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63화 (163/227)

< 변화 (1) >

“서운해?”

“서운하기도 하고··· 조금 놀란 것도 있고요.”

앞머리를 축 내리고 생각에 잠겼던 조 부장은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말문을 열었다.

“이해한다.”

박 상무가 그 마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위로가 되질 않는다.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가, 전혀 예상 못 했던 인물에게 먼저 갔다는 사실에, 지금 조 부장은 이곳에서 헤쳐왔던 지난날의 많은 시간이 허무해져 버렸다.

“그래. 사실 나도 놀랐다. 대표님이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후··· 최 팀장을 높게 평가하는 줄은 알았는데, 자회사 대표 자리에 앉히고 싶을 정도인 줄은 몰랐네.”

더구나 최재환은 작년에 실장에서 팀장까지 다이렉트로 올라왔다. 거기다 이번은 자회사 대표 자리.

조 부장은 괜스레 입술을 매만지다 고개를 들었다.

“근데··· 재환이가 거절했다고요?”

**

띡.

오디오 리모컨을 누르자 웅성거리는 소리에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뭐지? 왜 얘기를 안 할까요, 한성수 씨.

-그만합시다.

-잘 생각하세요. 죽은 세 사람과 한성수 씨가 어떤 관계가 있고, 그래서 한성수 씨가 복수한 거라면······.

오늘 있었던 대본리딩 현장 녹음 파일을 틀어놓고, 나는 와인잔을 손에 쥐었다.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 너머 보이는 한강을 눈에 담는데··· 한숨만 나온다.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달라질 것은 예상했다. 바뀔 것도 예상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두렵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순간이니까.

그런데, 이건 생각지 못했다.

최재환이 지에스를 그만둘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각에 잠겨 와인을 홀짝이면서, 그리고 이제는 바뀌어버린 것과 또 바뀌지 않고 다가올 것들을 떠올려봤다.

‘PR비 사건.’

2001년과 2002년은 연예계에 많은 일이 일어난다.

그중 지에스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PR비 사건’이다.

방송국 피디와 국장이 가수의 방송출연을 조건으로 기획사와 제작사에서 뒷돈을 받은 일인데, 관행적으로 해오던 일이 검찰에서 칼을 빼 들면서 수면에 떠오르게 된다.

라디오 몇 회, 방송 몇 분, 무대 연출에 힘 좀 써 달라면서 오가는 돈이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억.

지에스라고 그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차 대표의 미국 도피.’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도 한참을 더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차 대표.

결과적으로는 그 일이 전화위복이 돼 지에스가 성장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지만, 중요한 건 차 대표가 미국에 있을 때 지에스의 핵심으로 내가 떠오르게 된다.

나 최재환이 말이다.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느새 바닥을 보인 와인병을 보면서 잔을 내려놓았다.

“후······.”

이제 나는, 오늘 저녁 최재환을 만났던 순간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역에 몰입하듯.

은은한 조명,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 그리고 눈앞의 최재환.

“그 배··· 나는 먼저 내려야 할 것 같다.”

“뭐?”

“후.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나.”

입맛을 두어 번 다시던 최재환이 와인 한 모금으로 입을 게운다. 투박한 손으로 검붉은 입술을 훔치고. 내가 내민 키 두 개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너 이번 촬영 끝나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뭐, 이 정도에 흔들릴 놈 아니니까.”

뭔데 저렇게 거창한 거야.

“시현아.”

“뭐야. 뭘 먼저 내리는데?”

나는 따지듯 물었다. 화가 난 건 아니고, 반은 장난삼아.

“형 회사 그만둔다.”

“그래?”

누가 들어도 심각한 소리인데, 나는 당황하지 않고 있다.

알고 있으니까.

C&C가 궤도에 오르고 나는 자회사 대표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 다시 지에스로 돌아올 거다. 차 대표가 잠시 비워둔 자리를 지키려고.

“안 놀라냐?”

“놀랄 게 뭐 있어.”

피식 웃고 와인을 입에 머금자 최재환이 서운한 듯 흘겨본다. 와. 내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구나. 가만히 마주 보면 새삼 놀랄 때가 있다.

“자식··· 하긴, 직장인이 회사 그만두는데 놀랄 게 뭐 있냐.”

“그래서 어디로 가?”

대행사겠지. 그곳에 가서 잡지사도 인수하고, 매달 지에스 소속 배우와 가수들이 등장하는 잡지도 발행하고. 그걸 잘 알면서 물어나 본다.

그런데 최재환이 피식 웃는다.

뭐지.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최재환이 미소를 지우고 말했다.

“독립한다.”

잘못 들었나.

이제야 조금 이상해서, 와인잔을 내려놓고 묻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투자받기로 했어.”

내가 넋 나가 있는 동안 최재환은 계속 얘기했다.

제안을 받았고, 오랜 고민 끝에 수락했다는 얘기였다.

투자자와 투자 규모 같은 세부사항까지는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이놈이 나한테 이렇게 구구절절 얘기하는 걸 보면··· 마음의 결정을 한 거다. 내 미래가··· 아니지. 이 녀석의 미래가 바뀌었다.

‘후.’

레스토랑의 전경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거실 스피커에서 변호사 이혜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씬 넘버 40, 법정. 공판검사가 성수에게 구형을 하고 있다. 담담하게 듣고 있는 성수. 검사를 뚫어지게 보는 이혜리.

-피고인 한성수는 2001년 3월 8일, 압구정 소재 XXX에서 국회의원 XXX의 우측 하복부를 수차례··· 이에 본 검사는 피고인에게 형법 제250조에 의거하여 사형을 구형합니다.

-변호인 측 최후변론하세요.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 한성수는 국회의원 XXX, 제현일보 XXX기자, 조직폭력배 XXX를······.

**

“7827님··· 우와 이시현이 나왔었다고요? 근데 나는 왜 못 들었어요? 라고 보내주셨어요. 그래요, 오늘 좀 늦게 오셨네요. 1부에서 왔다 가셨는데.”

오소리가 문자를 읽는 사이 조정실에서는 ‘아직도 문자가 계속 와요’라고 큼지막한 글씨가 적힌 스케치북을 흔들고 있다.

“6326님, 우희 언니도 못한 걸 오소리가 해냈어··· 아 그러게요. 제가 해냈네요. 어떻게 된 거예요 우희 씨? 분발 안 하실 거예요?”

가만히 듣고 있던 고우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마이크를 향해 투정 섞인 하소연을 한다.

“와 이거 억울하다. 저요. 요즘 오빠 바쁠까 봐 연락 일부러 안 한 거거든요? 근데··· 전화번호가 바뀌었어. 진짜루!”

윙크와 함께 살짝 혀를 빼문 고우희.

“8302님은··· 그럼 지금 오빠랑 있는 게릴라 이벤트 주인공은 누굴까요? 라고 보내주셨어요. 정말 누굴까요? 저도 너무 궁금하네요. 아마 지금은 끝났겠죠? 아닌가. 지난번에는 월미도에서 바이킹도 타고 야식도 먹고 그랬다니까··· 그래요, 아마 아직 안 끝났겠다.”

이시현이 1부에 전화출연 잠깐 한 것만으로 이 난리다.

디제이 고우희도 그렇지만 작가와 피디의 얼굴이 흡족함을 넘어 세상 다 가진 표정들이다.

“자, 아쉽지만 오늘 시현 씨의 목소리 더는 들을 수가 없답니다. 아쉽죠. 정말 아쉬워요.”

“그래도 소리 씨는 촬영 중이니까 매일 보잖아요? 그죠?”

“예. 그건 그래요.”

“여러분, 지금 모든 걸 다 가진 소리 씨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에이.”

짓궂은 멘트에도 오소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밝은 모습이고, 차분한 모습이다.

“소리 씨, 지금 인터넷에는 ‘미스터 미스터리’의 메이킹 영상이 화제인데, 어떤 상황인 거예요?”

고우희는 오소리가 오열하는 장면에 대해서 물었다.

“그 장면은 사실 거의 드라마의 끝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변호사 이혜리가 모든 진실을 알고 성수가 떠난 빈자리를 마주 보며 슬퍼하는 장면이에요.”

“진실? 어떤 진실이요?”

“그건 얘기하면 안 돼요.”

오소리는 두 눈썹과 입꼬리를 살짝 기울이고 말했다.

“그럼 그 장면이 엔딩이네요?”

“그건 아니고요. 이후에 몇 개 씬이 더 있어요. 회상하는 장면도 있고요.”

“회상이요?”

아직 촬영하지 못한 씬이지만, 성수가 이혜리의 주위를 맴돌던 어느 날 그녀가 봉사활동을 하는 성당 식구들과 운동회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씬이다.

“아 궁금하다. 그럼 촬영장 분위기는 어때요? 이것도 비밀이면, 우리 사랑앓이 청취자 여러분, 화냅니다!”

“후후. 너무 좋죠. 배우들도 그렇고, 스태프들도 파이팅 넘치거든요. 특히 시현 씨가 분위기 메이커에요. 스태프들 밥 챙기는 건 기본이고요, 먼저 촬영이 끝나도 스케줄 없으면 꼭 기다려주시거든요.”

“역시 이번에도 우리 시현 오빠에 대한 미담은 끊이질 않습니다.”

“우희 씨도 아시죠? 같이 촬영해보셨으니까.”

“알다마다요. 아주 그냥 미담 끝판왕이잖아요.”

이시현 얘기를 하면 밤을 새울 수도 있는 두 사람이었다.

이때, 조종실에서 시간을 알렸다.

“여러분 2부 마지막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라디오를 끝내고 집에 오자마자, 오소리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지쳐서 잔털처럼 부스스해진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는 사이 오명숙은 무거운 짐가방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소리야. 배 안 고파?”

그녀가 냉장고 안에 먹을 게 없는 살피면서 물었다.

“조금 고프다.”

“뭐 먹을래?”

“라면이 먹고 싶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이 밤에 라면을 먹는다는 건 밤새도록 러닝머신을 달려야 한다는 뜻. 오명숙도 그걸 잘 알기에 미소만 띠고 지긋이 쳐다본다.

“알았어. 미숫가루 타줘.”

“그래.”

부엌에서 미숫가루 알갱이를 잘게 부스는 소리가 들린다.

스르륵. 스르륵.

잠시 뒤 오명숙이 걸쭉하고 달콤한 미숫가루를 탄 컵을 가져와 내밀었다.

“자.”

“고마워, 언니.”

한번에 꿀꺽, 꿀꺽 두 모금을 삼키고 한숨을 후.

그런 뒤 오디오 리모컨을 들었다.

꾹 누르자, 잠시 뒤 음악이 흘러나오고. 눈을 감고 듣는 오소리의 곁에 오명숙이 앉았다. 뿌드득 소파 소리. 짧은 한숨 소리.

“너 정말 시현 오빠 좋아해?”

오소리는 대답도 미소도 보이지 않았다.

“난 찬성. 두 사람 잘 어울려. 그러니까······.”

“언니.”

보조개를 살짝 그린 오소리가 눈을 떴다.

“아니야.”

“뭐가 아니야. 너 며칠째 이 노래 계속 듣고 있거든?”

이번에는 또 피식 웃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그래라. 아니면, 차일까 봐서 그래?”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나 자격 없잖아.”

오소리는 괜스레 해진 청바지 무릎을 뜯어내며 말했다.

그 모습이 바보 같고 답답해서, 오명숙은 콧바람을 킁 뱉고 해진 청바지 무릎을 탁 내려쳤다.

“니가 무슨 자격이 없어? 너 여배우야. 대한민국에서 제일 예쁜 여배우!”

“제일 예쁘긴.”

“제일 예쁘거든? 너 진짜 예뻐.”

“···그럼 뭐해. 나는 스캔들로 얼룩졌는데.”

**

-시현 씨는 뭐래요?

“글쎄. 별말은 않던데.”

최재환은 잠시 차 문에 기대 이시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레스토랑에서는 대수롭지 않아 보였는데, 집 앞에 내려줬을 때는 심각하게 찌푸려 있었다. 그래서 조금 후회가 든다. 괜히 얘기했나 싶어서. 촬영에 지장이 있을까 봐.

“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해요. 오빠가 알아서 잘하니까.

타인의 목소리에 오늘 하루의 피곤이 녹아드는 기분이 든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럼 오빠······.

“응?”

-후회 안 하는 거죠?

대답에 앞서, 최재환은 잠시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밤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날려준다. 후회라.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 해.”

-후회되면 말해요. 내가 쓰다듬어 줄 테니까. 따듯하게.

“야. 그거 왠지 야하잖아.”

-치. 제가요, 남자친구가 있는데요, 요즘 얼굴 한번 못 봐서 욕구불만이네요.

“···이따가 잠깐 들릴게.”

-진짜? 나 안 자요?

“자고 있어. 혹시 모르니까.”

-안 잘 거야. 기다릴 거야. 진짜로.

보채고, 까불고, 기대고.

최재환은 지금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용기가 났는지도 모른다. 차가운 세상에 뛰어들 용기가.

-오빠. 나 사랑해요?

달콤한 그 말에, 괜스레 입술을 깨문다.

-왜 대답이 없어요?

“쓸데없는 소리는.”

-쓸데없지 않은데. 듣고 싶은데.

토라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서.

“혜선아.”

왜요··· 묻는 목소리.

“너 나이 먹고, 춤추기 힘들고, 인기도 시들시들해지면··· 그때 할게.”

-뭘요?

“프러포즈.”

서둘러 전화를 끊은 최재환은 좀 전까지 들고 있던 미소를 내려놓았다. 한숨을 깊이 내쉬고 식당을 바라본다. 이제, 차 대표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이 하얀 술잔으로 향한다.

그대로, 차 대표는 그대로 쭉 한잔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오늘부터 손 떼. 이시현한테.”

< 변화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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