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76화 (176/227)

< 마음이 시키는 대로 (9) >

「2001년 4월 27일 금요일」

“안 하겠다는 거지.”

“이럴 거면 새벽에 거긴 뭐하러 찾아갔는지 모르겠어요.”

“됐어, 오히려 잘 된 거야. 지금 한창 물올랐는데 여기서 무리하게 해외 촬영으로 시간 뺏기는 것보다는 낫지.”

“그렇긴 한데······.”

조 부장이 하마처럼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쏟아내는 모습에 강 실장은 말꼬리를 흐리며 운동장으로 눈을 돌렸다.

촬영 준비 중인 스태프들 사이로 스탠드에 앉아 있는 이시현이 보인다. 이우정 기자와 함께 있는데,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길래 저렇게 웃음기 없는 얼굴들일까.

“그래도 필모에 할리우드 네 글자 박히는 게 어디 흔한 일인가, 거기다 첫 영화잖아요?”

최재환의 입장을 대변해봤지만, 조 부장은 찌푸린 얼굴을 또 한 번 흔들 뿐. 가래 끓는 소리로 같은 얘기를 또 했다.

“잘돼야 의미가 있는 거지. 망하면? 되려 몸값만 떨어지는 거야. 드라마용으로 낙인 찍힌다니까?”

“망하긴요. 이시현은 영화용이에요. 오히려 얼굴 때문에 연기가 저평가된 거지.”

갑론을박을 펼치면서도, 강 실장의 시선은 여전히 이시현에게 머물렀다.

**

“시현 씨, 그거 어디서 들었어요?”

이우정 기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그 상태로 이마를 찌푸리고 기억을 되새겼다.

“한국에서 Close your eyes 흥행하고 있을 때 그런 얘기 나온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배급사에서 발 빠르게 움직여서 묻힌 얘기거든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해당 여배우가 나서서 아니라고 부인했고.”

할리우드 자본이 사람 하나 입막음하는 건 쉬운 일이었을 거다.

“그때야 뭐, 다들 루머로 받아들였죠.”

흔한 할리우드 가십이라고.

“그리고 사실이라고 해도 누가 관심을 두겠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얘기니까. 더 잔인한 사실은 영화계의 성폭력 문제는 오래전부터 암암리에 있어 온 일이란 거다. 뭐 그게 영화계뿐이겠냐만은.

“근데, 그 감독이 반추를 맡는다고요?”

“만약 루머가 아니라면요? 제작사에서 여배우를 압박해서 잠재운 거라면.”

이우정이 손에든 펜을 흔들며 물었고, 나는 대답 대신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글쎄요.”

그녀가 난처한 듯 손에 든 펜으로 이맛살을 살살 긁는다.

“기자님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어요.”

이우정은 오랫동안 함께할만한 파트너다. 그렇지만 서로 무리한 요구가 이어지면 오늘이라도 남남이 되는 거다.

잠시, 나는 고개를 들어 운동장을 바라봤다.

엑스트라 배우들과 오소리가 맑은 하늘 아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감독은 그들 사이를 오가며 진두지휘를 하고 있고. 근데 저 구석에 있는 강 실장과 조 부장은 뭔 얘기를 저리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까부터 귀가 가렵다.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와주셔서 고마워요.”

더 얘기한들 소용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젊은 이우정은 아직 독이 제대로 여물지 못한 모양이니까.

결국, 스카이데일리랑 바로 손을 잡아야 하나···

걔들은 일단 저지르고 문제 생기면 모르쇠로 일관하는 놈들이니까. 이런 일에 써먹기 좋지.

하지만 그만큼 대가가 있어야 한다.

똥을 닦았는데도 덜 닦인 것 같은 느낌을 계속 안고 가야 할 거다.

“시현 씨.”

운동장에서 눈을 떼고 다시 이우정을 돌아봤다. 그녀가 비장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나를 본다.

“그거 다시 끄집어내도 증명할 방법이 없어요. 여배우는 벌써 아니라고 했고. 더구나 이제 와 이슈가 될 사안도 아니고.”

“이슈는 만들면 되죠.”

“어떻게요?”

“기자회견이라도 할까요?”

내 짓궂은 미소에 이우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괜히 김이 빠져서 피식 바람을 뱉었더니, 그녀가 구겨진 볼을 들썩이고 체념한 듯 가슴을 들썩인다.

“그럼 확실히 이슈는 되겠네요. 반추에서 하차했다, 감독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이 성폭행범이다··· 사람들이 믿겠어요? 증거가 없잖아요, 여배우가 이미 아니라고 했는데.”

합리적인 추론 뒤에 이어진 질문.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퍼즐 조각을 건넸다.

“본래 사람은 어떤 일이든 한 번으로 만족하지 못하죠.”

“그게··· 또 다른 피해자가 있다?”

퍼즐이 너무 쉬웠나.

“역시 기자님이네요.”

“기자라면 이정도는 해야죠. 여배우가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소식 하나에도 연애, 집안 사정, 소속사 트러블까지··· 덕지덕지 살을 붙여 지면을 꽉꽉 채우는 게 일인 사람들인데.”

쓴웃음을 짓고 잠시 기자의 일상을 얘기하더니, 그녀가 또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게 사실이냐가 중요하죠.”

“알아요 믿기 힘든 거. 기껏해야 어린 배우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것도 믿기 힘들죠. 하지만 확실해요. 제 배우 인생을 걸 정도로··· 그리고 기자님이 믿어주셨으면 하고 바라는 거죠.”

눈동자가 마치 곡괭이 든 광부의 시선이라서 미리 선을 그었다. 그녀의 눈주름 사이로 아직 여물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독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증명할 수 있겠어요?”

그녀가 물었다.

특종이나 대박을 문 얼굴이 아니라, 문제를 끌어안은 얼굴이다.

“증명 못 해요. 지금은.”

나는 그 말을 속삭이며 다시 오소리를 바라봤다.

4부, 63번 씬, 학교 운동장.

미스터 미스터리의 엔딩이다.

오소리가 먼저 컷을 가고, 그다음은 내 차례라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을 끝으로 꽃미남 살인자와도 작별.

한동안 마음이 허전하겠지만 그래도 뭐 이것저것 터지면 정신은 없을 테고.

근데 오소리가 나를 향해 속삭이며 손을 흔든다.

뭐라고 하는 거야··· ‘오빠’라고 하는 것 같다.

여름 수풀처럼 풍성한 그녀의 머리카락이 지나가던 바람에 흩날린다. 산뜻한 향기가 여기까지 오는 것 같은데, 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칙칙함이 느껴질 정도로 진지하다.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어요? 이런다고 시현 씨한테 돌아오는 게 있을지 모르겠어요. 감독이 하차해서 시현 씨가 다시 영화에 합류한다는 스토리로 흐르면 좋은데, 잘못하면 매장될 수도 있어요. 배급사 힘 우습게 보면 안 돼요.”

“저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는데··· 마음이, 시키네요.”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이우정이 피식 웃고 물었다. 나는 여전히 오소리의 미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떡밥 좀 던져주세요.”

물고기가 덥석 물 수 있게.

“수고하셨습니다!”

격려의 박수가 쏟아진다. 정신없던 지난 보름의 시간.

미스터 미스터리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똘똘 뭉쳐 불가능할 것만 같은 스케줄을 소화해냈다.

“고생했어.”

뿌듯한 미소를 띤 강 피디가 손을 내밀었다. 두 손을 맞잡고 흔드는데, 옆에 온 유 작가가 날 툭 치며 해맑게 웃는다.

“내가 시현 씨한테 빚진 거야?”

“글쎄요. 그랬는데··· 감독님이 대신 갚아주신 것 같은데?”

“그래, 내가 예술 좀 했지!”

너스레를 떠는 내 모습에 강 피디가 좋다고 맞장구친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나중에 한턱낼게.”

그녀가 씩 웃었다. 둥글동글 탐스러운 볼이 안경을 살짝 밀어내더니, 초롱초롱한 눈이 나를 사로잡고 다시 말했다.

“종방연 때 꼭 오는 거다?”

“이미 스케줄 뺐거든요?”

작년 6월만 해도 내가 유 작가 앞에서 이렇게 까불거릴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지금 나를 가득 담고 있는 유 작가의 눈동자도 그때를 떠올리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따가 술 진창 먹여서 구두 계약서 만들어 놓을 거야.”

“구두 계약서요?”

“올해 지나면 시현 씨한테 대본이나 한번 들이밀 수 있겠어? 어림없지.”

“유 작가님도 참. 그런 얘기를 왜 해? 하려면 몰래 해야지. 그리고 하는 김에 나도 낍시다. 나도 구두 계약하나 잡아놓게!”

맑은 하늘 아래 웃음소리가 들썩였다.

“근데, 영화는 어떻게 되는 거야? 정말 하차야?”

실컷 웃은 뒤에 강 피디가 반추에 대해 물었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담긴 눈들이 나를 쳐다보는 이때, 오소리가 껑충 뛰어와 유 작가의 팔을 끌어안고 미소를 씩 그렸다.

“아닌데.”

“뭐가 아니야?”

“시현 오빠, 저하고······.”

“소리야.”

내 속삭임에 그녀가 입술을 서둘러 닫는다. 계약서도 안 썼으면서 왜 저렇게 들뜬 모습을··· 보이나 싶었다가 그게 문득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들 앞에서는 여배우 오소리가, 내 앞에서는 어린애가 되길 주저하지 않는다.

“뭐야 이 분위기?”

유 작가가 오소리와 나를 번갈아 본다.

“아. 부장님!”

치맛자락을 흔들며 도망치는 오소리의 뒷모습에 강 피디가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둘이··· 진짜 뭐 있어?”

“한솥밥 먹는 식구요.”

심플한 대답에 유 작가가 내 등을 짝!

그러더니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강 피디님. 우리 이제 자리 비켜주자. 쟤들 눈빛 되게 따갑다.”

주위의 스태프들이 이쪽을 계속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나와 사진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이번 촬영은 특히 시간도 없고 정신도 없었다. 스태프들에게 다가가기도 힘들었고, 밥 한 끼 제대로 먹은 적 없고. 팬들한테도 최근에는 소홀한 편이었고.

“괜찮아요. 두 분은 그냥 계세요. 제가 갈 테니까.”

늘 그렇듯. 앞으로도 그렇듯.

나는 먼저 조연출 반유선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손에든 카메라를 빼앗으며 외쳤다.

“누가 우리 사진 좀 찍어줘요!”

환한 미소들이 내 곁에 다가온다.

**

“마이클.”

누군가와 통화를 끝낸 에이전트가 그를 불렀다.

“그 여자 또 입원했어. 대체 그 손목에 그을 때가 또 어디 있다고··· 덕분에 LA에 다시 소문이 돌고 있어. 페이 프로덕션에서도 말이 나오는 것 같고.”

“훗. 대중은 루머를 즐길 뿐이야. 제작사는 흥행만 보장되면 되는 거고. 그리고 나는 아름다움을 추구할 뿐이고.”

마이클은 시나리오를 흔들며 다시 말했다.

“프로덕션에 얘기해서 각색을 좀 더 해야겠다고 전해. 정하연을 고문하는 장면을 넣으면 좋을 것 같아. 그 밖에도 고칠 데가 많아.”

“오케이. 그렇게 전할게. 아무튼 언제 또 들썩일지 모르는 거니까 알고 있으라고.”

“들썩이라고 해. 누가 믿겠어? 그런 알코올 중독자 얘기를.”

화장실에 들어간 마이클은 거울 앞에 우뚝 섰다.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얼굴에 잠시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다시 속삭였다.

“먼 훗날, 내가 양심 고백이라도 하면 또 모르지.”

물론 그럴 리가 있나.

머리에 총구라도 박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단정한 쪽 머리를 튼 호텔 매니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마이클 본 감독님 앞으로 프런트에 메시지가 도착해서요.”

“메시지?”

에이전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봉투를 어루만졌다.

그 안에는 반으로 접힌 종이가 있었다.

“나는 네가 1997년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물론, 그 어린 소년도 알고 있는 일이지만··· 또 어떤 멍청한 팬인가 보네.”

에이전트는 이상한 메시지를 읽고 피식 웃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나온 마이클이 멍하니 그를 쳐다본다.

“왜 그래?”

이유를 묻자, 마이클의 흐린 갈색 눈이 문으로 향했다.

똑똑 소리가 다시 들리고 있었다.

에이전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열었다. 미모의 호텔 매니저를 기대했지만, 넝마 같은 옷을 축 늘어트리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

“야, 근데 너 진짜 어쩌려고 그래?”

회사에 도착했더니 강 실장이 2라운드를 시작한다.

어제 하루 최재환한테 시달렸는데, 오늘은 이놈이네.

차 대표는 어제 열 받았는지 내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그러게요. 제가 어쩌려고 이러는지.”

“이게 농담할 땐가.”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짓는 내 모습에 강 실장이 투덜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런데 사무실 앞으로 바삐 내딛던 걸음이 힘을 잃고 멈췄다.

“너······.”

강 실장 눈앞에 멋있는 녀석이 서 있다.

“오랜만이다, 형.”

박한영이, 멍하니 있는 강 실장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 마음이 시키는 대로 (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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