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60화 (160/227)

< 한 배를 탔습니다 (5) >

-와··· 오소리 연기력이 이 정도였어?

-아역 출신이라서 원래부터 한방이 있었음. 연기력은 충무로 보증수표.

-소리 연기 아주 좋다. 과하지 않고 진심 슬퍼 보여. 근데 무슨 상황인 거야?

-내 친구 지인이 ‘미스터 미스터리’ 스탭인데, 이시현하고 오소리 호흡 장난 아니래. 현장에서 보면 둘이 항상 대본 보면서 얘기하고 있더래.

-그놈의 지인발. 엊그제가 촬영 첫날이었거든?

-나 ‘스텝’ 촬영 때 조명팀 알바했는데, 저 말 사실일 거라 본다. 그리고 이시현, 스태프들에게 진짜 잘해줌. 촬영장에서 마주치면 하는 말이 항상 밥 먹었냐는 말이었다. 안 먹었다고 하면 가서 먹으라고 잡아끄는 바람에 조명감독님 눈치 보느라 고생이었고.

-진짜냐? 와 너님 완전 부럽다.

-사진 있냐?

-얘들아. 왜 시현 오빠 영상은 없는 거야?

-지에스 일해라! 오빠 카페에 오빠 영상을 올려야지 웬 오소리? 그리고 게릴라 이벤트 왜 안 해? 벌써 끝난 거야?

-그래! 지에스 일해라!!

홈페이지와 수포 카페에 올라온 메이킹 영상에 댓글이 계속 늘고 있다. 잡다한 글도 있지만, 대부분이 오소리의 눈물 연기를 두고 호평이다.

“반응 어때?”

“뭐 끝내주죠. 조 부장님은 좋으시겠어요. 소리 씨 요즘 너무 잘 되고 있으니까.”

모니터에서 눈을 땐 백유진이 통통한 볼을 끌어올리고 미소 짓는다. 그러자 성 팀장이 파티션에 팔을 기대고 목청을 높였다.

“요즘 다들 일할 맛 나지?”

“정말 그래요. 소리 씨도 잘 되고 있고, 시현 씨야 뭐.”

“그래서 말인데······.”

괜히 입맛을 한번 다시는 팀장의 모습에, 모두 일시 정지.

“자세한 건 다음 주에 다시 말하겠지만, 얼마 전 인수한 대행사에서 근무할 직원이 필요해. 혹시 지원자 있니?”

까마귀라도 날아간 걸까. 다들 합죽이가 됐다.

“근속 기간은 계속 이어질 거고, 그쪽으로 가도 정직원 대우해줄 거야.”

성 팀장은 전에 없이 밝은 미소를 들고 직원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삐삐 생각 없니?”

“왜, 왜 저예요? 저는 C&C로 옮기는 거 아니었어요?”

백유진은 경기까지 일으키며 반문했다. 미간과 눈썹에 힘을 주고 억울함을 강하게 어필한다. 괜히 거기 발 들였다가 공중분해 되면 어쩌라고.

“되게 싫어하네. 눈썹에 지렁이 붙었냐?”

“치.”

“아무튼 지원자는 언제든 나한테 얘기하도록. 너희들한테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잘 생각해.”

성 팀장이 찜찜한 말을 털어내고 뒤돌아서자, 백유진은 턱을 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미쳤나. 시현 오빠가 여기 떡하니 있구만.’

**

“뭐해?”

“그냥요. 소리 팬카페 좀 보고 있었죠.”

조 부장은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불쑥 들어온 박 상무의 덩치가 사무실을 꽉 채우고 있다.

“올해는 소리가 시작이 좋네. 명이 시청률 좋고, 이번 드라마도 잘 될 것 같고.”

“그러게요.”

조 부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사가 오소리를 언급하니 마치 자신이 칭찬받는 것 같다.

“근데 제가 올라가면 되는데 뭐하러 내려오셨어요?”

“딴 게 아니고. 지금 대행사에 앉힐 사람, 너 거론되고 있는 거 알아?”

조 부장의 미소가 옅어졌다. 실은 너무 들떠서 표정관리를 겨우 하는 거다. 인수한 대행사가 작은 규모긴 해도 회사에서 기회를 주는 거니까. 리더쉽을 인정해주는 거니까.

“생각은 있는 거지?”

조 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지금 회사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어. 이럴 때 포지션 제대로 잡아야 하는 거야.”

“예.”

꾹 다문 조 부장의 입매에 의욕이 넘친다. 박 상무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 말했다.

“시현이 스타일리스트 충원하는 건 어떻게 하기로 했어?”

“그 건은 일단 ATTM에서 지원자 받기로 했고요, 앞으로 서아린은 중요 스케줄만 지원하고, 현장에 나가는 건 충원 인력이 나갈 겁니다. 그리고 해외 촬영 지원 나가는 건은 상황 봐서 로케이션하려고요.”

“아무튼 그거 빨리 처리해. 앞으로는 시현이 해외 스케줄 많으니까, 특히 신경 쓰고. 대행사 가기 전에 마무리해야지?”

“예.”

조 부장은 사무실을 나서는 박 상무의 등을 바라보다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왠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얼굴을 쓸어내리고 모은 두 손에 한숨을 흘린다.

“내가··· 대표라.”

혼잣말을 되뇌는 그의 눈이 설렘에 물든다. 그러다 멈칫.

“거론되고 있다고? 그럼 나 말고 또 누구야?”

**

-강 실장 어디냐?

“예. 지금 촬영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신입들도?

“예.”

강 실장은 룸미러를 매만지며 뒤를 살폈다. 두 안경쟁이들이 이젠 제법 적응이 됐는지 편안한 자세로 차창 밖을 보고 있다.

-남수혁이는?

“옆에 있습니다.”

이번에는 조수석을 돌아봤다. 삐딱하게 팔짱을 켜고 눈을 감고 있는 남수혁의 모습에 강 실장은 콧잔등을 찌푸리고 으르렁거리다가 다시금 앞을 보며 말했다.

“하실 얘기 있으세요?”

-없어.

툭 끊어진 전화.

“뭐야.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들떴어?”

괜히 찜찜한 조 부장의 전화에 고개를 갸웃한 강 실장.

그러다 다시 룸미러를 보며 눈을 부릅뜬다.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연습생들 프로필 달달 외우라고 했더니만 세상 구경하고 있어? 아니면 벌써 다 외웠어? 그럼 천젠데? 매니저 할 필요가 없는데?”

“아닙니다!”

다시 긴장이 바싹 든 대답이 들리자, 자고 있던 남수혁이 찌푸린 얼굴로 뒤척인다.

“아이. 시끄럽게.”

이걸 확 그냥. 뒤통수를 갈기고 싶지만···

강 실장은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꾹 누르고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거의 다 왔다.”

얼마 가지 않아 차가 멈췄다.

가로숫길이 촬영팀 스태프들과 팬들로 인산인해다.

먼저 신입들이 차에서 내리고, 강 실장은 남수혁의 반들반들한 볼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려.”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팬들한테 깔릴지도 모르는데.”

콧바람만 들썩이며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남수혁.

그 모습에 강 실장은 턱을 씰룩거리다 홀로 내렸다.

“그래, 넌 여기 있어라.”

문이 닫히고.

차 안에 홀로 남은 남수혁은 슬며시 눈을 떴다. 스태프들 사이로 사라지는 강 실장을 보며 입술을 아득 깨문다.

‘젠장!’

회사의 처분에 관대함 따위는 없었다. 이제 더는 블랙보이에 남수혁이란 이름은 없으며, 앞으로도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활동은 없다.

그럼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자유로울까? 그것도 아니다.

차 대표는 이번 일을 연제협까지 끌고 갈 생각이고, 연제협이 움직이면, 300여개 기획사와 음반사들이 서로 눈치만 보며 관망할 게 뻔하니까. 그런 마당에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

한숨을 내쉬며 차창 밖을 바라보니 이시현이 보인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환호하는 팬들에게 다가가더니, 이시현이 갑자기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팬들도 함께 바닥에 둘러앉았다.

‘저건 또 뭐야?’

기가 막히네.

팬들과 저렇게 앉아서 즉석 팬 미팅이라도 하는 걸까.

‘쇼맨십은··· 저 뺀질뺀질한 놈! ’

저건 백 프로 가식이 분명하다.

자신을 고자질한 이시현을 보며 남수혁은 끓어오르는 화를 달래야 했다. 그러던 중 이시현 곁에 서 있는 최재환이 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멈칫해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자, 옅은 미소를 띠고 이시현을 보는 최재환이 눈에 들어왔다.

‘저런 매니저가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다.

최재환에 대한 얘기는 매니저들 사이에 교과서처럼 퍼져 있다. 남들이 다 포기한 이시현을 5년 동안 챙기고 뒷바라지해줬다는 얘기는 이제 너무 유명해져서 방송가에서도 흔한 얘기고.

하지만 자신은 어땠는가.

남수혁은 그날 차 대표 앞에서 유 팀장과 함께 훈계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 사람들한테··· 나는 뭘까.’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억울해졌다.

‘나한테도 최재환 같은 매니저가 있었다면.’

때로는 형 같은, 때로는 친구 같은, 그래서 진심으로 위해주는 매니저가 있었다면. 물론 이미 늦었지만.

‘내 시간은··· 죽은 거야.’

똑똑.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린 남수혁은 놀라서 머뭇거렸다. 최재환이다.

“잤어?”

살짝 열린 차창 틈새로 서로 눈이 마주쳤다.

“···아니요.”

“시현이 곧 촬영 들어가는데, 나와서 구경할래?”

“됐어요.”

그러자 최재환이 한숨을 나직이 쉬고 말했다.

“예전에 내가 너한테 막말한 적 있었지?”

스카이데일리에서 남수혁의 스캔들을 터트리려고 한 적이 있다. 그때 1팀장이 이시현의 기사로 막으려고 했었고.

“그거 미안하다.”

말없이 눈만 깜빡이던 남수혁이 입술 한번 훔치고 말했다.

“지금 와서 그건 뭐하러.”

“지금이니까. 너 아직 지에스에 있고. 아직 블랙보이 남수혁이고. 그리고 내 앞에 있으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너 훈계하려고 데려온 거 아니야. 촬영장 보여주려고 데려온 거지.”

“왜요? 이시현이 나보다 잘 되는 거 보여주려고요?”

삐딱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물었는데, 마주한 최재환의 시선에는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어차피 쟤는 잘될 거야.”

“지금 장난해요? 그럼 왜 데려온 건데요? 맨날 이렇게 데리고 다닐 거예요?”

“오늘만 따라다녀. 그게 내가 팀장으로서 줄 수 있는 배려니까.”

“선심 쓰시네요. 마지막이라 이거죠?”

“마지막인지, 다시 시작인지는, 너한테 달린 거야.”

드르륵.

차 문이 닫히고 최재환이 이시현에게 향한다. 팬들과 함께 있던 뺀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옷을 툭툭 털고 차를 슥 바라보더니, 혀를 살짝 빼문다.

“저게!”

**

“후······.”

오늘 촬영은 성수가 3번째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되는 씬이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해야 하기에 서아린 뿐 아니라 미술팀까지 붙어서 나를 살인자로 만들고 있다.

“나 전화 좀 하고 올게.”

최재환이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자리를 옮긴다. 강 실장이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보고 속삭였다.

“시현아.”

“예?”

“저놈 무슨 생각이냐?”

“뭐가요?”

또 뭐가.

“아니 남수혁을 왜 데리고 오란 거야?”

그건.

최재환이 가진 연민일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생각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찌 됐든 나는 그 방식이 틀렸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묻지 마. 그냥 받아들여.

“이런다고 남수혁이가 달라지겠어?”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죠.”

“알긴 뭘 알아. 남수혁이 변하는 걸 바라느니, 어리바리 신입들이 제 몫 하는 걸 기다리는 게 빠르겠다.”

강 실장은 이번 신입들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요즘 항상 데리고 다닌다.

“근데 누구랑 통화하는 거예요?”

통화 중인 최재환을 계속 지켜보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고 있으니까.

“왜?”

“웃고 있어서.”

“웃어? 저게? 에이. 되게 화난 얼굴인데.”

아니야. 저거 웃고 있는 거야.

아무튼.

분장이 거의 끝나간다. 사람들이 촬영장 주변에 많이 몰렸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라 몰입에 방해되지는 않는다.

‘후······.’

심호흡을 크게 하고 눈을 감았다.

성수의 감정을 새기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 간다.

엊그제 오소리는 마지막 촬영에 열연을 펼쳤다.

숨죽여 오열하는 모습이 얼마나 안쓰러운지 현장의 스태프들도 눈물을 글썽일 정도였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소리란 배우가 달라졌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녀뿐일까. 최재환도 많이 달라졌다. 강 실장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내 주위의 많은 게 달라지겠지.

성수는 과거에 사는 인물이다. 그의 삶은 늘 후회였다.

그때 여자아이를 구하러 뛰어들걸. 경찰에 신고할걸. 강물에 뛰어들어갈걸.

그렇게 살아온 그는 성인이 된 여자아이를 마주치면서 비로소 현재를 살 수 있게 된다. 오래전 멈췄던 삶의 시계가 제대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살인이라는 행위로 이어졌을지라도.

가만 생각해보니, 그런 성수가 왠지 지금의 나와 너무도 닮았다.

지금 나는 과거를 사는 걸까··· 아니면, 현재를 사는 걸까.

“오빠.”

분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서아린의 손길이 느껴진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재환은 여전히 통화 중이고, 강 실장은 팔짱을 켠 채로 나를 지켜보는데··· 마치 백암산에서처럼 조연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슛 들어갑니다!”

주위를 에워싼 경찰차, 총을 들고 있는 경찰들, 그리고 피 칠갑으로 서 있는 나.

“꼼짝 마!”

언제든 발포할 준비가 된 경찰들이 나를 향해 경고한다.

움직이지 마. 꼼짝하지 마. 칼 버려···

그래서 두려운가. 아니 두렵지 않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불어오고, 머리카락이 펄럭이고, 구름이 흘러간다. 마치 시간이 다시 흘러가는 것처럼.

“하······. 죽기 딱 좋은 날이네.”

< 한 배를 탔습니다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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