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72화 (172/227)

< 마음이 시키는 대로 (5) >

“이시현이라고요. 저 배우가.”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을 들고, 마이클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이트, 사무실, 한척한 창고, 바닥에 고인 피와 사체···

이시현의 얼굴이 한 점 바람 소리와 함께 또다시 화면을 채우자 마이클의 목젖이 크게 요동쳤다.

꿀꺽.

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드라마가 끝나고 자동차 광고가 이어졌다.

파도가 흩어진 해안도로를 달리는 세단, 차창이 열리고 이시현이 팔꿈치를 기댄다. 섬섬옥수 못지않은 고운 손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훑고. 살짝 다문 입술 틈에선 잔잔한 허밍이 흘렀다.

“마이클.”

마침 방문이 열리고 파란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배우 도착했습니다.”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간이지만 카메라 테스트를 받기 위해 배우가 찾아왔다. 시차 문제보다는 보안을 고려해 일정을 잡은 탓이다.

하지만 마이클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에 깔린 카펫만 들여다봤다.

‘이게 대체······.’

이시현이라는 배우에게 감정이 있던 건 아니었다.

가경 작가에게 불만이 있던 것도 아니며, 그저 원점에서 생각해보려던 것뿐이었는데.

겨우 일어나 한발 뗐지만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그를 멈춰 세웠다. 한 시간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자신감들이 눈에 서려 있다. 무언의 속삭임이 말하고 있었다.

실수를, 인정하라고.

**

“그러다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니까.”

오소리는 피식 웃으며 아몬드 하나를 손에 집었다.

겨우 와인 한잔에 얼굴이 붉게 변한 고우희는 살짝 감긴 눈을 들고 계속 말했다.

“내가 장담하는데, 시현 오빠 노리는 사람들 엄청 많을 걸?”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오소리는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아마 틀린 얘기는 아닐 거다. 평소 회사 내 소식을 귀띔해주는 오명숙 얘기로는 3W 슬기도, 현승아도 이시현을 내심 마음에 뒀다는 것 같으니까. 그리고 아까 그 여자도.

‘이시하라 유이.’

심지어 이시현과 키스 씬도 찍었지 아마.

‘사람이 미소가 너무 헤프다니까.’

얼굴값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데.

“그러니까, 그 전에 고백해야 한다니까. 그리고 그런 타입이 의외로 쉽게 넘어와.”

오소리는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며 귀여운 충고를 새겨들었다.

“언니.”

고우희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본다.

‘미스터 미스터리’ 첫 방 기념으로 밥을 사준다고 해서 왔더니만. 되려 스무 살이 된 기념으로 와인을 사달라고 해서 사준 게 화근이었다.

“Close your eyes란 영화 알아? 뇌종양 수술을 받은 여자가 시력을 잃었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눈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대신, 이제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행복합니다.”

그녀가 포스터 속 문구를 떠올리자 달싹거리던 고우희의 입술이 멈췄다.

“알지 그 영화.”

보이는 것이 당연하던 일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하루만, 한 시간만, 딱 10분만.

그렇게만 되면 가족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고, 하늘을 보고, 내 얼굴을 보고··· 사랑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그 잠깐을 간절히 원한 여자.

“영원히 오지 않을 기적을 기다리는 동안 여자는 보이지 않는 삶에 적응해 가잖아. 그런데 어느 날 기적이 찾아오고.”

입안에서 산산이 부서진 아몬드를 씹으며 오소리는 영화의 여운을 되새겼다.

종양이 재발한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여자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또다시 위험한 수술을 받고 시력을 잃을지, 아니면 죽음을 기다리며 세상을 실컷 볼지.

“그 영화 엔딩 기억해?”

고우희의 고개가 삐딱해졌는데,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있다.

오소리는 엔딩크레딧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봤던 순간을 떠올리며 와인잔을 흔들었다.

“알지. 근데 이 얘기는 왜 하는 거야?”

“언니는 만약에 앞이 안 보인다면, 누가 제일 보고 싶어?”

“에이. 나 그 정도는 아니야.”

이제야 영화 얘기가 나온 이유를 깨달은 오소리는 손사래부터 쳤다.

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과 비슷했던 순간은 있었다.

영화 속에서는 여주가 공원에서 음악을 들으려다가 이어폰을 떨어트리는 장면이 있다. 그걸 남주가 주워서 그녀의 귀에 꽂아준다.

그 장면처럼 촬영을 앞두고 감정이 살지 않아 답답했던 순간,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나 귓가에 이어폰을 꽂아주었던 이시현.

“그 영화 처음에는 20분짜리 단편이었대. 그런데 선댄스 영화제 입상 후에 제대로 투자를 받아서 완성했고, 한마디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거지.”

오늘 만남의 반은 영화 얘기, 반은 이시현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배우란 사람들이 이렇다. 그래도 이제 그만했으면 싶은데, 고우희는 와인을 홀짝거리며 좀처럼 작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이번에 그 영화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하는 거 알아? 우리 SN에서 투자하거든. 그래서 원작 감독 차기작에 우리 회사 서준 오빠가 오늘 카메라 테스트받아. 기브앤테이크!”

“오늘?”

“응. 지금쯤.”

“지금?”

아몬드를 오도독 씹던 오소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새벽에 무슨 카메라 테스트를 한다고.

“시차 때문이겠지. 감독이 되게 까다롭나 봐. 약간 사이코 같다던데?”

“차기작이 뭔데?”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하고, 오소리는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 싶어 손을 탁탁 털었다. 하지만 고우희의 대답에 그녀의 행동이 멈췄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그랬어?”

놀라서 재차 물었다. 분명 들었는데, 믿기지 않아서.

“반추라고 했지 아마.”

**

「새벽 1시 30분」

호텔 로비는 프런트를 지키는 직원들 외에는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하.”

여직원이 작은 입을 가리고 늘어진 하품을 쏟았다. 간간이 밖을 오가는 손님이 있기는 해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지금의 적막이 깨지는 일은 없을 것 같은 밤.

“매니저님.”

“왜.”

쪽머리를 톡톡 만지던 프런트 매니저가 고개를 돌렸다.

“이시현 좋아하세요?”

“이시현?”

매니저는 얇게 그린 눈썹을 살짝 올렸다.

“오늘 미스터 미스터리 첫 방 했거든요.”

“그건 또 뭐야?”

“이시현 드라마요.”

싱거운 얘기에 매니저는 피식 웃고 물었다.

“넌 나이가 몇인데 연예인 타령이니?”

“에이. 이시현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라니까요. 가족이에요.”

“가족?”

“이시현은요, 항상 팬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거든요. 이벤트만 봐도 그래요. 바쁜데도 팬들을 직접 찾아가는 게릴라 이벤트도 하거든요. 가정 형편이 어려운 팬한테는 장학금도 주고. 또 그걸 숨겨.”

여직원은 조곤조곤 이유를 설명했다.

“다들 그러지 않나?”

“어휴, 안 그런 연예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그리고요, 얼마나 잘생겼는데요. 가까이서 보면 숨도 못 쉬어요.”

이시현 얘기를 하는 여직원의 얼굴이 환하다. 잠이 달아난 모양이었다.

“아까 본 서준은 잽도 안 돼요.”

30분 전에 배우 서준이 호텔에 왔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서준 잘생겼던데?”

이번에는 매니저도 흥미를 보였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여자처럼 선이 얇았던 그 얼굴이 잽도 안 된다니.

“고건, 매니저님이 이시현을 못 봐서 그렇다니까요.”

안티들도 이시현을 실제로 보고는 팬클럽에 가입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까. 심지어 그 전설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매니저님, 나중에 이시현 콘서트에 같이 가요. 지금 팬들이 콘서트 하자고 회사에 청원 넣고 있거든요. 매니저님?”

콘서트 생각에 들떠있던 여직원은 넋 나간 매니저의 옆모습에 문득 앞을 돌아봤다.

“안녕하세요.”

꽃미남 살인자, 아니··· 이시현.

“이곳에 마이클 본 감독님하고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분들이 체크인했다고 하던데.”

대답은 없고. 프런트 여직원들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저기요?”

프런트를 톡톡 두드리며 그녀들을 부르자, 유난히 눈을 빛내던 여직원이 그제야 되물었다.

“저기, 이거 혹시 게릴라 이벤트?”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나는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댔다.

아. 등 따갑다. 프런트 직원의 시선이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한 명은 수포 회원 같던데, 아마 좀 있으면 카페에 내 소식이 올라갈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게릴라 이벤트 3탄을 할 날도 멀지 않았네.

띵.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에 프런트 직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제는 나갈 때가 걱정이지만.

마이클 본··· 마이클 본···

올라가는 동안 감독에 대해 생각했다.

이름이야 들어봤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일도 없었고. 또 할리우드 영화감독을 내가 어떻게 알아.

소득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더니, 파란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눈에 띈다. 설마 여기 층을 전부 빌린 건가 싶은데, 나를 본 여자가 노란 눈썹을 쫑긋 올렸다.

“이시현 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먼저 온 손님이 있어서.”

여기는 새벽 시간이라는 게 의미가 없는 모양이다.

하. 벽에 기댔더니 살짝 졸음이 쏟아진다. 괜히 왔나 싶어 후회될 때쯤 문이 열렸다. 몇 시간 전에 봤던 밝은 미소가 내게 다가왔다.

“미안해요. 지금 시각에 오라고 해서.”

“이시하라 상이야말로 나 때문에 쉬지도 않고 있는 거잖아요.”

“좋은 배우와 호흡을 맞추고 싶은 건 연기자의 당연한 욕심이니까요.”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욕심대로 될까.

“마이클 본 감독은 까다롭기는 해도 소신이 있는···.”

“괜찮아요. 그런 얘기 안 해줘도.”

무언가를 미리 알고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온 건 부탁을 하려고 온 게 아니다.

“시현아.”

나를 부른 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엘리베이터에서 최재환이 내렸다. 청재킷을 펄럭이며, 상기된 얼굴로 마치 경보라도 하듯 잰걸음으로 다가온다.

“야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전화 와서는······.”

오자마자 질문이다. 최재환은 찌푸린 이마에 구부러진 앞머리를 달고 이시하라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녀가 방으로 다시 들어가자, 이번에는 내 옆구리를 사정없이 찌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감독이 내 얼굴 한번 보자고 했나 봐.”

그 말을 하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왠지, 우리 대표님하고 재계약할 때 생각난다. 호프집에서 재계약을 하네 마네 얘기했었는데.”

“그거랑 이거랑 같냐.”

최재환이 나처럼 복도에 등을 기대며 속삭인다. 녀석도 피곤한지 나른한 한숨도 더해졌다.

“근데 너 차 끌고 왔어?”

“응.”

차 대표가 준 외제차 뒀다 뭐하겠어. 태울 여자도 없는데 이럴 때나 써먹어야지.

“대표님은 뭐래?”

“뭐라긴. 니가 갑자기 반추 안 하겠다고 하니까 비상이지. 사실 나도 깜짝 놀랐어. 내가 지른 것 때문에 그런가 싶어서 말이야.”

아마 지금 차 대표 머리가 꽤 복잡할 거다. 최재환도 나간다는 마당에 나까지 통제가 안 될 기미가 보이면 머리 좀 지끈거릴 거다.

“뭐 여기서 반전이 있으면 그냥 가는 거고.”

“반전이라.”

이게 반전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외국인 감독의 눈에 내 모습이 좋게 비칠지도 확신할 수 없고.

이런저런 생각 속에 다시 문이 열렸는데, 예상치 못한 얼굴들이 나왔다.

“사장님?”

놀란 최재환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SN의 고수만 사장이었다. 이 양반 오랜만이네. 어라 배우 서준까지.

“너희들 뭐야?”

“마이클 본, 감독님 뵈러 왔는데요.”

최재환의 대답에 고수만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는 잠시 우리 둘을 보더니 서준을 향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자. 이거 글렀다.”

이 사람이 마이클 본.

외모를 평가하긴 그렇지만 꽤 자유로운 남자라는 걸 알 것 같다.

다만 저 수염 좀 깎아주고 싶은 충동이 치솟는다.

근데 뭐. 가경 작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거라는 이시하라 얘기만 듣고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귀엽게 생겼다. 부리부리한 시선도 마음에 들고. 펑퍼짐한 얼굴도 마음에 들고.

“준비하신 게 있나요?”

블라우스 여자가 다정하게 나를 보며 물었다.

다들 그렇게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그동안 준비했던 성심그룹 회장 김은재를 어떤 식으로 완성했을지.

하지만 나는 오늘 그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전혀 없다.

“저는 오디션을 보려고 온 게 아닙니다.”

< 마음이 시키는 대로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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