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75화 (175/227)

< 마음이 시키는 대로 (8) >

노트에서 눈을 뗐더니 입술이 찌릿하다. 나도 모르게 잘근잘근 씹은 모양인데··· 이제 한숨 돌릴까 했더니만 산 넘어 산이 따로 없다.

까다로운 작가가 물러나더니 이제는 감독이 싸이코.

내가 재수가 없는 거야, 아니면 반추가 재수가 없는 거야.

“너, 마이클 잭슨이 피부 탈색했다는 얘기는 알아?”

최재환이 남수혁을 향해 눈을 가늘게 기울인다.

낚시꾼의 떡밥인 줄 모르고 머리 나쁜 붕어가 덥석 물었다.

“팀장님도 아시네요? 백인 되고 싶어서 그랬대요. 그게 페놀 박피라는 건데, 피부에 약을 도포해서······.”

붕어가 신나게 입을 벙긋거리는 사이 최재환은 노트를 말았다. 돌돌, 아주 동그랗게 말아서, 냅다 남수혁 머리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임마!”

녀석의 반달 눈썹을 가린 머리카락이 노트에 붙었다가 떨었다가 난리도 아니다.

“UFO는 안 믿냐?”

“당연히 믿죠!”

둘의 만담을 보고 있으니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뭐 지금 상황에 웃기라도 해야지, 어쩔 수 있나.

나는 한숨 한번 내쉬고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감독을 떠올렸다. 악수할 때 선뜻 손이 안 가더니만. 기억이든 본능이든 뭔가가 날 망설이게 했던 거다.

“너, 다른 데 가서 이 얘기한 적 있냐?”

“묻는 사람이 없던데요?”

남수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어디 가서 절대 얘기하지 마라. 너 진짜 재기 못한다.”

길잃은 양을 제자리로 돌리려는 최재환의 신신당부 뒤에 우리는 한 번 더 오디오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가 끝나고 최재환이 질문을 퍼부었다.

이것저것 돌려 물었지만 결국 요점은 순수 창작곡이냐, 이거다.

“시현이 넌 어때?”

질문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최재환은 노래가 마음에 드는지 눈을 번쩍이고 있고, 남수혁은··· 진짜 이놈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노래만 두고 보면 싫을 리가 없다.

평생 연금이나 다름없는 노래가 될 테니까.

오후, 특히 노을이 지는 시간이 다가오면 대한민국 어딘가에서는 이 노래가 꼭 흐른다. 해가 짧아지는 겨울이 올수록 그 경향은 더 짙어진다. 어느 때는 가로숫길 매장이 한 집 건너 이 노래를 틀 때도 있다.

분명 머잖아 그렇게 되지.

스토커의 시점이든 어쨌든 대중이 그걸 아는 건 아니다.

그저 좋은 가사, 좋은 멜로디 라인이 귀를 사로잡으면 대중은 충실하게 반응한다.

대체 이놈은 어떻게 이런 발상을 했을까.

내 눈에는 지금 놀란 마음이 90프로, 경이로움이 10프로 담겼을 거다.

아무튼 기가 막히긴 한데, 이러니까 얼굴 없는 작곡가로 살았지 싶다.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이상한 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바람 좀 쐬고 올게.”

남수혁이 이마를 구기고 나를 올려다본다.

유리문을 젖히고 최재환의 사무실을 나왔다.

직원들의 시선을 벗어나자마자 복도 창가에 엉덩이를 기댔다.

어쩐지. 너무 쉽게 영화 내용이 떠오르더니.

예술이란 이름으로 여배우를 짓밟은, 어느 명감독에 관한 기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럼 반추는 어떻게 하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자.’

머리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다.

떠올리지 않아도 될 기억이 우연한 순간에 튀어나온 것뿐이라고.

지금 와서 안 하려고 해도 새벽에 그 난리를 친 마당에 최재환이나 회사를 설득할 명분도 없다.

정신 좀 차리게 커피나 마실 생각으로 창가에 기댄 엉덩이를 뗐다. 때마침 묵직한 소음을 내며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다.

1층, 2층, 3층···

그리고 마치 두 눈에 잘 새기고 보라는 듯 오소리가 치맛자락을 사뿐 흔들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맑은 미소로 나를 본다.

송이경과는 3개월 정도 촬영한 반면 오소리는 이제 보름이다. 그런데, 유독 신경 쓰인단 말이지. 뭐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오빠 어디 가세요?”

보석처럼··· 아무튼 빛나는 눈이 나를 가득 담았다.

“선배는?”

“그 선배 소리 그만 하라니까요.”

오소리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팔뚝을 쓸어내리면서 애꿎은 구두코를 바닥에 톡톡 부딪친다. 눈은 웃으면서 콧잔등은 찌푸리고, 자꾸 미소가 그려지는 입술을 억지로 꾹 다물고 있고.

아휴.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지금 보니 오히려 더 신경만 쓰게 되는 것 같다.

그녀의 행동에 허투루 된 게 하나 없는 것 같다고 할까.

작은 손짓도 나와 연관된 것 같고, 자꾸만 눈이 가고. 애들 말하는 자뻑이면 차라리 다행인데, 그렇지가 않으니까 문제다.

“내가 그렇게 불편한가. 자꾸 그렇게 거리 두고.”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토라진 입바람이 삐져나온다.

“불편하긴. 오히려 좋아서 그러지.”

“예?”

“아 그 말이 아니라.”

그녀의 눈썹이 껑충 올라가는 바람에 나는 재빨리 손사래부터 쳤다. 그런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다. 편하다는 뜻. 편하다는!

“선배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말이야. 오소리 선배··· 나는 그 어감이 좋더라고.”

큰일이다. 오소리 얼굴이 급속도로 빨개진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내 말이 다 사랑에 세레나데로 들릴 게 뻔하지. 확실하다. 연애 고수는 아니어도 연애 초보 졸업장은 있으니까.

“소리 선배.”

창을 타고 들어온 바람이 달아오른 그녀의 볼을 식혀주길 바라며 그 이름을 속삭여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본다. 이십 대의 수줍음이 풋풋하게 담긴 얼굴이다.

“반추, 그렇게 하고 싶어?”

순간 수줍은 얼굴이 뒤로 물러나고, 의아한 얼굴이 나를 대한다. 계약서만 안 찍었지 오늘 새벽 얘기가 성사된 거나 다름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예.”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순간에 크게 와 닿지 않던 좀 전의 고민이 다시 이어지는 걸까.

감독의 일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건 한참 뒤의 일.

사실 그때가 와도 대중은 감독을 옹호하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으로 나뉠 테고.

아마 지금은 제작사에서 손을 써서 묻혔을 테지.

쇼비즈니스 업계의 추잡한 인간들이 억울한 여배우의 하소연 때문에 수백, 수천억을 투자한 영화가 망하는 걸 구경만 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나는 지금 생각지도 못한 운명의 놀이에 발을 담근 것 같다.

내가 살았던 시간이 하나의 완성된 퍼즐이라면, 지금 난 그 퍼즐 조각들을 한 아름 들고 이곳에 서 있는 거니까.

“근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이 아이를 위해서, 그 조각을 맞춰야 하는 걸까.

**

“미미 OST는 정규편성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고요, 일단 스텝 같은 경우는 지금 MNC와 최종 조율단계고요.”

성 팀장은 수화기를 목에 바싹 붙인 채로 색색의 메모지가 붙은 바인더를 휙휙 넘겼다.

“미미는 딱히 홍보 활동할 계획 없죠?”

갈라진 입을 녹차 한 모금으로 축이고 물었다.

-방송국에선 바라는 눈친데, 4부작이잖아? 지금 와서 홍보하기도 애매해.

“진짜 시청률이 이렇게 잘 나올지 몰랐는데 말이에요. 그죠?”

성 팀장은 바인더를 내려놓고 피식 웃었다.

처음 이시현이 미미에 합류한다고 했을 때 이해가 안 갔다. 남수혁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이시현이 합류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심지어 오소리까지 합류한다고 했을 때는 다들 말은 안 했었어도 술렁이는 분위기였다.

배우들이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걸 좋아할 직원은 없으니 말이다.

-우리 이 배우님이 지금 대세잖아. 또 유 작가가 대본 잘 뽑았고··· 뭐 그럼, 반추는 이제 시동 거는 거야?

너스레와 함께 붙은 질문에 성 팀장은 멀찍이 손을 뻗었다. 좀 전에 팩스로 온 A4 한 장을 집었다.

“페이 프로덕션에서 제작일정 보내줬는데, 이번에는 확정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은 조심스럽죠 뭐.”

-참네, 그 새벽에 어떻게 거길 또 찾아갔어.

반추를 안 하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래서 어제 밤늦도록 대책회의를 했건만. 이래저래 이시현도 슬슬 청개구리 과에 속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게요. 시현 씨야 그렇다 쳐도, 소리는 진짜 의외더라고요. 그 정도로 반추에 관심 있는지는 몰랐어요. 액션 씬도 많은 작품인데 말이에요.”

-아무튼, 대표님 얘기 끝나면 바로 전화해 줘.

“예.”

수화기를 제자리 놓은 성 팀장은 모니터 옆에 놓인 책상 달력을 바라봤다. 손가락을 뻗어 날짜를 주르르 훑었다.

“4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페이 프로덕션에서 보내준 제작일정은 6월에서 7월 사이에 촬영 시작.

“팀장님, 수포 카페에 누가 목격담 올렸는데요? 시현 씨 새벽에 봤다고.”

“뭐? 그거 지금 얘기 세면 안 되는데.”

성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서 백유진이 가리킨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언니들, 나 오늘 새벽에 일하는 중에 오빠 목격했어···

게시글 속에는 이시현의 뒷모습과 옆모습을 찍은 사진 두 장이 실려 있었다. 아무래도 새벽의 호텔 로비에서 찍힌 사진 같은데, 딱히 문제가 될 문구나 내용은 없었다.

한숨 돌리는 성 팀장을 백유진이 불렀다.

“팀장님.”

“왜.”

“시현 씨, 할리우드에서 통할까요?”

“글쎄. 이게 자본만 할리우드지 아시아 시장을 타깃으로 잡은 영화라서···.”

잠깐 얘기를 멈췄다. 한 번 더 사진을 눈에 담은 뒤에, 성 팀장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그래도 통해야지.”

누구도 앞날을 장담할 수는 없다.

지에스의 머리라 불리는 기콘부도 앞날을 정확히 예견하고 성공시킨 기획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게 가능하다면 신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이시현이 지금까지처럼 상승곡선을 계속 유지하기를 바라며 최선을 다해 서포트 하는 수밖에는.

“한중일 동시 개봉이니까, 잘하면 단숨에 아시아의 스타가 되는 건데. 그러면 팬클럽 회원도 엄청 늘겠죠?”

백유진이 눈을 묘하게 빛내며 속삭였다.

“그렇지. 지에스도 그만큼 성장할 테고. 눈부시게 말이야.”

반추라는 글자가 적힌 서류가 기콘부에 쌓이기 시작하면서 막연하게 꿈꿨던 미래가 점점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다.

“어? 팀장님?”

삼성동에 있어야 할 최재환이 기콘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성 팀장이 눈꼬리를 힘있게 추켰다. 허겁지겁 올라왔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거 때문에 오신 거예요? 그냥 보내달라고 하시지.”

그럴 리 없겠지만, 성 팀장은 페이 프로덕션에서 보내온 팩스를 손에 들고 웃으며 말했다.

다가온 최재환이 종이를 받아들었다. 한숨 소리에 종이가 펄럭인다.

준비과정, 촬영스케줄, 진행 상황을 알려주는 것과 이를 조율하는 과정에 관한 내용이 담긴 종이.

“페이 프로덕션에, 시현이가 한 가지 더 요구할 게 있답니다.”

최재환은 종이를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뭔데요?”

“감독 하차요.”

그 말에 놀란 성 팀장이 눈만 깜빡이며 입술을 머뭇거리자, 최재환이 한숨을 쉬며 속삭인다.

“무슨 말 할지 알아요. 나도 그랬으니까. 이 미친놈.”

**

“19만 명.”

작년 말 10만을 훌쩍 넘기더니 어느새 수포 카페 회원 숫자가 19만 명을 돌파했다.

특히 수포 카페는 이시현의 목격담과 사진이 수시로 올라오는 편이라 타 팬카페에 비해 게시판 갱신 속도가 무척 빠르다.

우스갯소리로 게시판 한번 들어가면 퇴근할 때야 나온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흠. 지금 강북에 있구나.’

이우정 기자는 모래시계 모양의 마우스 포인터를 흔들며 모니터에 집중했다.

30분 전에 이시현이 식당에 들어갔다는 목격담과 사진이 올라왔다. 모자를 살짝 걸친 이시현이 뒤를 돌아보고 팬들에게 손을 흔드는 사진이다.

“와. 요즘 애들은 뭘로 찍길래 이렇게 잘 찍는 거야?”

황금분할은 물론이거니와 색감까지.

심지어 팬들 기호에 맞춰 다양한 필터를 적용해 사진이 올라온다. 그래서, 팬들은 행복하다.

그럼 지금 식당 안에서 무슨 얘기가 이어지고 있을까.

아침에 기사 실린 것 때문에 최재환에게 연락했을 때는 오후에 뭔가 하나를 더 준다고 했었는데.

‘큰 건이었으면 좋겠네.’

반추 하차 기사는 단독이었지만, 큰 임팩트는 없는 기사였다.

엎어진 영화를 궁금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오히려 미미에 묻혀버렸다고 봐야 한다.

“이야, KIS 또 재방하네.”

황당해하는 누군가의 혼잣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사무실 한가운데 TV에 이시현의 얼굴이 꽉 차 있었다.

어제 첫 방에 이어, 새벽에 재방, 그리고 2회 차 방송 전에 삼방까지.

겨우 4부작 드라마를 방송국에서 이렇게 밀어주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하지만 고개는 끄덕여진다.

종일 이시현 얘기니까. 특히 첫 회 시작과 동시에 화면을 꽉 채운 이시현의 얼굴은 기자들 사이에서 벌써부터 올해 최고의 오프닝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으니 말이다.

“어?”

여타의 기자들처럼 TV를 보고 있던 이우정은 부르르 떨고 있는 휴대폰을 힐끗 보다 놀라서 눈두덩을 들썩였다.

“여보세요?”

큼큼, 목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낮췄다.

-기자님, 저 이시현입니다.

“알죠, 알아요. 드라마 잘 봤어요. 완전 짱!”

질척거리지 않게, 담백하게 말하려고 해도 비음이 자꾸 섞인다. 이우정은 인중을 길게 늘어트려서 들썩이는 볼을 겨우 잠재웠다.

-용건부터 얘기할게요.

“뭘까. 왠지 겁나네.”

-기자님, 미안한데 조금 일찍 갚으셔야겠어요.

“뭘요?”

-마음의 빚이요.

< 마음이 시키는 대로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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