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71화 (171/227)

< 마음이 시키는 대로 (4) >

아침까진 화창했는데 지금 내 앞에는 비가 내린다.

테라스 난간을 벗어난 빗방울들이 배수로에 모여 졸졸 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비가 데려온 선선한 바람이 내 얼굴을 스쳐간다.

“비가 오니까 조금 쌀쌀하네.”

눈을 떠보니 최재환이 커피를 가져왔다. 그는 비를 보며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4월이니까.”

비 탓인지 코끝에 닿는 커피 향이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

“드라마 봤어?”

“성 팀장님이 녹화한 거 보여주셨어.”

드라마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얘기는 이미 휴대폰을 가득 채운 문자로 충분하니까.

첫 방이 끝나고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문자가 쏟아졌다.

근데 생각보다 강 피디가 화면을 잘 잡아냈단 말이지.

예술 한번 해본다더니만, 대본이 전체적으로 우울해서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 기우였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거.

“나 진짜 잘생겼더라.”

“허.”

최재환이 헛바람을 뿜더니 미소를 내젓고 말했다.

“강 피디 어제 송출부 부장한테 욕 좀 먹었다더라.”

“왜?”

“편집을 하다하다가 방송 직전에 테입 한 토막 넘기고, 중간에 또 한 토막 넘겼다는 거야.”

“진짜?”

두 번째 토막을 못 넘겼으면 방송 사고로 이어졌을 거다.

“방송을 안 봤으면 뭘 그렇게 욕심을 냈냐고 했겠는데, 어제 보니까 그럴만 했더라. 근데 웃긴 건, 그렇게 욕먹고 국장님한테는 칭찬받았대.”

웃으며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최재환은 젖은 입술을 핥았다. 나른한 한숨소리가 빗소리를 잠시 밀어냈다.

“시현아.”

최재환이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저 느끼한 시선을 보니 또 무슨 얘기를 그럴싸하게 하려는 모양이다.

“잘했다.”

“뭘 잘해 아직 촬영 남았는데.”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형도 그동안 수고 많았어.”

여전히 따뜻한 커피 잔처럼, 우리 사이도 아직은 따뜻한 듯하다.

“섭섭했지?”

최재환은 괜스레 커피 잔을 매만졌다.

“너한테 미리 얘기 안 했던 거, 지금 생각하니까 니가 섭섭할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

섭섭했었나.

꽤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고 생각하는데.

“오그라드는 얘기는 그만하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나가서 회사를 차리는 건 차려도 배우가 있어야지. 데리고 나가는 연습생이라도 있어?”

“일단 윤 부장님, 아니 윤 사장님이랑 합치기로 했어.”

나는 입에 대려던 커피를 다시 내려놓았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민데, 왠지 물어도 의미 없을 것 같아서 더 묻지 않았다. 그러자 최재환이 체증이라도 가라앉은 듯 시원한 얼굴로 말했다.

“반추 잘 찍어라.”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반추를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밤사이 상황이 달라졌다.

“나올 때 보니까, 오소리가 진짜 좋아하더라.”

“그래?”

“그럼. 무척하고 싶어 했잖아··· 반추.”

커피를 머금은 최재환 입술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진다.

어쩌면 저 미소를 한동안 못 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눈에 담으며 나는 어젯밤 그 격정의 시간을 떠올렸다.

**

텅 빈 사무실은 최재환과 강 실장이 앉아 있는 공간만 전등 빛이 밝히고 있었다.

재깍재깍.

시계바늘 돌아가는 소리도 지겨워질 즘, 강 실장이 담뱃갑을 꺼내들며 최재환을 흘깃 쳐다봤다.

“찝찝한 건 빨리 발 빼는 게 정상인 거지. 시현이가 잘 결정한 거야.”

그렇게 말해도 최재환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오늘 첫 방도 벌써부터 난린데. 오죽하면 KIS에서 새벽에 재방송 편성 넣었다더라.”

강 실장이 휴대폰을 꺼내보였다.

“봐봐.”

사방에서 문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금 순간도 휴대폰이 울릴 정도로.

“그냥. 왠지 찜찜해서.”

“찜찜하긴. 너 회사 관두는 거 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

핀잔을 뱉고 강 실장이 일어났다. 목을 길게 빼고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근데 얘기는 언제 끝나는 거야. 하. 담배 한 대 피러가자.”

“난 됐어.”

지친 걸음을 들고 강 실장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최재환은 기지개를 펴며 벽에 걸린 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막 자정을 넘겼다.

“시현이 이놈은 마음 확실히 정한건가.”

안 하겠다고는 했는데.

그게 그냥 하는 말인지, 진심인지는 애매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페이 프로덕션에 끌려온 건 사실이다. 아는 건 없고 마냥 기다려야만 했다. 그 사이 이시현의 상황은 작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건만.

사실 반추만 포기하면 선택의 폭은 넓어진다.

미스터 미스터리가 끝나면 잡힌 스케줄도 없는 상황이니까.

예능을 할 수도 있고, 음반활동을 다시 할 수도 있다.

콘서트나 팬들을 만나는 일도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최재환은 이시현이 반추를 했으면 싶었다.

캐스팅 비디오에서 녀석은 그런 말을 했었다.

‘그 막 영화관에 보면 외국 배우들 멋있잖아요? 저도 누군가가 저를 보면, 그게 또 외국인 관객이면··· 저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됐으면 합니다.’

반추가 엎어지면, 앞으로 이시현이 언제 또 할리우드 자본이 들어간 영화에 출연할 수 있을까? 그것도 주연으로?

동양인이 할리우드에서 주연으로 데뷔한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

‘그래, 불가능한 일이지.’

아주 잠깐 이시현의 꿈에 근접한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마침 조 부장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파에 등을 묻는 그를 보며 최재환이 자세를 바로 하는데, 강 실장이 뒤이어 쫓아 들어왔다.

“얼마 전에 페이 프로덕션 경영진이 물갈이 된 모양이야. 그래서 가경 작가가 밀려나고 그 와중에 반추도 칼질이 된 거지.”

조 부장이 알아본 내용을 하나둘 꺼내 놨다.

“근데 그건 뭐 그쪽 내부 사정이고, 이번 오디션은 감독이 주도한 거야. 반추를 원점부터 다시 준비를 하겠다고.”

“감독이 누군데요?”

입가심을 하려 껌을 입에 문 강 실장이 물었다.

“그게······.”

조 부장이 얘기를 망설인다.

이마를 긁적거리더니, 소파에서 등을 떼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대체 누구기에 저러나 싶어서 다들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마이클 본.”

**

160센티미터의 단신, 넙대대한 턱과 큰 코, 흐지부지한 갈색 눈에 딱 어울리는 곱슬머리까지.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모두에게 외면 받으며 자랐다.

한심한 외모와, 그 외모가 만들어낸 자괴감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일에 소극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비호감을 부르는 외모 덕에 불리한 위치에 서는 편이었다.

그랬기에 주변이 늘 멸시와 차별의 시선으로 북적거렸다.

어찌됐든 그렇게 성장했지만, 이제 그는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삶이었다.

[마이클 본 감독, 페이 프로덕션과 3년 계약 체결」

손에 든 가십지에는 그가 바에서 늘씬한 여자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어떤 이는 엘프와 드워프같은, 판타지의 한 장면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큼!”

맥주와 담배 때문일까.

그는 목에서 끓는 가래를 뱉을까 말까 하다가 꿀꺽 삼켰다.

목을 타고 울렁거리는 것을 뱃속에 밀어 넣으니까 마치 ‘반추’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느낌이다.

그가 페이 프로덕션의 오퍼를 받았을 때, 동양인을 주연으로 둔 각본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하나였다.

엉망이라는 거.

그런데 한 장 한 장, 그리고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그는 반추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매력적이니까. 환상적이니까. 아름다우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랬기에 그는 반추에서 작가를 배제하는 초강수를 뒀다.

작가는 기괴할 정도로 이상한 사람이지만 분명히 천재다.

하지만 그건 종이를 앞에 두고 펜을 끼적일 때뿐, 영상이 만들어내는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정도로 감각적인 남자는 아니었다.

배우들도 무명의 배우들로만 채워놨을 정도니 말이다.

‘가경 작가를 반추에서 빼야겠습니다.’

어차피 페이 프로덕션에서 판권을 소유하고 있으니 각색의 권한도 감독이 가져오는데 문제가 없을 터.

그리고 오디션.

아예 처음부터 가경 작가가 캐스팅했던 배우들의 프로필은 보지 않았다. 편견이 생길수도 있으니까.

원점에서 시작하건만, 그 원점에서 발이 걸릴 일은 없어야 했다.

“마이클.”

누군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그는 가십지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고, 테이블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남자배우들의 사진과 프로필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좀 더 치켜들었더니 언제 들어왔는지 이시하라 유이가 서 있었다.

“저 여자가 여긴 왜 있는 거지?”

모든 걸 원점에 뒀지만 그는 이시하라 유이의 캐스팅을 유지했다. 그녀의 회사에서 발 빠르게 움직인 결과였다.

물론 그 외는 모두 원점.

“이시현에 대해서 재고해 달라고 합니다.”

“또 그 얘기네.”

마이클의 둥근 볼이 찌푸려졌다. 그러자 그녀의 말을 통역한 곱슬머리 남자가 조심스럽게 살을 덧붙였다.

“사실 저도 이시현의 연기가 좋습니다. 815특집드라마에서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을 제대로 보여줬어요. 그리고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우리 오빠는 시청률 50프로를 넘겼습니다.”

그래봤자 그거 하나.

“알았다고 전해줘. 나중에, 이번 오디션이 끝나면 그때 가서 그의 오디션을 다시 볼 테니까.”

다들 뭐가 이리들 급한 건지.

“이시현 측에서는 오디션을 거부하고 반추 출연도 재고하겠다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서울에서 오디션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남자의 표정은 신중했다. 비록 곱슬머리지만.

“저쪽에서 오디션을 거절하면 우리도 방법이 없지. 톱니바퀴처럼 물리고 물리는 상황에서 날이 하나 나가면 톱니를 갈아야 하는 법이니까.”

마이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툭 던져 얘기했다.

그리고 페이 프로덕션은 ‘이시현’이라는 배우와의 계약에서 손해 볼 짓은 하지 않았다. 법적인 문제는 크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배우란 인종은 널리고 널렸다.

당장 여기 놓인 배우들 사진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심지어 SN이라는 회사에서는 투자까지 제안하며 자신들의 배우를 써달라고 부탁해오는 상황인데, 뭐가 아쉬워서 무명의 배우를 쓴단 말인가.

고개를 가로젓고 일어난 마이클은 눈앞의 요정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나는 이 시나리오를 존경해. 그렇기에 완벽한 성심그룹 김은재를 찾으려는 거고. 당신의 우려는 잘 알지만, 지금은 기다려야만 할 거야.”

그 말을 하고 힐끗 곱슬머리 남자를 돌아봤다. 그럴싸하게 통역을 해달라는 시선이었다. 악역을 대충 떠넘긴 마이클은 주변을 돌아봤다.

작은 냉장고 옆에, 역시 작은 침대가 보인다.

“그나마 TV는 크네.”

구시렁대며 침대에 엉덩이를 걸터앉은 그는 한 손에는 맥주병, 한 손에는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버튼을 누른 순간.

TV화면에는 난데없이 한 남자의 클로즈업된 얼굴이 비쳤다.

화면을 꽉 채운 하얀 얼굴을 마주한 순간, 마이클은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드는 눈빛과 외모였다.

보고 있으니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비실비실 흘러내렸다.

“저 배우··· 누구지? 저 배우 누군지 아는 사람 없어?”

하지만 다들 그를 멍하니 볼뿐 누구하나 대꾸하지 않았다.

“저 사람에 대해 알아봐. 오디션을 꼭 봐야겠어. 다들 뭐해?”

재차 말하자 이시하라 유이가 한발 다가왔다. 그러더니 같은 얘기를 재차 꺼냈다.

“이시현······.”

“하. 그 배우는 나중에······.”

“이시현이라고요. 저 배우가.”

놀라서, 너무 놀라서 마이클은 TV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봤다.

< 마음이 시키는 대로 (4)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