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68화 (168/227)

< 마음이 시키는 대로 (1) >

오소리는 연신 눈꺼풀만 깜빡였다.

방금 그 말처럼 그녀의 심장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현기증이 느껴지고 심장은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발가락에, 손가락에 쓰러지지 않으려 힘을 주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두근··· 거린다고요?”

겨우 말을 꺼냈더니 목 언저리부터 명치까지 저림이 쏟아졌다. 이러다 창피하게 떨리는 숨이라도 토할까 봐 입술을 잘근 깨무는데, 이시현이 그녀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성수도, 가슴이 두근거린 순간이 있었네요.”

“예?”

잠시 몇 초 정도, 오소리는 그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한성수로서 얘기한 거였어.’

성수가 이혜리를 먼발치서 지켜보던 매 순간순간이 쓸쓸했던 건 아니었을 거다.

두근거린 순간도 있었겠지.

이혜리가 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 어쩌면 동네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바로 볼 때 지은 미소에도 성수는 두근거림을 느꼈을지 모른다. 사랑했으니까.

‘아.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런 줄도 모르고 제대로 착각을 해버렸다.

“자, 다시 들어갑니다.”

“감독님!”

오소리는 빨개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손을 높이 들었다. 슛을 외치려던 강 피디의 얼굴이 멍해졌다.

“왜?”

“대, 대본 좀······.”

주위를 물리느라 스태프가 뛰어다녔다. 신호등 앞에 가득했던 사람들이 뒤로 한발 물러난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이시현의 클로즈업 샷을 마지막으로 촬영이 끝나기 때문에 스태프의 발걸음에 여유가 있었다.

“액션!”

모두들, 슛이 들어감과 함께 이시현이 순간의 몰입에 빠져든 걸 지켜봤다.

하얀 볼에 흐르는 눈물. 이시현의 턱 끝에 대롱 매달린 그 눈물을 보면서 오소리는 꽃미남 살인자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

애틋함에 가슴이 저린다.

성수가 지녀온 마음이 안쓰럽고 가련하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촬영 기간이 끝나면, 정신없었고 행복했던 드라마 촬영도 끝나는 거니까.

완벽한 꽃미남 살인자였으며, 최선을 다해 한성수를 표현했으며, 상대 배우로서도 충실했던 이시현과의 마지막이 가까워져 오니까.

“오케이··· 컷!”

조금씩 거세지는 바람 속에서 오소리는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꼭 붙들었다. 마치 마음을 다잡듯. 그렇게 대구에서의 촬영이 끝났다.

**

「2001년 4월 25일 수요일」

“···6년이라.”

한숨처럼 속삭임이 들리고, 차 대표가 펼쳐진 다섯 손가락을 접으며 햇수를 헤아린다. 손가락 하나가 접어질 때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을 곱씹듯 동작이 무척 느렸다.

펼쳤던 손가락이 모두 오므라졌을 때, 그는 주먹 쥔 손을 내려놓고 말했다.

“널 밟을까, 부술까, 죽여놓을까 고민 좀 했다.”

험상궂은 말인데도 최재환은 되려 미소를 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좀 맞을 각오하고 왔습니다.”

“이 자식 보게. 나간다고 농담도 하네.”

찌푸려 있던 차 대표의 이마가 서서히 펴진다.

이어진 낮은 웃음소리에 최재환은 괜스레 손등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대표님 앞에 서면··· 항상 제대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커 보였거든요.”

지난 5년, 아니 6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하지만 차 대표와 가까워질 계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원체 남의 비위를 못 맞추는 편인데다, 그저 제 일하기 바빴으니까.

물론 그 이유보다는 차 대표의 존재가 너무 커서 감히 다가갈 수 없었던 탓이 크다.

“내가 하나만 물어보자.”

차 대표는 말문을 열고 잠시 고개를 돌렸다.

대표실 유리벽 너머로는 구름이 흐르고, 한강에서부터 흘러온 노을이 짙게 깔린다.

차 대표는 저 풍경이 좋아서 지에스의 시작을 이곳으로 결정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에 와서 나가는 거, 단순히 너에게 온 그 기회 때문이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아니면 둘이 싸웠냐?”

“그럴 리가요.”

최재환은 싱거운 웃음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딱히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백 대표는 믿을만해. 그 양반이 니 뒤통수 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이설희는 너무 믿지 마. 나이도 너무 어리고 재벌 애들 꽤 깐깐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힘들 거다.”

차 대표의 툭 던져진 말에 최재환은 괜히 가슴이 뻐근해서 짧은 숨을 토했다.

“오늘인가?”

“예, 오늘 미스터 미스터리 첫 방입니다.”

“4부작이면 뭐, 잠깐 들썩이겠네.”

차 대표는 거뭇한 입술을 엄지로 훑어내리며 속삭였다. 올백으로 넘겨 훤해진 이마가 찌푸려진다.

“스텝은 어떻게 하시기로······.”

“그거야 지금 당장 급할 거 있나. 반추 촬영 들어가면 시현이 국내 활동이야 뜸해질 텐데, 그때 봐서 방영해도 돼.”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내고, 차 대표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이시현이 지금 날 피하고 있는 거 알아?”

“강 실장에게 들었습니다.”

촬영이 바쁘다고 차 대표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다고.

“반항하는 건 좋아. 배우가 그런 것도 있어야지. 사실 그동안은 너무 착해서 밋밋한 것도 있었어.”

마지막으로 긴 연기를 뿜어내고 차 대표는 담뱃재를 짓이겼다. 재떨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그가 다시 입술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그것도 통제돼야 쓸만한 거지.”

“시현이는 잘할 겁니다.”

최재환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얘기를 했다.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아 녀석을 캐스팅했고, 그 후 지금까지 지켜봤다.

물론 모든 시간 모든 순간에 녀석이 최선을 다한 건 아니었지만··· 분명 지난 일 년 녀석은 달라졌다.

“반추 팀은 구성 끝났습니다. 그럼 저는 반추 촬영 일정만 확정되면, 시현이 일에서 완전히 빠지겠습니다.”

최재환은 한숨처럼 마지막 얘기를 꺼내고 일어났다.

대표실을 나와 문을 닫고 짧은 숨을 고루 내쉬었다.

고개를 돌리니 대표실 비서가 보이고, 그 옆 소파에 남수혁이 앉아 있다.

무슨 생각을 골몰히 하는지 꽤 심각해 보인다.

**

“끊을게요.”

전화를 대충 끊은 강 실장이 왼쪽 눈썹을 콱 찌푸린다.

“최재환이 이 정도야? 이거 은근 기분 더럽네.”

최근 이 사람 저 사람 통해 강 실장에게 연락이 오는 모양이다. 왜 최재환이 그만두는 거냐, 어디를 가는 거냐, 혹시 독립하는 거냐 등등.

나 역시도 그런 전화를 몇 통 받았는데, 고우희 매니저를 통해 SN에서 연락을 해왔을 정도다. 그래서 최재환이 그 정도였나 싶기도 하고.

“자기들이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지. 아 짜증 나네.”

강 실장이 내 뒤를 부지런히 쫓아오며 투덜거렸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 콧바람과 발걸음은 가볍게 들썩인다.

“이제 가세요?”

정신없이 뛰어가다 내 앞에 멈춰선 조연출.

“유선 씨, 영수증 떨어트렸다.”

어이구 덜렁아.

제작비 빵꾸 나면 제 돈으로 메꿀 거면서.

“으아! 큰일 날 뻔했다.”

식겁한 그녀가 영수증을 줍고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눈썹을 추켜세우고 묻는다.

“아 시현 씨, 종방 때 참석하실 거죠?”

‘미스터 미스터리’팀은 빠듯한 촬영이라 오늘 첫 방은 그냥 넘기고 다음 주 종방 때 모이기로 했다. 그래서 조연출이 배우들 스케줄을 미리 확인하는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녀가 밝게 웃는다.

“오케이, 시현 씨는 참석! 아, 근데 시현 씨 정말 할리우드 영화 촬영 들어가세요?”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눈치 보면서 저 질문이다.

나는 대답 대신 코끝을 찌푸려 웃었다.

아직은 어디에서도 공식 보도가 나가지 않았으니까.

“유선 씨, 그럼 수고하세요.”

조연출을 뒤로하고 우리는 스태프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다들 정신없이 움직인다. 얼핏 난장판으로 보여도 제 할 일들을 하고 있다.

“할리우드가 좋은 게 아닌데. 다들 난리네.”

차 키를 꺼내던 강 실장이 괜히 한숨이다.

지금 상황에 해외일정이라니. 흥행 실패하면 어떻게 하려고. 한 반년 훅 지나갈 텐데··· 임원들의 우려를 재차 쏟아낸다.

“기사 언제 내보내요?”

“글쎄. 저쪽에서 촬영 일정이 계속 밀리니까, 우리도 섣불리 예단할 수가 없잖아.”

“페이 프로덕션은 왜 그러는 거예요?”

“투자 문제 같은데.”

강 실장이 찌푸린 얼굴을 갸웃한다.

“지금 뭔가 애매해. 기콘부에서는 계약 해지 얘기도 나오더라.”

그러잖아도 촬영 일정이 밀린 상황이라서, 계약서는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그러고 보면 캐스팅부터 가경 작가와의 만남까지, 페이 프로덕션의 일 처리가 순조롭지가 못하다.

“근데 너 대표님하고 저녁은 언제쯤 먹을 거야?”

“촬영 끝나고요.”

만나봤자 할 얘기는 뻔하니까.

“그럼 다음 주로 일정 잡을게. 종방연 다음 날.”

“예.”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강 실장이 혀를 찼다.

“최 팀장 일 때문에 뒤숭숭하냐?”

“아닌데.”

잠깐 뒤숭숭하긴 했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다.

최재환이 지에스에 없다는 건, 다른 말로 내가 최재환에게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니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모든 걸 통제할 수도 없는 법이고.

“시현아.”

강 실장이 무게를 잔뜩 잡고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글이글 타는 눈빛. 뭐지 이 썩은 눈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최재환이 가도 내가 너 책임 질 거니까, 나만 믿어.”

마치 나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는 듯 부담감을 팍팍 주면서, 빈 주먹을 살짝 들고 내가 주먹을 부딪쳐주길 기다린다.

얘··· 왜 이러는 걸까.

그림자처럼 조용히 따라오던 서아린도 나처럼 고개를 가로젓는다.

「삼성동 지에스 C&C」

회사 앞은 오늘도 팬들로 북적거린다.

날이 좋든 나쁘든 건물 앞은 팬들의 놀이터. 그래서 아예 카페를 하나 오픈하자고 건의했는데 기콘부에서 실행할지는 미지수.

“오빠오빠! 촬영 끝나셨어요?”

차에서 내린 내 곁에 한무리 팬들이 따라붙었다.

빨주노초파남보 옷들을 살랑거리며 쫓아온다. 교복 입은 애들도 보이고.

“너희들 학교에 안 있고 왜 여기 있어?”

“오빠 보려고요!”

풋내 풀풀 나는 아이들이 하얀 이를 보인다. 배시시 웃더니 살갑게 물었다.

“오빠, 식사하셨어요?”

“너희는 먹었어?”

“예. 길 건너 분식점에서 떡볶이 먹었어요.”

“밥 먹어 밥. 키 안 큰다.”

짧은 순간이지만 팬들과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누며 눈을 마주한다. 요즘 들어 조금 귀찮긴 해도 팬들은 오늘 하루가 행복할 거다.

하지만 얼마 안 있으면 이 녀석들과 잠깐의 이별이 찾아온다.

해외 촬영을 하며 국내 활동도 병행한다지만, 사실상 힘든 일이니까.

“오빠 지금 들어가시면 언제 나오실 거예요?”

“안 나올 거야. 기다리지 말고 집에 가.”

“싫은데!”

혀를 빼죽 내미는 팬들의 모습에 웃으며 입구를 지났다.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오소리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있었다. 마주한 시선에, 나도 그녀도 미소를 띠고 서로를 바라본다.

“오빠 촬영 끝나고 오는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고 되물었다.

“이제 가는 거예요?”

오늘은 오소리와 함께 붙는 씬이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퇴근, 그녀는 출근. 아마 지금 촬영장에 가면 자정까지 촬영이 이어질 거다.

그 생각을 하는데 오소리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큰 눈을 끔뻑인다.

“왜요?”

“말 편하게 하라니까요.”

저 말 다섯 번은 들은 것 같다.

“그럴게.”

“벌써 일곱 번째 그 얘기하는 거 알아요?”

다섯 번이 아니었나.

“알았어.”

한 번 더 확답을 듣고서야 오소리가 가벼운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구두굽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녹음기 속에 담겨 있던 수줍은 고백도 귓가를 서성인다.

[그만들 하세요. 저 정말······.]

[관심 없어? 진짜 하나도?]

[하··· 예, 관심 있어요, 좋아해요. 이제 됐죠······.]

“시현아.”

먼저 발을 내디딘 강 실장이 나를 불렀다. 생각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안될 일이지.’

오소리의 감정에, 그리고 내 감정에 확신이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긴 시간 함께했던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나란 놈은 잠깐 만나 헤어지는 그런 연애는 싫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그래서 내가 모르는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 취미,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그 과정을 결코 가볍게 대하고 싶지 않다.

하. 어쩌겠어. 내가 원체 그런 놈인걸.

더구나 해외 촬영에 들어가면 그 결과는 뻔하다.

만남은 더뎌지고 서운함은 깊어지겠지.

“이상하네.”

강 실장이 중얼거린다.

1층, 2층···

바뀌는 숫자를 보면서 그를 슬쩍 쳐다보고 물었다.

“뭐가 이상해요?”

“소리가 상대 배우한테 저렇게 살갑게 구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명이 촬영 때도 하승진이랑 어쩌다 한마디 할까였는데.”

“제가 마음에 들었나 보죠.”

“허.”

강 실장이 헛바람을 뱉는다.

“시현아. 배우가 그런 대책 없는 자신감을 가지는 건 나쁘지 않은데··· 하. 모든 여자가 널 마음에 들어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녀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내리면서 나는 말했다.

“좋아요. 그럼 99프로라고 해두죠.”

**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이시현과 강 실장이 유리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둘의 모습이 제법 잘 어울리는데, 사무실 분위기는 썩 좋지가 못하다.

최재환이 험상궂은 얼굴을 든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고, 직원들은 쥐죽은 듯 있었다.

“오디션을 다시 본다고요?”

전화기를 붙잡고 되묻는 목소리가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

강 실장이 여직원에게 속삭여 물었다.

“무슨 일이야?”

“페이 프로덕션인데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나 봐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궁금함에 강 실장이 이맛살을 구기는 동안에도 통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해가 안 되나 보네요.”

최재환이 눈을 찌푸리고 중얼거리더니.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 전에 그쪽에서 좀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지금 어떤 배우랑 함께하고 있는지를, 좀 아셔야 할 것 같네요”

그러더니 이시현을 응시하며 전화기를 힘껏 부여잡았다.

“자꾸 이러면, 우리 반추 못 합니다.”

< 마음이 시키는 대로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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