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66화 (166/227)

< 변화 (4) >

지금 남수혁의 모습이 딱 그 꼴이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고양이가 머리를 때린 빗방울에 화들짝 놀란 것 같은.

“뭐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며, 남수혁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눈동자가 쉼 없이 움직이고 두꺼운 눈썹은 제멋대로 찌푸려져 있다. 찌푸린 표정도 가관이고.

“뭐야?”

뭐긴 뭐야. 저 자식이 아까부터 왜 저러는 건가 싶었는데, 나는 문득 손에든 악보를 깨달았다. 혹시··· 설마···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물었다.

“이거, 니 거야?”

대답 좀 하면 어디가 덧나는지, 녀석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에 든 악보를 낚아챘다.

“내 꺼야!”

“누가 뭐래?”

어이가 없어서 눈을 부릅뜬 녀석을 마주 봤다.

그런데 사실 나, 지금 많이 놀랐다.

‘오후의 빛깔’이 남수혁이 작곡한 곡이라고? 저 아름다운 곡이. 저 싸가지의 머리와 손에서 나왔다는 얘기에 지금 살짝 패닉 상태다.

그래 오랜만에 다시금 깨닫는다.

실력과 인성이 항상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이걸 어떻게······.”

남수혁은 입을 옴짝거렸다. 주름진 입술을 송곳니로 깨물면서 악보를 보고, 나를 보고, 그러더니 갑자기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더니, 휙 쏘아본다.

“정체가 뭐야?”

아. 녀석의 눈을 마주 보다가 깨달았다. 내가 완성곡을 불러서 당황한 거구나.

하긴 저 악보는 지금 기초공사도 제대로 못 한 상태 같은데, 내가 인테리어에 마당 조경까지 끝내버렸으니까. 그것도 이 잘난 목소리로.

“노래 좋더라.”

“아 진짜 뭐지?”

오늘 종일 저 말만 하다가 끝낼 건가 싶은데, 녀석이 휙 뒤돌아 연습실을 나갔다. 그런데 문 앞에서 멈춰 서더니 또 나를 돌아보고 울상인 얼굴을 갸웃한다.

“정말 뭐지?”

**

「2001년 4월 21일 토요일」

쿵쿵.

오명숙이 거실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소리야, 잠깐만.”

그러더니 손에든 향수를 다짜고짜 뿌리기 시작했다. 오소리의 가녀린 어깨를 붙잡고 여기저기 칙칙거리는 통에 노란색 원피스 치마가 펄럭거린다.

“이거 뭐야? 냄새 이상해.”

“이게 효과 직방이래.”

“어?”

“페로몬이라고 들어봤어? 암컷이 수컷을 유인할 때 발산하는 호르몬.”

“언니······.”

오소리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찌푸린 눈에 오명숙이 비쳤다.

“내가 무슨 동물의 왕국 찍으러 가?”

“얘 좀 보게. 사랑도 호르몬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일종이야 이것아.”

“됐어. 이거 이상해.”

손을 휘휘 저은 오소리가 손등에 코를 가져가더니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제야 페로몬 향수를 거둔 오명숙이 단단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양 볼을 꾹 붙잡았다.

“소리야”

“왜?”

오소리가 붕어 입술로 대답하자 오명숙이 눈을 가늘게 뜬다.

“요즘 사랑은 말이야. 팔부능선 넘는 등산코스가 아니야. 비행기 타고 슝 가는 게 요즘 사랑이거든? 그렇다고 너무 쉽게 넘어가지 말고. 적당히 밀고 당기란 말이야. 어떻게 하냐면······.”

“언니.”

“왜?”

“마지막 연애가 언제야?”

“···가라.”

**

“웬일이세요?”

아침부터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최재환이 아닌 신입 매니저였다. 이름이 경식이던가. 오뚝 솟은 콧대에 뿔테안경이 걸려 있는데, 안경알에 쫙 빼입은 내 모습이 비친다.

“아, 팀장님은 이제 바빠서. 그러니까, 그 뭐냐.”

알아. 내 일에서 빠지게 됐다는 거.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왜 오늘 오셨냐고요. 저 스케줄 없는데.”

“아, 그 말이구나. 시현 씨가 오늘. 리딩하러 가신다고.”

“그것 때문에 오신 거예요? 저 혼자 가도 되는데.”

“아. 그게. 그래도 매니저가 같이 가야죠.”

왠지··· 어린 최재환을 보는 것 같아서 나는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한발 다가가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경식 씨.”

“예, 예?”

“셔츠하고 바지는 가능하면 꽉 끼지 않는 걸 입으세요. 경식 씨가 불편하면, 보는 사람도 불편하니까.”

“아, 예. 감사합니다.”

넋 나간 얼굴을 끄덕인다.

다시 한발 떨어졌는데, 녀석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 놀리는 건 이쯤하고.

“오늘은 집에 가서 쉬세요. 저 혼자 가도 되니까.”

모든 직장인의 염원, 쉴 수 있을 때 쉬는 게 좋다.

“아닙니다. 저 정말 괜찮습니다.”

아니야. 가서 쉬어. 나중에는 이런 기회 오지도 않는다.

“리딩하는 몇 시간 동안 뭐하시려고요? 진짜 괜찮으니까, 집에 가서 쉬세요.”

“그럼, 가는 것만 태워드릴게요.”

고집은. 꼭 누구 닮았네.

끝내 신입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유 작가의 집으로 향했다.

살짝 열린 차창 틈새로 비 냄새가 흘러들어온다. 웬일로 일기예보가 딱 맞았데.

“심심하시죠?”

앞차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동안 신입이 라디오를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물었다. 그때 들리는 노래.

“아 블랙보이다.”

나도 귀 있다.

‘그나저나 진짜 그 노래가 남수혁 곡이라고?’

블랙보이는 2집에서부터 자작곡을 채워 넣었다.

동기부여와 책임감을 키우겠다고 차 대표가 지시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건 그 정도 선이다.

어차피 가수들이야 내가 관리하는 파트도 아니었고, 블랙보이 해체 이후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까.

‘그럼 왜 얼굴 없는 작곡가로 지낸 걸까.’

남수혁과 관련해 방송국과 타 회사에 압력을 넣긴 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놈 성격상 오히려 보란 듯이 활동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나···

나는 잠시 그 생각을 하다가 다시금 ‘오후의 빛깔’을 떠올렸다.

‘미미 OST로 딱인데.’

곡 자체도 서정적이고, 가사도 제격이다.

하지만 어제 보니 아직 완성된 곡도 아니고, 남수혁 얼굴은 무척 놀란 것 같고. 그냥 적당히 꼬셔서 달라고 할까.

머잖아 만인의 사랑을 받는 노래가 되긴 하지만, 지금 세상에 나온다고 해도 그 사랑과 견줘서 부족하진 않을 거다. 내가 홍보해 줄게. 그러니까 줘라···

‘라고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히겠지.’

어제 얼굴 보니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녀석이 나를 진심으로 싫어한다는 걸.

“다 왔습니다.”

신입은 유 작가의 집 앞에 나를 내려주고 떠났다.

차 뒤꽁무니를 보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 옆에 최재환이 서 있을 것만 같다고 할까. 벌써부터 이럼 어떻게 하냐.

“왔어?”

초록색 철문이 열리고, 검은색 레이스 치마를 펄럭이며 유 작가 나왔다. 그녀와 함께 마당을 가로질렀다. 강북의 마당 딸린 집에서 사는 걸 보면 그녀도 참 대단한 능력자다.

“오셨어요?”

거실에 있던 오소리가 나를 반겼다.

원피스를 입었네.

오늘은 화장이 수수하구나.

아직도 조금 아픈 걸까. 볼이 쏙 들어갔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살짝 눈인사하고 거실에 발을 들였는데.

“시현 씨, 안녕.”

“아, 작가님!”

김은수 작가도 함께 있다. 그리고.

“넌 왜 왔어?”

“오빠 안녕?”

하얀 이를 드러낸 고우희가 손바닥을 살살 흔든다. 이런. 여자들 세상이잖아.

펄럭이는 대본은··· 그냥 내려놓고.

리딩하러 왔는데 수다만 떨게 생겼다.

“오빠, 진짜 치사하다. 전화번호가 바뀌었으면 알려줘야지!”

고우희가 뿔이 잔뜩 났다. 눈썹이 일그러진 브이가 됐다.

“만나면 알려주려고 했지.”

“안 만났으면요?”

“그거야 뭐.”

“치!”

이 녀석도 여자라고 눈을 흘기고 있으니까 제법 무섭네.

“알았어. 이따 알려줄게.”

“이미 알거든요?”

그래도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미소를 생긋 보인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유 작가가 피식 웃었다.

“둘이 그렇게 친했어?”

“별로 안 친해요.”

내가 손을 흔들며 말하자 고우희가 내 옆구리를 쿡.

“조금요.”

“후후. 시현 씨, 우희만 챙기지 말고 소리 씨도 좀 챙겨라.”

김은수 작가의 말에 오소리에 속눈썹을 흔들고 옅은 미소를 띤다. 나는 대본을 다시 쥐었다. 그리고는 돌돌 말아서 고우희의 어깨를 툭 때렸다.

“이제 나오시게. 나는 소리 보러 온 거니까.”

“치사하다.”

“아니면 조용히 보고 있던가.”

툴툴대면서 고우희도 대본을 펼쳤다. 제 입에 검지를 가져가더니 쉿! 하고 속삭인다.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아무튼··· 천천히 주변에 침묵이 고인다.

오소리와 나는 대본에 집중했다.

서로가 이미 각자의 분량은 준비를 마친 상황이다. 그래서 감정선만 좀 잡으면 될 것 같았다.

가만 보자.

성수와 이혜리가 붙는 씬은 접견실, 그리고 이혜리의 주변을 맴도는 성수의 씬들이다.

펄럭.

대본 넘기는 소리가 귓가를 묘하게 간질인다.

촤르르.

나는 마지막 회차 대본을 빠르게 넘겼다.

작가야 당연하겠지만, 배우 역시 작품에서 특별히 애정이 가는 씬이 있다.

4부작 드라마, 회차당 최소 마흔 몇 개의 씬들.

다 합치면 이백 개가 넘는 씬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이 드라마의 엔딩이다.

4부 63# 학교 운동장 / 낮(오후)

성당 식구들과 운동회를 하는 이혜리의 모습.

그녀의 미소를 따라가는 성수의 시선. 마치 어린 소년이 짝사랑하는 소녀를 지켜보듯, 플래시백

cut to. 성당 운동회에서 밝게 웃고 있는 성인 이혜리.

cut to. 성인 이혜리를 지켜보는 성인 성수.

dissolve. 회상, 어린 이혜리가 뛰노는 모습.

cut to. 어린 이혜리를 지켜보는 어린 성수.

성수는 이혜리에게 속죄하기 위해서 살인을 한 게 아니다.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래서 그들을 죽인 것이다. 너무나 사랑해서 얘기도 못 하고.

**

“이야기가 너무 무겁다.”

대본을 넘기던 김은수 작가가 씁쓸한 미소를 띠고 턱을 괸다. 가는 팔에 걸린 팔찌가 흘러내렸다.

“혜리도 불쌍하고. 성수도 불쌍하고.”

성수는 사형을 선고받고. 혜리는 다시 혼자가 되고.

“성수 너무 불쌍해요.”

고우희는 심지어 눈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작가님.”

“응?”

오소리가 미소를 띠고 보자 유 작가가 이맛살을 접었다.

“상상하는 씬 넣으면 안 될까요? 둘이 한 번쯤은 같은 길, 같은 방향으로 걷는 장면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고우희도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흠. 시현 씨 오면 생각해보자.”

유 작가는 잠시 대답을 보류하고 이시현이 마당에서 통화를 끝내고 오기를 기다렸다.

“아 맞다. 나 오빠한테 할 얘기 있는데.”

고우희가 벌떡 일어난다. 또 어딜 괴롭히려는 건지.

이시현을 찾아 쪼르르 마당으로 나가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 작가가 오소리에게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근데, 둘이 어떻게 되는 거야?”

어제, 오소리의 이마에 손을 얹는 이시현의 모습.

그 모습을 보고 현장이 난리가 났으니까.

배우들 떠나고 스태프들은 다들 흥분 일색이었다.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 분위기 너무 좋더라, 진짜 연인 같더라, 등등. 질투와 부러움이 현장에 가득 찼다.

“뭐가 어떻게 돼요?”

“둘이 사귀는 거야?”

“어, 그게 무슨 소리야?”

김은수 작가도 호기심에 귀를 기울인다.

“소리하고 이시현. 둘이 지금 그렇거든.”

“뭐가, 뭐가 그래요?”

오소리가 손사래부터 젓자, 미소를 씨익 그리는 유 작가.

“내가 명숙이한테 들은 게 있거든? 너 솔직히 말해. 이시현한테 관심 있지?”

“작가님! 김 작가님도 계시는데······.”

눈을 흘기는 오소리.

“난 못들은 걸로 할게.”

“그래. 김 작가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

오소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작가들 둘이서 그녀를 놀리고 있었다.

“그만들 하세요. 저 정말······.”

“관심 없어? 진짜 하나도?”

“하··· 예, 관심 있어요, 좋아해요. 이제 됐죠······.”

툭툭 던지듯 말했는데, 문득 테이블 위를 내려보던 오소리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녹음기!”

이시현이 켜 놓은 녹음기.

< 변화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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