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74화 (174/227)

< 마음이 시키는 대로 (7) >

「2001년 4월 26일 목요일」

“시현아.”

“어?”

고개를 들자 흐뭇한 미소를 띤 못생긴 얼굴이 보인다.

그제야 주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선선한 바람은 계속 불어오고 있고, 테라스 난간에는 여전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졸립냐?”

“아니.”

나는 미소를 가로젓고 식은 커피잔을 쓰다듬었다.

“커피 따뜻한 거로 바꿔올까?”

다시 고개를 가로젓고 커피를 마셨다. 몇 모금 마시고 입이 쓰다 느껴질 때쯤, 최재환이 검붉은 입술을 두어 번 핥고 말했다.

“아까 왜 그랬어?”

“뭐가?”

“감독이랑 악수할 때 말이야.”

그러게. 왜 그랬을까.

감독이 할리우드에 온 걸 환영한다며 악수를 청했을 때, 나는 그 손을 바로 잡지 못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고 할까. 너무 쉽게 일이 풀려서 얼떨떨한 것도 있었다.

“별거 아니야.”

손을 한번 폈다 오므리며 말하자 최재환이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고 커피를 마신다.

“너 정말 감독이 누군지 몰랐어?”

몰랐다니까. 알 리가 있나.

호텔을 나와서야 최재환에게 감독에 대해 들었다.

‘Close your eyes’의 마이클 본이라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감독에 대해서는 몰랐어도 영화는 기억이 난다.

작년인가 재작년 이맘때 본적이 있으니까. 물론 최재환으로서.

당시만 해도 연기에 미련이 남았던 터라 꽤 집중해본 모양이다. 어림잡아 17년 전 기억인데, 얘기를 들었을 때 내용이 대강 떠올랐을 정도니까.

“몰랐지. 그렇게 쉽게 요구조건 수락할지도 몰랐고.”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잔을 흔들었다. 옅어진 커피색이 다시 짙어진다.

“Close your eyes. 나는 그거 꽤 재밌게 봤거든.”

“그래?”

하긴 재밌게 봤지. 그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여주가 정말로 눈이 멀었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시각장애인 연기를 펼쳤어.”

최재환이 빗줄기를 보며 기억을 더듬는다.

어쩌면 저 비를 보면서 어느 결혼식 날, 어느 예쁜 신부를 떠올리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말이야. 친절한 이웃이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할뻔한 연기가 실제처럼 리얼했어··· 뭐, 그런 감독이 반추를 연출한다니까, 나는 내심 기대된다.”

최재환이 커피잔을 코앞에 들고 낮게 웃었다.

어찌 됐든 일이 잘 끝났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근데 남수혁 이 자식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랬지?”

이제 슬슬 일어날까 싶은데, 최재환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가?”

“어제 나한테 할 얘기가 있다고 하더라고. 얘기 들으려던 참에 너한테 전화가 와서 나중에 듣자고 했지.”

아 그거.

그 일 때문이었나. 계속 찝찝한 이유가.

“나한테 곡 준다는 얘기일 거야.”

“곡을 줘?”

놀랄 만도 하지.

나도 처음에 그 소리 듣고 귀를 후볐을 정도니까. 그놈이 미쳤나 싶어서.

“형한테 찾아갔을 줄은 몰랐네.”

바로 거절했더니 쉽게 미련을 떨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녀석도 악착같은 구석이 있다. 그래서 성격이 그 모양인지도.

“무슨 곡?”

대답 대신,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후의 빛깔.’

좋은 노래다. 그걸 남수혁이 만들었다는 것이 의외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형 혹시 말이야.”

게슴츠레하게 뜬 시선이 돌아본다.

“아니다.”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간이지만 최재환에게 녀석을 데려갈 생각이 없냐고 물을 뻔했다. 내가 미쳤지.

“뭐야.”

입술을 달싹이던 최재환이 한숨을 내쉰다. 우리는 지금 피곤하다.

**

“잘했어, 잘했어!”

조 부장의 계속된 칭찬에 오소리는 피곤함도 잊고 배시시 웃었다. 눈웃음까지 보이며 싱글벙글이다.

“부장님, 저 진짜 올해 운 좋은가 봐요.”

“에이. 운이 아니지. 니가 열심히 한 거지.”

드라마 ‘명이’뿐 아니라 ‘미스터 미스터리’까지 반응이 폭발적이다.

팬들 응원이야 당연하고, 기자들 인터뷰 요청 들어오는 것만 해도 작년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근데, 오디션은 어떻게 봤어? 준비한 것도 없었을 텐데.”

조 부장은 창가에 다가가 블라인드를 걷어내며 물었다.

건물 아래 블랙보이 팬들이 또 한 트럭 모여 있다.

그나마 이시현이 삼성동으로 갔기에 저 정도 규모다.

“그게 딱히 뭘 한 건 없었거든요.”

오소리는 제 입술을 매만지며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냥 한 바퀴 돌아보라고 해서 돌아봤고, 이것저것 물어보길래 대답한 게 전부예요.”

“뭘 물어봤어?”

조 부장은 오디션 상황을 계속 물어보며 오소리를 데리고 사무실을 나왔다. 같이 못 간 게 미안하기도 하고, 혹여나 잘못된 게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촬영하는 데 문제없겠냐고, 시현 오빠하고 같은 회사냐고, 시키는 거 모두 할 수 있냐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오소리는 낮은 신음과 함께 기억을 떠올렸다.

“시키는 거?”

조 부장이 미간을 찌푸리고 돌아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 웃어넘겼다.

“촬영준비, 그런 거겠죠 뭐.”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녹음실로 향했다.

얼마 전 배우 이미현이 낸 컴필레이션 앨범이 100만 장을 돌파했다. 그래서 지에스에서는 오소리를 중심으로 같은 기획을 준비 중이었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조심히 문을 열자, 덩치 좋은 한지웅 팀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팔짱을 켠 채로 녹음실 부스를 보고 있었다.

“남수혁 지금 뭐하는 거예요?”

녹음실에 발을 들인 조 부장이 그에게 속삭여 물었다. 유리벽 너머 부스 안에는 헤드셋을 쓴 남수혁이 인상을 가득 쓰고 악보에 뭔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들어봐.”

더 입을 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미 오소리는 입술을 매만지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럼 시작합니다.”

엔지니어의 신호가 떨어지자 남수혁이 입을 푸르르 떤다.

**

-미미 반응 진짜 좋은데요?

“미미요?”

-미스터 미스터리. 가끔 수포 카페 좀 들리고 그래요. 촌스럽기는.

최재환은 핀잔을 들으며 수화기를 귓가에 붙이고 앉았다. 책상 위에 늘어져 있는 서류들을 챙기며 성 팀장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KIS에서 16부작으로 정규편성할 건가 봐요. 시현 씨는 못하겠지만.

“그 정돈가?”

아침에 녹화된 걸 봤지만 그때는 비몽사몽이었다. 물론 첫 장면부터 너무 강렬해서 눈이 확 뜨이긴 했지만.

잠시 휴대폰을 가린 최재환은 소파를 향해 말했다.

“시현아, KIS에서 미스터 미스터리 정규편성한단다.”

비스듬히 소파에 기대 머리통만 보이던 이시현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카페도 난리고. 홈페이지도 난리고. 기자들도 난리고. 우리 지금 정신없어요. 홍보부는 더 그렇겠지만.

좋은 소식이 계속 들리자 최재환의 입가에 미소가 가라앉질 않는다. 그의 손이 책상 한편에 놓인 신문들로 향했다. 직원이 매일 아침 추려놓는 신문이다.

[꽃미남 살인자와 함께한 숨 막힌 1시간]

[너무 빨라 정신없었던 미스터 미스터리? 기억나는 건 이시현!]

[오소리와 이시현, 둘이 이렇게 잘 어울렸나?]

[살인자도 소화한 이시현, 이후 행보는···]

[이시현, 차기작 빨간불!]

“아, 맞다.”

신문을 들추던 최재환은 수화기를 바로잡고 말했다.

“이우정 기자, 제가 소스 잘못 줘서 오보냈거든요. 반추 성사된 거는 세러데이에서 정정할 수 있게 해주세요.”

-뭐··· 그래요. 그런데 그거 계약서 언제 찍기로 했어요?

“프로덕션 쪽에서 이번에는 우리 번거롭게 안 하고, 바로 내일 준비해서 온다고 하더라고요.”

-오, 웬일이래. 얘기가 진짜 잘됐나 봐요?

“뭐 그럭저럭.”

고개를 끄덕이던 최재환이 다시 수화기를 가리고 말했다.

“아 시현아, 저녁에 대표님하고 약속 있어.”

또다시 흔들흔들하는 손.

다시 두런두런 대화가 이어지는데, 사무실 문이 열렸다.

“팀장님, 제가 다시 전화할게요.”

최재환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남수혁을 바라봤다. 흔들리는 앞 머리카락 사이로 삐져나온 시선. 최근 자주 보는데도 여전히 헷갈린다.

저 녀석이 지금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

“여기 있었네요?”

소파에 마주 앉으면서 남수혁이 나를 쳐다보고 웃는다.

여기 있었냐는 말은, 나를 찾아다녔다는 얘기.

“앉아.”

최재환이 내 옆에 앉았다. 그제야 나도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 너 시현이한테 곡 준다고 그랬다며?”

“예.”

남수혁이 깍지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무슨 곡?”

“여기요.”

청남방 안에서 꺼내 든 건 공시디와 노트였다.

“이거야?”

최재환은 일어나 오디오 기기에 시디를 밀어 넣었다.

곧이어 스피커를 타고 전주가 흘러나왔다.

어쿠스틱 기타 선율에 귀가 흔들린다. 남수혁은 눈을 감은 채로 손가락을 움직여 보이지 않는 기타를 치고 있었다.

‘거의 완성 됐네.’

지금 시기 지에스는 오토튠을 쓰지 않았기에 음이 튀면 재녹음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이 녹음이 한 방에 끝나진 않았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만큼 깔끔했다.

내가 알려준 부분도 충분히 반영하고 있고.

샘플 클리어라도 요구해볼까 싶은 짓궂은 생각도 들지만, 피식 웃고 만다.

“이거 니가 만든 거야?”

최재환의 질문에 남수혁이 미소를 끄덕인다.

“너 혼자? 가사도?”

믿기지 않는지 다시 물어도 답은 같았다.

“흠.”

최재환은 팔짱을 켠 채로 남수혁을 바라봤다. 남수혁은 뭔가 다른 평가를 기대하는 눈치다.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길 바라는 건 아닐 테고.

나는 펼쳐져 있는 노트를 곁눈질했다.

가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귀로 듣는 것과 보는 건 또 차이가 있다.

그대의 곁을 따라가면 왠지 외롭지 않아서

늘어진 그림자가 닿을 때면 살짝 미소가 나와서

웅크려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가슴이 답답해서

너는 항상 오후의 햇살처럼 있어 줘

약속할게 비가 오지 않게 할게

그 어떤 누구 앞에서도 그 어떤 이유 앞에서도

1, 2절 반복 가사를 훑어보고 있는데, 최재환이 가사 한 토막을 손가락으로 집으며 말했다.

“이거··· 왠지 좀 느낌 이상하다.”

꺼림칙한 얼굴로 다시 가사를 살핀다.

“가사는 좋은데,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다고 할까.”

“찜찜하다고?”

나는 다시 노트를 바라봤다.

서정적인 가사인데, 여기에 뭐가 찜찜한 게 있을까.

30대의 최재환이 느끼는 찜찜함은 뭘까.

남수혁이 그런 의문을 가진 나를 입꼬리를 올리고 쳐다본다.

“역시, 팀장님은 다르네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 가사. 스토커의 시점이거든요.”

“뭐?”

최재환이 얼굴을 구긴다. 물론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보세요.”

이번에는 남수혁이 펜을 집더니 노트에 표시를 했다.

그저 가사 중간중간 빗금만 쳤을 뿐인데, 새삼 이렇게 보니 소름이 돋는다. 아니, 정확히는 눈앞의 놈한테 소름이 돋은 거다. 진짜 이 독특한 자식.

“너 무슨 생각으로 이런 가사를 썼냐?”

최재환이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영감을 얻었거든요. 잡지에서.”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좋은 성적표를 자랑하듯, 남수혁이 환히 웃고 말했다.

“잡지?”

“여배우가 스토킹 당해서 자살 시도했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여배우?”

최재환이 팔짱을 켠 채로 소파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Close your eyes란 영화 아세요?”

“뭐?”

순간 최재환의 팔짱이 풀어졌다.

“거기 나온 여배우가 스토킹 당해서 자살 시도했대요.”

꿀꺽.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가사를 다시 살폈다. 목 언저리에 느껴지는 불쾌감을 밀어내려고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읽어내려갔다.

그사이 남수혁은 흥이 나서 가사에 얽힌 이야기를 계속 떠들었다.

“근데 그 스토커가 감독이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대의 곁을 따라가면 / 왠지 외롭지 않아서 / 늘어진 그림자가 닿을 때면 / 살짝 미소가 나와서.

“눈을 멀게 하려고 이상한 약도 먹이고 그랬대요.”

웅크려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 왠지 가슴이 답답해서.

“그거 말고도 더한 짓도 했다는 것 같은데··· 성폭행 장면 말이에요. 여배우한테 얘기도 안 하고 촬영했다고 하더라고요. 강제로.”

너는 항상 오후의 햇살처럼 있어 줘 / 약속할게 비가 오지 않게 할게 / 그 어떤 누구 앞에서도 그 어떤 이유 앞에서도.

< 마음이 시키는 대로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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