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61화 (161/227)

< 한 배를 탔습니다 (6) >

42# 가로숫길 한복판 / 낮

cut to. 피 칠갑이 된 성수의 등장, 3번째 살인을 저지르고 건물에서 내려오는 성수

cut to. 건물 안, 어느 공간에 흐르는 피.

cut to. 성수를 가로막는 경찰들, 피가 튀어 얼룩진 성수의 하얀 얼굴. (꽃미남 살인자 클로즈업)

cut to. 건물 안에 죽어 있는 정치인의 모습, 눈을 뜬 채로 죽어 있다.

cut to. 다시 성수의 상황.

경찰 : 꼼짝 마!

경찰 : 움직이지 마!

성수 : (노이즈에 귀가 먹먹하고. 경찰들의 입 모양만 눈에 들어온다) (초점 잃은 눈동자, 표정없는 얼굴)

경찰 : 칼 버려!

경찰 : (공포탄 발사)

성수 : (오히려 먹먹했던 게 사라지고.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시 반응했다가 하늘을 본다. 표정없는 얼굴에 옅은 미소가 새겨지고) 하······. 죽기 딱 좋은 날이네.

한 씬을 촬영하기 위해 수차례 컷을 외치고, 수차례 건물을 오르내리며, 수차례 카메라에 불이 들어온다.

대게 단막극은 예산 절감과 빠른 촬영을 위해서 가능한 짧은 촬영 횟수와 빠른 이동을 기본으로 삼는데, 오늘 강 피디는 욕심을 내고, 또 욕심을 냈다.

그 나름의 기준으로 회당 몇 씬은 임펙트를 주자는 계산이다.

“오케이!”

조명감독이 하늘을 보며 초조함을 달랠 즘에야 강 피디의 컷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내 서 있던 이시현이 지친 미소를 띠고 동선을 벗어나고, 현장 스태프들이 바빠진다.

“감독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시현 씨도 수고했어.”

강 피디는 담요를 두르는 이시현에게 꼿꼿한 엄지를 내밀었다. 배시시 웃으며 차로 가는 이시현을 뒤로하고, 저녁에 몰아칠 씬을 확인하려 스케줄 표를 펄럭인다.

저녁에는 오소리가 이곳에서 바로 이어서 촬영.

변호사 이혜리가 사건 현장을 확인하러 오는 씬이다.

그러니 촬영 전까지 현장을 다시 깨끗이 정리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소리 매니저한테 전화해서 한 시간 정도 늦게 와도 된다고 전해줘.”

“예!”

조연출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가만있어 보자. B팀은 지금 잘하고 있나······.”

타이트한 시간에 쫓겨 괜스레 혼잣말하며 휴대폰을 챙기는데, 옆에서 불쑥 캔커피가 내밀어 졌다.

최재환이었다.

이시현 팬들이 곰 매니저, 곰 매니저 하는.

“피곤하시죠?”

“아후 고마워.”

치익.

“후······.”

한 모금 삼킨 강 피디는 명치에 고인 한숨부터 쏟아냈다.

쳐졌던 심신이 다시 고개를 드는 기분이다.

“재환 씨. 내가 이제 사과해야겠어.”

차에 가지 않고 팬에게 다가가는 이시현을 눈으로 좇던 최재환이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이시현이란 배우에 대해 오해한 거 말이야. 이런 배우인지도 모르고.”

“잘하죠?”

최재환이 넌지시 묻고 눈썹을 찡긋한다.

“잘하다 뿐인가. 이시현하고 촬영하면 욕심쟁이가 된다던 박태 말이 진짜였어.”

시청률 50프로를 넘긴 ‘우리 오빠’로 인해 KIS에서 박태 피디의 입지가 꽤 높아졌다. 이러다 외주로 옮겨갈까 봐 황 국장이 특별관리할 정도니까.

그런 박태가 ‘미스터 미스터리’에 이시현이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찾아와서 했던 예언이 있다. 욕심쟁이가 될 거라고.

“웬만해서는 대충 타협하겠는데, 자꾸 욕심나네.”

“욕심나시면 계속 찍어야죠.”

“배우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시간이 돈인 사람들인데.”

사실 오늘도 초반에 충분히 오케이 컷을 외쳐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랬는데, ‘한 번 더 가볼까?’ 하다가 ‘우리 한 번만 더 가자’, ‘우리 이렇게도 한번 해볼까?’

이러니 좋아할 배우가 어디 있을까.

“감독님 원하는 대로 하시는 거죠. 더 좋게 가겠다는데 싫어할 배우가 누가 있어요? 오히려 이렇게 얘기해주시니까 고맙네요.”

“뭐. 그렇게 말해주면 나도 고맙지.”

이해를 해주니 다행이다 싶어서, 강 피디는 빈 캔을 우그러트리고 넌지시 물었다.

“김태호 그놈은 어떻게 된 거야?”

“글쎄요. 제가 나설 일이 아니라서.”

“어렸을 때는 괜찮은 놈이었는데. 안 본 새에······.”

그놈이 이시현을 험담하는 바람에 큰 실수를 저지를뻔했다.

“그 사람이라고 그러고 싶었겠어요.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거지.”

“아무튼. 내가 이제부터 귀 좀 열고 살아야겠어.”

강 피디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황 국장 말대로 그동안 동태눈깔을 들고 다녔으니 말이다.

“근데,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얘기가 길어지자 최재환은 다시금 이시현 쪽을 한번 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유 작가가 이 배우 할리우드 간다는 얘기를 하던데. 그거 사실이야? 농담이지?”

“그게······.”

잠시 망설였지만 최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곧 기사가 나갈 거니까.

그동안은 이시현이 가경 작가의 차기작을 한다고만 알려졌지, 그 차기작이 해외 촬영을 동반한 할리우드 제작사의 작품이라고는 언급되지 않았다.

“하. 지에스 기획력 끝내주네. 첫 영화부터······.”

혀를 내두르는 강 피디를 보면서 최재환은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들을 문득 떠올렸다. 굴곡 많았던 시간들인데, 너무도 기적 같은 시간들이어서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다.

계약 만료된 배우의 암울한 현재.

바닷사람들 이야기라는 단막극의 기회.

천우신조로 잡은 바이바이 CF.

7UP에 출연하게 된다고 좋아했던 기억.

그러나 단막극도 수목극도 엎어지는 바람에 망연자실했던 순간.

그때 찾아온 가경 작가의 제안.

그리고 기적적으로 합류하게 된 815특집드라마 ‘우리 오빠’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또 얼마나 많은 순간이 있었던가.

“그럼 해외 촬영하면, 국내 활동은 안 하는 거야?”

“아니요. 촬영하는 중간중간 할 수 있는 건 하려고요.”

“해외 왔다 갔다 하려면 재환 씨 힘들겠네.”

“제가 힘들 게 뭐 있나요.”

“왜. 배우야 비행기 타고 자고 일어나면 되지만, 매니저는 곁에서 챙기기 바빠니까 항상 힘들지.”

최재환이 피식 웃는다.

“아닌가? 다른 매니저가 따라다니나?”

강 피디의 기울어진 시선에 최재환은 대답 없이 짧은 숨을 고르며 현장을 눈에 담았다. 그 모습이 어딘지 쓸쓸해 보인다.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고.”

“예!”

**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

“그냥 이것저것.”

“이것저것 뭐?”

“촬영 끝나니까 기운이 남아돌지? 잠이나 자 임마.”

“진짜 뭔데?”

남수혁은 찌푸린 이마를 꿈틀꿈틀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이시현과 최재환이 티격태격하고 있다. 별 시답잖은 것을 궁금해하는 배우라니. 매니저가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한 게 뭐가 그리 궁금할까.

“촬영 끝났으니까, 저 이만 가면 되죠?”

더는 들을 수가 없어서, 남수혁은 차창에서 머리를 떼고 물었다. 최재환이 무심히 쳐다본다.

“가도 되는데, 너 혼자 갈 수 있어?”

“예?”

황당해서 콧잔등을 찌푸리는데, 뒷좌석에서 이시현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내가 아직 스케줄이 남았거든. 가려면 혼자 가야 하는데. 너 대중교통 이용할 줄 알아?”

알 리가 있나.

데뷔 후 줄곧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만 타고 다녔는데.

“무슨 스케줄인데요?”

“게릴라 이벤트.”

“팬 찾아가서 만나는 거요?”

“어.”

후. 한숨을 푹 쉬고.

남수혁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무슨 팬을 찾아가서 만난다고. 쇼맨십과 가식의 절정인 뺀질한 놈. 고자질이나 하는 놈···

입술 언저리에서 맴도는 욕들을 겨우 목구멍에 우겨놓는데, 이시현은 또 최재환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려달라고 조르고 있다.

‘대체 얘들 뭐야?’

저 닭살 돋는 대화는 뭐고, 차 안에 떠도는 이 향긋한 방향제는 또 뭐고. 서아린인지 뭔지 하는 애는 이런 게 아무렇지도 않나?

차라리 강 실장 차를 타고 왔을 때가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 뒤 슬쩍 눈을 떴는데··· 남수혁은 순간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이시현이 고개를 빼죽 내밀고 옆에서 빤히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뭐, 뭐예요?”

“내 말이 맞지? 안 잔다니까.”

이시현이 서아린을 향해 입꼬리를 올리자 그녀가 팔을 슥 내민다. 그 가는 팔을 붙잡더니 손가락 두 개로 짝! 때리는 이시현.

“지금··· 나 가지고 내기한 거예요?”

어이가 없어 묻는데, 최재환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쟤들은 신경 쓰지 마. 넌 내가 이따 택시 태워서 보내줄게.”

그나마 정상적인 놈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다시 한 번 바람 한번 뱉고, 남수혁은 팔짱을 켠 채로 한참을 앞만 봤다. 그렇게 조용해진 가운데 최재환이 물었다.

“연기 해보고 싶냐?”

“예. 해보고 싶어요.”

남수혁은 헤드라이트로 반짝이는 도로의 차들을 보며 본심을 내비쳤다.

“쉬운 길 아니야. 촬영 들어가면 한시도 긴장 늦출 수 없어. 들어가기 전이야 두말할 것 없고.”

“긴장이요? 훗. 잠만 잘 자네요.”

조잘대던 이시현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있다. 저 얼굴에 긴장하는 티가 있던가. 코디하고 농담이나 따먹고.

“자는 거 같아? 내일 촬영할 거 곱씹는 거야. 이미지훈련.”

“예?”

“촬영 들어가면 저 녀석 하루에 두 시간이나 자나?”

진짜인가 싶어서 다시 뒤돌았는데, 이시현의 입술이 이따금 움직이고 있다. 눈썹도 꿈틀거리고.

“대사··· 다 외운 거예요?”

“기본이니까.”

최재환이 싱겁다는 투로 말하고. 차가 방향을 튼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인천.”

“예?”

얼마나 달렸을까.

차가 멈춰선 곳은 인적이 드문 사거리였다.

“팀장님, 우리 도착했습니다.”

대로변에 차를 세우고 최재환이 기콘부 성 팀장과 통화하자, 앞에 서 있던 차가 후미등을 깜빡인다.

그제야 최재환이 뒷좌석을 돌아봤다.

그냥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까 이시현이 눈을 뜨고, 음악을 듣고 있던 서아린은 동그란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이시현을 살핀다. 눈곱이 끼진 않았는지, 머리카락이 삐치진 않았는지. 모난 곳을 찾으려 눈을 부릅뜨고 본다.

이상하게 호흡이 잘 맞는 세 사람에게 질려서, 남수혁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 주위를 살폈다. 어디에 팬이 있다는 걸까.

저 빌딩 안에? 아니면 저 카페 안에?

그것 말고는 보이는 거라고는 포장마차 하나가 전부.

‘설마.’

아니겠지.

남수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하니 저 포장마차는 아니겠지.

‘근데 저 뺀질이는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여?’

이시현이 눈을 뜬 순간부터 싱글벙글이다.

“그렇게 좋냐?”

최재환이 한숨을 쉬고 묻는다.

“어. 나 오늘 무조건 마실 거야. 내가 먹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장소가 장소잖아.”

“말이나 안 하면.”

진짜 저 포장마차라고? 저런 데를?

찌푸린 얼굴을 펴지 못하는 남수혁에게 이시현이 묻는다.

“수혁이 너도 가서 한잔할래?”

“난 됐어요.”

강하게 고개를 내젓는데, 이시현이 씨익 웃더니 운전석 등받이에 팔을 기대고 다가왔다.

“왜··· 요?”

“오늘 만날 팬은 이름이 이수민이야. 이름 예쁘지?”

“그래서요?”

“수민이는 학원이 끝나면 부모님 포장마차 일을 돕는대. 참 기특하지 않냐?”

“좋으시겠습니다.”

“응 좋아. 우리 팬들은 어쩌면 저리 다들 착한지.”

“제 팬들도 착하거든요?”

톡 쏘아붙이자 이시현이 피식 웃는다.

“그럼 왜 그랬어?”

“뭐가요?”

“그 착한 팬들, 실망 시켰잖아.”

그 말을 끝으로 이시현이 차에서 내렸다.

**

“소리 씨, 15분 뒤에 들어가요.”

“예!”

졸음이 솔솔 몰려오는지, 오소리는 조연출을 향해 반쯤 감긴 눈꺼풀을 겨우 들고 미소를 보였다. 그래서 조 부장이 차 문을 닫아주려 하자 힘없이 팔을 뻗는다.

“그냥 둬요.”

“안 추워?”

“바람이 좋아서.”

4월의 밤바람이 그렇게 좋은 걸까.

오소리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치렁치렁 내려온 머리카락을 흔들다가 눈을 살며시 뜨고 묻는다.

“근데, 시현 오빠는 어디래요?”

“오빠?”

담배를 입에 문 조 부장은 라이터를 손에 쥐고 멈칫했다. 호칭이 달라졌으니까.

“오빠잖아요. 나보다 나이도 많고. 만날 나한테 선배 선배 하는 것도 부담스러워서요.”

“뭐 그렇긴 하지. 지금 월미도래.”

조 부장은 불을 마저 붙이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말했다.

“월미도요?”

“이 밤에 바이킹 타고 있단다. 팬하고.”

“우와. 팬 누구랑?”

기운 없던 눈동자가 반짝인다.

“오늘 게릴라 이벤트 하잖아.”

“아, 팬 직접 찾아가는 거요?”

“난 그거 도통 모르겠다. 반응은 좋은데, 선정 기준도 없고. 왠지 요란하고.”

“누군지 좋겠다. 좋아하는 스타하고 바이킹도 타고.”

“이것도 뭐 하루 이틀이지.”

조 부장은 짧아진 담배를 탁탁 털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제 대행사 쪽으로 옮기면 최재환이 다 알아서 할 테니 현장에 나오는 것도 끝이구나 싶은데.

“아··· 연애하고 싶다.”

“뭐?”

조 부장은 놀라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오소리가 여전히 밤바람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로 나른한 미소를 띠고 있다. 연애하고 싶다는 소리를 해서 사람 놀래 키고는 말이다.

“언니, 나 그거 줘.”

툭 내민 작은 손에 오명숙이 뭔가를 건넸다.

은색의 동그란 물체. 이시현이 선물해준 시디플레이어.

“소리 너 설마······.”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시현이한테 관심 있어?”

조 부장은 담배를 비벼끄고 다시 물었다. 진지하게. 그러자 오소리가 눈을 슬며시 뜨고 말했다.

“관심이야 있죠. 한 배 탔잖아.”

< 한 배를 탔습니다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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