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73화 (173/227)

< 마음이 시키는 대로 (6) >

‘후······.’

방 안을 살피며 최재환은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필드에 선 배우 못지않게 이 순간은 매니저도 긴장될 수밖에 없다. 일이 잘되면 누구보다 기뻐하지만, 안되면 곁에서 위로해주는 것 또한 매니저의 몫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마이클 본이구나.’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무릎이 해진 청바지를 입은 외국인은 한눈에 봐도 자유분방해 보였다. 딱히 어떤 사람인지 감은 오지 않지만, 꽤 까다로울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잘 끝나야 할 텐데.’

스태프들, 감독, 통역. 작년에 본 적 있는 외국인들도 눈에 띈다. 그나마 이시하라 유이가 있어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특이한 점은 각자 자유로운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건데··· 다리를 꼰 채로 벽에 기댄 이도 있고,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 턱을 괴고 이시현을 보는 사람, 심지어 감독은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

‘할리우드는 이런 식으로 오디션을 보나?’

경험한 적이 없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한데 생각해보면 놀라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 방 안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거니까. 그만큼 다들 표정만은 신중했고, 이시현을 향한 카메라 두 대에는 이미 짙은 빨간불이 대기 중이었다.

“준비하신 게 있나요?”

파란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 최재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후. 짧은 한숨과 함께 오디션이 끝나고 기분 좋게 웃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의자를 좀 더 끌어 앉았다. 그런데, 그 기대는 생각지 못한 순간에 어긋나 버렸다.

“저는 오디션을 보려고 온 게 아닙니다.”

**

“절 부른 이유가 다시 오디션을 보자는 건지는 몰랐습니다.”

“그럼 여기 왜 왔죠?”

감독이 침대를 누르고 있는 엉덩이를 들썩이고 물었다.

“이유를 알려주려고 부른지 알았습니다. 왜 반추 촬영이 늦어지는지, 김은재 역이 왜 공중에 떴는지. 아니면 지난번 카메라 테스트에 문제가 있었나요?”

“나는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페이 프로덕션도 동의했습니다.”

퉁명한 목소리가 내 말을 받아쳤다. 이런저런 불만도 섞인 것 같은데, 통역이 적당히 걸러내고 순화하는 게 분명하다. 암만 봐도 저 얼굴은 지금 욕을 한창 뱉는 표정이거든.

“그래서 오디션을 보지 않겠다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벽에 여길 온 이유가 단순히 그거 따지자고 온 걸로 비치면, 나란 놈의 그릇은 그것밖에 안 되는 거다.

“오디션을 보는 건 문제 없습니다. 저는 언제든 김은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쉴 때도, 내 앞에는 김은재가 살아 숨 쉬니까.

“그가 제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며 매일매일, 대사 한자한자 꾹꾹 눌러서 봤거든요.”

시나리오 속 인물은 평면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은 단어의 나열이니까. 그걸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나리오 밖에서 찾아내야 한다.

김은재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행복했던 적은 언제였지? 좋아했던 놀이나 취미는? 트라우마는? 그에게 유민서는 대체 어떤 존재지?

시나리오가 담지 못한 김은재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물어보고 또 물어보며 상상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당신이 걷어찼거든. 환장할 노릇이지. 그러니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기분이 어땠을까.

물론 이 안의 사람들에게 내 연기는 관심 거라고 아닐 거다. 작년에 카메라 테스트를 봤을 때도 그런 말을 했으니까.

내게서 성심그룹 김은재의 이미지를 찾으러 왔다고.

연기는 그다음이라고.

“만약 이번에 캐스팅이 확정된다면 준비과정과 촬영스케줄, 반추와 관련된 진행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또다시 제가 모르는 오디션이 진행된다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

방안에 정적이 흐른다. 감독이 불룩 나온 볼을 긁으며 나를 훑어봤다.

그 시선이 닿으니 왠지 등줄기가 뻐근하고 궁금하다.

갈색빛이 감도는 저 눈동자는 내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까.

이시하라 얘기로는 미스터 미스터리를 보고 나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던데, 감독이 본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가 머릿속에 그려둔 성심그룹 김은재와 흡사할까?

어차피 포기하기로 한 거 일단 주사위는 던졌는데, 단순히 던지기만 한 건 아니다.

지금 내 시선, 내 행동, 내 몸가짐은 이미 성심그룹 김은재니까.

“크랭크인 전까진, 그것이 뭐든, 변수가 생기는 곳이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립니다.”

촘촘히 박힌 콧수염을 긁으며 감독이 나를 가르치듯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계약서를 언급해볼까 하다가 관뒀다. 의미가 없는 일이다.

또다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지금 내 눈앞에는 많은 것들이 스쳐 가고 있다.

냅킨 계약서를 들고 기뻐하던 최재환의 모습도.

가경 작가를 만나러 일본에 갔던 순간도.

가부키 거리의 사람들 앞에서 집중했던 순간도···

어찌 됐든 결론을 내리기까지 감독이 고려할 건 딱 하나.

그런 귀찮은 짓을 할 만큼 내가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 그 하나.

**

“무슨 일일까?”

여직원은 쪽머리를 흔들대며 중얼거렸다. 새벽 시간, 이시현이 호텔에 왔다. 만나러 온 상대는 호텔에 투숙한 페이 프로덕션 사람들.

“뭘 그렇게 고민을 해?”

그녀의 찌푸린 이마를 보다 못한 프런트 매니저가 넌지시 물었다.

“이상하잖아요. 이 새벽에 여길? 매니저님, 무슨 일일까요?”

“뭐긴. 오디션 보러왔겠지.”

“아. 그러네.”

여태까지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여직원은 싱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서준도 왔었구나. 무슨 영화지.”

이번에는 어떤 영화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이어졌다.

“매니저님, 마이클 본 감독이 누군지 아세요?”

“Close your eyes 몰라?”

조용조용하던 매니저의 입에서 순간 낭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얼굴빛도 달라졌다.

“Close your eyes? 들어는 본 것 같은데.”

“안 봤으면 꼭 한번 봐. 난 극장에서 다섯 번도 넘게 봤어. 그때마다 엉엉 울었고.”

“에? 정말요?”

늘 차분하고 올곧은 매니저가 영화를 보고 눈물범벅이 됐다는 얘기. 여직원이 믿지 못하게는 듯 뱁새눈을 흘겼다.

“진짜거든?”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들고, 매니저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눈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근데, 그 여배우 아마 자살시도를 했다지?”

“진짜요?”

“응. 잡지에서 본 것 같아.”

여직원이 놀라서 눈썹을 들썩이는데, 마침 로비에 눈에 익은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정신없이 또각 소리를 울리며 다가와 프런트에 손을 올렸다.

“여기, 마이클 본 감독님이 체크인했다고 하던데.”

도톰한 입술이 숨을 크게 몰아쉬며 물었다.

크고 투명한 눈동자는 꽤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

“아주 사람 놀라게 하려고 작정을 했지?”

방을 나오자마자 최재환이 주먹질부터 시작했다.

빈 주먹이지만 어깨를 몇 대 두드려 맞으니까 제법 맵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이시하라의 얼굴은 착잡함에 물들어갔다. 사실 다른 건 걱정 없는데 이 자리를 주선한 그녀가 곤란해질까 봐 걱정이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놀랐죠?”

“아니요. 솔직히 저는 조금 통쾌한걸요.”

얘기와 달리 그녀의 미소가 밝지가 않다.

“가경 작가님뿐 아니라, 캐스팅됐던 모든 배우가 통보 없이 빠졌어요.”

그 정도로 감독의 권한이 막강하다는 얘기인듯했다.

이상하다. 가경 작가 때는 작가가 그 정도 권한이 있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감독이라니.

할리우드에 대해 아는 건 크게 없지만, 그래도 감독보다는 제작사의 입김이 더 큰 거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파이널 컷 같은 경우도 제작사의 입맛대로 바뀌는 편이고.

“그럼, 다시 오디션을 거쳐서 캐스팅되는 건가요?”

얘기를 듣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다.

“예.”

“그럼 유민서 역은요?”

“그 역도 다시 오디션을 거치겠죠. 처음 캐스팅됐던 배우는 다른 영화에 들어간 것 같으니까.”

일본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재일교포 3세 조은설.

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오소리를 떠올렸다. 그녀도 반추를 원했으니까. 만약 오디션 기회가 그녀한테도 간다면. 물론 이런 기회가 쉽게 올 리는 없지만.

“오소리가 여기 있으면 좋을 텐데.”

내 혼잣말에 최재환이 문득 검지를 내밀었다. 왜 손가락을 내미나 싶어 봤는데.

“저기 있는데?”

고개를 돌렸더니, 엘리베이터에서 오소리가 내리고 있었다.

째깍째깍

차 대표가 재계약 기념으로 선물해준 시계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최재환과 나는 창이 있는 복도 귀퉁이에서 기다렸다.

오소리가 방에서 나오기를. 내 요구에 대한 감독의 결정이 끝나기를.

“설마 되려나.”

최재환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오소리가 여기서 역을 따내면 그거야말로 홈런이니까.

그런데 안되라는 법은 또 없는 거다. 그녀는 이 새벽에 여기까지 달려왔고, 일단 감독이 오소리를 돌려보내지 않았으니 가능성은 생겼다.

한데 약속 없이 찾아온 그녀에게 감독이 기회를 줬다는 건, 의외로 까다롭지 않은 타입인가? 오소리는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별의별 생각들이 이어지는데, 최재환이 툭 말했다.

“너 영어 공부 좀 해야겠더라.”

하긴 통역을 거치니 대화가 뚝뚝 끊겼다.

생각해보면 이것저것 할 게 많지. 영어도 배워야 하고, 음악도 꾸준히 배워야 한다. 지금까지는 이시현의 외모로 덕을 봤다면, 이제는 내 스스로 해야 할 것들이다.

“시현아.”

녀석이 고개를 학처럼 빼 들고 나를 쳐다본다.

“왜?”

“너 지난번에 부장님이 스캔들 얘기한 거, 어떻게 생각하냐?”

얼마 전 국밥집에서 조 부장이 스캔들 어쩌고 했던 일.

“글쎄.”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을 살폈다.

전혀 생각이 없었는데, 지난번 촬영장에서 오소리를 두고 처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손이 살짝 닿았을 뿐인데··· 극 중 한성수의 감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여운이 여전히 남아 있단 말이지.

“그거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쓰면, 또 신경 쓴 만큼 사람 마음이 움직여요.”

그 말대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

달칵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마침내 오소리가 나왔다.

힘없이 문을 닫더니,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고개를 푹 숙인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기적이 오지 않은 모양이다.

“괜찮아?”

최재환이 눈치를 살피며 묻자, 오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불에 눈물 자국이라도 새겨졌을지 알았는데 멀쩡한 얼굴이다.

“나중에, 또 좋은 기회가 있겠지.”

굵은 손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위로하는데, 그녀가 최재환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뭐야. 정말 기적이 찾아왔단 말인가.

한참 만에야 최재환의 목에서 떨어지고 그녀가 말했다.

“들어오래요.”

**

동경.

다수의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마이클에게는 그것이 아름다움이란 형체다.

그래서 감독이 됐다. 살아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제 뜻대로 움직여 더 아름답게 화면에 담아낼 수 있으니까.

이미 이시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부터, 정확히는 TV 화면에 비친 그 얼굴을 본 순간이었다.

마이클의 머릿속에 있던 성심그룹 김은재는 이시현으로 대체됐다.

회의실에 앉아 있는 이시현.

유민서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는 이시현.

눈 내리는 하늘을 응시하는 이시현.

군중의 시선 속에서 로비 한가운데를 당당히 가로지르는 이시현.

매시간, 모든 순간이 이시현으로 꽉꽉 채워졌다.

하지만 더 흥미를 돋는 건, 과연 저 배우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하는 거다. 극한까지, 아주 괴롭히고, 또 괴롭혀서, 구역질을 쏟을 정도로 몰아세우면.

그래서 저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변할 때까지.

“일단, 프로덕션에 얘기는 전하지.”

마이클은 침대에서 일어나 어울리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잠시 뒤, 통역을 전해 들은 이시현이 한숨을 깊이 내쉰다. 그러더니 자세를 바로 했다. 안에 있는 김은재를 끌어내려는 듯 보였다.

“잠깐.”

마이클은 손을 흔들었다.

그는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놓인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힘든 시절 배고픔도 잊고 이 낡은 가방 하나 어깨에 메고 LA 거리를 온종일 뛰어다녔다.

카페에서, 거리에서, 혹은 친구 집 주차장에서 타이핑한 시나리오들이 이 가방 안에서 구겨진 채로 담겨 있다가 제작사에 내밀어 지곤 했다.

바로 오늘 같은 순간을 위해서.

저 아름다운 것을 탐할 기회를 잡기 위해서.

“오디션은 됐어. 문이 열렸을 때부터, 이미 김은재 역은 당신 거였으니까.”

그 말 뒤에 그는 가방에서 꺼낸 시나리오를 건넸다.

[반추(反芻)]

각색까지 완료된 최종 탈고본.

넋 놓고 시나리오를 쓰다듬는 이시현에게 마이클이 손을 내밀었다. 씨익. 미소와 함께.

“Welcome to Hollywood.”

< 마음이 시키는 대로 (6)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