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62화 (162/227)

< 한 배를 탔습니다 (7) >

「2001년 4월 19일 목요일」

“블랙커피 두 잔, 카푸치노 한 잔 주문 받았습니다.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남자는 카운터에서 등을 돌렸다. 뿔테 안경을 들썩이며 얼마 전 소개팅한 여자한테 문자를 보낸다.

[오늘은 이시현 못 봤어]

문자 하나 보내고 테이블에 앉기 무섭게 바로 답문이 도착했다.

[뭐예요. 오빠 지에스 다니는 거 맞아요?]

[진짜지 그럼. 사진 찍은 거 봤잖아?]

[그럼 오빠. 게릴라 이벤트 다음 주인공 누군지 알아요?]

“내가, 맡은, 연예인은, 아니라서,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몰라.”

남자는 한 자 한 자 입에 굴리며 문자를 보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자는 이시현 때문에 연락을 해오는 것 같았다.

[그럼 언제 오빠가 이시현 맡아요?]

[곧···]

문자를 보내려다가 서둘러 지운다.

‘곧은 개뿔. 허세도 적당히 쳐야지.’

물론 가족들에는 허풍을 빵빵 쳤지만. 머잖아 이시현의 남자가 될 거라고··· 말했었던가.

‘언젠가 나도 팀장님처럼 선글라스 딱 끼고 이시현 옆에서··· 크아.’

함께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정말 잘 어울린다.

뭐랄까. 포스가 있다고 할까.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예.”

남자는 서둘러 일어나 커피를 챙겼다.

동기와 그는 블랙커피. 거품이 많은 카푸치노는 강 실장.

거품을 보니 왠지 침이라도 뱉어야 하나 고민이 드는데.

하여튼 받아들고 시계를 보니 아직 여유가 있었다.

괜스레 빨리 올라가 우중충한 남자들 세상에 몸을 던지느니,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야 아직 따뜻하고.

“진짜? 너도 지원했어?”

때마침 카페에 한무리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도 있고, 빨간색 뾰족구두에 하얀 면바지를 펄럭이는 여자도 있고, 다들 머리카락 색도 한없이 자유롭고.

‘우와.’

남자에게 있어 지에스는 천국이자 꽃밭이다.

비록 강 실장은 예쁜 여자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라고 했지만.

“뭐야 그럼··· 경쟁률 엄청 세네.”

“쌜 수밖에 없지. 이시현하고 한 배 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아. 꼭 내가 돼야 하는데. 나 해외 한 번도 안 가봤단 말이야.”

“넌 그럼 고작 해외 촬영 때문에 가겠다는 거야?”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러는 넌?”

“나 지난번에 스텝 촬영장에 지원 나갔잖아? 그때 일주일 고생했다고 지갑 선물 받았어. 얼마나 다정하던지. 수고했다고 손편지까지 껴서 선물 해주더라. 난 여태 그런 연예인 본적이 없거든.”

“하긴. 이시현이 자기 사람 엄청 챙긴다더라.”

남자는 여자들 얘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턱을 괸 채로, 피아노 건반을 치듯 제 볼을 두드리며 그녀들이 얘기하는 이시현을 상상한다. 잘생기고, 인성 좋고, 매너 좋은··· 한마디로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존재.

‘그런데 있더란 말이지. 여기 지에스에.’

[오빠 왜 답이 없어요?]

또다시 온 문자에 남자는 이마를 찌푸렸다. 왠지 정나미가 떨어져서 눈을 떼는데, 순간 놀라서 멍해졌다. 지금 막 카페에 들어온 여자.

“송이야.”

여자들이 그녀를 부른다.

‘송이?’

“너 이시현 팀 지원했지?”

“저요?”

그녀가 표정 없이 되물었다.

“그래. 너 이시현 팀이었잖아?”

“저 지금 지훈 오빠랑 같이 다니잖아요.”

“그래서 안 가겠다? 오. 의리녀.”

“뭐 별 차이 있나? 다 거기서 거기지.”

남자는 송이라는 여자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이시현도 별거 아니라는 여자, 한마디로 멋있는 여자.

“커피 나왔습니다.”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든 여자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이제 카페에는 카운터 직원과 남자, 그리고 ‘송이’가 남았다. 직원은 기계처럼 커피를 만들고 있고, 송이는 다리를 꼰 채로 비스듬하게 카운터에 기대고 있다.

짝 달라붙어 도드라진 청바지 라인···

목 언저리를 살짝 덮은 짧은 머리···

허리에는 남방셔츠를 두른 패션 감각···

‘예쁘다.’

남자가 넋이 나간 사이, 커피를 받아든 그녀가 총총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간다.

**

「미스터 미스터리 3, 4부 대본리딩(수정 대본)」

대본이 펄럭이는 소리.

붉은 입술에 하얀 손가락을 올린 채 집중하고 있는 이시현.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바퀴에 걸쳐두고 대본을 보는 오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스태프의 목소리.

“씬 넘버 15, 현장검증. 몰려든 기자들과 카메라, 그리고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인을 재현하는 성수.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쏟아진다.”

“한성수 씨! xxx 의원을 왜 살해한 겁니까?”

대답 없는 성수.

“한성수 씨가 죽인 세 사람은 서로가 연관이 있는 건가요?”

묵묵부답.

“한성수 씨가 그 세 사람에게 협박을 받았었다는 얘기가 있던데, 진실인가요?”

“자자. 물러나세요!”

형사가 막아서는 그때, 이혜리의 사주를 받은 기자가 달려들어 질문한다.

“묻지 마 살인입니까? 아니면··· 복수인가요?”

멈춰선 성수.

갑자기 수갑 찬 손을 들어 마스크를 벗는다.

드러난 얼굴에 쏟아지는 플래시, 당황한 형사들이 막아서는데···

“씬 넘버 40, 접견실. 여론이 호의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알리는 이혜리. 성수에게 희망을 심어주는데.”

“한성수 씨. 바깥은 지금 난리에요.”

흡족한 미소를 띠며 깍지낀 손을 책상에 올리는 이혜리.

“죽은 셋이 저지른 일들이 하루가 멀다고 인터넷에 올라오고 있어요. 조직폭력배, 기자, 국회의원··· 그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더러운 짓은 다 하고 살았더라고요.”

성수는 말없이 그녀의 얘기를 귀담아듣는다.

“근데, 이제 얘기할 때 되지 않았어요?”

그러자 고개를 들어 이혜리를 마주 보는 성수.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고.

“인터넷 제보 중에, 한성수 씨가 그 셋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다는 말이 있던데. 그거 사실이에요?”

“아닙니다.”

“정말요?”

이혜리는 고개를 돌린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예.”

“후······.”

한숨을 내쉬고. 다시금 성수를 보는 이혜리.

“아니던데. 죽은 셋, 한성수 씨하고 연관이 있던데.”

성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제보를 토대로 알아보니까, 한성수 씨가 자랐던 고아원이 있는 마을. 죽은 세 사람이 어렸을 적 그 마을에서 살았더라고요. 그런데 한성수 씨는 그 셋을 몰랐다?”

침묵. 영원할 것 같은 침묵.

“대체 뭐지? 왜 얘기를 안 할까요, 한성수 씨.”

“그만합시다.”

“잘 생각하세요. 죽은 세 사람과 한성수 씨가 어떤 관계가 있고, 그래서 한성수 씨가 복수한 거라면, 내가 어떻게든 스토리 한번 짜볼 테니까. 지금 한성수 씨가 가진 거··· 여론밖에 없어요.”

깍지낀 손을 풀고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이혜리.

“우리한테 시간 그렇게 많지 않아요.”

뒤돌아가려는데.

“누굽니까.”

“뭐가요?”

“인터넷에 그런 제보 올린 사람.”

“글쎄요. 한성수 씨를 도와주려는 사람이겠죠.”

“하지 말라고······.”

“예?”

“팬카페인지 뭔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 올리지 말라고 해주세요. 나는 그저··· 그 셋이 살인자라서 죽인 거니까.”

“그러니까 말하라고요. 왜 그들이 살인자인지. 살인자라고만 하지 말고 이유를 말하라고요!”

“······.”

“혹시 그건가요?”

“······.”

“한성수 씨가 자란 고아원에서 예전에 실종된 여자아이가 하나 있던데.”

이혜리는 표정 변화 없는 성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되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떨리는데, 이때 들려온 속삭임에 눈이 찌푸려진다.

“글쎄. 그런 일이 있었나.”

대본리딩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늘어진 한숨과 기지개를 켜는 소리,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대본 연습실을 가득 채웠던 열기도 하나둘 떠나는 배우들의 등을 따라 흩어지고··· 오소리는 대본과 재킷을 챙기다가 이시현에게 물었다.

“오빠 안 가요?”

그는 인사하느라 잠깐 일었나가 다시 앉아 대본을 잡고 있었다.

“가야죠.”

“오늘 뭐 하세요?”

오소리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만날 사람이 있어요.”

“만날 사람? 게릴라 이벤트 또 해요?”

“음··· 그렇다고 봐야죠?”

어디서 하는지, 이번 주인공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오소리는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궁금한 건지, 아니면 이시현의 목소리가 계속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계속 얘기하고 싶은데 유 작가의 장난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아니야?”

“우리 작가님 또 질투하신다.”

“소리야. 나 질투 같은 거 안 하거든? 너 나 놀리면 대본 수정한다. 이혜리 죽는 거로.”

“작가님 그거 협박이잖아요!”

잔잔한 웃음이 흐르는 가운데, 이시현이 대본을 챙겨 일어났다. 바로 따라간 오소리는 대본 연습실을 나오자마자 그를 붙잡았다.

“저 오빠.”

이시현이 멈춰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본다. 그런데 복도의 열린 창을 타고 바람이 불어오면서 향수인지, 아니면 아카시아 꽃향기인지. 이유 모를 달콤한 냄새가 흘러왔다.

“주말에 시간 돼요?”

**

‘주말이라.’

조금 뜬금없는데.

오소리가 괜찮으면 주말에 대본리딩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유 작가의 집에서 보자고.

어쩔까.

주말은 오전 촬영만 하고 끝이라서 딱히 문제는 없다.

그리고 다른 스케줄도 없어서 어차피 연습실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고.

뭐, 그건 좀 생각해보고······.

나는 세면대 거울을 바라보며 미소를 방긋 지어 보였다.

지금부터 만나러 갈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니까.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은 순간이기에, 지금 순간을 실컷 만끽하고 싶다.

화장실을 나오니 카펫이 깔린 복도의 통유리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보인다.

나는 잠시 넋 나간 사람처럼 벽에 기대어 야경을 눈에 담았다.

1분, 1초가 소중하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지금 순간 숨 쉬고 있음을 느끼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응?’

휴대폰이 진동한다.

“여보세요?”

-아아. 잃어버린 ‘우리 오빠’ 번호 아닌가요?

코맹맹이 목소리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이런 전화할 사람, 딱 한사람밖에 없지.

“글쎄요. 전 잃어버린 여동생이 없는데.”

-왜 없어요? 여기 있구만!

빽 지른 목소리가 귀에 익어도 너무 익다. 오랜만에 전화 와서 라디오 강제 출연이라니.

-안녕하세요, 시현 씨! 고우희의 ‘사랑을 할 겁니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예, 안녕하세요.”

-시현 씨, 우리 사랑앓이 청취자분들께 인사 부탁드려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배우 이시현입니다.”

-와 짝짝짝! 자, 다른 게 아니고요, 저희가 지금 제보를 받았어요. 시현 씨가 지금 게릴라 이벤트 하러 가신다고.

“그거 비밀인데?”

-비밀, 공개됐네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얘기를··· 맞다. 아까 오소리한테 했었다.

“혹시 오늘 초대 손님이 오소리 씨?”

-저는 비밀을 지킬 의미가 있습니다! 증인보호프로그램 아시죠?

어휴.

“후···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만나기 직전이에요.”

-진짜요?

나는 천천히 걸어 레스토랑으로 돌아왔다.

주방과 홀 직원들의 시선을 느끼며 휴대폰 너머의 청취자들에게 속삭여 말했다.

“흠, 지금 창가 쪽에 앉아 있네요. 서울의 야경이 참 멋있게 보이는 자리예요.”

-지금 장소가 어디예요?

“레스토랑이고요. 이번에는 제가 그분을 초대했어요. 그래서, 지금 레스토랑 안에는 그분 혼자 계세요.“

-우와!

“전 오늘 그분하고 식사하고, 선물을 드릴 거예요.”

좀 큰 선물이다.

-선물이요?

“예.”

-와 부럽다.

“그리고 같이 드라이브도 할 생각이에요.”

-부러움 종합세트네요. 그럼 이번 팬은 어떤 분이세요?

“그거야 지금부터 만나보면 알겠죠? 아 근데, 한 가지는 확실해요.”

-어떤?

“절 아주 많이 응원해주는 사람이라는 거.”

**

“누구야?”

“비밀.”

“자식 싱겁기는.”

최재환은 툴툴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레스토랑 안에 단 둘뿐이다. 지금 시각, 서울의 야경이 훤히 보이는 이곳에 왜 아무도 없는 걸까.

“여기 분위기는 진짜 좋은데 왜 우리밖에 없지? 음식이 맛이 없나?”

“글쎄. 우리 둘이 오붓하게 밥 먹으라고 신이 배려해줬나 보지.”

“오붓은 개뿔.”

어쩜 저렇게 닭살 돋는 말을 잘할까.

최재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설마 싶어 이시현을 다시 봤다.

“너··· 여기 빌린 거야?”

“돈 좀 썼어.”

“이게 미쳤나.”

기가 막혀서 미간을 찌푸렸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웃는다.

이제 와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니까. 또 이제는 그만큼 버는 놈이니까. 그래도 잔소리는 좀 하고.

고요한 시간···

야경과 함께 두 사람은 저녁을 즐겼다.

와인을 나누며, 지나온 시간들을 얘기하며 웃고 떠들었다.

“자.”

이시현이 뭔가를 내밀었다.

키가 두 개인데, 뭔가 싶어 보다가 최재환이 물었다.

“뭐야?”

“위층이 너무 시끄럽더라고. 나 층간 소음 딱 질색이거든. 그래서 고민 좀 했는데, 답이 딱 나오데?”

최재환은 이시현을 빤히 쳐다봤다.

“혼자 사는 총각을 위층에 들이는 거야. 어때? 나 똑똑하지?”

“······.”

“그리고 차 키는.”

“시현아. 됐어, 난 괜찮아.”

최재환은 두 개의 키에서 머물렀던 시선을 떼고 말했다.

“이거 형한테 그냥 주는 거 아니야. 대여해 주는 거야. 우리 한 배 타고 계속 가야 하니까, 그래서 형이 좀 편해져야 나도 일하기 수월하니까.”

“시현아.”

나직이 부르니 이시현이 피식 웃는다. 하지만 최재환은 웃을 수가 없었다. 이 말을 꺼내는데 도저히 미소가 새겨지질 않아서.

“그 배··· 나는 먼저 내려야 할 것 같다.”

< 한 배를 탔습니다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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