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69화 (169/227)

< 마음이 시키는 대로 (2) >

“자꾸 이러면, 우리 반추 못 합니다.”

최재환의 턱이 씰룩거리면서 좀 더 얘기가 이어졌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화난 얼굴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뭐야?”

수화기가 제자리에 놓이자 강 실장이 다가가 물었다.

하지만 최재환은 대답 없이 셔츠 소매부터 올렸다. 그래도 열이 식지 않는지 창문을 열고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마신다.

꿀꺽꿀꺽.

꽤 큰 갈증인지 연거푸 몇 잔을 더 마시고서야 물기 어린 입술에서 고인 숨이 터져 나왔다.

“페이 프로덕션에서 시현이 오디션 다시 보재. 정확히는, 비공개로 치렀던 오디션을, 공개 오디션으로 다시 진행하겠다는 거야.”

최재환은 정수기 옆 쓰레기통에 확 구긴 종이컵을 던져버렸다. 소매가 풀어진 팔뚝에선 잔 근육들이 파도치듯 흔들렸다.

그러더니 찌푸린 검은 눈썹을 구겨가며 입꼬리를 올린다.

아주 제대로 화난 모양이다.

대체 무슨 문제길래.

나는 콧잔등을 긁고 빈 의자에 앉았다. 긴 다리를 꼬고 턱 끝을 긁적긁적.

‘오디션을 다시 보라··· 페이 프로덕션의 생각일까, 가경 작가의 생각일까.’

하지만 크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래도 작가는 아닌 것 같으니까. 상당히 이상한 성격이긴 해도 한 입으로 두말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나를 캐스팅하는 동안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니까.

“감독은 누구로 결정됐어?”

허리춤에 손을 얹은 최재환은 내 질문에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독도 베일에, 촬영 일정도 베일에, 작가는 연락도 없고.

‘개판이구만.’

훗.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 나왔다.

어째 너무 쉽게 가고 있는 것 같더니만. 꼭 이렇게 장애물이 하나씩 튀어나온단 말이지.

“야 넌 또 뭐가 웃겨?”

강 실장이 기이한 것이라도 본 얼굴로 물었다.

하긴. 매니저나 배우나 지금 상황에 웃고들 있으니 이상할 거다.

“웃는 거 아닌데. 화난 건데.”

내 말에 강 실장이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했다.

“진짜, 너희 둘은 잘 만났다.”

**

‘저 이상한 놈들.’

남수혁의 눈에 웃고 있는 최재환과 이시현이 보였다.

좀 전만 해도 뭐든 때려 부술 것 같은 심각한 분위기였는데, 느닷없이 왜들 웃는 걸까.

“시현아.”

최재환이 손을 까딱까딱 움직이자, 이시현이 회의실로 따라 들어갔다. 회의실 유리벽에 블라인드가 쳐지고 강 실장이 회색 파일철을 챙겨서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

“넌 왜 여기 있어?”

“아. 이거 때문에.”

남수혁은 얼떨결에 소파에 놓인 잡지를 손에 집었다.

“이상해. 이상해. 다들 이상해.”

강 실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제야 남수혁은 얼떨결에 들었던 잡지를 쳐다봤다.

[주부생활 4월호]

“에이.”

잡지를 옆으로 툭 던지고 찌푸린 얼굴을 숙인 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여기 온 이유를 생각했다.

그날, 그 연습실에서, 이시현이 흥얼거린 그 멜로디.

‘분명 내 노래가 맞는데······.’

그 허밍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렇다고 온전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절대음감은 아니니까.

그날도 내 노래라고 외치고 연습실을 나와서는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되새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띵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문제는 밤만 되면, 잠을 자려고 하면, 그 어렴풋한 멜로디가 천장을 서성거린다. 사람 미치게끔.

“수혁아.”

문득 들린 소리에 남수혁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곳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어? 누나!”

3W 권혜선이다.

사고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거였다.

반가움에 벌떡 일어난 남수혁은 뒷목을 쓸어내리며 그녀를 자세히 훑었다.

부츠컷 청바지에 속이 살짝 비치는 시스루 블라우스, 트레이드마크인 긴 머리가 그녀의 갸름한 턱을 따라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뭘 그렇게 보니? 사람 처음 봐?”

새침한 미소에, 그제야 남수혁이 물었다.

“몸은 괜찮아?”

“응. 덕분에.”

“그럼 이제 복귀하는 거야?”

“글쎄. 잘 모르겠다 몸이 굳어서.”

그녀가 쓴웃음을 보이며 목을 쓸어내린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흔들거리면서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근데 넌 정말 재계약 안 해?”

고개를 끄덕이자, 권혜선이 눈을 깜빡거린다.

남수혁은 뒷목에 머물러 있던 손을 내리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요즘 미팅하느라 정신없어. 곡도 좀 알아보고 있고.”

“그래? 난 그래도 네가 계속 블랙보이로······.”

“어, 왔어?”

얘기가 더 이어질 찰나, 회의실에서 나온 최재환이 곰 발바닥 같은 손을 들어 권혜선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함은 뭘까 싶은데, 뒤이어 나온 이시현이 그녀에게 살짝 눈인사를 하고 강 실장과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너 아직도 안 갔어?”

뒤따라가지 않은 최재환이 남수혁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가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기에는 지금 상황이 거지 같아서, 남수혁은 서둘러 재킷을 챙겨 들었다.

“갈 거예요. 나중에 봐 누나.”

성큼 발을 내딘 남수혁이 문득 다시 멈췄다. 뒤돌아서 최재환을 힐끗 보고, 권혜선을 마주 봤다.

“누나.”

“어?”

“지금 남자친구 없지?”

그 질문에 최재환이 황당한 얼굴로 남수혁을 쳐다봤다.

“야 너 지금 뭐라고 그런 거야?”

“누나한테 물어봤는데요. 누나, 만나는 사람 있어?”

재차 묻자, 권혜선이 입술을 살짝 핥으며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나 갈게.”

확답을 들은 남수혁은 미소와 함께 걸음을 돌렸다.

**

“그만 좀 쳐다보지.”

“안 봤는데.”

자꾸 쳐다보길래 눈치 좀 줬더니만 남수혁이 턱을 삐죽 내밀고 엘리베이터 숫자 등을 바라본다.

“자식. 잘생긴 사람 처음 보나.”

내 속삭임에 다시 고개를 돌린 녀석이 이마를 콱 찌푸렸다.

“하. 어이가 없네.”

임마. 어이없기는 이쪽도 마찬가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 옆에서 경계심 가득한 눈빛과 주춤거리는 행동으로 무척 신경 쓰이게 하는 네가 더 어이가 없거든?

차라리 강 실장이라도 옆에 있으면 모르겠는데 둘이 있으니 영 기분이 찝찝하다.

띵.

문이 열리자마자 녀석에게서 해방된 기분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연습실로 향하는데, 기분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봤더니.

“뭐야?”

남수혁이 쫓아오고 있다. 저 자식 분명 아까 1층 눌렀었다.

“나도 연습실 가는 거예요.”

믿기 힘들지만 무시하고 연습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려는데, 녀석이 문을 붙잡는다.

“하.”

뭐냐고 묻는 것도 지겨워 한숨만 내쉬니까 녀석이 입술을 핥고 눈을 치켜떴다.

“그 멜로디······.”

머뭇머뭇하는 입술을 보니,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겠다.

“오후의 빛깔?”

녀석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것 때문에 온 거면 그냥 가.”

입을 벙긋하는 남수혁을 뒤로하고 연습실에 발을 디뎠다.

사무실에서 나올 때, 쌓여 있던 대본 중에 하나 집어온 걸 펼치고 앉았다.

평소라면 지금쯤 가슴이 두근거려야 한다.

수많은 대본 안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숨어있고, 지에스의 배우라면 그걸 언제든 볼 수가 있으니까. 지금이 그런 순간인데. 남수혁이 안 가고 입구에 서 있다.

“그냥 가주면 안 될까? 나 지금 바쁜데.”

말은 퉁명하게 뱉었지만,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들뜬 미소를 가라앉히는 중이다. 실은 녀석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 좋아.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나는 대본을 내려놓고 물었다.

뭐 뻔한 얘기겠지.

그 멜로디가 뭐냐, 좀 들려달라 등등··· 그런 거겠지.

그래 인정한다. 이게 다 내 탓이다. 시간이 지나면 남수혁이 알아서 완성할 노래였는데 내가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키고 말았다.

그래서 사실 고민을 좀 하고 있었다.

결국에 세상에 나와야 할 노래인데, 자칫하면 나 때문에 변수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차피 거의 완성된 곡 아니었어? 약간 다듬으면 좋을 것 같아서 흥얼거려봤던 건데. 뭐. 지금 허밍이라도 할까?”

길게 생각할 게 뭐 있을까 싶어 물었다. 그냥 대충 들려주면 녀석이 완성하겠지.

“그 노래··· 불러볼 생각 없어요?”

남수혁이 입술을 주저하며 말했다.

“그래 불러준다니까. 근데 니가 다 완성한 거야. 나는 그냥······.”

“알아요 내 노래인 거. 내 말은, 불러볼 생각 없냐고요. 무대에서요.”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걸까.

“어디서?”

눈을 깜빡이자, 남수혁이 다시 말했다.

“무대에서.”

나는 멍해진 정신을 겨우 붙들고 녀석을 바라봤다. 그렇게 눈만 깜빡이며 생각했다.

‘오후의 빛깔은··· 여자가, 그것도 여배우가 불렀는데.’

**

하늘에는 달이 뜨고, 촬영장은 조명이 떴다.

“아 죽겠다.”

한숨을 연거푸 내쉬는 오소리 때문에 살충제를 쥔 조 부장의 손이 부지런해졌다.

조명 때문에 날벌레들이 사방에서 밀려온다. 문제는 이놈들이 산적 같은 스태프들한테만 달라붙으면 되지 여배우까지 괴롭힌다.

치익! 치익!

살충제를 정신없이 뿌리고, 또 뿌리고.

뿌연 연기가 퍼질 정도라서 오소리가 바로 캑캑거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조 부장은 살충제 뿌리랴, 오소리의 얼굴에 손부채를 하랴 정신이 없었다.

“아 진짜. 벌써 이러면 여름에는 어떻게 해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조 부장은 땀과 살충제에 젖은 이마를 쓸어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날벌레가 한 움큼 묻어난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오늘 고생 많았다고, 진짜 고생했다고 서로를 치하했다.

특히 조명팀이 고생이었다. 오소리는 축 늘어진 조명팀 알바생에게도 인사를 하고 차로 이동했다.

“하. 힘들다.”

“고생했다.”

“언니도 고생했어.”

위로 섞인 미소와 함께 솥뚜껑 손을 든 오명숙이 그녀의 이마에 가닥가닥 붙은 머리카락을 뗀다.

“근데 부장님.”

살짝 눈을 감은 채로, 오소리는 조 부장을 불렀다.

“왜?”

담배 한대 피우고 있던 조 부장이 모기가 달라붙은 제 이마를 툭 때리며 뒤돌았다.

“시현 오빠요. 반추 뭐가 잘 안돼요?”

“왜?”

조 부장이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이며 다시 물었다.

“아까 회사에서 나올 때보니까, 최 팀장님 표정이 안 좋더라고요.”

“하긴··· 너도 알 권리는 있지.”

입맛을 쩝 다시고, 조 부장은 허공에 손부채질을 계속하며 말했다.

“원래 페이 프로덕션에 가경 작가가 지분이 좀 있나 봐.”

“그래요?”

“그래서 그동안 반추 캐스팅이며 제작팀 구성이며 가경 작가가 추진했는데, 아무래도 주연 설정이 동양인이고 한·중·일 3개국에서 촬영한다는 게 임원들 눈에는 좋지 않잖아. 그래서 제작비가 조금씩 축소되더니 이제는 한계선까지 내려간 모양이야.”

돌이켜보면 지난날 오소리가 반추 캐스팅에서 미끄러진 것도 제작비와 관련이 있을 게 분명했다.

조 부장은 담배 연기를 다시 길게 뿜어내며 말했다.

“그래서 주인공 설정을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으로 바꿀 생각인 것 같아. 이건 내 추측.”

오소리가 눈을 찌푸린다.

“이래저래 문제는 돈이지. 돈.”

조 부장이 담배를 짓이기며 속삭이자, 오명숙이 불쑥 끼어들었다.

“시현 씨가 캐스팅된 거 알려지면 투자할 회사 널렸을 텐데.”

“투자라는 거, 도깨비방망이 내리꽂는 것처럼 쉬운 게 아니다.”

“왜요? 시현 씨 정도면 다들 투자 못 해 난리지. 아니면, 스텝처럼 우리 회사에서 투자해서 제작하면 안 돼요?”

“아서라. 지금 회사가 벌려놓은 한 두 개가 아니야. 그리고 시현이가 아무리 지금 꼭짓점에 있다고 해도 할리우드 영화촬영은 호기심, 그뿐이야. 그걸로 흥행해 한방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그런 꿈 같은 얘기에 돈 쏟아부을 사람들 없다.”

말은 대충 쏟아내고 있지만, 회사가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이시현 정도면 투자하겠다는 곳이 없겠는가.

하지만 회사는 애초부터 영화의 흥행 가능성보다는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수식어만 보고 추진한 일이다. 게다가 괜히 투자만 진창 받았다가 망하면? 그 또한 큰일.

그리고 무엇보다 제작사에서 비용을 줄인다는 것은 흥행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는 건데, 그럼 뻔한 거다.

‘에휴.’

조 부장은 한숨을 쉬며 또다시 담뱃갑을 뒤적였다.

그래도 최재환이 이시현의 할리우드 진출에 기대가 컸는데.

“비가 오려나.”

구름에 가려진 초승달을 향해 담배 연기를 속삭이던 조 부장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다리 난간에서 유 작가가 아까부터 낯선 여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실루엣이 눈에 익은 것 같기도 해서 조 부장이 눈을 찌푸려 좀 더 지켜보려는 이때였다.

“오빠?”

차에 있던 오소리가 껑충 내린다. 이시현이 그녀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이거.”

그가 손에서 내민 것은 어린아이 주먹 크기의 휴대용 선풍기였다.

“와.”

그저 작은 선물일 뿐인데, 오소리의 얼굴에 핀 미소는 구름에 숨은 달을 대신해 주변을 환히 밝혔다.

“오빠는 이제 밤 씬 촬영 없잖아요?”

“첫 방인 날에도 다들 촬영 중인데, 저 혼자··· 아 미안. 나 혼자 쉬고 있기가 그래서.”

이시현이 잔잔히 새겨진 미소를 들고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가 왔다는 소식에 여기저기 시선이 몰려든다.

“아. 그렇구나. 후후.”

오소리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괜히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금 들었는데. 이시현이 어딘가를 향해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 하고 속삭이더니 아예 어깨를 틀고 그쪽을 바라본다.

그래서 뭔가 싶어 오소리도 살짝 고개를 빼고 그쪽을 눈에 담았다.

‘누구지?’

어떤 여자가, 유 작가와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오소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때,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의 얼굴이 선명히 보인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여자가 손을 흔들자, 이시현이 반가운 얼굴로 외쳤다.

“이시하라 상!”

< 마음이 시키는 대로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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