘기한 것 같습니다. 원체 생각이 많은 놈이라서요.”
몇 번을 생각해도 그것밖에는 결론이 나질 않는다.
“권 팀장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차 대표의 시선이 떨어지자 최재환은 소리 없이 숨을 토했다.
“일단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출처가 확실해야 하니까요. 물론 그동안 기자들 움직임도 예의 주시하고, 특이점 있으면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기자들이 써내려가는 거는 웬만해선 그냥 둬. 어차피 우리한테 유리한 상황이니까. 그러다 많이 들썩인다 싶으면 기자회견도 염두에 두고. 터트릴 때는 터트리려야지. 별일 아니잖아? A가 안되면 B로 가는 거지, 그거 하나 못 찍는다고 끝이야?”
직원들의 대답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얘기가 마무리되자, 차 대표는 꼰 다리를 풀고 일어났다.
“성 팀장은 도미파 한희영 대표 들어오시라고 전화하고, 최재환이는, 남수혁이가 뭐 할 얘기 있다며? 남수혁이 데리고 오고. 그럼 이제 뭐가 남았더라··· 아.”
끝을 맺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한다.
“근데 박한영이는 왜 온 거야?”
**
오후 7시.
호텔에서 가장 넓은 방에 페이 프로덕션 스태프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뭘 한다는 거야.’
뚱한 얼굴의 마이클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늘 오디션에 참석하는 배우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고, 어떤 작품인지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시나리오는 초고조차 나오지 않았다는 말에 어이가 없을 정도다.
“감독님.”
곱슬머리 스태프가 낱장 짜리 시놉을 내밀었다.
대충 받아든 마이클은 턱을 북북 긁으며 시놉을 눈에 담았다.
‘이건······.’
순간 그는 바닥에 퉁기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주친 에이전트의 눈도 시놉을 보고 당황한 모습이었다.
“배우 들어옵니다.”
문이 열리고 배우가 들어온다. 훤칠한 키, 또렷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남자 배우였다.
“박한영입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
‘형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열댓 명의 스태프들이 방 안에 있었지만, 박한영의 시선은 가경 작가에게 향했다.
아무리 이복형제라지만 속을 모를 사람이다.
이시현이 오랜만에 전화가 와서 가경 작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을 때만 해도, 박한영은 자신이 서울에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래서 지금 서울, 이 호텔에, 이들 앞에 서 있지만.
그는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만 명확히 알고 있을 뿐이다.
“준비되면 얘기해주세요.”
스태프의 안내에 숨을 크게 마셔 몰입한다.
사실 촬영장에서 연기하는 데 있어 몰입이라는 건 크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배우에게 촬영은 일상이자 일이니까. 일은 곧 숙달되며, NG가 나더라도 다시 찍으면 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현장에서의 연기는 다르다.
카메라가 아닌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연기를 펼칠 때면 NG가 났다고 끊고 가는 게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그 순간의 연기, 몰입이 필요하다.
‘실전은··· 오랜만인데.’
두 작품, 각각 오백만, 도합 천만 배우.
박한영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되새기며 연기에 앞서 자신의 옆을 바라봤다.
이시현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 마음이 시키는 대로 (10)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