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시키는 대로 (3) >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이시하라 유이의 모습은 하얀 이마를 드러낸 그녀가 시원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그게 작년 8월이니까,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구나 싶다.
지금은 올림머리가 단발머리로 변한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여자는 그것만도 엄청난 변화긴 해도, 그때나 지금이나 예쁜 얼굴이 어디로 달아나는 건 아니니까.
[그럼 또 봐요.]
달빛을 등진 이시하라 유이가 매니저와 함께 어둠 속으로 길을 떠났다.
하늘하늘한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날벌레 공격에 부지런히 손을 휘젓고 있던 유 작가가 물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
“반추요.”
이것저것 소소한 얘기를 나누기는 했어도 중요한 건 반추였다. 이시하라 유이도 비공개 오디션을 통해 반추에 캐스팅된 상황이니까. 재일교포 권수경 역이던가.
“벌써 10시네요.”
현장 철수에 박차를 가하는 스태프들을 보며 속삭였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게 다반사인 밤 촬영인데, 오늘은 이른 시간에 촬영을 접은 편이다. 그래서 스태프들과 맥주나 마시며 첫 방을 자축하려고 놀러 왔는데··· 얘기가 조금 길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소리는 차 안에 들어가 있고, 조 부장과 강 실장은 담배 연기에 찌들어 있었다.
그들에게 눈을 떼고 물었다.
“작가님은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김 작가가 이시하라 유이 캐스팅할 때, 나도 오디션에 참여했거든. 그때 인연.”
유 작가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빙긋 웃는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하고, 동그란 눈에 나를 비추고 말했다.
“근데 유이가 시현 씨 칭찬 엄청하더라.”
“그래요?”
“촬영 때 그렇게 배려를 많이 해줬다며? 통역도 자처하고.”
“연인이었잖아요.”
새삼 그 얘길 꺼내니까 그녀와의 키스 씬이며, 그녀를 등에 업고 논두렁 길을 걷던 기억이 떠오른다.
연기였을 뿐인데도 마치 추억처럼 되새겨진다.
정작 함께 촬영 할 때는 서로가 많은 얘기를 하지 못했었는데. 나는 나대로 정신없었고, 그녀는 한국이라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서로가 말을 아꼈었다.
“유이 예쁘지. 둘이 제법 잘··· 아.”
“잘 뭐요?”
“아, 아니야.”
유 작가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고 오소리의 차를 힐끗 보며 다시 묻는다.
“반추, 무슨 얘기한 거야?”
“반추팀이 서울에서 오디션을 하려나 봐요.”
이시하라 유이도 그 오디션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고 했다.
젠장. 이거 최재환이 얘기한 것보다 상황이 나쁘다.
정확히 어떤 역의 오디션인지 구체적으로 듣진 못했지만, 이시하라 유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런 오디션이 진행되는지도 몰랐을 거다.
“아. 그래서였나.”
유 작가가 날벌레를 잡듯 갑자기 손뼉을 부딪쳤다.
“뭐가요?”
“엊그제 충무로에 잠깐 들렸는데, 일본에서 온 스태프들이 비공개 오디션을 치른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거든. 그래서 충무로가 긴장하고 있다고 말이야.”
그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조 부장이 입에 문 담배를 콱 깨물었다.
“이것들이 계약서가 무슨 휴지쪼가리인지 아나.”
그나마 휴지는 써먹기라도 하지.
반추 계약서는 불쏘시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액의 손해배상을 요구할 만큼 좋은 계약서는 아니었다.
“안 되겠다. 들어가서 상황 좀 알아봐야지.”
조 부장이 등을 휙 돌린다. 차로 향하는 걸음이 빠르다.
“작가님 내일 봬요.”
“가게?”
아쉬워하는 그녀를 두고 나도 날벌레 무리를 뚫고 차로 향했다.
‘뭐가 문제일까.’
한국에서 오디션을 다시 하겠다는 건, 영화제작은 하되 결국에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얘기다.
“무슨 일 있어요?”
차에 돌아왔더니 서아린이 귓가에서 이어폰을 빼고 갸름한 턱을 내밀며 물었다.
“글쎄.”
의자에 등을 묻은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명치 끝이 뜨거워지면서 온몸의 피가 끓는 기분이다.
이거 참··· 기분 더럽네.
카메라 돌아가기 전까지는 뭐든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우를 감내할 정도로 내가 부족한 건가. 대체 지에스를 어떻게 보고.
“형.”
휴대폰을 꼭 쥐자, 최재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추하지 말자.”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기사도 내. 가경 작가 차기작 반추, 최종 고사라고.”
최재환은 일단 들어오라고 말했다.
“촬영이 자꾸 딜레이 돼서 못하겠다고 하자. 우리가 까였다는 것보다는 먼저 깐 게 그림이 좋잖아.”
까였냐는 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 그게 무슨 소리긴 문자 그대로지.
“우리 까였어.”
**
“시현아 잠깐만!”
끊어진 전화에 이마를 찌푸리던 최재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주 앉아 있던 남수혁의 눈이 그 뒤를 쫓았다.
최재환은 청담동에 전화하더니 대표님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뭐라 뭐라 떠들더니 전화를 끊고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말했다.
“수혁아, 자세한 건 우리 내일 얘기하자. 노래도 그때 듣고.”
그 말을 끝으로 최재환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뭐가 그리 급한지 허둥지둥 튀어나갔다.
“젠장.”
홀로 덩그러니 남은 남수혁의 입에서 쓴 욕이 나왔다.
블랙보이 남수혁 꼴이 말이 아니다.
이 정도로 찬밥신세라니.
지금도 밖에 나가면 팬들이 줄지어 따라붙건만 회사에서는 연습생보다 못한 대우나 받고 있다.
‘두고 봐라. 내가 꼭 다시 일어난다.’
비록 그것이 이시현의 손을 잡을지언정.
텅 빈 회의실을 둘러본 남수혁은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켜 노트를 챙겨 나왔다.
철컥.
문을 닫자 사무실 안에 맴돌던 따가운 시선들이 달려들었다.
우락부락한 매니저들, 직원들, 신입 매니저도 있고.
“다녀왔습니다.”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한승연인가 뭔지 하는 애가 꾸벅 인사를 하며 사무실에 들어왔다. 한데 그녀뿐 아니라 줄줄이 여자들이 들어온다.
곧 데뷔한다는 연습생들인데, 사실상 로드 매니저가 붙었으니 연습생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쟤들이 여긴 왜?’
그 말을 하기에는 그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찾기가 더 어려웠다. 그래서 서둘러 나가려는데, 연습생들이 목이 터져라고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어. 그래.”
얼떨결에 인사를 받고 지나치던 남수혁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사무실 한편에 놓인 대형 TV에서 자동차 광고가 나오는데, 화면 상단에 ‘미스터 미스터리’ 마크가 선명했다.
‘이시현.’
남수혁은 그제야 사무실이 북적거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들 오늘 저것 때문에 모인 거다.
계곡을 가로지른 자동차가 전조등을 깜빡일 즘에 마크가 사라졌다. 곧 시작할 것 같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기 무섭게 드라마가 시작됐다.
첫 화면부터 클로즈업된 이시현의 얼굴이 나타났다.
바람에 흔들리는 앞 머리카락, 핏기까지 드러나 보일 정도로 하얀 얼굴, 여름 수풀처럼 짙은 눈썹, 촘촘한 속눈썹의 흔들거림, 붉은 입술, 그리고 공허한 시선.
깜빡.
눈꺼풀이 한번 움직이자 강렬한 비트가 울려 퍼지는 나이트 안의 전경이 펼쳐졌다.
흥에 겨운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고, 웨이터들은 부킹을 해주려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다.
‘편집에서 바뀌었나?’
이미 대본을 본 남수혁은 첫 씬에 접견실 장면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가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편집이 달라졌어도 다음에 이어질 씬은 예상할 수 있다. 구성이 바뀌었을 뿐 연속된 씬은 그대로일 테니까.
선풍기가 힘없이 회전하고 있는 어두운 사무실이 나타날 테고···
모자를 눌러쓴 한성수가 목울대를 꿈틀거리는 장면, 손에 쥔 칼, 바닥에 떨어지는 피가 화면에 나타났다.
성수는 재킷 안주머니에 칼을 쑤셔 넣고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자 텅 빈 사무실을 채우는 삐걱 소리에 이어서, 의자에 늘어져 있던 피투성이 남자의 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깜빡.
두 번째 살인 현장은 한적한 창고.
의자에 묶여 발버둥 치던 기자의 목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기자는 죽기 전까지 온갖 신음을 토했다. 그 신음의 흔적은 온몸에 난자한 상처에서 볼 수 있었다. 셔츠와 바지가 애초에 무슨 색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은 피로 흥건했을 뿐이다.
깜빡.
거구의 몸을 가진 국회의원.
그래서인지 바닥이 피로 흥건했다. 죽은 몸은 마치 아무렇게나 버려진 바다표범의 사체 같았다.
깜빡.
“꼼짝 마!”
“움직이지 마!”
“칼 버려!”
경찰이 하늘에 쏜 공포탄 소리를 따라 한성수가 고개를 들었다. 맑은 구름을 본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새겨지고.
“···죽기 딱 좋은 날이네.”
경찰서에 광수대 차가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형사에게 끌려 내린 성수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죽은 세 명 외에 또 다른 살인이 있습니까?
-왜 죽였습니까?
-원한관계였습니까?
-뭐로 죽였습니까?
쉴 새 없이 질문이 쏟아지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데, 성수가 걸음을 멈췄다.
독이 바싹 오른 뱀처럼 그에게 달라붙던 여기자가 멈칫.
차갑고 이질적인 시선이 그녀를 바라본다.
지금 여기자의 눈앞에는 꽃미남 살인자가 있었다.
‘아주 그냥··· 영화를 찍었구만.’
남수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자리에 이시현이 아닌 내가 있었다면.’
그런 아쉬움.
‘하지만······.’
이시현이기에 저 그림이 나왔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그런 분한 마음이 가슴에서 들썩였다.
지금 순간 남수혁은 이시현을 뛰어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면서 TV에서 시선을 뗐다. 그런데, 갑자기 터진 낮은 탄성이 그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와.”
신입 매니저였다.
그러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계속해 이어질 꽃미남 살인자의 시선을 감당하기 위해서.
**
「2001년 4월 26일 목요일」
“여기요.”
정류장 가판대에서 여학생들이 천 원짜리를 내고 거스름돈을 건네받았다. 그녀들 손에는 ‘세러데이 서울’이 들려 있었다.
[꽃미남 살인자와 함께한 숨 막힌 1시간]
속삭임이 들릴 것만 같은 타이틀 문구 아래 이시현과 오소리의 사진이 실렸다.
“오빠 사랑해요!”
작은 얼굴에 주근깨가 촘촘히 박힌 여학생이 신문을 끌어안고 어깨를 덩실거렸다.
“나 어제 보면서 소름 돋았잖아. 이것 봐, 아직도 닭살이 살아 있어.”
“전개 엄청 빠르더라. 초반에 그냥 확확!”
안경 쓴 여학생은 빈 주먹으로 친구의 배를 찌르는 흉내를 냈다.
하지만 드라마에선 직접 사람을 죽이는 장면은 없었다.
죽은 이들 역시도 모자이크에 덮여 있었다.
“이시현, 가경 작가 차기작 하차?”
한참 수다를 떨던 여학생들의 눈이 대뜸 커지더니, 신문을 뚫어지게 들여다본다.
“어? 그럼 오빠 영화촬영 안 들어가는 거야?”
“가만있어 봐, 좀 읽게.”
신문이 펄럭였다.
“다가올 5월부터 이시현은 공식적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가경 작가의 차기작 ‘반추’의 촬영이 예정돼 있었다. 복수의 관계자 말에 따르면 반추는 할리우드 자본이 들어간 영화로, 한·중·일 3개국에서 촬영이 진행된다. 사실상 이시현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여겨졌으나 제작사의 문제로 촬영이 지연되면서······.”
“뭐야? 활동 중단? 왜에?”
“바보야 영화 하차했다잖아. 그럼 한국에 계속 있는 거지.”
“진짜야? 허. 그럼 뭐야? 우리 하마터면 한동안 오빠 못 볼뻔했네?”
“지에스 일 처리 엉망이다 진짜. 하라는 콘서트는 안 하고.”
“후와. 완전 생이별할뻔했다.”
“아, 버스 왔다!”
안도의 숨을 내쉬던 여학생들이 도착한 버스에 우르르 올라탔다.
버스가 떠나자, 멀뚱히 서서 여학생들의 야단법석을 감상했던 한송이는 입안에 굴리던 껌을 마저 씹고 속삭였다.
“기사가 그대로 나갔네. 저거 아닌데 상황 완전히 바뀌었는데······.”
완전히 달라진 상황.
어젯밤 일을 떠올리던 한송이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에이씨, 또 만차잖아?”
< 마음이 시키는 대로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